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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결은 약자의 무기다’라는 말은 자명의 진리인 것이다. 그 단결의 길은 일시적 권모술수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정대한 정의와 광명뇌락의 정신을 근거로 한 당적결합에 있는 것으로 믿는다."
위 글은 조성환 선생인 1926년 북경에서 발표한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 선언문」의 일부이다. 그는 대한제국의 군인 출신으로 일제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던 1907년 신민회를 조직하여 항일 구국운동에 투신,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무위원, 군무부장 등을 역임하는 등 해외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역사적 배경
| 현재 주소 |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보통리 190-2 |
|---|---|
| 현재 상태 | 현재 중요민속자료 제126호 김영구 가옥으로 지정되어 있다. |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제는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마저 해산시키며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간다. 이에 저항하여 의병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특히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 활동에 가담함으로써 일제에 저항하는 의병투쟁이 전국적인 규모로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남한대토벌 작전 등을 펼쳐 항일 의병을 잔혹하게 진압하였다. 결국 국내에서의 의병 활동이 일제의 탄압으로 어려움에 빠지자, 항일 의병은 국외로 이주하여 일제를 몰아내는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주도한 단체가 신민회이다.
신민회는 나라의 힘을 기르기 위한 교육운동과 식산흥업 정책뿐만 아니라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비밀 결사였다. 신민회의 활동이 본격화하자 일제는 한국을 강제로 병합한 이후 총독을 암살하려했다는 이른바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의 주요 인사들을 감옥에 가두고 모진 고문을 가했다. 결국 신민회는 해체되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이에 굴하지 않고 해외에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로 합병하고 무단통치로 우리 민족의 손과 발을 꽁꽁 묶기 전부터 한반도를 떠나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는 노력이 꾸준히 이어졌다.
1919년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배에 맞서 전국적인 만세시위운동이 벌어졌다. 전국이 모든 국민이 참여한 거족적인 독립운동인 3·1운동으로 우리 민족은 독립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
3·1운동 이후 국내외 항일독립운동세력은 일제와 본격적으로 싸우기 위해서는 통일된 독립운동 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해외와 국내 독립운동 단체 들이 모두 참여하여 상해에 세운 조직이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이다. 초기 임시정부는 내무총장 안창호의 주도로 연통제(국내의 비밀행정조직망)와 교통국(임시정부 통신 기관)을 조직하는 한편 독립신문을 발행하였으며, 각종 외교 선전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또한, 애국공채 발행과 국민 의연금을 통해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승만과 안창호가 독립운동을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를 두고 대립하였으며, 이념적으로도 국무총리인 이동휘는 사회주의 혁명을 부르짖었고 대통령 이승만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여 서로 충돌하였다.
1921년 이후 임시정부는 연통제, 교통국과 같은 국내 비밀행정조직망의 파괴와 외교 선전활동의 무성과, 심각한 재정난 등으로 오랜 침체기를 겪었다. 인원도 줄어들어 초창기에 천여 명에 달하던 독립 운동가들이 수십 명으로 감소하였다. 조선 총독부는 밀정을 파견하여 임정 요인에 대한 체포, 납치, 암살 공작을 단행하였고, 김희선, 이광수, 정인과 같은 자들은 친일파로 변절하였다. 1927년 국무령에 선출된 김구는 국무령제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편하였다.
1931년 김구는 보다 직접적인 항일투쟁을 추진하기 위하여 한인 애국단을 결성하고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실행하였다.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의 주모자로 수배된 김구는 상하이를 떠나서 숨어 지내야 했으나 남경으로 옮긴 국민당 정부는 이를 계기로 김구와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게 되었다.
1934년 양기탁(주석)·송병조(재무)·조소앙(내무)·김규식(외무)·윤기섭(군무)·최동오(법무)·김철(무임소)·조성환(무임소)·성주식(무임소) 등 9명이 국무위원으로 당선되었다. 1940년 임시정부는 국무위원제를 주석제로 개편한 뒤 한국독립당의 김구를 주석으로 추대하였다. 1942년 조선 민족혁명당이 임시정부에 합류하게 되면서 김규식이 부주석에, 김원봉이 군무부장 겸 한국광복군 부사령에 선임되었다.
1940년 충칭에 자리 잡은 임시정부는 국민당 정부의 도움을 받아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고,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941년 연합군에 가담하여 일본에 선전포고하였다. 또한 연합군의 일원으로 비밀리에 국내에 침투하여 공동작전을 펴기로 계획하였지만 한국광복군이 국내로 들어가기 직전에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읽기
읽기자료 1
여주에서 태어난 조성환 선생은 26세 때인 1900년 대한제국 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부패한 군부를 숙청하려다 발각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3년 만에 칙령으로 특별 사면되어 참위로 임관되었으나 사직하였다. 1906년 안창호·양기탁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여 항일구국운동에 투신하였다. 신민회는 민족교육과 민족산업의 육성이라는 애국계몽의 틀을 일부 벗어나 만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는 등 적극적인 구국운동을 모색하였다. 1907년 1월 연해주로 망명하여 헤이그특사 파견 때 이상설을 원조하였다. 그리고 1908년 노우키에프스크에서 최재형과 구국방략을 협의하고 북경으로 가서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한 뒤 귀국하여 민족종교인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그 뒤 북경으로 건너가서 북경을 근거지로 간도·연해주를 왕래하면서 중국 혁명 원로 진기미와 함께 한중공동전선을 펴 항일투쟁을 전개할 것을 주창하였다. 1912년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가 중국 동북지방을 시찰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암살을 기도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 체포되어 거제도에 1년간 감옥 생할을 하였다. 석방된 뒤 또다시 항일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던 만주와 연해주 로 건너갔다. 그 뒤 지린성 당국과 교섭하여 흑룡강성 오운현에 약 5,000호가 거주할 수 있는 농지를 마련하고 항일독립운동의 기지와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둔전제(변경 지역이나 군사적 요충지에 주둔한 군대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토지를 경작하는 제도)를 실시하려고 하였으나 러시아혁명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 질문1 1907년 조성환이 연해주로 망명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 질문2 조성환이 흑룡강성 오운현에서 둔전제를 실시하려고 했던 목적은 무엇일까요?
읽기자료 2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그는 노령 니콜리스크에서 유동열 등과 무력투쟁을 계획하다가,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하게 되자 이동녕·이시영 등 30여명과 함께 1919년 3월 하순 상해로 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군무부 차장에 임명되었다. 1919년 4월 임시정부 의정원의원에 노령대표의원으로 당선되고 군무부위원이 되었다. 또한 1919년 4월 23일 서울에서 열린 국민대회에서 평정관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무력투쟁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하고 다시 만주로 나와 북로군정서 조직에 참여하여 참모장에 임명된다. 이 북로군정서가 청산리에서 일본군 대부대를 상대로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청산리전투 이후 일제의 반격을 피하여 밀산으로 이동, 10여 개의 독립단체를 하나로 통일한 대한 독립군단을 조직하여 외교부장이 되었다. 그러나 1921년 6월 공산당의 배반으로 이른바 자유시참변을 당하는 커다란 손실을 입고 그는 북경으로 돌아와 임시정부 외무위원으로 중국정부와의 외교 교섭활동을 계속하였다.
질문 1) 다음 글을 읽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 방향을 둘러싼 논쟁에 대해서 이야기해봅시다."1919년 3·1운동을 분수령으로 대한의 독립운동은 크게 3가지 방법론으로 분화되었다. 실력양성론은 일제를 이길 실력을 기르자는 주장으로 일제가 정해 놓은 합법적인 한계 내에서의 독립운동을 주장하였다. 외교독립론은 무장투쟁의 방법이 현실적으로 힘이 모자라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미국이나 영국 등 강대국들의 힘을 얻어 일본을 물러나게 하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무장투쟁론은 의병들의 뜻을 이어받아 힘으로 일본을 내쫓고 독립을 이루려는 노력으로 강대국에 대한 외교가 갖는 한계를 주장하고,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이루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말한다.
만주와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 노선을 대체로 무장투쟁론을 주장하였고, 미국에서 활동했던 이승만을 비롯한 인사들은 외교독립론을 주장하였다."
3. 독립 세력의 단결을 호소하는 민족유일당 운동을 전개하다.
1926년 8, 9월경 북경의 독립운동계에서는 분열되어 있던 독립운동단체들을 대동단결시키기 위한 새로운 방략이 모색되었다. 안창호가 중심이 되어 원세훈과 함께 대 독립당을 결성하고자 시도한 끝에 같은 해 10월 북경에서 ‘한국독립유일당촉성회’를 조직하였으며 이때 선생은 이런 내용의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단결은 약자의 무기다라는 말은 자명의 진리인 것이다. 그 단결의 길은 일시적 권모술수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정대한 정의와 광명뇌락(光明磊落)의 정신을 근거로 한 당적결합에 있는 것으로 믿는다.”
-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 선언문」 중 일부(1926년 10월 16일 북경에서)"
선생은 동시에 『촉성보』를 간행하여 단체의 단결과 단일투쟁을 호소하였다. 선생의 이런 노력이 기폭제가 되어 1927년 4월에는 홍진과 홍남표 등을 중심으로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가 조직되고 이어서 광동, 남경, 무한 등지에도 파급되었다. 1927년 11월에는 각지 촉성회가 연합하여 상해에서 ‘한국독립당촉성회 대표 연합회’가 개최될 때 북경대표로 참가하여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 연합회를 조직하였으며 각지의 촉성회를 연결하여 ‘유일당 조직준비회’를 결성하는 것이 이 조직의 목적이라고 밝혔다. 민족진영은 이와 같은 유일당 결성을 통하여 독립운동계의 통일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나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에 의하여 좌익세력이 1929년 11월에 상해 촉성회의 해체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유일독립당 운동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 질문1 다음 글을 읽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 방향을 둘러싼 논쟁에 대해서 이야기해봅시다. "1919년 3·1운동을 분수령으로 대한의 독립운동은 크게 3가지 방법론으로 분화되었다. 실력양성론은 일제를 이길 실력을 기르자는 주장으로 일제가 정해 놓은 합법적인 한계 내에서의 독립운동을 주장하였다. 외교독립론은 무장투쟁의 방법이 현실적으로 힘이 모자라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미국이나 영국 등 강대국들의 힘을 얻어 일본을 물러나게 하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무장투쟁론은 의병들의 뜻을 이어받아 힘으로 일본을 내쫓고 독립을 이루려는 노력으로 강대국에 대한 외교가 갖는 한계를 주장하고,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이루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말한다. 만주와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 노선을 대체로 무장투쟁론을 주장하였고, 미국에서 활동했던 이승만을 비롯한 인사들은 외교독립론을 주장하였다."
읽기자료 3
1926년 8, 9월경 북경의 독립운동계에서는 분열되어 있던 독립운동단체들을 대동단결시키기 위한 새로운 방략이 모색되었다. 안창호가 중심이 되어 원세훈과 함께 대 독립당을 결성하고자 시도한 끝에 같은 해 10월 북경에서 ‘한국독립유일당촉성회’를 조직하였으며 이때 선생은 이런 내용의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단결은 약자의 무기다라는 말은 자명의 진리인 것이다. 그 단결의 길은 일시적 권모술수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정대한 정의와 광명뇌락(光明磊落)의 정신을 근거로 한 당적결합에 있는 것으로 믿는다."
-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 선언문」 중 일부(1926년 10월 16일 북경에서)
선생은 동시에 『촉성보』를 간행하여 단체의 단결과 단일투쟁을 호소하였다. 선생의 이런 노력이 기폭제가 되어 1927년 4월에는 홍진과 홍남표 등을 중심으로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가 조직되고 이어서 광동, 남경, 무한 등지에도 파급되었다. 1927년 11월에는 각지 촉성회가 연합하여 상해에서 ‘한국독립당촉성회 대표 연합회’가 개최될 때 북경대표로 참가하여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 연합회를 조직하였으며 각지의 촉성회를 연결하여 ‘유일당 조직준비회’를 결성하는 것이 이 조직의 목적이라고 밝혔다. 민족진영은 이와 같은 유일당 결성을 통하여 독립운동계의 통일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나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에 의하여 좌익세력이 1929년 11월에 상해 촉성회의 해체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유일독립당 운동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 질문1 선언문에서 단결을 강조하는 이유를 한국독립유일당촉성회의 조직 배경을 통해 탐구해 봅시다.
- 질문2 민족유일당 운동이 실패한 이유를 당시 독립운동의 정세와 연관지어 설명해 봅시다.
시각자료
시각자료 1
다음은 인터넷 검색창에 ‘조성환’으로 인물 검색을 한 결과이다. 물음에 답하시오.
- 질문1 독립운동가인 조성환선생이 검색 인물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독립운동가를 기리기 위해 검색 인물에 항상 올리는 것은 검색 결과를 왜곡하는 일일까 아니면 독립정신을 기리는 일일까? 함께 고민해 봅시다.
시각자료 2
서울시 효창공원의 임정묘역에 있는 조성환 선생의 묘소(가운데가 조성환, 왼쪽이 이동녕, 오른쪽이 차리석이다.)
다음은 서울 효창공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안치된 조성환 선생의 묘소입니다.
- 질문1 조성환의 묘소를 찾고 조성환 선생 외에 함께 임정묘역에 함께 있는 두 묘소의 인물들에 대해서 조사해 봅시다.
시각자료 3
다음은 1912년 당시 중국에 있던 조성환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편지에는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중국의 현황과 우리나라의 관계, 북경 상해 등지의 독립운동 현황이 담겨져 있습니다.
- 질문1 신해혁명 이후 중국의 정치체제의 변화를 조사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치체제와의 연관성을 생각해봅시다.
- 질문2 조성환이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현황을 미주에서 활동하는 안창호선생에게 보낸 이유를 이야기해 봅시다.
시각자료 4
다음은 조성환 선생과 부인의 사진이다.
- 질문1 두 분의 옷차림을 보고 조성환 선생의 주요 활동지가 어디였는지 추론해봅시다.
모둠활동
"(가) 조성환은 1907년 9월 안창호, 양기탁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항일구국운동에 투신하였다. 신민회를 창립한 세력은 5개의 국권회복운동계열을 근간으로 하여 형성되었는데 무관학교 출신으로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계열, 구국언론활동을 하던 계열, 기독교도를 주축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계열, 상인과 실업가 등 민족자본가들의 계열, 미주에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공립협회 계열 등이다.
선생은 무장투쟁을 강조해온 30대의 무관학교 출신으로서 15명의 최고 간부(군인) 중의 1인으로 활동하였다. 1908년 1월 이후 북경으로 가서 활동하였으며 잠시 서울에 돌아와 군자금을 조달하여 국외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 활동하였다.
(나) 애국 계몽 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일본 놈들을 우리 땅에서 쫓아내지도 못하면서, 무고한 백성들을 현혹시켜 죽음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고 있다.’면서 의병 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을 비난하였다. 그러나 교육이나 산업 육성과 같이 실력을 키워서 독립을 얻자는 운동은 별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여기에 애국 계몽 운동에 투신했던 사람들 중 일부는 1910년 일제에 의해 식민지가 된 후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하기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