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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만세운동 선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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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묘동 57번지 현 단성사 앞에 자리하고 있던 파조교(罷朝橋)는 순종의 장례식 날 서울 시내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6·10만세운동이 시작된 곳이다. 파조교는 관리들이 창덕궁에서 조회를 파하고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나와 이 다리를 지나갔던 것에서 이름 붙여진 곳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대나무를 얽어서 다리를 놓고 그 위에 흙을 덮어서 가설하였으나, 조선 후기 창덕궁이 법궁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게 되면서 돌다리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1926년 6월 10일 돈화문 앞에서 홍릉 앞까지 2만 4천여 명의 인파가 길가에 늘어선 가운데 8시 30분경 순종의 국장행렬이 단성사 앞 파조교 부근에 이르자 중앙고보생 30-40명이 이선호의 선창으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격문 1천 여 매를 살포하였다. 이 때 수백 명의 학생이 일제히 만세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드니 부근에 모여 있던 군중들도 이에 동조하여 만세를 불렀다. 이어서 관수동·을지로3가·훈련원·동대문·신설동 부근에서 연달아 시위가 일어났다. 이날 시위대의 지축을 흔드는 만세소리는 끊일 줄 모르고 일제의 가슴을 서늘케 하였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현재 상태

1926년 4월 25일 순종황제가 승하하자 애도분위기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당시에 송학선의 금호문 의거, 국외 독립군의 심상치 않은 동향들로 민족적 항일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어갔다.
금호문의거는 순종황제의 승하한 직후인 4월 28일 오후 1시 10분 경 창덕궁 금호문 앞에서 송학선이라는 청년이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조선총독을 처단하기 위해 단행한 의거였다. 이날 순종황제의 조문을 위해 사이토 총독이 창덕궁으로 온다는 정보를 접한 송학선은 금호문 앞에서 기다리다가 자동차에서 내리는 경성부협의회 의원 사토〔左藤虎次郞〕를 사이토로 잘못 알고 의거를 결행하였다. 당초 목표인 사이토 총독 처단에는 실패하였지만, 망국의 통한에 젖어 있던 한국인에게는 더할 수 없는 쾌거였다. 송학선의 의거는 항일 분위기를 고조시켜, 3·1운동 때와 같은 기운이 재연될 조짐이 일고 있었다.
일제는 3·1운동 때와 같은 분위기가 다시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장례식을 철저하게 규제하며 관 주도 아래 거행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자발적인 장례식을 강행하려는 일반 민중 및 학생들과 이를 저지하는 일제와의 충돌은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그런데 당시 6·10만세운동의 계획은 상하이의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에서 먼저 추진되었다. 임시상해부는 당초 5월 1일 메이데이(May Day)에 즈음하여 대규모의 대중투쟁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임시상해부는 김단야를 국내로 파견하여 대중시위 계획을 추진해 갔다. 4월 23일부터 4월 29일까지 신의주에 잠입하여 국내 거사를 준비하던 중 김단야는 순종황제의 승하소식을 접하였고, 애도의 분위기가 전국으로 물결쳐 가는 것도 목격할 수 있었다. 또한 일제가 순종황제의 승하로 메이데이 기념행사를 원천봉쇄함에 따라, 이날의 대중시위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김단야 등은 당초의 대중시위 계획을 만세운동으로 전환해 갔다. 처음에는 계급적 반제시위로 추진되던 시위가 보다 민족적 운동의 형태로 바뀌어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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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6·10만세운동은 천도교와 조선공산당, 학생층 등 다양한 주체들이 서로 다른 정치이념을 초월하여 깊은 연대 아래 계획·추진되었다.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는 6·10만세운동의 거사를 위해 처음부터 천도교 세력과 연대를 모색해갔다. 
그러나 6·10만세운동에서 천도교 구파의 지도자들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배후에서 지원하는 전술을 취하였다. 3·1운동을 주도했다가 막대한 피해를 입은 바 있는 천도교는 일제의 분열책으로 창건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으며, 신·구파의 내부 분화로 더욱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사정은 조선공산당의 경우도 비슷하였다. 1925년 11월에 1차 조선공산당이 발각되어 크게 타격을 입은 조선공산당은 겨우 당의 진용을 수습한 상황이었다. 조선공산당이 6·10만세운동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당 중앙기관과 분리된 고려공산청년회를 중심으로 진행시켜갔던 것도 일종의 조직보전을 위한 방책이었다. 6·10만세운동의 지도부는 고려공산청년회 권오설의 책임 하에 이지탁·박민영 3인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혁명세력의 결집에 힘을 기울여 나갔는데 천도교 구파가 가장 유력한 세력이었다. 
6·10만세운동에서 천도교 측의 주요 임무는 격문 인쇄 및 배포와 만세운동의 지방 확산에 있었다. 박래원은 천도교청년동맹과 인쇄직공조합 인사들을 중심으로 동지규합에 나서 손재기·백명천·양재식·민창식·이용재 등을 포섭할 수 있었다. 그리고 권오설로부터 받은 자금으로 인쇄기 등 인쇄에 필요한 시설을 갖추었다. 이들은 5월 17·18일부터 5월 31일까지 약 5만 장의 격문 인쇄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박래원과 관계자들은 격문의 지방배포를 위해 발송 지역을 정하고 그 지역의 조선일보지사·개벽지사·소비자조합·천도교 교구·기타 청년 단체들에게 『개벽』·『신민』·『신여성』 등의 잡지 사이에 격문을 넣어 발송하고자 하였다. 또한 이들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책임자를 선정하여 파견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전국을 호남선·경부선·경원선·경의선 방면 등 4개 지역으로 나누고 지역 근거지를 중심으로 활동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그러나 상하이의 김단야로부터 6월 초까지 오기로 한 격문과 자금은 전달되지 않고 출발이 지연되었다. 박래원은 천도교 지도인사인 권동진에게 급히 1만원 가량의 자금지원을 약속받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인 위조지폐범을 추적하고 있던 일제 경찰이 1926년 6월 4일 대한독립단 명의로 된 격문 1장을 발견하고 수사망을 좁혀 개벽사에 숨겨져 있던 격문상자를 발견하면서 계획은 발각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발각 당일에만 박래원을 비롯한 천도교 간부와 개벽사 인사 80명이 체포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 질문1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집단을 써 봅시다.
  • 질문2 6·10만세운동에서 천도교 측은 만세운동을 지방으로 확산하기 위해 어떠한 방법을 계획하였나요?
  • 질문3 조선공산당이 당 중앙기관과 분리된 고려공산청년회를 중심으로 6·10만세운동을 추진한 이유를 써봅시다.

읽기자료 2

6·10만세운동에는 학생들도 추진주체로 참가하였는데 대표적인 집단으로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세칭 ‘통동계’를 들 수 있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1925년 9월 서울에서 창립되어 1920년대 후반 서울지역 학생운동을 선도한 단체였다. 6·10만세운동 무렵 500여 명에 달했던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창립 초기 일정하게 조선공산당 내지 고려공산청년회와 깊게 연결되어 있었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가 추진한 6·10만세운동의 준비과정은 대략 4단계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제 1단계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학생 80여 명이 세검정으로 야유회를 가던 도중 순종황제의 승하사실을 알게 된 4월 26일부터 5월 2일까지이다. 이 당시는 아직 만세운동에 대한 구체적 계획을 세우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제 2단계는 이병립이 권오설을 통하여 만세운동의 계획을 전달받은 5월 3일 경부터 5월 19일까지로 조선학생과학연구회가 만세운동의 계획을 세우는 단계이다. 권오설은 이병립에게 6·10만세운동에서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임무와 역할을 지시하였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주요 임무는 인산 당일 가두행렬에서의 만세선창과 격문살포였다. 이병립을 비롯한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간부들은 수차에 걸쳐 학생 동원 및 시위방법 등을 숙의하면서 만세운동 계획을 세워나갔다. 
제 3단계는 각 급 학교 학생 40여 명이 박하균의 하숙에 모여 만세운동 계획을 협의했던 5월 20일부터 6월 5일까지이다. 이 시기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간부를 중심으로 한 만세운동의 계획이 학생계로 파급되면서, 의거 준비가 성숙되어간 때였다. 5월 20일 모임에서는 박하균·박두종 등은 자금 조달의 책임을 맡았고, 이선호와 이병립 등은 학생 포섭의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제 4단계는 조선공산당이 발각되는 상황에서 만세운동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 6월 6일 경에서 의거 당일까지이다. 6월 6일 이후 조선학생과학연구회에서는 독자적으로 준비를 추진시켜나갔다. 이때부터 태극기 200장과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 30장을 제작하는 한편 격문을 초안하여 인쇄에 들어갔다. 6월 9일까지 격문 1만여 장을 인쇄한 후 배포에 들어갔다. 격문배포는 주로 이선호와 박두종·박하균 등이 맡아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배포하였다. 이들은 인산 당일에 혼란할 것에 대비하여 호각 신호에 의해 일제히 만세를 부르기로 했다.
한편 세칭 ‘통동계’는 고보생들을 중심으로 한 추진주체로, 중심인물은 5~6명 정도에 불과한 규모였다. 뚜렷한 조직을 기반으로 한 세력도 아니었다. 그래서 이들은 거사를 계획했던 곳인 통동의 이름을 따서 ‘통동계’라 불려왔다. 이들의 동지적 결합은 같은 학교의 학우 내지는 하숙집 친우관계로 서로 얽혀져 있었다. 순종황제가 독살되었다는 소문과 함께 송학선의 금호문의거가 일어나면서 통동계 학생들은 3·1운동 때처럼 전국적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의지를 모아갔다.
이들의 거사 추진과정은 대략 세 단계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제 1단계는 거사계획이 구상되고 동지가 포섭되는 단계이다(5월 16일~5월 25일). 이 단계에서는 인산일을 전후하여 거사를 하기로 원칙적 합의를 이루었지만, 구체적인 투쟁방법이 확정된 상태는 아니었다. 우선 이들은 서울의 각 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동지규합에 나섰다. 일주일 만에 50여 명의 동지가 모였고, 이 들 중 통동계 학생들은 건물폭파와 같은 과격한 투쟁방법은 실현가능성이 어렵다고 결론 내리고, 순종황제 인산일을 기해 3·1운동 때와 같은 방법으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뜻을 모았다.
제 2단계는 만세운동을 위한 격문을 작성하고 인쇄하는 단계였다(5월 26일~5월 31일). 5월 26일 등사판과 용지를 확보한 이들은 5월 29일 통동 71번지 김재문의 하숙집에서 공동으로 격문을 작성하였다. 작성된 격문은 5월 31일까지 5,000여 장 정도가 인쇄되었다. 거사에 필요한 자금은 고향에서 보내오는 생활비의 일부와 외투·책을 팔아 충당하기로 하였다.  
제 3단계는 선언문 배포와 인산 당일의 거사로 이어지는 단계이다(6월 1일~6월 10일). 5,000여 장의 격문을 1인당 1,000장 정도를 맡아 포섭된 동지에게 배포하는 한편, 6월 8일과 9일에는 시내 각 학교와 전국 주요 지방학교에 격문을 발송하면서 거사를 추진시켜나갔다. 이때는 권오설 등의 계획이 발각되면서 일제의 경계와 압박이 극도로 가중되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이들은 기민하게 행동하면서 격문배포와 발송을 마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일정하게 연대해 갔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통동계는 동지를 포섭해 가는 과정에서 서로의 계획을 알게 되었다. 이들 두 세력은 거사를 연합해서 추진할 뜻도 있었지만,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 연락을 유지하면서 각기 추진하기로 하였다. 

  • 질문1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학생단체를 써봅시다.
  • 질문2 6·10만세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필요했던 활동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나요?
  • 질문3 학생 단체끼리 연합하지 않고 일정한 연락만을 유지하면서 6·10만세운동을 추진한 이유를 써봅시다.

읽기자료 3

선공산당과 천도교계통의 거사계획이 인산을 불과 3일 앞두고 발각되자 일제는 모든 경찰력과 군대를 동원하면서 철통같은 경계를 펼쳐나갔다. 서울에 동원된 일본 군대는 약 1만 명에 달하는 삼엄한 상황이었다. 인산 당일 장례행렬이 지나갈 길 양측에는 약 2만 1,000여 명의 학생들이 도열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들 학생들의 도열 앞뒤로는 기마경찰과 헌병·사복경찰이 포위하여 엄중한 경계와 감시를 하고 있었다. 
6월 10일 서울의 거리는 조선박람회의 구경거리와 조선의 마지막 인산을 구경하고자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장례행렬은 오전 8시 창덕궁에서 발인하여 종로3가-청계3가-을지로3가-을지로6가-훈련원(영결식:오전11시)-동대문-창신동-신설동-청량리-금곡유릉으로 향하게 되었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통동계 학생들의 만세시위는 오전 8시 반 종로 3가의 만세시위를 신호탄으로 하여 모두 8곳에서 일어났다. 이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단성사 앞의 시위 : 오전 8시 반 종로3가 단성사 앞에서 국장행렬이 통과한 뒤 동양루 앞에 도열해 있던 중앙고보 이선호의 선창으로 중앙고보생 30~40여 명이 만세를 고창하면서 격문 약 1,000여 장과 태극기 30여 장을 살포하였다. 이에 연희전문학교 학생들도 호응하면서 일대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때 기병의장대가 타고 있던 말이 놀라 돌아서서 달리는 바람에 군중이 이리저리 몰리다가 중경상을 입은 사람이 많았다. 만세를 외치다 현장에서 잡힌 학생은 50여 명에 달했다.
② 오전 8시 40분 관수교 부근에 국장행렬이 통과하자 연희전문학생 등 50여 명이 격문을 살포하며 만세를 외쳤다. 관수교 남쪽 부근에서는 이병립과 연희전문 박하균·이천진이 앞장서서 격문을 날리며 만세를 외치자 학생들이 호응하였고, 이때 일제경찰에 의해 학생 40여 명이 강제 연행되었다.
③ 오전 9시 반경에 청년학원 생도 박두종 외 2명의 청년이 경성사범학교 앞에서 격문 1,000여 장을 살포하며 만세를 외쳤다. 이때 만세시위는 격렬하게 이루어져 부근의 사범학교 담이 무너질 정도였다. 만세시위를 주도하던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간부 박두종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④ 오후 1시 경 훈련원 부근에서 학생 1명이 태극기를 흔들면서 만세를 외쳤다. 훈련원 서쪽 일대에서도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⑤ 오후 1시 10분 경 동대문 부인병원 앞에서 장례행렬이 지나간 후『시대일보』 김락환 외 2명이 격문을 뿌리며 만세를 외쳤다.
⑥ 창신동 채석장 입구에서 50세 가량의 사람이 만세를 외쳤다. 홍종현(37세)이 혈서를 쓰고 투쟁에 참가하였다.
⑦ 오후 1시 45분 경 장례행렬이 신설동 고무회사 앞을 지나갈 때 학생 1명이 격문 100여 장을 살포했다. 
⑧ 오후 2시 20분 경 동대문 밖 동묘 앞에서 ‘통동계’ 학생 4명이 관수교 부근에서 살포한 것과 같은 격문 700여 장을 살포했다. 

이날의 만세운동은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 무렵까지 계속하여 일어났다. 여덟 곳에서 일어난 이날의 만세시위에는 500~600명의 학생들이 참가했다. 을지로 부근에서 일어난 시위는 사범학교 담이 무너질 정도로 격렬하였다. 동대문 앞 시위현장에서는 일본 기마병이 말발굽에 치거나 밀려서 쓰러진 사람들로 일대 혼잡을 이루었고, 70~80여 명이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만세운동이 일반 군중은 일제 기마병과 군경의 삼엄한 경계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못하였고 대부분이 학생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날 만세현장에서 체포된 학생은 210여 명에 달했다.

  • 질문1 순종황제 국장행렬의 경로를 써봅시다.
  • 질문2 서울에서 일어난 6·10만세운동은 모두 몇 차례에 걸쳐 이어졌나요?
  • 질문3 서울에서 일어난 6·10만세운동의 특징을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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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 질문1 사진은 창덕궁 금호문 앞에서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는 일제 군경의 모습이다. 읽기자료 1)을 다시 읽고 이 사진과 관련이 깊은 역사적 사건을 유추하여 써봅시다.
  • 질문2 사진 속의 사건이 일어나게 된 이유와 이 사건이 당시 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 써봅시다.

시각자료 2

  • 질문1 이 사진은 당시 6·10만세운동이 발생했던 주요 장소이다. 읽기자료 3)에 제시된 만세운동장소와 사진 속의 장소들을 각각 연결시켜 봅시다.
  • 질문2 당시 경찰의 삼엄한 경계에도 불구하고 만세시위가 연속적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를 써봅시다. 또한 다른 지역으로 더 이상 시위가 확산되지 못했던 이유도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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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3·1운동과 6·10만세운동은 운동의 발생원인, 전개과정에서 많은 유사점을 가지지만 동시에 차이점 또한 많다. 이 두 만세운동을 비교, 정리하여 봅시다.

모둠활동 2

조선공산당, 천도교 구파의 시도가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사실상 실패로 돌아갈 뻔한 상황에서 6·10만세운동을 이끌었던 계층은 당시 학생층이었다. 당시 만세운동을 지도한 학생들과 인터뷰를 한다고 가정하고 당시 상황을 잘 이끌어 낼 수 있는 질문지를 만들어 봅시다(인터뷰 대상자는 읽기자료 참조)

 


모둠활동 3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의 만세운동 사례를 찾아 그 원인·전개과정·결과를 정리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4

순종황제 인산일에 즈음한 추도사를 당시 학생의 입장에서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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