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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각(동학의 정통을 이은 천도교의 항일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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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각은 우이동 버스종점에서 도선사입구 쪽으로 올라가면 좌측으로 나오는 천도교종합대학원 건물 뒤에 있다. 봉황각은 독립운동가로서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의암 손병희가 1911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우이동이었던 이곳 27,900여평을 매입하여, 보국안민을 내세우고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찾기 위해 천도교 지도자를 훈련시킬 목적으로 1912년에 세운 건물로 3·1운동의 산실이 되었던 중요한 건물이다.

1894년 반봉건 반외세의 뜻을 세우고 일어난 동학농민운동 이후 동학은 민족의 종교가 되었다. 일제 침략이 본격화되던 시기 동학은 이름을 천도교로 바꾸고 다시 일제와의 싸움에 나섰다. 최제우-최시형을 거쳐 3대 교주 손병희 때에 이뤄진 천도교의 활동을 통해 일제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민족 종교인들의 활동을 탐구해 보자.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 254
현재 상태 현재 천도교 의창수도원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봉황각과 그 부속 건물에는 손병희 선생의 유품과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유물이 남아 있다.

봉황각은 우이동 버스종점에서 도선사 입구 쪽으로 올라가면 좌측으로 나오는 천도교종학대학원 건물 뒤에 있다. 봉황각 뒤에는 봉황각과 동시에 지어졌다고 하는 'ㄱ'자 평면의 살림채가 있으며, 봉황각과 담으로 구획되어 있다.

봉황각은 동남향으로 자리 잡았고, 봉황각 왼편의 살림채 역시 같은 좌향을 하였다. 봉황각이 건립되었을 당시에는 봉황각 오른편 아래 우이동 버스종점 주변에 12동의 건물이 더 있었다고 하는데, 3·1운동 후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고 한다. 봉황각을 포함한 건물의 숫자가 13인 것은 천도교의 신앙 방법 중의 하나인 '13자 주문'과 통한다. 봉황각 오른쪽인 동북쪽에 봉황각과 직교하며 동북향으로 서 있는 천도교종학대학원 건물은 1960년대 말 천도교수운회관(종로구 경운동 88 소재)을 새로 지으며 그 자리에 있던 벽돌조 건물을 이건한 것이다.

봉황각은 '弓乙(궁을)'자형으로 평면이 구성된 한식 목조건물인데, '弓乙'자형의 몸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이고, 왼쪽 머리를 구성하는 부분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인데, 오른쪽 모서리 한 칸은 몸채 왼쪽 모서리와 겹쳐 있다. 건물 평면을 '弓乙'자형으로 한 것은 천도교의 핵심사상 중의 하나인 '궁을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궁을은 천도교 교조 최제우가 하늘에서 받은 명부의 모양으로 우주 만물의 순환 작용과 활동을 형상화한 것이다.

몸채는 한가운데에 정면 2칸의 대청을 두고 오른쪽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누마루가, 왼쪽에 전퇴를 둔 정면 2칸의 방이 배치되어 있으며, 정면 가운데 칸 처마 아래에는 '鳳凰閣(봉황각)' 현판이 걸려 있다. 기단은 두벌대의 장대석 기단을 두었고, 그 위에 사각형의 초석을 두어 사각기둥을 세웠다. 처마는 부연을 단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을 하였다.

이 건물은 얼른 보기에는 민가풍의 건물로 보이나 격식은 궁궐의 부속건물 양식이 가미되어 있다. 건물 이름 '봉황각'은 최제우의 시문에 자주 나오는 말인 '봉황'에서 따왔다. 흰 바탕에 푸른색으로 쓴 봉황각 현판은 오세창의 글씨인데, '봉(鳳)'자는 중국 당나라 명필 안진경의 서체를, '황(凰)'자는 당나라 명필 회소의 서체를, '각(閣)'자는 송나라 명필 미불의 서체를 본뜬 것이다.

손병희는 고종 19년(1882) 동학에 입교하였고, 2년 후 교주 최시형을 만나 수제자가 되었다. 을사조약을 찬동한 친일분자인 이용구 등과 결별하고, 1906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제3대 교주로 취임하였다. 1908년 교주 자리를 박인호에게 물려주고 이곳 우이동 봉황각에 은퇴하여 수도에 힘쓰며 지도자들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주었다.

손병희는 3·1운동도 이곳에서 구상하였으며, 이곳을 거쳐 간 사람들은 후에 3·1운동의 주체가 되어 구국운동의 최선봉에 서게 되었다. 봉황각에서 마주보이는 전면 약 50m 되는 산의 언덕에는 손병희의 묘가 있으며, 봉황각과 천도교회관에는 당시의 유품이 남아있다. 봉황각은 연성도량으로 의창수도원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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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1894년 농민전쟁의 형태로 민족운동을 전개했던 동학은 1900년대에 이르러 이용구가 주도하는 시천교와 손병희가 주도하는 천도교로 분립되었다. 시천교는 일진회의 앞잡이가 되어 친일행각을 일삼았으며, 천도교는 애국계몽운동에 적극 동참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1900년 동학의 3대 교주가 된 손병희는 동학농민운동의 배타적 성격에서 벗어나 개화의 방향으로 노선을 바꾸어 갔다. 그는 1901년 이후 일본에 건너가 권동진·오세창·조희연·이진호·조희문·박영효 등 망명중인 개화파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일본에 64명의 유학생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1904년 이용구가 동학교도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진보회는 강연회를 개최하며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했으나, 진보회와 통합한 일진회는 1905년 11월에 일본의 보호정치를 주장하는 매국적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일본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 손병희는 1905년 12월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하고, 천도교 활동의 목표를 민족의 자주독립과 개화혁신으로 삼았다. 그는 귀국 후 친일단체인 일진회와 결별하고, 이용구 이하 62명을 출교시킴으로써 반일 민족종교로서 천도교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당시 천도교는 ①자주독립의 실현을 위한 민족교육사업, ②민지(民智)계발과 문명개화를 위한 언론출판사업, ③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국민계몽운동을 추진하였다. 천도교는 새로운 학교를 설립하기보다는 재정난으로 학교 운영이 어려운 사립학교를 인수하여 경영하는데 주력하였다. 당시 천도교가 인수하여 경영한 학교로는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가 있다. 한편 손병희는 귀국 시 인쇄기와 활자를 들여와 인쇄소를 설치하고, 1906년 6월 천도교 기관지인 『만세보』를 발행했는데, 그 목적은 국민계몽에 있었다. 만세보는 국한문 혼용으로 발행되었고, 한문에는 반드시 한글로 토를 달아 민중계도의 본래 취지에 충실하였다.

이처럼 천도교는 한말에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민족언론지를 발간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노력했고, 다수의 천도교도들은 대한 협회에 가입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했으며, 국권 피탈 이후에는 기독교세력과 연합하여 3·1운동을 주도하면서 종교적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 질문1 손병희는 동학농민운동의 실패 이후에 개화사상을 적극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이런 변화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 질문2 손병희가 이용구를 쫓아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읽기자료 2

3·1독립운동의 역사적 산실이요, 독립운동의 지도자를 양성하던 ‘봉황각’에 대해서 아는 이가 그리 많지 않다. 봉황각은 독립운동가로서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의암(義庵) 손병희 선생이 1911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우이동(현주소: 서울시 강북구 우이동)이었던 이곳 2만 7,900여 평을 800원에 매입했다. 800원은 쌀값으로 환산하여 지금 가치로 약 20억 원에 해당하는 거금이다.

천도교인들의 성금을 모아 천도교 지도자를 훈련시키는 목적으로 1912년 3월 7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같은 해 6월 19일 준공하였다. 봉황각에는 보국안민의 정신으로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찾기 위한 천도교인들의 소망이 담겨있다.

손병희 선생은 봉황각 건축을 시작하면서 완공도 되기 전에 각 지방 간부들을 소집했다. 손병희 선생은 3·1운동도 이곳에서 구상했으며, 1912년 4월 15일부터 1914년 3월 25일까지 7차에 걸쳐 전국의 교역자들에게 49일 동안 차례로 특별연성(천도교의 수련 용어로 몸과 마음을 닦아서 일을 이룬다는 의미) 훈련인 독공수련을 실시했다. 독공수련에 1회에 21명, 2~4회에 49명씩, 5~7회에는 105명씩 총 483명이 참가해 수료했다. 수련시간은 오전 8~12시, 오후 2~5시, 오후 8~11시로 하루 10시간이었다.

당시의 독공수련은 천도교인의 정신수양만을 목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수련을 통해 인간의 근본을 찾고 주체성과 자주성을 확립하는 정신개벽을 이룩함으로서 항일 독립운동에 임하는 정신적 자세를 확고히 하는데 역점을 두고 행해진 것이다. 천도교가 3·1독립운동을 비롯해 이후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독립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연성수련을 통해 민족정신을 확립한 천도교인들이 많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5명이 봉황각에서 배출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손병희 선생은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제병합 되자 10년 안에 나라를 되찾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가지고 이를 실천할 민족운동가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장으로 봉황각을 건립한 것”이다.

봉황각은 일제강점기에는 호랑이가 출몰할 정도로 인적이 드문 한적한 곳이었다. 때문에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을 모의하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3·1운동을 주도한 대표적인 종교단체인 천도교는 손병희를 비롯한 간부들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봉황각에 보여 계획을 논의한 것으로 보인다. 비밀 모임 때에는 손병희 선생의 부인인 주옥경 여사가 일제 경찰의 단속을 피하기 위해 망을 봤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해방 이후 천도교에서는 1958년 1월부터 이곳을 의창수도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봉황각에서 마주보이는 전면 약 50m되는 산언덕에는 손병희 선생의 묘가 있으며, 독립선언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현재 봉황각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다.

  • 질문1 천도교도들이 봉황각 건립에 성금을 낸 이유를 말해 봅시다.
  • 질문2 봉황각과 3·1운동의 관계를 설명해 봅시다.

읽기자료 3

일진회는 1904년 8월 송병준과 독립협회 출신 윤시병, 유학주, 동학교 이용구 등이 조직한 대한제국 시기의 대표적인 친일 단체이다. 1904년 8월 18일 한성부에서 송병준이 일본군을 배경으로 '유신회'를 조직하였다가 8월 20일에 다시 '일진회'로 회명을 개칭하고 그 해 9월에 동학의 잔존세력으로 조직된 이용구의 진보회를 흡수하여 일진회에 통합하였다. 이후 회장 이용구와 송병준 주도하에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병탄될 때까지 일제의 군부나 통감부의 배후조종 하에 침략과 병탄의 앞잡이 행각을 벌였다.

친일파의 원조가 매국노라면 이용구는 송병준과 함께 매국노 가운데서도 가장 앞줄에 세워야 할 사람이다. 그는 대한제국 말기 일진회(一進會)를 이끌면서 소위 ‘한일합방 청원서’를 통해 일본에 아예 나라를 넘기자고 주장했다. 그런 이용구도 처음에는 동학당에서 간부로 활동한 적이 있다. 대체 이용구는 어떤 연유로 매국노로 전락하게 된 것일까?

이용구(李容九, 1868~1912)는 1868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19세에 충북 청주로, 20세에 충주군 황산리로 이주하였다. 23세 무렵 동학교에 입교한 그는 동학군 2차 기병 당시까지도 동학교의 교리를 믿는 충실한 동학교도였다. 당시 남접은 전봉준, 북접은 2세 교주 최시형이 이끌고 있었는데 남접은 비타협 급진노선을, 북접은 반대로 평화적 종교노선을 지향했다.

이용구는 북접에 속해 있었으나 노선은 남접에 가까웠다. 1894년 2월 전봉준이 고부에서 궐기하자 그해 10월 최시형은 북접의 총동원령과 함께 항일 혈전을 선포하였다. 이에 그는 충주군 서촌에서 경기·강원·충청도의 교도 수천 명을 거느리고 출전했다.

손병희 부대의 우익장으로 5만 명의 동학군을 지휘하던 그는 12월 12일 논산전투에서 왼쪽 허벅다리에 총상을 입고 패해 충주로 피신하였다. 이후 1898년까지 만 4년 동안 그는 노모와 처자를 데리고 힘든 피난생활을 시작했다. 그사이 첫 번째 아내는 체포·투옥되었다가 이 때 얻은 병으로 죽었고, 그도 1898년 1월에 체포돼 감옥을 전전했다. 그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교주 최시형의 행방을 대지 않아서 왼쪽 다리에 골절상을 입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풀려난 이용구는 1901년 손병희를 따라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 무렵 러-일 간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는데 그는 어느 쪽이든 이길 쪽을 택해서 살길을 찾아야 한다는 기회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동학에 입교해 반외세·자주를 몸으로 익혀온 그였지만 10여년에 걸쳐 핍박을 받아오면서 이렇게 변질되고 말았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손병희가 조직한 진보회를 친일노선으로 변질시키고는 송병준이 이끌던 친일단체 일진회와 통합하였다. 방일 당시 일본의 선진문물을 본 그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할 것으로 내다보고 일본군에 협력키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러일전쟁을 준비하던 일본군으로부터 협조요청을 받고서 경의선 철도건설과 군수품 운반에 회원 3천명을 무보수로 동원시켰다.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이 승리하면서 이용구의 예언은 적중했지만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손병희는 그를 따르던 무리 62만 명을 교단에서 내쫓고는 1905년에 동학의 전통을 이어 반일사상을 가진 천도교를 창설했다. 이용구는 이에 맞서 친일노선의 시천교를 창설, 교주가 되었다.

이듬해 통감부가 개설되면서 일본 낭인그룹의 조선 내 활동이 활발해진 가운데 일본 조동종 승려 출신의 다케다가 그에게 접근해 왔다. 이용구는 다케다를 시천교 고문으로 추대하였는데 그는 나중에 일진회 고문 시가야마 등과 함께 이용구를 조종하여 ‘한일병합운동’을 추진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가 안중근 의사의 총탄을 맞고 사망한 후 11월 4일 장례식이 치러졌는데 이날 이용구는 서대문 밖 독립관에서 일진회 회원들을 거느리고 이토 추도회를 열었다. 이어 12월 3일 이용구는 일진회 임시총회에서 “나라와 백성의 형세가 절박하여 황실 존영과 인민 복리를 위해 합방을 성립시켜야 한다”는 내용으로 시국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설명하고, 일진회 회원들은 이를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이튿날 일진회는 100만 회원의 이름으로 대한제국 순종과 내각, 통감부에 ‘일한합방 상주문’을 제출하고 대한제국 2천만 동포 앞으로는 ‘일한합방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로부터 8개월 뒤에 이용구의 소망대로 한-일 두 나라는 ‘합방’이 실현됐다.

  • 질문1 이용구가 동학군을 이끌던 항일투사에서 친일파로 돌아선 계기를 위 글에서 찾아 써봅시다.
  • 질문2 동학은 “서양의 학문과 종교에 반대한다”는 의미를 담아서 세운 반외세의 종교입니다. 손병희가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한 이유를 찾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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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봉황각 경내에는 고색창연한 빨간 벽들로 된 2층 건물이 있습니다. 이 건물은 천도교중앙총부 건물이었습니다.

  • 질문1 다음 글을 읽고 이 건물과 3·1운동의 연관성을 찾아 봅시다. "봉황각 경내에는 고색창연한 빨간 벽돌로 지어진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원래 천도교 중앙총부 건물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운동 현재의 수운회관이 있던 자리에 중앙대교당과 같이 지어졌다. 1918년 12월 1일 중앙대교당과 같이 기공식을 했으나 3·1운동으로 도중에 공사가 중단됐다가 1922년4월에야 비로소 낙성식을 할 수 있었다. 천도교중앙총부와 중앙대교당은 3·1운동 때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일제의 감시를 피해서 중앙대교당을 짓겠다는 명목으로 모금한 성금 중 일부로 건축되었다. 1969년 수운회관이 건립되면서 현재의 자리인 우이동 봉황각 경내로 옮겨졌다."

시각자료 2

다음은 친일파 이용구 등이 만든 일진회가 건의한 한일합방청원서입니다.

  • 질문1 다음은 한일합방청원서의 내용입니다. 글을 읽고 일진회가 합방의 명분으로 제시하고 있는 내용에 밑줄을 그어 봅시다. "통감 자작 소네 아라스케 각하 대한국 일진회장 이용구 등 1백만 회원은, 대한국 2천만 민중을 대표하여, 황송히 머리 숙여 재배(再拜)하면서, 대일본 천황 폐하를 대신하는 한국 통감 소네 아라스케 각하에게 삼가 글을 바치옵니다. …(중략)… 우리나라는 귀국과 이해가 이미 상통하여, 정교가 이미 상합하여, 이른바 일한의 관계는 좋은 일 궂은 일에 일체를 이루고 있으매, 이 또한 하늘의 뜻이요, 전혀 인력이 아닌 것입니다. 마땅히 이때로써 그러한 관계를 양국의 청사에 비치고 …(중략)… 바라는 바는 새로운 합방의 힘으로써 양으로는 동방 치안의 근기를 굳혀 동아의 형세를 지탱하고, 음으로는 천리와 인도로 계양하여 세계 열국의 평화를 보임할 뿐입니다."
  • 질문2 다음 글을 읽고 일제가 일진회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써 봅시다. "한편 ‘한일합병’ 청원에 앞서 이용구는 일본 수상 가쓰라[桂太郎]에게 청원 소요자금 3백만 엔을 요구하자 가쓰라는 3천만 엔이라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합방 후 일진회원 25만 명에게 제공된 돈은 불과 15만 엔이었다. 게다가 ‘한일합병’ 후 1주일의 시한을 두고 일진회는 해산 권고를 받았다. 일제는 이용구와 일진회를 ‘한일합방’을 위해 써먹은 뒤 헌신짝처럼 내팽겨쳐 버렸다."

시각자료 3

다음은 이용구의 사진입니다.

  • 질문1 다음은 이용구가 죽기 전의 모습을 그린 이야기입니다. 이용구가 일제에게 협력한 것을 후회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1912년 5월 22일 일본 스마[須磨]에서 죽기 얼마 전 문병차 들른 우치다[內田良平]에게 그는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참 바보짓을 했어요. 혹시 처음부터 속았던 것은 아닐까요?” 항일의병장에서 친일 매국노로 전락한 그에게 마지막으로 돌아온 것은 배신과 그로 인한 회한의 눈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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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다음 글을 참고로 하여 봉황각과 손병희를 주인공으로 하는 ‘역할극’ 대본을 모둠 별로 만들어 봅시다.

 

※ 역사적 사건 주제로 한 희곡 쓰기

1. 주제 정하기 (다음 주제 중 모둠 별로 한 가지 씩 정하기)
1) 손병희의 봉황각 건립
2) 친일파 이용구와 일진회의 활동
3) 3·1운동을 계획하는 손병희와 천도교인
4) 손병희를 비롯한 민족 대표 33인의 독립선언

 

2. 분량 : A4용지 2쪽 이상의 분량으로 작성한다.

 

3.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정확히 설정할 것.

 

4. 다음 희곡 쓰기의 일반적 주의사항을 지킬 것.
① 짧더라도 완결된 이야기가 될 수 있도록 쓸 것
② 희곡의 3요소(해설 / 지문 / 대사)가 모두 들어가야 함
③ 인물간의 갈등이나 내적 갈등이 나타나도록 쓸 것
④ 가능하면 등장인물은 3~4명이 되도록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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