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배둔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거리(시장) |
| 상태 | 멸실 / 하천이 복개되어 도로가 되었고, 도로 주변으로는 신축 건물이 세워져 있다. |
| 정의 | 1919년 3월 30일 고성군 구만면 국천 모래사장에서 행진해 온 시위대와 회화면 주민들이 만나 만세운동을 전개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3.30 고성군 국천 모래사장 독립만세시위/1919.3.30 고성군 배둔장터 독립만세시위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허재기/서찬실/김갑록/김동기 |
| 관련 내용 |
1919년 3월 30일 고성군 회화면 면소재지인 배둔리에서는 800여 명이 참여한 큰 시위가 있었다. 이 날은 배둔장터 장날이었다. 배둔장터는 고성 동북의 7개 면과 창원 및 함안의 여러 개 면에 인접하여 장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오후 1시경 구만면 국천(菊川) 모래사장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구만면·개천면·마암면 주민들은 10리쯤 떨어져 있는 회화면 배둔장터로 향하였다. 배둔장터에는 전날 밤 허재기(許在其) 등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서찬실(徐贊實)·김갑록(金甲錄)·김동기(金東琪) 등이 회화면 주민들을 이끌고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구만면과 회화면 주민이 합세하면서 시위 인원은 700~800명으로 늘아났다. 일본 헌병대에서는 일본 재향군인의 협력을 얻어 전원 출동하여 중심 인물 색출과 검거에 나섰는데, 당일 시위대는 큰 희생 없이 모두 해산하였다. 그러나 현장에서 중심 인물들을 잡지 못했던 일본 헌병들은 그 후 검거에 나섰고, 서찬실 등이 검거되었다. 배둔장터 의거를 기념하기 위해 1971년 6월 회화면 배둔리에 창의탑(彰義塔)을 건립하였다. 이는 1988년 도로 확장으로 구만면 입구로 옮겨졌다가 다시 2007년 5월 회화면 배둔리 배둔시외버스터미널 앞으로 이전되었다. |
| 참고 문헌 |
「토지대장」. 「고성군 회화면 배둔리 지적원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1916. 『동아일보』, 1935년 12월 15일,「 市場敷地로 千坪 無償貸付」. 경상남도경찰부,『고등경찰관계적록』, 1936, 16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3-3·1운동사(하), 1971, 262~26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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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고성군 회화면 배둔리 |
|---|---|
| 주소 | 경남 고성군 회화면 배둔리 442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고등경찰관계적록』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배둔장터의 위치는『동아일보』 1935년 12월 15일자 기사에서 배둔리 하천변에서 개설되다가 하천 제방공사 후 이전하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는데, 「고성군 회화면 배둔리 지적원도」를 통해 하천 옆 배둔리 442번지가 잡종지 지목의 토지임을 확인하였고, 「토지대장」을 통해 1935년경 442-4번지가 제방으로 지목 변경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














배둔장터(「고성군 회화면 배둔리 지적원도」, 1916)
배둔시외버스터미널 앞에 세워진 3·1운동 창의탑
마산 방향으로 본 배둔장터
배둔장터 주변 모습
고성 방향으로 본 배둔장터
배둔장터 주변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