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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의거지(청년지사, 매국노를 응징하여 친일파를 떨게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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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법이 불공평하여 나의 생명은 빼앗지만 나의 충혼(忠魂)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를 교수형에 처한다면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너희 일본을 망하게 할 것이다"

 

자신의 부와 권력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이완용을 처단하려다 실패한 이재명 의사가 1910년 5월 18일 사형 선고를 받은 법정에서 일본인 재판장에게 한 말이다.

그는 함께 공모한 자가 누구냐는 일본인 재판장의 물음에 이천만 조선 동포가 모두 매국노를 죽이는데 가담한 것이라고 대답하는 등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당당한 태도를 보여 재판을 지켜 본 많은 방청객들을 감동시켰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길 74 (명동2가) 명동성당 정문 앞
현재 상태 명동성당 정문 앞에 의거를 기념하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서울 롯데백화점 본점에서 명동성당 방향으로 걸어가다 보면 명동길이 나온다. 명동길에 접어들어 대규모 영화상영관, 우리은행, 국민은행을 지나 천천히 걸으면 눈앞에 명동성당이 들어온다. 명동성당 정문 왼쪽(동쪽)에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는 곳에 조그만 표석이 있다. 1999년 11월 서울시가 세운 이 표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이재명(1890-1910)은 친일 매국노인 이완용을 척살하려 한 독립 운동가이다. 평북 선천 출생으로, 1909년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을 마치고 나오는 이완용을 칼로 찔렀으나, 복부와 어깨에 중상만 입히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이듬해 순국하였다."

 

이곳이 1909년 12월 22일, 20살의 꽃다운 나이의 청년지사 이재명이 친일 매국노 이완용을 처단하기 위해 의거를 일으킨 곳이다.

1904년부터 일제에 강제로 합병된 1910년까지의 기간은 일제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전개되었던 시기였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미국, 영국, 러시아와 조약을 체결하고 한국에 대한 독점적인 지배권을 승인받았다. 1905년 11월 일본의 특명전권대사로 서울에 온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이 거처하고 있던 궁궐을 일본군으로 포위하고, 외교권을 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는 내용의 조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조약의 승인을 거부하며 의견을 내지 않고 결정을 대신에게 위임하였다.

조약의 체결이 어려워지자 이토 히로부미는 조정 대신들을 상대로 위협과 매수에 나서 조약의 체결에 참여시켰다. 이때 학부대신 이완용을 비롯한 5명의 대신이 찬성을 표시하면서 일제는 조약이 성립되었다고 발표하였다.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자 이를 규탄하는 구국운동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을사늑약에 협조한 매국노와 일본 침략자를 직접 응징하고자하는 의거가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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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이재명은 평안남도 평양 출신으로 어려서 부모를 여의었다. 평남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졸업한 그는 1904년 미국노동이민회사의 이민모집에 응하여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1904년 시작된 하와이 농업이민은 당시 한국의 가난한 농민들에게는 기회로 여겨졌다. 하와이 농업 이민을 모집하는 사람들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생활을 아주 매력적으로 묘사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하와이의 기후는 일년 내내 상쾌하고, 농장일은 즐거운 것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하와이의 실제 생활은 감독의 채찍질 밑에서 허리를 펴지 못하고 일하는 고단한 노동의 연속이었다. “30분 정도의 점심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10시간 일하는 동안에는 허리를 펴거나 담배 피울 겨를도 허락하지 않는다. 루나(하와이 말로 현장 감독)은 우리들을 마치 소나 말과 같이 채찍으로 다스린다.”고 하와이의 노동이민에 참여했던 한 노동자는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런 고된 노동 속에서도 하와이의 한국인들은 일당을 모아 애국공채를 매입하고, 한인여학교 기부금을 내는 등 대한 독립운동과 미주한인의 교육을 후원하였다. 또한 1905년 일본이 하와이의 명예영사로 사이토를 임명하자 하와이의 한국인들이 격렬하게 반대한 것은 단지 민족적인 반감뿐만 아니라 고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과 지배에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1906년 3월 샌프란시스코로 옮겨간 그는 안창호가 조직한 독립운동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민족의식이 더욱 투철해졌다고 한다. 1907년 7월 헤이그에 고종의 밀사로 파견된 이준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의분을 갖게 된 그는 공립협회에서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의 숙청을 결의하자 침략의 원흉과 친일파 매국노를 없애기로 결심하고 그해 가을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젊은 동지들을 모으며 기회를 엿보았다. 미국에서부터 알고 지냈던 김병록, 평양에서 만난 대한의원 학생 오복원과 김용문 등이 이재명과 뜻을 같이했다. 이후 더 많은 동조자를 규합하며 기회를 엿보던 이재명은 한때 자신이 죽이려던 이토 히로부미가 10월 26일 안중근에 의해 처단되자 11월 하순경 이완용과 일진회 회장 이용구(1868~1912년)를 죽이기로 목표를 바꾸었다.

  • 질문1 하와이 노동이민이 이재명 의사의 민족의식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 질문2 안창호가 조직한 공립협회에 대해서 조사해 보고 이재명 의사의 공립협회 가입이 민족의식 강화의 계기가 된 이유를 이야기해 봅시다.

읽기자료 2

미국에서 귀국한 그가 한 일은 매국노 처단의 뜻을 같이할 동지들을 모으는 일이었다. 1909년 11월 경 이재명은 먼저 서울에서 당시 최고 엘리트였던 대한의원 학생(지금의 의과대학생) 오복원·김용문에게 친일 매국노 대신들을 죽이는 데 뜻을 같이할 것을 권유하여 동지로 끌어들였다. 이어 11월 하순 평양으로 가서 12월 상순까지 김정익·이동수·전태선·이응삼 등을 박태은 집으로 불러 이완용 척살의거에 가담하도록 촉구하였다. 그러자 원래부터 이용구를 살해할 생각을 품고 있던 김정익은 한일합방을 앞장 서 주장하는 이용구를 먼저 죽이고 그 다음에 이완용을 죽이자고 하였다. 이러한 논의의 결과 이재명·이동수·김병록 3인은 이완용을 살해하고, 김정익·조창호 2인은 이용구를 살해하기로 하였다.

이재명 등은 암살을 위해 구체적으로 일을 분담하기로 하였다. 즉 오복원·박태은·이응삼 3인은 자금 조달을, 전태선과 조창호는 무기구입을 맡았다. 이재명은 12월 12~13일 경에 서울로 올라가 김용문에게 이완용과 이용구를 살해하기로 했다고 알렸다. 이에 김용문은 이용구의 집을 알려주며 이용구의 동정을 알아내는 임무를 맡았다. 이울러 이재명은 자신과 미국에서 같이 생활한 적이 있는 경상남도 동래부의 김병록을 급히 서울로 불러 거사에 가담시켰다.

12월 12일 경 이재명은 거사 때 착용할 학생복과 무기를 구입하였다. 그리고 김정익·이동수·전태선 등 거사동지들이 이재명을 뒤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17일 경에 이들은 이재명의 숙소에서 마지막 회합을 갖고 이완용을 먼저 살해하고, 이용구를 나중에 살해하기로 하였다. 이같이 결정한 뒤 각자 무기 분배를 마치고 김용문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의거가 끝난 후 이들은 대부분 잡혀 이재명은 사형, 김정익은 징역 15년형, 오복원, 전태선 등은 징역 10년, 박태은, 김용문은 징역 7년 이응삼, 이학필, 김병현, 김이걸 등은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 질문1 이재명 의사는 뜻을 같이할 동지들을 모을 때 어떤 말로 설득했을까요? 내가 이재명 의사가 되어 설득할 말을 글로 써 봅시다.
  • 질문2 교과서 등 대부분의 역사책에는 이재명 의사의 의거를 이재명 개인이 한 것처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함께 의거를 했던 동지들의 이름을 적어보고, 왜 이재명의 단독 행동으로 알려졌는지 자신의 의견을 적어 봅시다.

읽기자료 3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후 일제는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두 달 가까이 일본과 한국에서는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행사가 계속되었다. 추모 행사가 시들해질 무렵 12월 22일, 벨기에 황제인 레오폴 2세의 별세를 애도하는 추도식이 벨기에 영사관 주최로 종현교회당(지금 명동성당)에서 열렸다. 레오폴 2세는 아프리카의 콩고를 침략하여 식민지로 만들고 ‘콩고 자유국’의 국왕이 되었던 인물이다. 레오폴 2세의 무자비한 콩고 지배로 콩고의 인구 수가 30년만에 거의 절반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콩고를 무자비하게 침략한 벨기에 국왕의 추도식에 이완용은 내각 총리대신 자격으로 참석한 것이다.

추모 행사가 끝나고 11시 30분 경 경호대의 호위를 받으며 인력거에 타려고 할 때, 이재명이 몸에 단도와 육혈포를 지니고 나타났다. 칼을 빼어든 이재명이 매국노 이완용에게 달려들 때 인력거꾼 박원문이 막아섰다. 이재명은 박원문을 한칼에 쓰러뜨리고 이완용의 등과 어깨 등을 찔렀다. 곧 이어 달려온 경호원에게 칼로 등을 찔린 이재명은 체포되었다. 인력거꾼 박원문은 현장에서 숨지고, 세 곳에 상처를 입은 이완용은 혼수상태에 빠져 병원으로 실려갔다. 당시 현장에 있던 이동수는 이재명이 이완용을 죽였다고 판단하여 몸을 피하였다.

병원이 아니라 옥인동의 자기 집으로 실려간 이완용은 밤새 긴급 치료를 받았고 그 다음날 대한의원으로 이송되어 대수술을 받고 삼엄한 경계 속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당대 최고 외과의사인 대한의원 원장 기쿠치의 치료 덕분이었다. 대한제국의 완전한 병합을 위해 일제의 최고 협력자인 이완용과 그의 친일 인맥이 필요했던 일제가 그를 살리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인 것이다. 일본 경찰이 병원을 둘러싸고 철통같은 경계를 펼치는 가운데 최고의 의료진의 치료를 받은 이완용은 두 달 뒤인 2월 14일 거의 완쾌되어 퇴원할 수 있었다.

  • 질문1 일제가 이완용의 치료에 온힘을 기울였던 이유를 글로 써 봅시다.
  • 질문2 다음 주장에 대해 반박하는 글을 써 봅시다. "이재명 의사의 의거가 성공하지 못한 것은 근대 의료기술 때문이었다. 만약 의료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더라면 매국노 이완용은 죽었을 것이고 우리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근대 의료기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이었다."

읽기자료 4


이른바 "총리대신 이완용 모살(謀殺) 미수 사건"으로 기소된 사람은 이재명을 비롯해 13명이었고, 이 가운데 이동수(李東秀)는 도피에 성공했지만 결국 1924년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이 사건은 처음에는 "박원문 살해"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모살 미수"만으로는 이재명을 처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제는 인력거꾼 박원문이 살해된 것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박원문을 살해한 것에도 고의성은 없었기 때문에 애당초 처형은 무리한 것이었다. 재판은 법의 해석에 의한 공정한 판단이 아니라 일제와 친일파의 정치적인 의도를 관철시켜 이재명을 처형하기 위한 겉치레에 불과하였다.

재판 과정에서 이재명은 자신의 행위가 일제에게 매국노를 제거하여 국권을 회복하려는 데 있었음을 당당하게 주장하였다. 그는 이완용 모살 미수사건에 대한 공판에서 이완용의 죄목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①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외부를 폐지하고 통감부를 설치한 일
② 헤이그밀사사건을 구실 삼아 송병준과 함께 이등박문의 허락을 얻어 고종황제를 위협하여 양위케 한 일
③ 7조약을 체결하여 모든 권력을 통감에게 팔아넘기고 군대를 해산시킨 일.
④ 어린 황태자를 일본에 인질로 보내고 일본 여자와 정략적인 결혼을 시킨 일.
⑤ 고종 황제를 일본에 건너가도록 획책한 일
⑥ 엄동설한에 강제로 황제로 하여금 서북지방을 순행케 한 일.
⑦ 사법권을 일제에게 위임하여 국내의 여러 애국지사를 처벌하고 인민의 행동을 제약한 일.
⑧ 겉으로는 일진회장 이용구로 하여금 한일합병 성명서를 발표케 하고 속으로는 합방을 궁리하고 추진한 일."

 

이재명이 이완용을 살해하려 했던 것은 이완용의 친일 행각이 극에 달했으며 결국 나라를 일제에 넘기게 될 것이라는 점을 명백하게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그가 제거하고자 했던 인물이 이완용뿐만 아니라 송병준·이용구와 같은 친일 매국노들이 있었다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즉 이재명은 이완용 등의 친일파를 제거하는 것이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길 위기에 처한 민족을 지키는 일이라는 점을 굳게 믿었다.

이재명의 이완용 저격사건이 발생하자 통감부에서는 사건의 성격을 단지 흉악한 범죄자가 저지른 치졸한 행동으로 격하시키려 하였다. 당시 민심은 이재명의 의거로 인해 친일파에 대한 분노가 커지고, 일제에 대한 반감 역시 점점 커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제는 이러한 민심을 가라앉히고 친일파들을 보호하여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재명의 의거와 같은 일이 재발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였기에 이재명의 의거를 왜곡하려한 것이다.

일본과 친일파의 사건 축소 움직임 속에서 이재명은 확고한 신념으로 공판에 당당하게 임했다. 당시 일본인 검사는 논고에서 “이재명은 우국지사라고 자칭하나 편견자의 한 사람일 뿐이며 그가 공범이 없다고 자칭하는 것은 자기의 허영심을 충만케 하기 위해서이다. 또 이용구를 죽이려다가 이완용을 죽이려 한 것도 역시 허영심에서 나온 것이지 국가사상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당시 이면우와 안병찬은 한국인 변호사로서 이재명의 행위가 개인적 분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애국적 열성에서 나온 것이며, 이완용과 이용구가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이므로 그들을 응징하려는 행위는 정당성이 있는 의로운 행위임을 힘주어 변론하였다.

이재명은 공판정에서 일본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동지를 보호하고 스스로 책임을 지려는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자신은 국가에 바친 몸이므로 변론할 것이 없으나 곁에 있는 연루자들에 대해서는 변론할 것이 있다며 동지들의 무죄를 주장하였다. 이재명 등에 대한 공판은 1910년 4월 13일 하루 만에 끝내고, 5월 18일 이재명에게는 사형, 김정익·이동수·김병록·조창호 15년, 오복원·전태선 10년, 박태은·김용문 7년, 이학필·김이걸·김병현·이응삼 5년이 각각 언도되었다. 사형이 언도되자 이재명은 “불공평한 너의 법으로 나의 생명을 빼앗기는 하지만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라”고 자신의 확고한 애국심을 표현하였다.

김정익, 이동수, 조창호, 이학필 등을 제외한 9명이 항소했지만 일제는 그들의 항소를 기각하고 1심 판결대로 형을 집행하였다. 상고 기각 판결로 형이 확정된 지 보름 만인 1910년 9월 30일 이재명은 서대문감옥소 교수대에서 이십대 초반의 짧은 인생을 마감했다.

  • 질문1 일제가 처음에는 “이완용 모살 미수 사건”이라고 했다가 박문원의 살해를 죄목에 추가한 이유를 써 봅시다.
  • 질문2 이재명 의사가 재판정에서 제기한 이완용의 8가지 죄 중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죄를 두 개 선택하고 그 이유를 적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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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다음은 의거 전에 찍은 이재명 의사의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흥사단의 창단 멤버로 미국에서 주로 독립운동 자금 조달을 담당했던 양주은이 소장했던 것입니다.

  • 질문1 흥사단은 1907년 유길준이 설립한 계몽단체로 1911년 조선 총독부의 탄압으로 해체되었으나, 유길준이 죽은 후 안창호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재결성하였습니다. 흥사단의 양주은이 이재명 의사의 사진을 소장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각자료 2

다음은 2월 18일에 열린 이완용의 장례식을 보도한 『경성일보』의 기사입니다. 기사에는 “사이토 총독 등 1,300여명의 조객이 참석한 가운데 극도의 애도 속에” 장례식이 열렸다고 적혀 있습니다.

  • 질문1 성대한 장례식이 끝난 후 이완용은 전라북도 익산에 묻힙니다. 그러나 그의 묘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의 공격과 도굴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50여 년이 지난 1979년 그의 후손들이 무덤을 없애 버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무덤을 공격하거나 도굴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후손들에게 이완용은 어떤 사람으로 인식되었을까요?

시각자료 3

다음은 이완용이 죽은 다음 날인 2월 13일자 『동아일보』의 기사입니다.

 

"그도 갔다. 그도 필경 붙들려 갔다. (…중략…) 살아서 누린 것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이제부터 받을 일 이것이 진실로 기막히지 아니하랴 (…중략…) 부둥켰던 그 재물은 그만하면 내놓지! (이완용은 월급 100원이 희귀했던 시절에 나라를 통째로 일본에 넘긴 공으로 300만 원을 받았다고 한다.) 앙탈하던 이 책벌을 이제부터는 영원히 받아야지!"

  • 질문1 위의 사설을 읽고, 이완용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적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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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다음 두 편의 글은 이재명에 의해 죽은 인력거꾼 박원문에 관한 상반된 입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글을 읽고 (나)의 입장에서 모둠원들이 의견을 모아 (가)의 주장을 비판하는 글을 300자 내외로 써 봅시다(비판을 할 때에는 구체적인 예를 드는 등 비판의 근거를 설득력 있게 제시해야 합니다).

 

"(가). ‘정당한 폭력’은 정당한가?

이재명이 공판에서 박원문을 죽인 것이 '우연'이었음을 강조하고 "무지무능한 저 가련한 노동자를 일부러 죽이려고 했겠는가"라고 반문했지만, '무지한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 적이 없었다. '나라를 위한 일'을 하는 과정에서 평민 하나쯤 목숨을 잃는 것은 당시 민족주의자 사이에서 별다른 고심거리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이재명 의거'에 대한 기억에서 박원문의 죽음을 꼭 빠뜨려야만 하는가?"
- 박노자, 「정당한 폭력은 정당한가」, 『한겨레 21』, 2007년 4월 13일-

 

(나). 박원문은 누구인가? 이완용을 인력거에 태워준 죄밖에 없는 사람인가? 그러나 박원문이, 이완용이 이동할 때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는 단순한 인력거꾼이 아니라 핵심 경호원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박원문은 원래 이완용의 사위 홍운표의 인력거꾼이었는데 신체가 건장하여 이완용의 인력거를 끌게 되었다(『황성신문』, 1909년 12월 24일).

 

그리고 이재명이 이완용에 앞서 박원문을 칼로 찌른 것은 공판 기록에 나오듯이 박원문이 이재명을 제지하려 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만약 박원문을 놓아 둔 채 이완용에 달려들었다면, 등을 보인 이재명은 박원문에게 쉽게 공격당하고 거사가 수포로 돌아갔을지 모른다.
- 황상익, 「세 번 찔리고 살아난 이완용, 그 일등공신은…」, 『프레시안』, 2010년 9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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