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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번 국도를 타고 김포를 지나 초지대교를 건너 4km를 가면 강화도의 유서 깊은 절인 전등사의 남문을 볼 수 있다. 전등사는 현존하는 한국 사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으며, 부처님의 가호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호국불교의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는 역사와 권위를 간직한 사찰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바와 같이 삼랑성은 단군이 세 아들[三郞]을 시켜 쌓았던 고대의 토성이었고, 삼국 시대에는 토성 자리에 석성을 쌓아올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삼랑성 안에 자리 잡은 전등사는 세 발 달린 솥을 거꾸로 엎어놓은 모양을 가진 정족산과 더불어 강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 유적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전등사에서 일제의 군대 해산에 저항하는 강화도 의병의 전투가 격렬하게 진행된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강화도는 고려의 대몽항쟁,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격전지로 외세의 침략에 항거하는 상징적인 섬으로 알려져 있지만 항일의병에 대한 사실은 다른 역사적 사실에 비해 덜 알려져 있다.
1907년 7월 30일 전 강화진위대장 이동휘는 정족산성 전등사에서 김동수와 허성경 등의 기독교인을 비롯하여 해산군인 400여 명을 모아 합성친목회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반일집회를 열어 일반 군중을 참여시켰다.
강화의병의 전투지였던 전등사를 통해 강화도 의병의 항쟁에 대해 알아보자.
역사적 배경
| 현재 주소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5(전등사로 37-41) |
|---|---|
| 현재 상태 | 의병 전투와 관련된 기념 표석이나 알림판은 설치되어 있지 않음. |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미국, 영국, 러시아와 조약을 체결하고 한국에 대한 독점적인 지배권을 승인받았다.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국권을 강탈하자 이를 규탄하는 구국운동이 다양하게 전개되었고 의병들이 다시 봉기하였다. 을미의병이 국모시해에 대한 복수를 내세웠다면, 을사의병은 국권회복을 전면에 내세웠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지 2년 후인 1907년 일제는 열강과 더욱 긴밀한 관계 속에서 한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이러한 때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하였다.
1907년 「정미7조약」을 체결한 일제가 가장 서두른 것은 한국군의 해산이었다. 비록 허약해진 한국군이었으나 그래도 군대인 만큼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워 무장해제를 시킨 것이다. 1907년 8월 서울의 시위대의 해산에서 시작하여 진행된 한국군대의 해산은 곧 애국군인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다.
1908년 강화에서 이능권을 위시한 의병의 활동이 계속되자, 일본은 같은 해 10월 용산 주둔 일본군 제6사단 예하의 제13연대 70여 명의 병력을 강화로 투입하였다. 10월 30일부터 31일 이틀간 전등사에서 일본군과 이능권 부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이능권 부대는 화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읍내로 철수한 일본군은 11월 1일 다시 전등사에 출진하였으나, 이미 의병은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읽기
읽기자료 1
일제가 한국의 군사권을 박탈하려는 음모는 1904년 6월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한국을 장악한 상태에서 한국 정부에 대해 각종 침략조약을 강요하였는데, 그 때 한국군을 무력화하려고 시도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7개월 전 소위 병제개혁으로 인해 한국군의 지휘부인 원수부가 해체되었을 뿐 아니라 1만 6천 명의 한국군 병력이 8천 명으로 줄어들었다.
1905년 8천 명이었던 한국군은 2년 뒤 7천 명으로 줄었으며 이 중 겨우 궁궐을 지킬 정도의 시위대가 서울에 주둔하고 지방의 주요 도시에는 8개 진위대대가 분산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1907년의 군대 해산은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한국군에 가한 최후의 일격이었다. 1907년 8월 1일 일제는 서울 시위대를 해산한 데 이어 지방의 진위대를 해산하였다.
한국군 강제 해산에 반대하는 무장투쟁은 서울의 시위대부터 시작되었다. 서울 시위 1연대 1대대 대대장 육군 참령 박승환이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 만 번 죽어도 애석할 것이 없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자, 이에 자극을 받은 제1연대 1대대와 제2연대 1대대가 무기를 들고 일어났다. 남대문에서 벌어진 일본군과의 전투는 3시간에 걸친 혈전이었다. 치열한 공방전 끝에 일본군은 42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한국군은 장교 13명을 포함한 57명이 전사하고 10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신식 소총과 기관총 그리고 수류탄까지 사용한 압도적인 일본군에 맞서 비록 구식 소총이지만 용감하게 싸웠으나 결국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에서의 투쟁은 곧 지방 진위대에 알려졌으며 강화진위대는 원주 진위대에 이어 두 번째로 궐기하였다. 강화진위대는 수원 진위대의 강화 분견대였는데, 8월9일 지홍윤·유명규·이동휘 등을 선두로 무기고를 장악하고 읍내로 진출하여 일본 순사를 사살하고 군수 정경수를 동문 밖에서 처형하였다. 이튿날인 8월 10일 일본군이 강화 갑곶에 상륙하자 매복하고 있던 한국군이 기습하여 10여 명의 사상자를 내게 했다. 그러나 다음날 기관총을 앞세운 일본군 2개 중대가 증파되어 강화성은 함락되었고 한국군 병사 600여 명은 바다를 건너 황해도 해주와 통진 방면으로 탈출하여 그 지역의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한 한국군 부대가 항일의병부대에 합류함으로써 항일 의병투쟁은 더욱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 질문1 다음은 1907년 이완용과 군부대신 이병무의 이름으로 발표된 조칙이다. 밑줄 친 ㉠으로 인한 결과와 이에 대한 우리의 대응을 위 글에서 찾아 써 봅시다. "짐이 오직 나라 일이 어려운 때를 만나 쓸데없는 예산을 절약하여 이용후생의 산업에 응용함은 시급한 과제이다. …(중략)… 짐은 지금부터 군제쇄신을 도모하여 사관양성에 전력하고 후일 징병법을 발포하여 공고한 병력을 구비코자 한다. ㉠ 짐이 이에 유사에 명하여 황실시위에 필요한 자를 선발하고 기타는 일시 해산하노라. - 『구한국 관보(舊韓國 官報)』, 1907년 8월 1일, 「호외」 -"
읽기자료 2
고종은 을사늑약이 일제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무효 조약임을 국제적으로 알리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가장 믿었던 신하인 이용익을 프랑스로 보내려 했지만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07년 이용익은 다시 고종의 뜻을 받들어 국권 회복을 호소하기 위해 연해주로 향했지만,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급사하고 말았다.
고종은 이용익이 비명횡사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특사를 헤이그까지 보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당시 육지나 바다를 철통같이 지키던 일본 군경의 감시망을 돌파해 특사가 안전하게 국경을 넘을 수 있도록 지켜 줄 유능한 '호위 무사'의 선발이필요했다.
연해주로 가려면 육로와 해로를 거쳐야 했기에 육상과 해상에서도 능히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자를 선발했다. 여기에 선발된 이가 이능권이었다. 그는 일본 비밀 기록 속에 '해적(海賊)'으로 나오는 것으로 봐서 수군 군관 출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고종의 밀명을 받들어 특사를 무사히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보낸 뒤 귀국했지만, 그 특사들이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는 소식에 울분이 쌓였다. 게다가 국왕까지 쫓겨나게 되자 고향 강화도에서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다.
강화도는 본래 진위대 본부가 설치된 곳이었다가 얼마 전에 수원으로 옮겨가 분견대가 있던 곳이었다. 이곳에서도 군대 해산에 반대한 군인들이 의병 투쟁에 나서고 있었다. 이미 강화의병 총대장은 김용기(일명 봉기), 중대장은 지홍기와 박계석이 맡아 의병 투쟁의 대열에 나섰고, 오늘날 2개 소대 규모였던 분대는 김귀봉, 김장석, 궉종석, 유학도 등 4명이 이끌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강화 출신이었던 이능권이 의병을 일으키자, 몰려드는 의병이 해산 군인을 포함해 300여명에 달했다. 그는 의병들을 훈련시킨 후 신식 무기로 무장해 강화도에서 일본군과 여러 차례에 걸쳐 접전하면서 적군 다수를 살상시키는 등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이듬해인 1908년 의병부대를 '대동창의진'이라 명명하고 부하 의병인 이호춘·유성준·김추옥 및 여만복 등과 더불어 강화군 길상면에 살고 있는 방의표에게 군자금으로 엽전(葉錢) 500냥을 조달 받은 이외에 11개소에서 약 43,800냥에 달하는 많은 양의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또한 강화도 전등사에 몰래 숨겨 둔 무기를 일본군에게 넘겨준 송계찬이란 자를 살해하여 이적 행위자를 처단하기도 하였다. 그는 군자금으로 대량으로 무기를 구입해 서울 진공이라는 큰 꿈을 꿨다. 국권 회복이 일본 군인, 경찰과의 소규모 투쟁으로 얻어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강화도의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자 일제는 일본군과 일·한 경찰관 등 400여 명을 주둔시켜 매일같이 의병 토벌에 나섰다. 그 바람에 강화도에 머물기 어려워진 대부분의 의병들은 서울 진공이라는 목적을 위해 평산·연안·장단군 등지에 분산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 이능권은 40여명, 지홍일은 30여명, 박계석은 20여명으로 구성된 소부대를 운용했지만 그것마저 여의치 않았다. 상황이 어렵게 돌아가면서 이능권은 강화도를 나와 경기도 부평을 거쳐 서울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밀정의 안내를 받은 일·한 순사대에 의해 12월 13일 중부동 윤창하의 집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이튿날 부상당한 몸으로 강화도로 끌려와서 아무도 모르게 숨겨두었던 총 15정, 탄약 566발을 압수당했다. 그 모습이 지금껏 사진으로 남아있다. 이능권은 1909년 9월 27일 경성공소원에서 교수형이 확정되어 11월 8일 순국했다.
- 질문1 이능권이 헤이그 특사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1908년 강화도 의병이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3
『대한매일신보』는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이 양기탁 등 민족진영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1904년 7월 18일에 창간한 신문으로, 일제강점기의 매일신보와 현 서울신문의 전신이다. 대한매일신보는 발행인이 영국인 베델이었기 때문에 통감부의 검열을 받지 않고 항일논설을 자유롭게 실을 수 있었다. 따라서 일반 민중들의 지지도가 높았고 발행부수도 가장 많았다. 이 신문은 항일논설을 통해 일제의 침략야욕을 폭로하며, 일본에 대한 비판을 꾸준히 하였다. 조선 민중들의 민족의식을 드높여 신교육과 애국계몽운동에도 크게 이바지 했다.
일제 통감부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1910년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로 전락하기까지 고종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 해산의 부당성, 그리고 일제의 야만적 행위들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등 끊임없는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기사를 통해 강화의병의 활동을 살펴보자.
『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13일자는 “그저께(8월 11일) 수원 진위대 교관 소창대위가 보병 일개 소대를 거느리고 강화진위대 분견소를 해산하기 위하여 출장했다”고 전하고 있다. 일제는 ‘헤이그 밀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퇴위시킨데 이어, 그해 8월 1일 서울의 시위대를 시작으로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해산시켰다. 8월 11일 강화 분견대 상위부대인 수원 진위대 대위가 군대해산을 위해 강화에 도착한 것은 강화 분견대를 해산시키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수도 한성으로 향하는 제1관문인 강화도는 일찍부터 군사적 비중이 높았다. 외세 방비를 위해 상당한 전력이 강화도에 배치됐다. 강화 지방대는 1896년 처음 대대로 설치돼 300여 명의 병력이 주둔했고, 1900년 6월에는 지방대대가 진위대로 확대 개편되면서 700명이 증강 배치된다. 이들은 조선에 대한 침략 야욕을 노골화한 일본 제국주의는 물론, 서구열강에 맞서 최전선에서 조선의 수호자로 수많은 전투를 벌였다.
1905년 강화 진위대는 수원에 본부를 둔 제1진위보병대대 산하의 분견대로 축소된다. 일본군이 대한제국의 ‘방비’ 임무를 맡으면서 대한제국 진위대가 변경을 지키는 지방군이 아닌 일본 헌병대 소속 체제로 편입된 데 따른 조치다. 남은 병력은 50명뿐이었다.
11일 강화 분견대 해산보다 앞서서 분견대원들은 서울에서 군대해산과 이에 맞선 남대문 전투 소식을 알고 있었기에 군대 해산에 반대하여 8월 9일부터 총기 유출사건과 탈영사건을 계속 일으켰다. 당시 속출한 무장탈영소식과 총기 유출에 대해 『대한매일신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본월 팔일 오전 10시에 인천제보로 강화소식을 들은즉 강화군 진위대 병정들이 총을 가지고 해산하였는데 어디로 간지 알지 못하였다더라”(8월 11일자)
“지나간 구일에 강화대 병정 2명(하정도 등)이 민병 8명을 거느리고 풍덕군 후릉에 이르러 참봉 홍덕주씨를 위협공갈하고 수호하는 양총 8병과 탄환 이백오십발을 빼앗어 갔다더라.”(8월 15일자)
“강화군에서 해산한 병정이 통진군에 와서 헛총을 놓아 인민을 위협하며 그 고을 분파소의 보관하는 총 열병과 탄약을 몰수해 빼앗아 갔다하고.”(8월 16일자)"
강화 분견대와 강화 주민들의 상황을 알지 못한 일본군은 군대 해산을 위해 8월 11일 오전에 강화도에 상륙하였다. “…일본 편에서는 기관포가 둘이오, 공병과 장교이하 십사명이 십일일 오전에 기차로 또 떠났다더라.”(8월 13일자)
강화 분견대의 해산을 위해 강화도에 상륙하는 일본군과 이에 반대하여 무장한 한국군대와의 전투가 전개된 것은 8월 11일의 일이었다.
『대한매일신보』 13일자 기사는 “오후 4시에 (소창 대위가) 하륙할 즈음에 한국병정 오십 명 가량이 맹렬히 나와 치는 중에 일병(일본군)이 억지로 하륙하니 한병(한국군)은 강화부로 들어가서 백성들과 협력해 성안에서 굳이 막는데…”로 이어진다.
『대한매일신보』는 14일 ‘강화군 항일전 접전소식’을 속보로 전한다. “강화군에서 한·일병이 접전하여 한국 병사와 일본 병사가 많이 사망하였다 하고, 한국 병사는 때때로 요해처에 방비할 뿐더러 혹 김포 통진 등지로 이접하는 이도 있다더라.”
의병들은 처음에는 일본군에 맞서 승기를 잡은 듯 보였지만 기관포로 무장한 일본군에 당할 수는 없었다. 11일 새벽 일본군은 강화읍 공격에 들어갔다. 화력의 열세를 이기지 못한 분견대원들은 오전 7시쯤 사방으로 탈주하고 만다. 일진회를 앞세운 일본군은 가택 수색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사정거리에 들어오는 자는 모두 죽었다. 이때 죽은 자가 50명 정도였다. 일본군은 사로잡은 의병을 서울로 압송하는 도중 총으로 죽이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강화군에서 폭동이 났을 때의 파송하였던 일순사가 그 고을에 사는 김동수씨 등 일곱 사람을 잡아가지고 서울로 올라오다가 중도에서 김씨등 세 사람을 포살하였다더라.”(8월 24일자)"
일본군은 강화의병 봉기 소식에 잇따라 서울에서 군대를 급파한다. 서울의 일진회원들도 강화에 도착해 일본군을 도와 봉기군을 색출하고 탄압하는데 앞장선다. 또한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경시총감이 직접 강화도에 내려왔다.
"강화군에 불안한 형세를 진압하기 위하여 경시총감 환산중준(丸山重俊)씨가 순사 몇 명을 영솔하고 작일 상오 팔시에 그 고을로 나려갔다더라.”(8월 15일자)"
결국 강화분견대와 주민들이 대거 가세했던 강화봉기는 우세한 화력을 앞세운 일본군의 강력한 탄압으로 9일 오후부터 11일 오전까지 3일 만에 끝났다.
- 질문1 다음은 강화의병들이 친일파인 일진회 간부를 처단했다는 기사입니다. 기사를 보고 『대한매일신보』가 친일파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졌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일전에 강화에서 의병이 일어났는데, 해군수 정경수(강화 일진회 총무)씨가 잠시 피신코저 하다가 의병에게 잡혀서 피해하였다니, 근래에 일진회원으로 피임한 관찰군수들은 이 말을 듣고 바늘방석에 앉은 것과 같겠네.(8월 14일자)"
- 질문2 다음 글을 통해 강화의병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이후 활동을 생각해 봅시다. "동일에 또 해주 전보를 거한 즉 강화에서 패하여 달아난 한병(한국군)이 황해도 연해변에 출몰한다함으로 해주수비대에서 병정을 파송하였고(『대한매일신보』 8월 17일)." "강화도 한국군 병사의 일부는 황해도에 들어가 북방의병의 선구가 되었다. 7월 중순의 경성 탈영병 폭행이래 수개월 동안에 그들 일부는 이미 경성 강원 충청 경북 황해도 각지에 가득차게 되었다.(김윤식, 『속음청사』, 269~270쪽)."
시각자료
시각자료 1
다음은 체포된 이능권과 이를 둘러싼 한인 순사들을 찍은 사진이다. 이능권은 일본인과 한국인 순사에 의해 체포되어 강화도 끌려와 전등사에 숨겨두었던 총과 탄약을 압수당했다.
- 질문1 강화 의병들이 전등사에 총과 탄약을 숨겨 두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 질문2 맨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의병장 이능권이라는 위 사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각기 다른 설명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 진실일까요? 자신의 생각과 그 이유를 적어봅시다. "(1)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체포당한 이능권 의병장이고, 뒷줄 오른쪽으로부터 고이께순사, 유부장, 미스노부장, 손순사이다.(신기수 편저, 『한국병합과 독립운동』, 노동경제사, 1995)" "(2) 한인 순사들이 이능권(앉아 있는 사람) 의병장을 이끌고 강화도에 은닉해 둔 총과 탄환을 찾아내 증거 자료로 찍은 사진이다.(『부산일보』, 2008년 7월 26일)"
시각자료 2
양헌수 승전비(인천기념물제36호)
다음은 전등사 안에 세워진 양헌수 승전비이다. 양헌수는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군에 맞서 물리친 장수이다.
- 질문1 전등사에 양헌수 승전비를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 질문2 병인양요의 전투가 있었던 곳을 강화도에서 찾아보고, 프랑스 군에게 약탈당한 외규장각의 위치를 찾아봅시다.
모둠활동
강화도는 선사 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우리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섬입니다. 강화도를 답사하기 위한 답사 계획서를 모둠별로 작성해 봅시다.
다음에서 제시하는 용어를 시대별로 나열하고,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정리해 봅시다.
"부근리 고인돌, 초지진, 광성보, 백련사, 청련사, 전등사, 고려궁궐터, 강화외성"
‘강화도의 대외 항쟁’을 주제로 다음 답사 계획서를 작성해 봅시다.
“강화도의 대외항쟁” 답사계획서
답사 홍보의 말 : 답사를 함께 갈 학생들에게 홍보하는 글을 쓴다.
답사 주제 : 답사 대상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을 문장으로 작성한다.
답사 대상 : 답사 대상 유적/유물을 시대 별로, 또는 지역 별로 선정한다.
답사 대상에 대한 간단한 설명 : 답사 대상 유적/유물에 관한 간단한 설명을 적는다. 설명은 길지 않도록 간단한 안내글이 좋다.
참고자료/참고사이트 : 참고문헌( 논문, 책) / 참고사이트의 경우 사이트 주소를 반드시 적는다.
출발일시 및 집합장소 : 집합장소는 강화터미널로.
준비사항 : 답사 할 때 필요한 것을 생각하여 적기(필기도구, 디지털 카메라, 모자, 관광안내지도 등)
참가비 : 교통비/입장료/식사비 등을 고려하여 책정
참가비 사용계획 : 강화터미널에서 성인요금을 기준으로 작성(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일정표 : 강화터미널에서 9시 출발을 기준으로 오후 6시까지 일정을 작성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