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임은동 동산 3·1운동 만세시위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산야 |
| 상태 | 변형 / 현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던 동산은 왕산기념관이 들어 서 있어서 부분 변형되었다. |
| 정의 | 1919년 4월 8일 선산군 구미면 임은동 주민 300여 명이 만세시위를 전개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 3·1운동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강용준(姜龍浚)/유시동(劉時東) |
| 관련 내용 |
선산군 구미면 임은동(林隱洞)은 한말 의병장 왕산(旺山) 허위(許蔿)의 고향으로 일찍부터 항일의 기풍이 강한 곳이었다. 더구나 임은동 허씨(許氏) 집안은 허위가 순국한 이후 성산(性山) 허겸(許蒹), 박경(博卿) 허학(許壆), 중산(重山) 허로(許魯), 범산(凡山) 허형(許蘅), 일창(一蒼) 허발(許潑), 해여(海黎) 허담(許聃) 등이 선봉이 되어 국권회복과 독립을 위해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가문이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임은동의 강용준·유시동은 이 마을에서 의거를 계획한 후, 1919년 4월 8일 밤 10시 300여 명의 주민들을 규합하여 임은동에서 밤늦도록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4월 9일 선산경찰서 경찰 4명과 일본군 수비대 5명, 그리고 인동의 일본군 헌병주재소 헌병 2명이 달려왔다.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마을 뒷산으로 이미 종적을 감추었기에 한 사람도 붙잡히지 않았다. 다시 4월 15일 일본 군인과 경찰이 이 마을을 급습하여 강용준·유시동을 비롯한 지도급 인사 30여 명을 붙잡아 갔다. |
| 참고 문헌 |
경상북도경찰부,『고등경찰요사』, 1934, 37∼38쪽. 金正明,『朝鮮獨立運動』Ⅰ, 東京:原書房, 1967, 589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3, 1971, 46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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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임은동 |
|---|---|
| 주소 | 경북 구미시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고등경찰요사』와『독립운동사』3권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현일고등학교 전정중과 동네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위치를 확인하였다. |














『고등경찰요사』(경상북도경찰부, 1934)
임은동 동산 원경
임은동 동산에 세워진 왕산기념관
임은동 동산 후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