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신채호 생가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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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분류 | 해외독립운동가 국내사적지 |
종류 | 가옥 |
상태 | 복원 / 생가는 복원되었으며 주변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
정의 | 신채호가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던 곳 |
관련정보
관련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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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조직 | 신민회/동창학교/신한혁멱당/대한민군임시정부/의열단/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
관련 인물 | 이승만 |
관련 내용 |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1898년 성균관에 입교해 수학했다. 1905년 『 황성신문』의 논설위원, 1906년 『대한매일신보』의 주필활동하면서 일제의 침략과 친일파들의 매국행위에 대한 논설을 실어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1907년 4월 신민회에 가입해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으며, 1910년 4월 일제의 강제병합 직전 망명하였다. 1911년 연해주에서『대양보』와『권업신문』의 주필로 활동하면서 러시아와 만주지역 동포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문필활동을 전개했다. 1914년에는 서간도 환인현의 동창(東昌) 학교 교사로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쳤으며, 1915년 북경에서 신한혁명당, 1917년 상해에서 대동단결선언에 참여했다.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위임통치를 주창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자『신대한』을 발행해 무장투쟁노선을 지지하는 언론활동을 펼치며 이승만 타도에 앞장서 반(反)임시정부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의열단의 독립운동노선과 투쟁방법을 천명한「조선혁명선언」을 집필 발표했으며,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창조파에 참여하여 임시정부의 해체와 새로운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그는 국민대표회의가 실패로 끝나자 국사연구에 전념하였다. 1926년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했으며, 1928년 4월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북경회의에 참석했다. 같은해 대만에서 독립자금을 모집하던 중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0년 대련법정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에서 복역 중 1936년 2월 21일 옥중에서 병사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참고 문헌 |
신용하,『신채호의 사회사상연구』, 한길사, 1984. 조동걸, 「단재 신채호의 삶과 유훈」, 『한국사학사학보』3, 한국사학사학회, 2001, 181~199쪽. 한시준, 「신채호의 재중독립운동」, 『한국사학사학보』3, 한국사학사학회, 2001, 227~253쪽. 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 『단재 신채호 전집』 8,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4쪽 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 『단재 신채호 전집』 9,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425~44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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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당시 주소 | 충청도 회덕현 산내면 어남리 도리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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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대전광역시 중구 단재로229번길 47(어남동 233) |
도로명 주소 | |
위치 고증 | 「고령신씨세보」 및 『단재 신재호 전집』에 출생지가 기록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