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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중국군을 격퇴하다 – 용문산 전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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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는 용문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 여럿 있다. 경상북도 상주시에 있는 용문산, 전라남도 장흥군에 있는 용문산, 그리고 경기도 양평군(또는 가평군)에 있는 용문산이 있는데, 경기도 가평의 용문산은 6․25전쟁 당시 국군이 중국군을 크게 무찌른, 용문산 전투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용문산 전투는 1951년 5월 중국군(중공군)의 2차 춘계대공세 당시 경기도 양평군 북방의 용문산을 방어 중이던 한국군 제6사단이 5월 18일부터 5월 20일까지 3일간의 전투 끝에 중국군 제63군단 소속 3개 사단(제187사단․제188사단․제189사단)을 섬멸시켜 방어하는데 승리한 전투이다.
이 용문산 전투는 중국군의 춘계 공세를 저지하고, 자칫 잘못 하면 바뀔 수 있는 전쟁의 흐름을 계속 우세하게 유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병력을 막아내는 방어 전투의 모범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한국전쟁 사상 최대의 전과를 올렸던 용문산지구 전투는 한국전쟁사에 커다란 승리의 금자탑을 세웠다. 우리 육군은 용문산 전투의 주역이었던 제6사단 제2연대에 ‘용문산 부대’라는 호칭을 붙여주어 오늘까지 이 날의 승리를 기리고 있다.
  현재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천안리에는 용문산전투가평지구전적비(1997.06.23. 건립), UN군72탱크부대참전기념비 등이 세워져 용문산 전투를 비롯한 가평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를 기념하고 있는데, 용문산전투가평지구전적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용문산 전투를 기리는 시가 새겨져 있다.




가평 하늘 푸른 별이여

우리는 잊을 수 없으리라 그 날을
용문산 기슭 가평벌 짓밟던 중공군
우리는 영원히 기억하리라 그 날을
자랑한 청성부대의 빛나는 대첩
저 청자빛 하늘 아래 심혼 불사르며
광영의 뿌리내린 영웅들이시여.
그대로 하여 자유조국 이룩하였으니
민족사에 살아 숨쉴 호국의 별 되리.
그 눈부신 승리의 기쁨 한마음되어
새 세기로 웅비하는 조국 떠받들며
통일로 지향하는 화합의 광장
번영으로 이르는 큰길에 나아가리라.

 

이처럼 용문산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거나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용문산전투가평지구전적비’ 이외에도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광탄리에 ‘용문산지구전투전적비’,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에 ‘용문산지구전적비’ 등이 세워졌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천안리 98 일대
현재 상태 변형 / 고지의 형태는 남아 있으나 당시 주변의 민가 같은 건물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돌파하고, 압록강 근처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10월 19일 밤 압록강 건너 대규모로 중국군이 전쟁에 참여하는 바람에 전세는 다시 역전되었다. 6․25전쟁이 시작할 때 참여하지 않았던 중국군은 왜 이제야 참전을 하였을까?
  미군이 참전하여 전세가 뒤바뀌게 되면, 이제 막 신생 국가로 출발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존립이 위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 사회주의 국가를 지원하고, 자본주의 국가의 확대를 막아야 한다는 명분의 문제도 있었다. 이에 중국 내에서는 미군이 북한 지역으로 진격을 해올 경우, 중국군이 참전을 해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다만, 미국의 군사력과 중국의 군사력을 비교해봤을 때 미국의 막강한 공군력과 원자폭탄이 문제였다. 이 때문에 중국 안에서는 참전에 반대하는 주장도 만만치 않아서 논란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마오쩌뚱은 그래도 미국과 싸울 수 있으며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50년 8월 4일 정치국 회의에서 마오쩌뚱은 만약 미국이 원자폭탄을 사용한다고 해도 중국은 끝까지 전쟁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가운데 9월 15일 맥아더의 지휘 아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게 되자 전쟁의 흐름이 바뀌었다. 그 동안 북한에게 밀리기만 하던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을 하게 되었으며, 9월 28일에는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그 여세를 몰아 북진을 계속하였다. 10월 1일 38도선을 넘어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고 10월 26일에는 국군 일부가 압록강 근처 초산까지 진격하였다. 11월에는 국군과 유엔군 대부분이 압록강 근처까지 도달하였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서울을 빼앗기며 후퇴를 하게 된 북한 측에서는 9월 29일 김일성, 박헌영이 스탈린에게 전보를 보내 소련이 직접 군사 지원을 해주고 중국이 참전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이에 스탈린은 중국군(중국인민지원군)이 북한군(조선 인민군)을 지원해달라는 전보를 중국에 보냈으며, 북한도 중국에게 참전해 줄 것을 요구하는 전보를 보냈다.
  중국 공산당은 10월 2일 회의에서 참전하기로 결정하였으며, 한편 소련에게도 참전할 것을 요구를 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미국과의 마찰을 우려하여 직접적인 군사지원은 피하고 무기와 장비를 공급하거나 작전상 필요한 때에 공군 일부를 출동시켜 엄호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런 소련의 태도에 중국은 실망하기도 하였지만, 마오쩌뚱의 주장에 따라 중국은 최종적으로 참전을 결심하였다. 10월 19일 경부터 비밀리에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 대규모로 압록강을 건너온 중국군은 10월 25일 국군․ 유엔군과 맞부딪혔으며, 11월 하순부터 국군과 유엔군을 압박하며 남쪽으로 밀고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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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중국은 10월 중순 26만 명이라는 대군을 북한 지역으로 투입, 1951년 5월까지 총 6차에 걸친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 10월 말 중국은 유엔군에 대해 1차 대공세를 펼쳤다. 그리고 11월 6일 다시 썰물처럼 사라졌다.
  중국군이 갑자기 사라진 이후 11월 24일까지 18일 동안 청천강 일대의 전선에는 정적이 흘렀다. 중국군이 아직 압록강 남쪽에 남아 있는 것이 분명했으나, 중국군 대부대의 뚜렷한 움직임은 없었다. 이런 중국군에 대해 도쿄에 위치한 미국 극동군사령부는 미군의 공군력과 강력한 화력을 경험한 중국군은 다시는 공세를 시도할 수 없을 것이며, 한 번만 더 미군과 국군이 공세를 하게 되면 전쟁을 아예 끝낼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중간에 위치한 미8군사령부의 판단은 엇갈렸다. 극동군사령부와 비슷하게 중국군을 무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갑자기 나타나 맹렬한 공격을 하다 또 갑자기 사라진 중국군의 움직임에 대해 느낌이 좋지 않다고 믿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 가운데 유엔군은 11월 20일부터 전면적인 공격을 하기 위한 소규모 공격을 시작하였다. 11월 24일 전체 유엔군의 공세가 이루어졌는데(이때 시작된 대공세를 흔히 크리스마스공세라 부른다), 대공세 첫날부터 어려움이 많았다. 곳곳에서 중국군의 움직임이 보이고, 진격이 생각만큼 순조롭지 않았다. 더구나 11월 25일 역으로 중국군의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었다. 12월 15일까지 전개된 중국군의 2차 대공세로 유엔군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그리고 1950년 12월 31일부터 1951년 1월 14일까지 계속된 중국군의 3차 대공세로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수도 서울을 적에게 내어주고 후퇴(1․4후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4후퇴로 37도선의 평택-안성선까지 물러난 유엔군과 국군은 전력을 회복한 후 1951년 1월 24일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의 지휘 아래 강력한 화력과 공군의 지원을 받으며 총반격을 하였다. 23만 명의 대병력이 동원된 서울재탈환작전이었다. 이에 다음날인 1월 25일 중국군이 즉각 방어에 나서 중국군의 4차 대공세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유엔군과 국군의 강력한 화력 공격에 북한군과 중국군은 서울을 포기하고 후퇴, 국군과 유엔군은 3월 14일(4월 13일, 4월 21일)수도 서울을 다시 찾았으며, 3월 24일에는 38도선 이북까지 밀고 올라갔다.

 

1차 공세

1950.10.25.1950.11.06.

 

2차 공세

1950.11.25.1950.12.15.

*유엔군의크리스마스공세

3차 공세

1950.12.31.1951.01.14.

신정공세

4차 공세

1951.01.25.1951.02.18.

(1951.02.11.1951.02.18.)

 

(2월공세)

5차 공세

1951.04.22.1951.04.30.

1차춘계공세

춘계공세

1951.05.16.1951.06.10.

2차춘계공세

6차 공세

1951.05.16.1951.05.23.

 

 

 

  1951년 봄이 되자 중국군은 다시 총공세를 시작하여 춘계공세(대개 겨울이면 전투가 잠잠하였다가 봄이 되면 크게 벌어지는데 이때 펼치는 공격을 춘계공세라 한다)가 이루어졌다. 중국군은 1951년 4월 하순과 5월 중순에 참전한 이후 최대 규모의 병력인 50만 대군을 동원하여 두 차례의 춘계공세[1차 춘계대공세(4월 하순~5월 중순), 2차 춘계대공세(5월 중순~6월 초순)]를 하였다. 4월 공세 때에는 서부전선을 공격하여 서울 외곽까지 진출하였고, 5월 공세 때에는 중부전선을 공격하여 속사리-하진부리 선까지 돌파구를 확장하였으나, 재기불능의 인적 손실을 입는 등 대참패를 면치 못하였다.
  반면 유엔군은 전선의 일부가 뚫려 후방 30∼65㎞까지 물러나긴 하였으나 강력한 화력과 기동력을 이용한 조직적인 시간벌기전투를 펼쳐 전투력을 보호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즉시 반격할 수 있는 태세를 유지하였다. 특히 국군이 용문산과 대관령에서, 그리고 미군이 벙커고지와 운두령에서 각각 결정적인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유엔군은 한 달 동안 계속 밀리기만 하는 상황에서 벗어나 이제는 공격하는 입장으로 바뀌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중국군의 공세가 끝났을 무렵 양측은 지금까지 밀고 밀리는 과정에서, 어느 일방의 결정적 승리 쟁취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받아들이기 힘든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가 따른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하여 깨닫게 되었다.
  1951년 5월 16일부터 23일까지 계속된 중국군의 제6차 대공세를 마지막으로 중국군의 공세는 끝났다. 드디어 1951년 7월 초 유엔군과 공산측은 ‘휴전회담’ 개최에 합의함으로써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군사접촉선을 중심으로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고 오래끌기만 하는 지구전의 양상을 띠었다.


  • 질문1 중국군은 총 몇 차례의 대공세를 하였는지 써봅시다.
  • 질문2 중국궁의 3차 대공세로 우리는 수도 서울을 다시 빼앗기고 후퇴를 하였는데, 이때의 후퇴를 무슨 후퇴라고 부르는가?
  • 질문3 1951년 봄이 되자 중국군은 다시 총공세를 시작하여 5차 대공세가 이루어졌다. 5차 대공세를 다른 말로 무엇이라고도 부르는지 써봅시다.
  • 질문4 중국군의 6차대공세 이후 유엔군과 공산군․중국군이 휴전회담의 개최에 합의한 이유는 무엇인가?

읽기자료 2

  중국군의 개입(1950.10.19.)으로 37도선까지 밀려났던 아군은 1951년 초 재반격 을 전개하여 전선을 다시 38도선 이북으로 밀어 올렸다. 그러나 중국군은 4월 하순부터 다시 모든 전선에 걸쳐 춘계대공세를 하였다. 특히 중국군 6개 사단이 사창리 일대로 집중 공격을 해옴으로써 이 지역을 방어하고 있던 한국군 제6사단은 큰 손실을 입은 채 가평 남쪽 방향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선은 다시 남으로 밀렸고,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 북쪽에서 중국군의 공격을 일단 막을 수 있었다. 중국군은 다시 2차 춘계대공세를 준비하였으며, 국군과 유엔군 도 방어진지를 만들면서 이에 대비하였다. 용문산 일대로 철수했던 한국군 제6사단도 부대를 재편성하고,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용문산 일대의 지형은 3면이 강으로 둘러 쌓여있고, 용문산 전방으로 427고지와 나산, 353고지, 559고지, 381고지 그리고 장락산맥 등 기복이 심한 고지들이 급경사를 이룬 지역이다. 당시 용문산(1,157m ;1157고지) 일대를 방어하고 있던 제6사단(장도영 준장)은 주저항선이 북한강에서 12~17km 정도 떨어져 있기 때문에 중국군이 북한강 남쪽에 진지를 확보하면 방어에 불리하다고 판단해 용문산 뒤쪽 방향에 사단 지휘소를 설치하고, 용문산 일대에는 제7연대와 제19연대, 공병대대를 주 방어임무 부대로 편성․배치하였다. 즉 주저항선인 용문산 서쪽에 제19연대, 동쪽에 제7연대를 배치하였다. 그리고 북한강과 홍천강 남쪽 기슭에는 제2연대를 투입, 전방 경계임무를 수행토록 하고, 가평 방향인 홍천강 북쪽에는 정찰부대까지 투입시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작전태세를 갖췄다.
중국군은 중동부 전선에서 대규모 공세를 통해 철의 삼각지에 대한 위협을 없애버리고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하였다. 5월 대공세에서는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한 한국군을 무너뜨려 방어선을 돌파한 다음 미군을 앞과 뒤, 그리고 옆에서 공격한다는 작전이었다. 이에 용문산지역에 배치된 한국군 제6사단을 주 공격목표로 선정하였다.
  제6사단은 한 달 전 중국군의 대공세로 강원도 화천군 사창리지구 전투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후 사단을 재편성, 적의 공격에 철저히 준비하였다. 특히 제2연대 장병들은 사창리 전투에서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결사’라고 쓴 머리띠까지 매었으며, 지휘관들도 자신의 식량을 휴대해 목숨 걸고 진지를 지킬 것을 다짐하면서 전투 준비에 힘썼다.
이런 가운데 중국군이 공격해올 때가 가까워짐에 따라 사단 왼쪽의 국군 제2사단과 오른쪽의 미군 제7사단이 주저항선으로 철수함에 따라 제6사단 제2연대만이 청평호 남쪽 지역에서 적의 지역으로부터 돌출된 상태에서 방어하게 되었다.
5월 18일 저녁, 중국군은 한국군 제6사단의 전방 경계진지를 주 방어진지로 오인하고 총공격을 시작하였다. 밤새도록 계속된 전투는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됐지만 중국군의 계속되는 공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제2연대는 5월 19일 오전 제1대대를 나산(羅山)으로, 오후에는 제2대대를 427고지로 각각 철수시켜 새로운 방어진지를 만들도록 하였다.
  5월 19일 저녁, 중국군은 예비사단까지 투입시켜 제2연대를 포위하며 공격해 왔다. 적진에 완전 고립된 제2연대는 또 다시 밤새도록 전투를 벌였지만, 중국군의 포위망은 점점 더 좁혀져 왔다.
  한편, 그동안 용문산 뒤쪽에서 반격준비를 끝낸 제6사단 제7연대와 제19연대가 5월 20일 5시 역습을 시작하였다. 국군 제6사단 제2연대의 방어지역을 주저항선으로 잘못 판단하여 전력을 집중하여 공격하고 있던 중국군은 엉뚱한 곳에서 국군의 기습을 받게 되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사단 주력부대가 역습을 하는 동안 제2연대는 제1대대와 제3대대를 다시 427고지로 철수시킨 다음, 전면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온힘을 다해 싸웠다.
중국군의 포위공격과 비장한 각오를 한 국군 제2연대 장병들의 결사항전, 제6사단 주력부대의 역습, 그리고 10여 차례의 항공지원과 포병의 화력 지원 등으로 427고지 일대는 순식간에 불꽃 튀는 격전장이 되었다.
전황이 국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자 포위당할 것을 두려워한 중국군은 21일 새벽 북한강 이북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한 국군 제6사단은 도망가는 중국군을 쫓아 가평과 춘천을 거쳐 화천발전소까지, 60여 Km를 진격하며 한 달 전 패배를 당한 설욕을 깨끗이 씻어내며 중국군 제63군단을 모두 무찔렀다.
  3일간의 전투 결과 국군은 전사 107명, 부상 494명, 실종 33명의 피해를 입은데 비해 중국군은 전사 1만 7,177명, 포로 2,183명이라는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었다. 공격에 나섰던 중국 제63군단의 절반에 달하는 숫자였다.
제6사단의 용문산 전투는 단순히 용문산을 방어했다는 전술적 승리에 그치지 않고 중부전선을 무너뜨리기 위해 총공격을 가해 온 중국군을 막아냄으로써 수도권에 미칠 위협을 사전에 막았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또한 용문산 전투를 계기로 국군과 유엔군은 전선을 현재의 휴전선 부근까지 밀어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용문산 전투에 이어 후퇴하는 중국군을 쫓아 24일부터 30일까지 전개된 국군과 UN군의 반격작전으로 중국군은 10만 병력과 주요 장비들을 거의 상실하여 전세가 불리해진 공산군 측은 휴전회담을 제의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용문산 전투는 휴전회담의 실마리를 제공한 전투이기도 하였다.

  • 질문1 용문산 전투로 널리 알려진 용문산은 어느 지역에 있는 산인가?
  • 질문2 용문산 전투가 벌어진 시기는 6․25전쟁의 전개과정상 어떤 시기에 해당되는가?
  • 질문3 용문산 전투가 벌어진 것은 몇 년 몇 월의 일인가?
  • 질문4 중국군의 대공세에도 불구하고 용문산 전투에서 우리 국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를 나열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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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6․25전쟁 당시 전투 상활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 질문1 이처럼 어떤 ‘전투 상황을 날마다 적어놓은 기록’을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 질문2 이 기록에서 용문산 전투와 관련된 내용을 찾아 순서대로 나열하여 써봅시다.
  • 질문3 이 기록에 따르면, 국군 제6사단이 용문산 전투를 승리로 매듭지은 날은 언제인지 써봅시다.

시각자료 2

용문리 전투의 작전지도이다.

  • 질문1 용문산의 위치를 확인하여 표시해 봅시다.
  • 질문2 이 전투에 참가한 중국군 3개 사단은 몇 사단인지 찾아봅시다.
  • 질문3 용문리 전투에서 중심 병력이었던 국군은 몇 사단 몇 연대였는지 확인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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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용문산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인지 종합적으로 조사․정리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2
6․25전쟁 당시 경기도 양평군(또는 가평군) 용문산 일대에서는 ‘용문산 전투’ 이외에도 많은 전투(가평지구 전투 등)가 있었다. 가평지역에서 벌어졌던 전투를 찾아 정리하여 보고서로 제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1951년 5월 18일부터 5월 30일까지 전개된 용문산 전투를 대상으로 전투일지를 작성해 봅시다.

모둠활동 4
  용문산 전투에서 중국군에게 포위된 우리 국군은 백병전(白兵戰: 칼이나 창, 총검 따위와 같은 무기를 가지고 적과 직접 몸으로 맞붙어서 싸우는 전투)을 전개하며 혼신의 힘을 다 쏟으며 싸웠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희생하신 분들에게 나는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지?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발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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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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