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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에서 내려 6번 출구로 올라오면 장충단 앞이다. 이 부근에는 ‘장충단 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많은 시민들이 산책은 물론 인라인 스케이트, 농구, 배드민턴 등을 즐기는 도심 속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서 사랑받고 있다. 그러나 이곳이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마지막까지 국권을 지키려 했던 대한제국 제일의 추모 공간이었음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공원입구에 있는 작은 안내판의 설명에서 ‘장충단 터’를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이곳에 있는 구조물은 ‘장충단 비’ 와 주변에 있는 석조물 2개가 전부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장충단은 어떤 곳이었을까?
역사적 배경
| 현재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2가 202, 신라호텔 영빈관 |
|---|---|
| 현재 상태 | 신라호텔 영빈관이 들어서 있다. |
지금의 장충단은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6번 출구 바로 앞에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원래 자리는 이곳이 아니다. 조선 영조 때 도성의 남쪽을 수비하던 남소영이 있던 남산의 동쪽 기슭으로 현재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이다. 대한제국은 광무 4년(1900)에 남소영이 있던 그 자리에 장충단을 세워 남산 동쪽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일본인 거주지의 확대를 막으려고 했던 것이다.
장충단은 1895년 을미사변 때 순국한 궁내부 대신 이경직과 시위대장 홍계훈을 비롯한 충신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제단이었다. 입구에는 소나무로 홍여문을 세우고 큰 나무에 대한국기를 걸어 사방에 세웠으며, 제단 위쪽부터 홍계훈, 이경직을 비롯해 명성황후를 지키다 목숨을 잃은 무인들의 위패를 모셨다.
고종은 장충단에 제사를 지내는 전각과 부속건물을 건립하고 대한제국 제일의 추모 공간의 위상을 부여하고, 1908년까지 해마다 봄, 가을에 위령제를 지냈다. 위령제를 지낼 때에는 군악을 연주하고 조총을 쏘면서 엄숙하게 거행하였다. 제를 지낼 때 군악대가 연주하고 군인들이 조총을 쏘았는데 “남산 밑에 장충단 짓고 군악대 장단에 받들어 총일세”라는 민요가 불릴 정도로 관심이 높았던 행사였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합하면서 장충단은 폐사되었다. 일제는 장충단 일대를 공원으로 조성해 벚꽃나무를 심고 위락시설을 설치했으며, 1932년에는 한국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의 혼을 달래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의 이름을 딴 박문사(히로부미의 한문 표기가 박문이다.)라는 절을 짓기까지 하였다.
해방이 되면서 일제가 지은 박문사는 철거되었지만, 장충단을 다시 세우지는 못하였다. 장충단 사당과 부속 건물들이 6·25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 시기 순국선열을 기리는 대표적 현충시설이었던 장충단의 유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장충단비가 유일하다. 하지만 장충단비 역시 1969년 본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장충동2가 197번지 장충단공원 내로 옮겨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읽기
읽기자료 1
장춘단 터는 원래 남소영이 있던 자리이다. 남소영은 조선 후기 어영청의 분영 중 하나로 서울 남산 장충단의 남소문 옆에 있었는데, 영사의 규모가 194간이나 되었다. 어영청은 효종이 추진한 북벌 계획의 본영을 맡았던 핵심 기관이며, 남소영의 부근에는 군영과 관계있는 건물이 집결되어 있었다. 순조 때 편찬된 『만기요람』의 기록을 보면 어영청은 5군영 중 제독검, 월도, 협도, 권법 등 십팔기 무예가 가장 성행했던 곳으로, 훈련은 주로 이곳 남소영에서 행해졌다. 또한 남산의 활터인 석호정 현판에는 남소영을 ‘십팔기 옛터’라고 말하고 있다. 장충단이라는 이름은 광무 4년(1900) 남소영 자리에 을미사변 때 순사한 충신·열사를 위해 단을 만들고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는 데서 유래했다.
- 질문1 장충단이 있던 곳은 원래 어영청과 관련 있는 남소영이 있던 곳이다. 조선 후기 인조반정 이후 어영청이 만들어진 계기는 무엇일까요?
읽기자료 2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서의 정치·경제적 지배권을 청에 빼앗겼던 일본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발발을 조선 침략을 위한 기회로 삼아 ‘일본공사관 및 거류민 보호’라는 구실 하에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일본군은 군대를 보낼 때부터 청 세력을 조선에서 물리치고 조선을 대륙침략의 전진기지로 차지하려는 정책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에 군대를 주둔시켜 놓고 1894년 5월 중순 이후 조선 정부에 내정개혁안을 강요하였다.
조선 정부는 이를 내정간섭이라 하여 거절함은 물론 불법으로 들어온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또 한편 조선 정부에서는 6월 11일 교정청을 신설하여 동학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안의 일부를 받아들인 정치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조선의 태도에 일제는 조선 정부의 뜻을 무시하고 6월 21일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는 갑오변란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일제가 조선 침략의 야욕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첫 단계 침략사건이다.
궁궐을 지키던 경복궁 시위대는 일제의 무력 진입에 맞서 전투를 벌였다. 경복궁 시위대는 기병 중에서 500명을 선발하여 편성된 강한 부대였지만 이 사건으로 궁궐 수비 병사 17명이 전사하였다. 일본군은 건청궁에 있던 고종을 협박하여 전투중지 명령을 내리게 하였다. 전투 중이던 조선 시위대는 이 명령을 받고 ‘모두 통곡하며 총통을 부수고 군복을 찢어버리고’ 경복궁에서 탈출하였다.
경복궁을 무력 점거한 일제는 자신들의 무력행사를 은폐하기 위하여 대원군을 유인, 입궐시켰다. 이와 같이 일본군이 경복궁을 강점한 상태에서 일본을 따르는 개화파에 의하여 이른바 김홍집 1차 내각이 수립되었으며, 이 정권에 의해 갑오개혁이 추진되었다.
일제는 갑오개혁을 통해 조선을 무력으로 장악하고 개화를 구실로 조선을 침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고종과 명성황후의 반대에 부딪쳤다. 게다가 명성황후는 러시아 세력과 제휴하여 일제의 침략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일제는 조선을 침략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인 명성황후 민씨를 살해하려 했고, 조선 측에서도 흥선대원군, 우범선, 이두황, 이진호, 전 군부협판 이주회, 개화파 문신 유길준, 친일파 송병준의 사위 구연수 등 다양한 계층의 조선인 지도자들이 내통, 협조했다.
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정식 군대를 동원할 경우 국제사회로부터 커다란 비난을 받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일본 낭인을 시켜 명성황후를 살해하고자 하였다. 미우라는 황후 시해를 위한 음모를 ‘여우사냥’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일본을 출발하여 인천 제물포 항구에 나타난 일본인 낭인들은 조선인 군관들의 경호와 길안내로 경복궁까지 3시간 내에 진입했다. 일본인들을 막으려고 나왔던 홍계훈과 시위대는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나 이들의 화승총은 일본의 개량된 총을 당해내지 못하고 홍계훈은 일본 수비대가 쏜 총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들은 궁녀 복장을 한 황후를 찾아내 사살한 뒤, 시신을 건청궁 동쪽 녹원에서 석유를 뿌려 불에 태운 뒤 연못에 던졌다.
사건 직후 일제는 황후의 시해가 조선인 반란군에 의해 일어난 것처럼 여론을 꾸미고자 하였다. 일제는 자신들의 책임을 일체 부인했으며 친일내각도 오히려 명성황후를 폐비시켜 쫓아내는 조치를 내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당시 궁궐에서 일본인들의 범죄를 목격한 러시아인 건축기사 사바틴과 시위대 교관이었던 미국인 다이(Dye)가 일제에 의해 저질러진 일임을 세계에 폭로하였다. 을미사변은 국제적 범죄행위로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침략행위의 일환으로 취해졌다. 너무나 비참한 황후의 시해소식을 접한 한국인들은 일제와 친일정권에 대하여 적개심이 솟구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문석봉 등 유생을 중심으로 항일 의병이 봉기하게 된 것이다.
- 질문1 일제가 명성황후의 암살을 계획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 질문2 일제에 협력하여 명성황후의 살해에 함께 참여했거나 방관했던 조선인들은 누구이며, 왜 그랬는지 이야기를 해 봅시다.
- 질문3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해봅시다. "사바틴(Seredin Sabatin)은 1883년 제물포의 개항에 맞추어 우리나라에 온 러시아인 건축 기술자이다. 사바틴은 근대 초기에 세워진 양관이라 불리던 서양식 건축물, 기념물, 공원 등의 조성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지금도 그가 지은 건물과 유적지가 인천과 서울 등지에 남아있다.
- 질문4 3-1)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폭로한 사바틴이 설계한 근대 건물을 조사해 봅시다.
- 질문5 3-2) 일제가 명성황후의 시해를 조선인의 소행으로 꾸미려고 했던 이유를 이야기해 봅시다.
읽기자료 3
을미사변 이후 일제의 야만적인 행동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2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이른바 ‘아관파천’ 이후 1년 동안 많은 이권이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의 손에 넘어가는 등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거소를 옮기자 황제로 즉위하고 연호를 변경하여 나라의 위엄을 높이고 자주독립의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897년 8월 연호를 광무로 변경하고, 10월 12일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일제를 비롯한 열강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꾀하고자 하였다. 대한제국의 선포는 일본과 러시아의 침략과 간섭에서 벗어나 국권과 군권을 확립하고자 했던 절실한 열망에서 비롯되었다.
황제로 즉위한 고종은 2년 동안 미루었던 명성황후의 장례식을 1897년 11월 21일과 22일에 거행하였다. 1900년 9월 고종황제의 명으로 명성황후 시해사건 때 순사한 시위대장 홍계훈과 궁내부 대신 이경직을 비롯해 갑오년 이후 전사한 장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전 어영청 남소영 자리에 제단을 쌓고 장충단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장충단은 을미사변뿐 아니라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의 근대사의 비극적인 사건 때마다 희생된 여러 신하들과 장병들을 함께 위로할 목적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고종은 이곳에 장충단을 꾸며 제사를 위한 전각과 부속건물을 건립하고 매년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 질문1 위 글에서 대한제국 시기에 장충단이 갖는 의미를 찾아 밑줄 그어 봅시다.
읽기자료 4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을미사변 등 일제의 만행을 기억하기 위해 세워진 장충단은 한국을 지배하고자 했던 일제에게는 달갑지 않은 곳이었다. 한국을 강제로 병합한 일제는 대일감정을 악화시킨다는 구실로 제사를 금지하여 장충단을 없애버렸다. 장충단에 서 있던 장충단비도 남산 숲속에 방치하였다. 이로 인해 제사가 끊긴 장충단의 사당은 굳게 잠겼고, 사당 안에는 태극기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또한 1919년부터 장충단공원을 경성부가 직접 관리하게 되면서 장충단에 수천 그루의 벚나무를 심고 위락시설을 설치하는 등 일본식 공원조성사업을 실시하였다. 1932년에는 한국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의 혼을 달래기 위해 박문사라는 절을 짓고 왕실을 상징하는 궁궐의 정문(경희궁의 흥화문)을 떼다가 박문사의 사당으로 전락시키는 등 간악한 일을 저질렀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군국주의 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남산 서쪽 밑에는 상해사변 당시 사망한 3명의 일본인 결사대를 '육탄삼용사'라는 이름으로 동상을 세워서 한국의 민족정신과 관련된 기억을 완전히 말살하려 하였다. 말하자면, 대한제국 시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을 기리는 대표적 현충시설이 침략에 앞장선 일본 정치가와 일본인 용사의 성지로 탈바꿈하게된 것이다.
해방 후 일제에 의해 세워진 박문사와 ‘육탄삼용사’ 동상은 철거되었지만 장충단의 수난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에 방치되었던 장충단의 건물들이 6·25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장충단 터에 신라호텔 등이 들어서 더 이상 옛 모습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장충단의 유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장충단비가 유일하다. 하지만 장충단비 역시 1969년 본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장충동2가 197번지 장충단공원 내로 옮겨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 질문1 일제가 장충단을 없애고 일본식 공원으로 바꾼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위 글에서 장충단에 세워진 일제강점기 건물과 동상을 찾아봅시다.
읽기자료 5
1920년대 한국에서는 노동조합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전개된 노동쟁의는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임과 동시에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한국의 노동조합은 ‘메이데이’ 행사를 개최함으로써 비로소 세계의 노동자들과 연대 활동을 하게 되었다. 매년 5월 1일을 메이데이로 기념하는 것은 이 날이 전 세계 노동자가 단체행동을 통해 국제적 단결과 노동자의 세력을 과시하는 노동자들의 축제의 날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날은 세계의 노동자가 단결하여 인간다운 권리를 얻기 위해 함께 싸우는 노동자 국제 연대의 날이기도 하다.
조선에서의 최초의 노동절(5·1절) 행사는 서울의 조선 노동연맹회의 주관에 의하여 1923년에 이루어졌다. 노동연맹회에서는 5월 1일 서울지역 노동자들 전부가 휴업을 단행하고 장충단에서 ‘노동시간 단축’, ‘임금인상’, ‘실업방지’ 등을 주장하고 노동가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계획했다.
(구로역사연구소, 『우리나라 메이데이의 역사』, 거름, 1990, 34쪽)
- 질문1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절 행사가 갖는 의미를 위 글에서 찾아 말해봅시다.
- 질문2 노동절 행사를 장충단에서 벌인 이유를 생각해봅시다.
시각자료
시각자료 1
다음은 장충단 비 뒷면이다. 뒷면에는 장충단의 건립 내력을 적었는데, 글을 쓴 이는 당시 육군부장이었던 민영환이다.
- 질문1 뒷면 글을 쓴 민영환의 죽음에 대해서 조사해 봅시다.
시각자료 2
다음은 1897년 명성황후의 장례식 사진입니다.
- 질문1 1895년 시해당한 명성황후의 장례식은 2년이 지난 1897년에 거행되었습니다. 명성황후의 죽음에서 장례까지 2년이나 걸린 이유를 생각해봅시다.
시각자료 3
다음은 1932년 일제가 세운 박문사의 전경입니다. 일제는 조선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업적을 기리고 일본인과 조선인의 정신적 결합을 위해 박문사를 지었다고 널리 선전하였습니다.
- 질문1 다음 글을 읽고 일제가 장충단 자리에 '박문사‘를 지은 이유를 탐구해 봅시다. "장충단공원의 동쪽 신라호텔이 있는 언덕은 예전에 박문사라는 사찰이 있던 곳이다. 일본인들은 그 언덕을 가리켜 춘무산(春畝山)이라 불렀다. 박문(博文)은 이등박문, 즉 이토 히로부미를 가리키는 말이고 춘무는 그의 호다. 조선을 강제 병합한 일본은 '항일의 상징' 장충단을 공원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1932년 그 한쪽 구역의 언덕 이름을 '춘무산'이라 짓고 박문사를 지었다. 박문사 건축은 궁궐 파괴와 병행하여 진행됐다. 조선 총독부 청사를 짓느라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던 광화문. 그 양옆의 담장 석재를 가져다 박문사의 담을 쌓았고, 경복궁 선원전과 그 부속 건물을 옮겨다가 박문사 건물로 삼았다. 1932년 당시 이미 일본인 자제들을 위한 경성중학교로 변해버린 경희궁. 박문사의 정문은 조선의 궁궐 중 경희궁의 대문을 가져다 썼다."
- 질문2 박문사를 지으면서 파괴된 궁궐을 찾아 봅시다.
시각자료 4
다음은 일제강점기의 장충단 공원의 모습입니다.
- 질문1 일제가 장충단 자리에 대규모 일본식 공원을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 질문2 일제강점기 장충단 공원의 자리에 현재 어떤 건물이 들어서 있는지 알아봅시다.
모둠활동
모둠 별로 다음 사항을 참고하여 자료를 정리, 발표를 합시다.
※ 모둠 발표 시 주의 사항
1. 각 조 별로 주어진 과제를 조사해서 정리하여 발표합니다.
2. 모둠 별 활동을 할 때에는 모둠원들에게 골고루 역할이 돌아가도록 하고, 발표는 대표가 합니다.
3. 발표하는 형식은 프레젠테이션(한글이나 파워포인트)을 권장합니다.
4. 발표시간은 10분입니다.(파워포인트 장수로 15장 내외. 동영상, 사진, 그림 등 가산점)
※ 모둠 별 주제(현충시설의 뜻, 역사, 위치, 특징 등을 사진 등을 넣어서 발표할 것)
1. 미국의 현충시설
2. 일본의 현충시설
3. 중국의 현충시설
4. 우리나라의 현충시설
5. 호주 및 캐나다의 현충시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