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손병희 생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복원 / 복원되면서 원래 구조와 다르게 변경되었다. |
| 정의 | 천도교 교조이자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손병희가 태어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894 동학농민운동/1919 3·1운동 |
|---|---|
| 관련 조직 | 동학/진보회/천도교 |
| 관련 인물 | 오세창/박영효/권동진/이용구/박인호 |
| 관련 내용 |
손병희(孫秉熙, 1861~1922)의 호는 의암(義菴)이고, 청주군 산외이면 대주리에서 아버지 손두흥(孫斗興)과 어머니 최씨(崔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882년 22세 때 동학에 입문하여,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관군과 싸웠으며, 1897년에는 동학의 3대 교조가 되었다. 1901년 일본을 경유,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오세창(吳世昌)·박영효(朴泳孝) 등을 만나 국내사정을 듣고 1903년에 귀국하여 두 차례에 걸쳐 유능한 청년을 선발하여 일본으로 데리고 건너가 유학시켰다. 1904년 권동진(權東鎭)·오세창 등과 개혁운동을 목표로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한 후 이용구(李容九)를 파견하여 국내 조직에 착수, 각지에 회원 16만 명을 확보하고 전 회원에게 단발령(斷髮令)을 내리는 등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1906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교조로 취임하여 교세를 확장하였으며, 1908년 교조 자리를 박인호(朴寅浩)에게 인계하고 우이동에 은거하며 수도에 힘썼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천도교 대표로 참여하여 독립을 선언하였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된 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보석으로 풀려나 상춘원에서 요양하던 중 병으로 사망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이 곳은 선대로부터 살던 집으로 손병희가 태아나 1882년 동학에 입교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으로 1971년 본래 낡은 초가집을 해체 보수하고 다시 복원하였다. |
| 참고 문헌 |
이융조·김경표·신영우, 「손병희 생가복원에 대한 고찰」, 『인문학지』 4, 충북대학교 인문학연구소, 1989, 371쪽. 광복회 충청북도지부, 『충청북도 독립유공자공훈록』, 2001, 3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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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충청북도 청주군 산외이면 대주리 |
|---|---|
| 주소 | 충북 청주시 북이면 금암2리 385-2 |
| 도로명 주소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의암로 234 |
| 위치 고증 | 손병희의 생가는 본래 자리로부터 조금 떨어진 손병희선생 유허지 안에 복원되어 있다. |














1905년 일본에서 동지들과 찍은 사진(앞줄 오른쪽 두번째)
중년시절의 손병희
손병희 동상
손병희 유허지 입구
손병희 생가 원경
손병희 유허지 전경
손병희 생가 전경
손병희 생가(1960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