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이재명 의거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열투쟁 |
| 종류 | 거리 |
| 상태 | 부분변형 |
| 정의 | 1909년 12월 22일 청년지사 이재명이 친일 매국노 이완용을 처단하기 위해 의거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09 이완용 처단 |
|---|---|
| 관련 조직 | 공립협회 |
| 관련 인물 | 이완용(李完用)/이재명(李在明)/송병준(宋秉畯)/이용구(李容九) |
| 관련 내용 | 이재명(1886~1910)은 평양 일신학교를 마친 뒤 1904년 미국 노동이민 모집에 응모해 하와이에서 농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1906년 다시 미국 본토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공립협회(共立協會)에 가입해 활동하던 그는 1907년 7월 정미7조약의 강제 체결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 침략 원흉과 매국노를 처단할 것을 결심한 이재명은 1909년 1월 순종황제의 서도(西道) 순시에 동행하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안창호의 만류로 그만두고, 항일투쟁을 위해 원산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 그해 10월 26일 안중근의 이토 처단 소식에 고무되어 다시 귀국한 그는 평양에서 동지들과 친일매국노 이완용·송병준·이용구 등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상경하여 기회를 엿보던 중 1909년 12월 22일 종현 천주교회당(명동성당)에서 있을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추도식에 이완용이 참석한다는 신문보도를 접하고, 군밤장수로 가장하여 성당 문밖에서 기다리다가 식을 마치고 나오는 이완용을 찔러 복부와 어깨에 중상을 입혔다. 현장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뒤 일제 경찰에 체포된 이재명은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10년 9월 13일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경성시가전도」(1910);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지도』, 2006, 32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7, 1976, 210~21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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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
|---|---|
| 주소 | 서울 중구 중구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경성시가전도」(1910)에 명동성당['불국교회당(佛國敎會堂)']의 위치가 표기되어 있다. |














이재명 의거지 - 현 명동성당 입구
이재명
성당 입구에 설치된 표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