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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관 터(자주독립을 위한 민중 계몽 운동과 민권 운동의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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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4번 출구 사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조금 걸으면 우리 은행 앞에 조그만 표석을 발견할 수 있다. 표석이 있는 자리는 독립협회가 모화관을 개수하여 1897년부터 회관으로 사용한 독립관이 있던 곳이다. 이 표석에는 “독립회관 터(獨立會館址) 여기 영천동 일원은 독립회관(1896~1910)이 자리하였던 터로 원래 모화관(1407~1895) 터였다.”라고 쓰여 있다.

독립관은 독립협회가 본래 영은문을 통해 들어온 중국 사신에게 연회를 베풀던 모화관을 개수하여 1897년부터 회관으로 사용한 자주독립의 상징적인 건물이다. 독립협회는 왜 모화관을 개수하여 협회의 건물로 사용하고자 했을까?

당시 대한제국을 둘러싼 열강의 침략적인 접근을 막아내고자 했던 독립협회의 활동을 통해 강대국에게 둘러싸인 우리나라가 자주적인 외교를 펴는 데 필요한 지혜를 배워보도록 하자.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영천시장길 4
현재 상태 건물은 없어지고 독립문 교통안내센터 뒤편으로 영천시장이 들어서 있다. 건물이 있던 자리에는 독립회관터였음을 알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1895년 청일전쟁 이후 조선을 둘러싼 대립축은 청을 대신한 일본과 삼국간섭을 계기로 등장한 러시아였다. 을미사변 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사건은 러시아가 조선의 정치에 깊이 관여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는 일본을 제외한 대부분의 열강에게 조선에 대한 이권침탈을 보장해 주었다. 러시아가 만주와 한반도에 동시에 진출하고자 하는 정책을 펴자, 일본과 영국은 이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미국 역시 영국과 일본의 동아시아 정책을 지지함으로써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대립이 이뤄지는 상황이었다.

독립협회는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결성되었다. 독립협회의 결성은 본래 개화파에 속하는 서재필을 중심으로 이상재, 이승만, 윤치호 등이 주도했고, 이완용, 안경수, 박정양 등 당시 정부 고위관료들도 참가했으며, 남궁억, 안창호 등의 지식인들도 참여하였다. 이들 개화파는 청나라가 종주권을 주장하던 시기에 반청(反淸) 입장에 섰으며, 미국, 러시아, 프랑스, 일본 등에 우호적이며 서구의 문물을 적극 수용해야 된다는 견해를 제기하였다. 이들은 주로 외교관계 업무와 관련을 맺어온 사람들로서 구미 외교관 및 선교사, 상인들로 구성된 정동구락부(영문으로는 Seoul Club으로 표기되었음)에 출입하면서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정동파' 또는 '외국인파'로도 불렸다.

독립협회는 독립문의 건립과 아울러 이전 청나라 사신을 위한 영빈관으로 사용되다가 방치되었던 모화관을 개수하여 독립관이라고 하고 집회장소와 사무실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본래 모화관은 영은문을 통해 들어온 중국 사신에게 연회를 베풀던 사대외교의 상징적 건물이었는데 청일전쟁 이후 방치된 채로 있었다. 독립협회는 모화관을 개수해 사무실 겸 집회장소로 사용하기로 하고 약 2천원의 경비를 들여 공사를 마무리한 뒤, 1897년 5월 23일 현판식을 거행하였다. 독립관이 완공되자 왕세자가 국문으로 친히 쓴 독립관이라는 현판을 달고 매주 일요일 오후 3시에 회원들이 모여 강연회를 갖기로 하였다. 독립문은 원래 1897년 8월 13일 조선 왕조 건국 505주년을 맞는 개국기원절에 맞춰 준공할 예정이었지만, 조금 늦어져 11월 20일에 완공되었다. 이때는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지 불과 한 달이 지난 때였기 때문에 준공식은 성대한 기공식에 비하여 조촐하게 치러졌다.

독립협회는 독립관에서 매주 일요일 오후 3시에 회원들이 모여 토론회를 갖기로 하였다. 토론회의 개최는 독립협회의 성격이 민중계몽 단체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897년 8월 29일 오후 3시 독립관에서 “조선에 급선무는 인민의 교육”을 이라는 주제로 약 70여 명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첫 토론회가 성공적으로 개최되었다. 토론회는 학생과 시민들의 커다란 호응 속에 매번 성황을 이루었다. 참석자들의 열띤 토론으로 토론회는 진지하고 활기가 넘쳤다. 토론회는 매주 일요일에 여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광무 2년(1898) 12월 3일까지 총 34회의 토론회가 열렸다. 초기의 주제는 사회·문화 등 비정치적인 것들이었으나, 러시아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정치적인 문제를 주로 취급하였다. 이런 토론회를 통해 독립협회 회원들의 정치의식과 조직에 대한 소속감은 높아졌다. 그에 따라 독립협회는 개화·개혁의 여론을 조성하는 민중 계몽 단체로 자리를 잡아 나갔고, 독립관은 공론을 형성하는 토론마당으로 시민사회의 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독립관은 독립협회의 사무실 겸 집회소로 사용되었지만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철거되었다. 현재 독립관이 있던 자리에는 터를 알리는 표석만이 남아있다. 서대문 독립공원 구내에 있는 독립관 건물은 서대문형무소를 공원으로 조성하면서 1996년에 한식 목조 건물로 복원한 것이다. 독립관 건물은 순국선열들의 위패 봉안 및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다.

 

질문 1) 독립협회가 결성된 역사적인 배경을 러시아와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정책을 중심으로 정리해 봅시다(단, 청일전쟁, 아관 파천 두 사건을 넣어서 글을 전개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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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독립협회가 새로 고친 독립관은 본래 모화관이었다. 모화관은 조선 시대 명나라와 청나라의 사신을 영접하던 곳이다. ‘모화’라는 말에는 “중화를 사모한다”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데 이는 조선과 중국 간의 사대 관계를 잘 보여주는 말이다. 고려를 무너뜨린 조선은 1407년 송도의 영빈관을 모방하여 서대문 밖에 모화관을 건립하였다. 원래 모화루인데 세종 12년(1430)에 모화관으로 고쳐지었다. 모화루 앞에는 영은문을 세우고 남쪽에 못을 파 연꽃을 심었다. 1429년(세종 11) 규모를 확장하여 개수하고 모화관이라 개칭하였다. 중국 사신이 올 때는 2품 이상인 원접사를 의주에 보내고, 선위사 또한 2품 이상인 자로 사신이 오는 길의 다섯 곳으로 보내어 맞게 하고 연회를 베풀어 위로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사신이 모화관에 들면, 조선의 왕세자는 그의 앞에 나아가 재배의 예를 행하고 백관도 재배의 예를 행하였다. 이 때 백관은 반을 나누어 사신이 도착하기 전에 관에 나아가 대기하였다. 또, 사신이 돌아갈 때는 백관이 품계의 정종(正從)의 위치를 달리하여 두 줄로 섰다가 일제히 재배례를 행하였다.

명에 대하여 이뤄졌던 사대외교관계는 임진왜란 이후 명이 쇠퇴하고 청이 새로운 중국대륙의 지배국으로 등장하면서 변화가 생겼다. 조선은 일본의 침략에 대응해 지원군을 보내주었던 명을 재조지은(再造之恩; 나라를 다시 만들어준 은혜)의 나라로 보답하고자 하였으나 청의 무력에 굴복하고 말았다. 결국 병자호란 이후 명과의 사대관계는 청과의 사대관계로 변화되었다. 영은문과 모화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사신들도 명에서 청으로 대상이 바뀌었을 뿐 꾸준히 이루어졌다.

1882년 임오군란을 진압하는 데 병력을 보낸 청은 이후 조선에 대해 형식적인 사대교린의 외교방식을 실질적인 정치 경제적 지배를 통해 식민지와 제국주의 국가의 관계로 변화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1876년 강화도 조약을 통해 조선을 강제로 개항시키고 경제적, 정치적 침략을 하고 있던 일본과 대립을 가져왔다. 조선을 둘러싼 청과 일본의 대립은 갑신정변을 거쳐 동학 농민 운동을 계기로 1894년 청·일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일본군은 군비 증강 정책으로 양성한 강력한 군대를 앞세워 청의 함대를 궤멸시키고 승리하였다. 그 결과 일본은 시모노세키에서 강화 조약을 맺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과 함께 타이완과 랴오둥 반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로써 청은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동아시아의 맹주 자리를 일본에게 내주었다. 일본은 서양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새로운 제국주의 국가의 일원이 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하자 조선과 청 사이의 전통적인 사대 관계는 끊어졌다. 1895년 박영효는 영은문, 모화관 등을 헐어버리자는 제안을 했다. 그 뒤 모화관은 폐지되고, 1896년 서재필(徐載弼) 등이 독립협회를 세우고 그 모화관을 사무실로 쓰는 한편,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고 모화관을 독립관이라 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회관으로 사용하였다.

  • 질문1 조선과 중국의 전통적인 외교관계를 가리키는 용어를 위 글에서 찾아 써보고, 조선이 이러한 외교관계를 통해서 추구하고자 했던 목표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 질문2 중국과의 전통적인 외교관계가 끊어지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을 쓰시오.
  • 질문3 다음 기사를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 이제 대조선국이 독립국이 되어 세계만방을 어깨에 겨누니 이는 우리 대군주 폐하의 위덕이 떨침이요, 우리 대조선국의 유사 이래의 광명이요, 우리 이천만 동포의 행복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기념할 실적이 없으므로 이에 공공의 의견으로 독립협회를 발기하여 전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새로이 세우고, 전 모화관을 새로 고쳐 독립관이라고 하여 ㉡ 옛날의 치욕을 씻고 후인의 표준을 만들고자 함이요, 그 부근의 땅에 독립 공원을 이루어 그 독립문과 독립관을 보전코자 하니 성대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돌아보건대, 그 공역이 커서 큰 비용이 될 것이니 힘을 합치지 않으면 성취를 기약치 못할 것이다."
  • 질문4 밑줄 친 ㉠을 통해 알 수 있는 국가 체제의 변화와 그러한 변화를 통해 당시 정부가 얻고자 했던 목표를 추론해 봅시다(단, ‘폐하’의 호칭을 국가 체제 변화의 근거로 하여 글을 전개할 것).
  • 질문5 밑줄 친 ㉡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쓰시오(단, 조선과 중국의 전통적인 외교관계를 가리키는 역사용어를 사용할 것).

읽기자료 2

독립관에서 개최된 토론회는 다음과 같은 규칙에 따르도록 하였다.


① 논쟁이 될 수 있고 회원과 방청인의 지식에 도움 되는 주제를 1주일 전에 선정한다. 즉 상대적인 개념이 들어 있는 연설의 제목을 정해 놓는다.
② 연사 4명을 1주일 전에 선정하여 주제의 결정을 찬성하는 우편과 반대하는 좌편으로 나누어 각기 자기편이 옳다는 주장을 하게 한다.
③ 토론회 당일 회원들은 토론자로서 토론에 참가하여 자기가 공명하는 편을 지지하는 발언을 할 수 있다.
④ 회원 이외의 방청인의 참관을 적극 권장한다.
⑤ 토론 후의 승부는 참석한 회원과 방청인의 다수 의견에 따라 결정한다.

이것을 게일(James S. Gale)은 ‘yes-no meeting’이라고 했는데, 회원들에게 대중연설을 훈련시키는 데 적합했다. 회원들은 처음에는 대중 앞에 연설하러 나서는 것을 주저했으나, 수백 명의 회원들이 얼마 후에는 아주 효과적인 대중연설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수의 방청인들이 토론회에 계몽되어 독립협회에 동조 가입하여 독립협회 세력을 급속히 신장시켰다.

특히 주목할 것은 토론회가 개최됨으로써 이 시기에 독립협회의 내부구조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우선 일반회원들이 토론회에 참석하여 자유로이 자기의 의사를 발표함으로써 민중회원들이 독립협회의 표면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다음으로 토론회를 통해서 독립협회의 회원이 현저히 증가하고 독립협회의 세력도 급속히 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토론회의 토론과정을 통하여 공동의 집단의식을 갖게 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독립협회의 사상을 형성시키는 중요한 과정이 되었다. 그리고 회원들이 집단의식을 갖게 됨으로써 회원 간의 연대감이 강하게 되었다.

  • 질문1 토론회의 토론과정을 통해서 독립협회에 생긴 변화를 이야기해 봅시다.
  • 질문2 다음 토론회의 주제를 통해서 독립협회가 추구하고자 했던 개혁의 방향을 추론해 봅시다. "모두 34차례 열린 토론회의 주제를 내용 별로 분류해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신교육진흥에 관한 것 3회, 산업개발 주장 5회, 민족문화 창달에 관한 것 1회, 미신타파 3회, 위생과 치안에 관한 것 3회, 자주독립 3회, 신문보급에 관한 것 1회, 대외정책에 관한 것 1회, 수구파 비판 2회, 이권 반대 2회, 자유 민권에 관한 것 5회, 의회설립 주장 1회, 독립협회 지회설치 1회였다."

읽기자료 3

만민 공동회(萬民共同會) 또는 관민 공동회(官民共同會)는 조선말, 대한제국의 대토론회이다. 시민운동이자 시민사회단체로 독립협회에서 처음 주관하였다가 1898년 4월을 기점으로 독립협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민중대회로 성장하였다. 1897년(광무 1년) 초 독립협회의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일부 지식인과 관료층들도 참여하였으므로 관민 공동회라는 명칭을 붙였다. 1897년 초 서재필 등을 중심으로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군중 집회를 열어 러시아인 고문과 군부의 교련사관의 해고를 요구하여 대중 여론을 일으켰다. 그 후 이 대회는 계속적으로 열려, 제국주의의 침략을 규탄하고 정부의 시책을 비판하였다.

1897년 10월 박정양을 비롯한 정부의 개혁적 관료들과 독립협회가 함께 주관하면서 범국민적인 대회, 단체로 성장했다. 정부 측의 박정양과 이상재, 독립협회 측의 서재필과 윤치호 등이 이를 지도하였다. 이후 만인이 참여한다는 뜻의 만민 공동회로 명칭을 바꾸게 된다. 만민 공동회에 참여한 사람들도 처음에는 주로 지식인과 소상인이었으나, 점점 확대되어 학생, 교원, 종교인, 하층민까지 참여하였다. 그동안 천대받던 상인이나 백정들도 많이 참여했다. 시민들은 점차 신분을 초월하여 나라의 일을 논의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자유로이 발표하였으며, 스스로 대표자를 뽑아 만민 공동회를 민주적으로 운영하였다.

1898년(광무 2) 3월부터는 러시아, 프랑스 등 열강의 이권개입을 반대하는 등 제국주의 침략 반대운동을 펼쳤으며, 점차 독립협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1898년 10월부터는 독자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1998년 10월 말 열린 만민 공동회에서는 시민과 정부 대신들이 한 자리에 모여 관민 공동회를 열고 국권 수호와 민권 보장, 열강의 이권침탈 방지를 내용으로 하는 헌의 6조를 결의하였다. 고종 황제는 헌의 6조에 자신의 5개조를 더하여 향후 권력 기구의 정비와 개혁 정책의 추진을 약속하였다. 특히 헌의 6조 중에서 제1조 “외국인에게 의부하지 아니하고 관민이 동심합력하여 전제 황권을 견고케 할 사 것 ”에 대해, 고종은 전제 황권의 입지를 확고히 하면서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고 이를 수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부 황제의 측근들이 독립협회가 황제권을 무너뜨리고 공화제를 실시하려고 한다고 허위 사실을 고종에게 보고하였다. 이 사건으로 고종은 독립협회의 간부들을 체포하고 독립협회를 해체시킨다. 독립협회가 해체된 이후에도 만민 공동회는 1898년 12월 회의를 개최하려 했으나 정부의 탄압으로 무산되었고, 고종이 군대까지 동원하여 1899년 만민 공동회를 강제로 해산하면서 완전히 폐지되었다.

  • 질문1 관민 공동회라는 이름을 만민 공동회로 바꾸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다음 헌의 6조의 내용을 보고 만민 공동회가 추구하는 국가 개혁의 방향을 추론해 봅시다. "첫째,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관리와 백성들이 마음을 함께하고 힘을 합쳐 전제황권(專制皇權)을 굳건히 한다. 둘째, 광산, 철도, 석탄, 산림 및 차관, 차병(借兵)은 정부가 외국인과 조약을 맺는 것이니, 만약 각 부의 대신들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하여 서명하고 날인한 것이 아니면 시행할 수 없다. 셋째, 전국의 재정은 어떤 세금이든지 막론하고 모두 다 탁지부에서 관할하고, 다른 부(府)와 부(部) 및 사적인 회사에서 간섭할 수 없으며, 예산과 결산을 사람들에게 공포한다. 넷째, 이제부터 중대한 범죄에 관계되는 것은 특별히 공판을 진행하되 피고에게 철저히 설명해서 마침내 피고가 자복한 후에 형을 시행한다. 다섯째, 칙임관은 대황제 폐하가 정부에 자문해서 과반수의 찬성에 따라 임명한다. 여섯째, 규정을 실지로 시행한다.(『고종실록』, 1898년 10월 30일, 3-65쪽 ; 『황성신문』, 1898년 11월 1일, 「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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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서재필 선생

  • 질문1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창립한 이유를 다음 글을 읽고 이야기해 봅시다. "위 사진 속 인물은 급진 개화파로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서재필(1864~1951)이다. 그는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984년 갑오개혁을 통해 갑신정변으로 인한 역적의 죄명이 벗겨지자, 1895년 귀국하여 1896년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갑신정변 당시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해 실패했던 경험이 있어 무엇보다 국민의 계몽과 적극적인 참여 의식이 중요함을 깨닫고, 이를 위해 우선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그리고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알리기 위해 독립문을 건설하려고 했는데, 이를 위해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누구나 기금을 내고 회원이 될 수 있도록 규정함으로써 다양한 계층의 참여를 적극 유도하였다."

시각자료 2

다음 사진은 서재필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1896년 4월 7일 처음 발행한 『독립신문』입니다. 신문은 모두 4면인데, 1~3면은 국문판으로 편집하고 4면은 영문판으로 하였습니다. 창간호의 논설은 한글을 통해 민중을 계몽하고 서구문명을 받아들이자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첫째 편벽되지 아니한 고로 무슨 당에도 상관이 없고 상하 귀천을 달리 대접 아니하고 모두 조선 사람으로만 알고 조선만 위하여 공평히 인민에게 말할 터인데, …… 우리가 모두 언문으로 쓰기는 알아보기 쉽도록 함이라. 남녀 상하 귀천이 모두 보게 함이오. 또 한쪽에 영문으로 기록하기는 외국 인민이 조선 사정을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혹 편벽된 말만 듣고 조선을 잘못 생각할까 보아 실상 사정을 알게 하고자하여 영문으로 조금 기록한다.
-독립신문 창간사-"

  • 질문1 『독립신문』의 발간에 정부가 예산을 지원한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시각자료 3

다음은 관민 공동회에서 백정 박성춘이 연설하는 장면을 그린 민족 기록화입니다.

  • 질문1 위의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는 당시의 사회상을 이야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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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타임머신을 타고 1898년으로 돌아갔다는 가정하에 독립협회 방식으로 토론을 진행해 봅시다.

 

"도라간 일요일 오후에 독립협회 회원들이 독립관에 모여 의회원을 설립하는 것이 정치상에 제일 긴요하다는 문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는데, 정치상에 긴요하고 유조한 말이 많이 잇더라. 이 다음 일요일 오후에 회원들이 다시 모여 각처에 독립협회 지소(支所)를 설립하는 것이 본회의 제일 중요한 일로 결정한다는 문제를 가지고 강론을 할 터이니 많이 와서들 들으시며 회원들도 실고 없는 이들은 다 와서 참례를 하시오."
- 『독립신문』, 1898년 4월 9일, 「잡보」"

모둠활동 2
위 신문 기사에서 지난 일요일 열린 토론회의 주제를 찾아봅시다.
모둠활동 3

위의 주제에 대하여 모둠 내에서 찬성과 반대를 정해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고 친구들의 의견을 적어 봅시다(자신의 의견을 먼저 적고 다른 친구들의 의견은 다른 색의 볼펜으로 적어 봅시다).

 

찬성 :

반대 :

모둠활동 4

모둠 공통의 의견을 다수결로 정해 봅시다.

 

우리 모둠의 공통의견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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