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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역전(서울역 앞) 강우규 의거지(젊은이를 부끄럽게 만든 노년의 애국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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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1월 29일 오전, 서대문 형무소의 사형장에 65세의 노인이 포승줄에 묶여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형을 집행하기 전, 사형을 집행하는 관리가 노인에게 마지막을 남길 말이 없냐고 물었다. 노인은 짧은 시 한편을 남겼다.

 

"단두대에 홀로 서니 춘풍이 감도는 구나.(斷頭臺上 猶在春風)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有身無國 豈無感想)"

 

의연한 태도로 자신의 목숨을 민족 독립 운동의 제단에 바친 이 노인이 바로 강우규 의사이다. 그는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 앞에서 조선에 부임하는 일제의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게 폭탄을 던져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그러나 서울역의 동상 앞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강우규 의사에 대해 물으면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지 않는다고 그의 업적이 빛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가 벌인 의거는 의열 활동의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항일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이 매우 컸다. 그래서 그의 사상과 업적을 안중근, 윤봉길 의사의 업적과 비슷하게 평가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는 왜 젊은이들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의거에 용맹하게 나섰을까? 그 이유를 함께 생각해 보자.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봉래동 2가 122
현재 상태 구 서울역사 앞에 동상과 함께 표석이 서있다.

서울역은 서울특별시의 중심역으로 대부분의 열차와 경의선 전철이 이 역에서 출발하여 다시 돌아온다. 1899년 9월 경인선이 개통되었을 때에는 노량진까지만 철도가 들어왔는데, 1900년 한강 철교가 개통되면서 남대문정거장역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그 뒤 경부선(1905년), 경의선(1906년) 이 차례로 개통되고 1923년 역이름을 경성역으로 바꾸면서 본격적인 서울(당시 경성부)의 관문 역할을 하였다. 1925년 도쿄역에 이어 두 번째 규모로 역사가 완공되고 이후 만주 방면의 국제 열차를 취급하는 등 한반도의 철도 교통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곳에서 3·1 운동이 일어난 뒤 꼭 6개월, 1919년 9월 2일 강우규 의사는 사이토 신임 일본 총독 일행에게 폭탄을 던져 독립을 향한 민족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강우규 의사는 왜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지기로 결심했을까? 그 이유를 당시의 상황을 통해 알아보자.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로 합병한 이후, 일제는 무단통치를 통해 우리 민족의 저항을 힘으로 억누르고자 하였다.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하여 헌병경찰은 한국인의 모든 일상생활에 관여하였으며, 즉결처분권이 있어 의심만으로 감옥에 가두거나, 심지어 한국인만을 대상으로 야만적인 태형을 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억압적인 무단통치는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잠시 누를 수 있었을 뿐, 없앨 수는 없었다. 1919년 3월 1일 우리 민족 최대의 민족운동인 3·1운동이 펼쳐져 독립을 염원하는 만세소리가 전국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일제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이를 탄압하여 3개월 만에 겨우 시위는 잦아들었지만, 한 번 불붙은 독립운동의 불길은 꺼지지 않고 조용히 발 밑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일제는 3·1운동의 책임을 물어 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를 물러나게 하고, 1919년 8월 12일 제3대 총독으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예비역 해군대장을 현역에 복귀시켜 임명했다. 그러자 새 총독이 부임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다시 일어났다. 서울의 학생과 종교계에서는 신임 총독의 부임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조직적으로 나타났다. ‘청년중앙단’ 명의로 조선은 3·1운동으로 이미 독립하였으므로 신임 총독은 즉시 도쿄로 돌아가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강우규 의사 역시 새 총독의 임명을 인정한다면 가혹한 식민지 통치를 그대로 용납하는 것이 되어 3·1운동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는 대한 국민 노인 동맹단 대표가 되어 서울에 가서 신임 총독을 처단함으로써 국내외의 지원을 얻어 독립이 달성되기를 소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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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강우규 의사는 1855년 평안남도 덕천군 산골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어렵게 자랐다. 30세 무렵에 그는 함경남도 훙원군의 산골로 이사하여 한약방과 잡화상 경영으로 재산을 모았다. 1908년에 함경도 전역을 다니며 학교 설립 운동과 기독교 선교 활동을 벌이고 있던 신민회 함경도 지방 책임자 이동휘를 만나 감화를 받고, 자신의 재산을 털어서 영명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동휘의 활동은 “한손에 성경을 잡고 또 한 손에는 교육사상을 고취하는 서류를 잡은 후 이르는 곳마다 산천이 떠나갈 듯한 목소리로 첫마디부터 열혈이 뚝뚝 떨어져 수많은 청중이 흑흑 느끼며 울고 그 마당에서 반듯이 학교가 설립되었으니 신사상 주입에 신이 되었다.”라는 세간의 평가가 있을 정도로 커다란 호응을 얻었다. 강우규는 이 무렵부터 의거 전까지 이동휘와 교분을 두텁게 쌓으며 서로 나라를 걱정하는 생각을 나누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10년 조국이 일제에 강제로 합병되자 크게 분노한 그는 50대 중반의 나이로 독립운동에 뛰어들기 위해 북간도의 두도구로 망명하였다. 그 후 러시아령 하바로프스크를 거쳐 1917년에 만주 길림성 요하현으로 이주하고 신흥동 마을을 개척하여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광동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어, 한인 이주민과 그 자녀들에게 민족의식과 배일사상을 키워주었다.

이어 강우규는 1917년에 광동학교를 세워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강우규는 학생들에게 일제의 침략에 대해 설명하고 우리 민족이 살 길은 일제를 몰아내고 독립 국가를 세워 한민족은 한민족끼리 사는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이 무렵 신흥동에는 연해주와 인근에서 우국지사들이 수시로 드나들었고 무장한 독립단원도 다녀갔다.

  • 질문1 강우규 의사의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준 이동휘와 신민회에 대해 조사해 봅시다.
  • 질문2 이동휘의 사상과 행동이 강우규 의사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말해 봅시다.

읽기자료 2

1919년 3월 국내에서 발발한 3·1운동의 소식은 국경을 넘어 연해주까지 전해졌다. 3·1운동이 시작된 지 불과 4일 만인 3월 4일에 만세운동의 소식이 전해지자, 강우규 의사의 주동으로 신흥동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마을의 남녀노소와 인근 독립당 당원까지 합세하며 500여명의 동포가 각자 태극기를 들고 광동학교에 모여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고 중국관헌이 집중된 중심지까지 가두시위를 벌였다. 그 후 강우규는 자주 강 건너 연해주를 왕래하며 독립운동을 활발히 펼쳤다.

1919년 3월 하순에 러시아 블라디모스토크의 신한촌에서 김치보·박은식 등의 주도로 46세 이상 애국 노인들의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 국민 노인 동맹단이 결성되자, 강우규는 즉시 가입하고 요하현 지부장이 되었다. 노인 동맹단은 각지에서 독립운동에 분주한 청년 운동가를 지원할 목적으로 발족되었다. 노인 동맹단의 조직 규모는 7,000명을 목표로 할 정도로 컸다. 특히 노인 동맹단은 군자금 모금을 비롯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선 청년들도 하기 어려운 활동을 자진 수행하여 조국독립에 헌신하는 것을 당면 목표로 하였다. 노인 동맹단은 그해 5, 6월경 조직이 정비되면서 박은식이 기초하고 김치보 이하 21명의 대표가 서명한 한국독립요구서를 작성하여 일본정부에 보냈다.

이 문서에서 3·1운동에서 보여준 민족의 독립 의지를 강조하며 한국식민지 통치를 즉시 철회하고 독립을 지원하라고 요구하였다. 또한 5월 말에는 연해주의 대표적 독립운동가인 이동휘의 아버지 이승교를 비롯하여 홍치윤, 윤여옥, 안태순, 차서대 등을 대표로 서울에 파견하며 종로 보신각 앞에서 만세 시위를 벌리고 운집한 군중을 대상으로 독립 연설회를 개최하려 하였다. 일제 군경의 탄압으로 크게 진행되지는 못했지만 이승교는 그 자리에서 칼로 목을 찔러 자진 순국을 기도했고 나머지 단원들은 붙잡혔다.

이 활동으로 조국을 떠난 국외동포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3·1운동에 동참하고 있음이 국내외에 알려졌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조선 총독이 경질될 것이라는 소식을 접한 강우규와 노인 동맹단은 새 총독의 임명과 부임이 3·1운동으로 분출된 전 민족적 독립 열망과 세계적 대세인 민족자결주의를 완전히 외면하고 하늘의 뜻도 거역하는 소행이라고 인식하여 의거를 결심하였다.

  • 질문1 해외 동포들의 3·1 만세운동을 조사하고 이를 통해 3·1운동의 의의를 생각해 봅시다.
  • 질문2 대한 국민 노인 동맹단의 활동 목표와 구체적인 활동을 위 글에서 찾아 써 봅시다.
  • 질문3 노인들이 독립운동에 나서는 것에 대해서 당시 젊은 학생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읽기자료 3

강우규는 곧 시베리아에서 러시아 사람에게 영국제 폭탄을 50루불에 샀다. 이 폭탄은 사람이 밀집한 장소에서는 약 100명의 인명을 살상할 수 있는 강력한 성능을 가졌다. 폭탄을 몸에 지니고 그는 6월 11일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하여 원산으로 입국하였다. 그는 함께 거사를 준비할 최자남·도명수·허형 등의 동지를 모아 총독을 죽일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사이토 마코토가 9월 2일 남대문역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확인하고 8월 28일부터는 남대문역에 가까운 여관으로 숙소를 옮기고 매일 남대문역을 답사하여 면밀한 실행계획을 세웠다.

9월 2일 군함을 타고 인천에 도착, 기차 편으로 오후 5시 서울 남대문역에 내린 사이토 마코토 총독 일행이 환영객들에게 인사를 받은 다음 대기한 쌍두마차에 올랐다. 바로 이때 귀빈실 문전인파 속에 대기하고 있던 강우규는 폭탄을 총독을 향해 던졌다. 폭탄은 총독이 탄 마차 앞 12m 지점에 떨어져 폭발하였다. 이 의거로 총독부 고관, 군 수뇌, 경찰 간부 및 순사, 기자 등 37명이 중경상을 입었지만 총독에게는 손상을 입히지 못하였다. 폭탄의 파편 몇 개가 마차를 뚫고 사이토 총독의 허리띠와 군복에 구멍을 뚫었을 뿐이었다.

폭탄을 던진 후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간 강우규는 총독을 폭살하기 위한 다음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일본경찰의 수사에 행적이 포착되어, 폭탄을 던진 날로부터 보름 뒤 친일 순사부장으로 악명을 떨치던 김태석의 손에 체포되고 말았다.

강우규는 체포된 후 경찰에서 잔혹한 심문조사를 시작으로 검찰과 예심, 그리고 제1심의 지방법원과 상고심인 복심법원에서의 사형판결 등 절차를 거쳐 1920년 11월 29일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 전후 1년 3개월간을 열악한 서대문형무소를 중심으로 이리 저리 끌려 다니며 옥중생활을 겪었다. 그러나 강우규는 재판과정과 수형생활, 그리고 처형되던 순간까지 일관되게 의연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어 일제의 사법·경찰 관리들까지 감동시켰다.

강우규의 의거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은 매우 컸다. 그의 공개재판 기사가 신문에 실릴 때마다 의거를 칭송하는 사람들이 늘어갔고, 특히 청년 학생들이 그의 의거에 큰 감동을 받았다.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 당한 뒤 감옥 공동 묘지에 묻혔던 그의 유해는 해방 후 서울 우이동으로 이장하였다가 1962년 3·1절에 강우규 의사에게 건국건로훈장 중장을 추서하고 그의 유해를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정중히 안장하였다.

강우규는 65세의 노인으로 의열투쟁에 가담한 인물이었다. 연세에 전혀 구애받지 않은 활동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귀감이 되고 있다. 3·1운동 이후 일제는 이른바 ‘문화통치’를 허울로 내세워 한민족을 분열시키고 식민지배를 장기화하려고 하였다. 문화통치의 본질을 간파한 그는 신임총독을 처단함으로써 우리의 독립의지를 만천하에 알리고자 하였다.

비록 사이토 총독 폭살은 실패로 끝났지만 강우규의 의거는 국내 폭탄 의열활동의 효시였으며 1920~30년대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의열투쟁의 실질적인 ‘도화선’ 중 하나였다.

  • 질문1 강우규 의사의 의거가 일제강점기 민족독립운동에서 갖는 역사적인 의의를 위 글을 참고하여 정리해 봅시다.

읽기자료 4

1919년 3월 26일에는 블라디보스톡에서 노인 동맹단의 발단식이 있었다. 김치보의 집에서 조직된 노인 동맹단은 한국독립을 목적으로 재외 한인 65세 이상의 노인을 모두 결속하려는 데 있었다. 이 당시 약 320여 명을 단원으로 모집하였는데 단원을 확대하려는 노력이 꾸준히 전개되어 지방으로까지 다니며 단원을 모집하였다. 노인 동맹단은 대표자 6명을 조선 총독부에 파견할 것과 결사대를 모집하여 국내로 들여보낼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으며, 이 밖에 단원 150명을 국내로 파견하여 3·1운동을 확산할 계획도 세웠다. 노인 동맹단은 조직을 확산하기 위한 전단위원을 두어 이들을 각 지방에 파견하여 단원 모집에 힘썼다. 전단위원은 발기인을 7인으로 하고, 입회금은 7루 불이었으며, 연령도 46세 이상 70세까지로 하여 총 7,000명의 회원을 모집하려 하였다.

1919년 5월 5일 노인 동맹단은 이승교 등 대표 7명을 선정하여 국내로 파견하였다. 이들 대표들은 일본에 보내는 문서 2통과 취지서 수백 매, 여비 1만 루불을 지참하고 출발, 5월 31일 서울에 도착하여 그날 오전 11시 경 종로 보신각 앞에서 민중들에게 연설을 한 후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 독립 만세를 부르다가 체포되었다. 이때 이발(李發)은 “의로써 치욕을 당하지 않겠다”며 칼로 스스로 목을 찔렀으나 일경이 그를 대한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이승교와 정치윤은 너무 노쇠하여 노령으로 추방당하였으며, 안태순은 징역 1년, 윤여옥은 징역 10월, 차대유는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 6월 25일 노인 동맹단은 강문백·연병우를 대표로 블라디보스톡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 보내 독립요구서를 제출하였다.

  • 질문1 블라디보스톡은 연해주의 중심 도시입니다. 노인 동맹단이 국내가 아닌 블라디보스톡에서 창설된 이유를 말해 봅시다.

읽기자료 5

다음은 강우규 의사의 의거에 대해 보도한 신문 기사입니다. 기사를 읽고 물음에 답해 봅시다.

 

"귀빈실 바깥 어귀에는 총독부에서 보낸 마차, 자동차가 기다리고 있다. 귀빈실을 나온 일행은 각각 나누어 타고 총독 동부인의 탄 마차가 정히 발을 떼어 놓을 때에 돌연히 끽다점 옆 인력거 둔 곳의 등 뒤에서 총독의 마차를 겨냥하고 폭탄을 던진 자가 있었는데 폭탄은 총독을 떼어 놓은 뒤쪽 두간 가량이나 되는 곳에 떨어져서 굉연히 큰 음향이 일어나며 폭발되는 동시에 그 폭발에 상한 자가 부지기수인바 드디어 중경상자 37명을 낸 ㉠ 참담한 춘사(椿事)가 일어났었는데 사이토 총독은 군복 및 혁대 세 곳에 구멍이 뚫어질 뿐 무사하였다."
(『매일신보』, 1919년 9월 4일, 「轟轟 爆彈의 聲」)

  • 질문1 밑줄 친 ㉠ 참담한 춘사(椿事)는 ‘뜻밖에 생기는 불행한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가 강우규의사의 의거를 ‘춘사’라고 매도한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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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다음은 감옥에 갇혔을 때 강우규 의사의 사진입니다.

  • 질문1 강우규의사는 당시 65세의 노인이었습니다. 65세의 노인이 목숨을 걸고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하면서 일제에게 경고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시각자료 2

다음은 강우규 의사의 의거를 전하는 당시 신문 기사와 의거의 대상이었던 사이토 마코토의 사진입니다.

  • 질문1 강우규 의사의 의거를 신문을 통해 알게 된 당시 사람들의 반응을 생각해 봅시다.
  • 질문2 일제는 3·1운동 이후 통치방식을 기존의 무단통치에서 기만적인 문화통치로 전환하였습니다. 일제의 통치방식의 변화가 우리 국민의 독립의지를 약화시키려는 기만적인 술책이었음을 사이토 마코토 신임 총독의 이력을 근거로 비판해 봅시다. "사이토 마코토(1858 ~ 1936) : 일본 해군 출신으로 1906년 해군대신으로 취임한 후, 1912년 해군대장으로 승진하였다. 1914년 일본 내각과 해군의 수뇌부들이 군수업체로 부터 뇌물을 받은 사건으로 사임하였다. 1919년 조선 총독에 취임하였다."

시각자료 3

다음은 노인 동맹에 참가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는 대한국민노인동맹 명부입니다.

  • 질문1 명부의 표지를 보면 연도가 단조기원(檀祖紀元) 4252년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단조기원’의 연도 기준은 무엇일까요?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연도 방식과의 차이점을 이야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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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다음은 강우규 의사가 재판과정에서 일관되게 주장한 내용입니다. 글을 읽고 모둠 별로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일본은 불의와 폭력으로 우리나라를 합병하여 잔혹한 식민지 통치를 자행하였다. 이는 세계의 양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나는 대한의 국민인데 어찌 너희 일본의 굴복하여 너희들의 노예가 되겠는가. 그래서 해외에 망명하면서 우리 민족을 위한 종교와 교육에 종사하여 마음을 계발하고 인재를 양성하여 조국을 광복할 계획을 세워 죽을 때까지 계속하기로 한 것이다.

일본은 한국을 통치할 능력과 자격이 없다. 더욱이 우리 한인을 말살하여 일본인을 만들려는 ‘동화’란 것은 어리석은 꿈같은 수작인 것이다. 사이토 총독은 세계대세인 민족자결주의와 정의를 교란하고, 한국인 2,000만을 궁지에 빠지게 하여 동양 평화를 해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2,000만을 대표하여 신명을 바쳐 국권회복과 독립을 위하여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것이다."

모둠활동 2
강우규가 사이토 총독을 폭살시키려 한 이유를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모둠활동 3
일제가 선전한 동화 정책의 기만성을 문화통치와 관련지어 비판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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