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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수복의 교두보를 확보하다 – 연희 104고지 전투지

도입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1동 옛 성산회관에서 연세대학교 쪽으로 50m 정도를 가면 왼쪽으로 ‘해병대수도서울탈환 104고지전적비 (연희)’라는 빨간 표지판을 볼 수 있다. 이곳을 향해 올라가 보면 아담한 작은 공원에 ‘해병대104고지전적비’가 세워져 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鎭魂
조국을 위해 산화한
피우지 못한 꽃봉오리여
암흑의 장막을 걷으시고
서광의 하늘문을여셨네
태극기는
중앙청에 다시 휘날리고
비둘기는
남산위에 평화로이 날으이
아-그날
감격의 눈물은 흐르고
초목도 흐느꼈으니
장하도다
호국의 영령이여
젊은 해병 혼이여
한 많은
역사의 사연을 잊으시고
고이 잠드소서
(수도 서울탈환전투에서
 산화한 해병의 영전에)
서기 一九八二년九월二十八일

 

  연희104고지 전투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한 한미연합군은 서울을 되찾기 위해 계속 진격하면서 서울 연희동의 104고지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이 고지의 점령으로 한·미 해병대는 서울 시내로 함께 진격할 수 있는 중요한 발판을 확보할 수 있었다.
현재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104고지 남동쪽 기슭의 우뚝 솟은 바위에 ‘104고지전첩기공비’가 새겨져 내려오고 있으며, 또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104고지를 탈환한 해병대원들의 명복을 기리기 위한 ‘해병대104고지전적비’(1982.09.28. 건립)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이 지역 일대에는 근린공원인 궁동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1동 산113-10
현재 상태 변형 / 도시개발과정에서 주택가로 편입되었으나 능선이 일부 남아 있다. 해병대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가 고지 정상에 세워져 있다.

  1905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을 무찌를 발판을 확보하는데 성공한 미 제10군단은 9월 18일부터 서울을 되찾기 위해 서울을 향한 진격을 시작하였다. 이를 위해 미 제1해병사단(국군 제1해병연대도 여기에 소속됨)은 서울의 서쪽에서 시가지를 향해 공격하도록 하고, 미 제7보병사단(국군 독립 제17연대도 여기에 소속됨)은 서울의 남쪽에서 북한군의 지원을 막는 것과 함께 그들이 후퇴할 길을 막으면서 낙동강전선을 뚫고 올라오는 미 제8군과 연결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인천상륙의 선봉이자 주력부대였던 미 제1해병사단 소속의 3개 연대는 각각 역할을 나눴다. 제5연대는 경인국도의 북쪽을 택하여 서울로 진격하고, 제1연대는 경인국도의 남쪽을 택하여 서울로 진격하며, 제7연대는 예비병력으로 당분간 인천 수비를 맡도록 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의 서울 공격이 시작되자 북한군은 제9사단과 제18사단 등 2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서울을 방어하였다. 그들은 서울의 시가지 교차로마다 장애물을 설치해 시가전을 전개할 준비를 갖추면서, 연희고지와 안산을 지키며 국군과 유엔군의 서울 진입을 막으려 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 서쪽 방향과 남쪽 방향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미 제10군단은 행주와 마포, 신사리에서 한강을 건넌 후 연희고지와 망우리, 구의동 일대의 북한군 진지를 공격해 9월 26일까지 서울 시가지의 절반 정도를 점령하였다. 다음날인 9월 27일에는 공격부대가 삼각지와 남대문, 회현동 일대의 남아있는 적을 모두 무찌르고, 오전 6시 10분 한국 해병대 제2대대 6중대 1소대 박정모 소위와 소대원들이 중앙청에 북한 인공기를 내려고 태극기를 올렸다.
이어서 9월 28일, 공격부대들은 북한군을 서울 시내에서 쓸어내듯 물리치며 의정부 방면으로 공격을 계속하였다. 그날로 북한군의 저항은 끝났으며 수도 서울은 인천상륙 후 2주일, 북한군에게 빼앗긴 지 3개월 만에 되찾았다.
  그 이튿날인 9월 29일 정오, 중앙청에서는 감격의 수도탈환식 행사가 치러졌다. 이 행사를 통해 맥아더 원수는 수도 서울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넘겨주었으며, 대통령은 맥아더 원수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주었다.
  전쟁에서 적의 침략으로 빼앗겼던 수도를 되찾는다는 일은 어느 한 전투의 승리나 어느 한 지역을 되찾는 것과는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북한군 남침 3일 만에 그들에게 빼앗겼던 수도 서울의 탈환은 그만큼 우리 국민에게 감격적인 사건일 수밖에 없었다. 또 그동안 적들로부터 고통 받던 서울 시민들이 다시 찾게 된 자유는 더욱 가치 있는 것이었다. 아울러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이번 기회에 분단된 조국 대신 통일된 정부를 수립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하기에도 충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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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당시 북한군은 서울 최후방어선을 뺏기지 않으려고 요새를 만들어놓고 죽기 살기로 저항하였는데, 북한군의 최후 방어선의 하나였던 연희고지(서울 연희동에 있는, 높이 88m, 56m, 104m의 고지를 통틀어 일컫는다)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1950년 9월 21일, 서울 강서구 개화동에서 고양군 지도면 행주리로 건너가는 나루터인 행주나루를 통해 한강을 건넌 미국 해병 제5연대 제3대대는 연세대학교 좌측에 있는 백련산 216고지를, 한국 해병 제1대대(대대장 고길훈 소령)는 궁동산 104고지, 즉 연희104고지를 확보하기 위해 공격하였다.
같은 날, 미 해병 제1연대가 영등포에서 어렵게 싸운 끝에 거의 시가지를 확보할 무렵 서울 서쪽 방향을 담당한 미 해병 제5연대와 한국 해병대는 수색 방면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도로와 철로를 따라 오전 7시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하게 되었다.
  미 해병 제5연대는 이전 진격계획 일부를 조정하였다. 연세대학교 오른쪽 방향에서 경의선과 한강 사이를 전투지대로 하여 성서초등학교 뒷산인 성산동의 68고지를 향하여 전진하는 제1대대의 임무에는 변함이 없었으나, 연세대학교 왼쪽 방향에 있는 백련산 216고지를 제3대대의 공격목표로 한정시키는 한편, 미 해병 제5연대에 소속된 한국 해병 제1대대는 연대 중앙에 위치하여 모래내 건너편의 104고지를 확보하고 그 일대에 야간방어진지를 마련하도록 하였다. 즉 한국 해병 제1대대(대대장 소령 고길훈)가 중앙 104고지를 담당하고, 미 해병 제5연대 제1대대가 오른쪽 68고지를, 제3대대가 왼쪽 216고지를 담당하여 서로 공격대형을 유지하면서 적의 주 방어진지를 돌파하여 서울 시내로 진격하고자 하였다.
  수색에서 서울의 도심으로 들어서려면 안산의 296고지로부터 남쪽과 서쪽으로 뻗어 내린 여러 갈래의 능선들을 넘어야만 한다. 수색에서 불광천을 건너 백련산과 경의선 사이의 넓은 들판인 남・북가좌동 일대를 지나면 그 최초의 나지막한 능선과 마주치게 되는데, 이곳 끝 봉우리가 염산․연희산․궁동산이라고도 부르는 104고지이다. 국군은 이 104고지를 넘어 서울 시내로 진격하고자 하였다.

  • 질문1 216고지는 군대에서 이 산을 부르는 이름이다. 일반적으로 불리는 이름은 무엇인가?
  • 질문2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수복작전에서 서울 서쪽을 세 방향에서 공격하였다. 이처럼 세 방향으로 나누어 공격을 한 이유는 무엇일 지 추정해봅시다.
  • 질문3 직접적으로 연희104고지 공격을 담당한 것은 어느 부대인가?

읽기자료 2

  연희104고지 진격을 맡은 한국 해병대 제1대대는 이미 장항, 군산지구, 진동리(강원도 인제)지구, 통영(충무시)지구 등의 전투에서 전투 경험을 쌓은 분대장들이 많았다. 이런 전투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해병대 제1대대는 큰 저항을 받지 않고 북한군을 물리치며 수색을 쉽게 점령한 후 밤 12시 30분경에는 104고지까지 진출하였다.
  9월 21일 새벽 1시, 한국 해병 제1대대는 104고지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제1대대 장병들은 고지 앞을 흐르는 하천 등이 북한군에게는 유리한 반면 자신들에게는 아주 불리한 조건이었지만 용감히 적진으로 돌격하였다. 104고지가 서울 방어를 위해 매우 중요한 지점인 것을 알고 있던 북한군은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방어진지를 견고하게 만들어놓고 각종 화기를 준비하는 등 빠른 시간 안에 어떠한 공격이라도 능히 막아낼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역량을 집중하여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제1대대는 제3중대를 중심 병력으로 104고지에 공격을 시작, 곧 적의 진지에 들어가 칼이나 창, 총검 따위와 같은 무기를 가지고 적과 직접 몸으로 맞붙어 치열하게 싸운 끝에 드디어 오후 6시 30분경 이 고지를 완전 점령하였다. 이 과정에서 제3중대 화기소대장 김진태 중위는 목표를 탈취한 직후 날아온 적 포탄에 전사하기도 하였다. 북한군도 이 고지를 지키기 위해 최후까지 저항하였지만, 결국 진지를 빼앗기고 그 뒤쪽에 있는 고지로 도망하였다.
9월 22일 새벽 3시, 120㎜ 박격포와 각종 화기의 지원을 받은 약 600명 규모의 북한군들이 3시간 동안 두 차례의 역습을 하기도 하였으나, 국군이 필사적으로 방어, 이들을 막아내고 104고지를 지켜냈다.
  당시 서울 서쪽 방향을 차지하고 방어하던 적은 북한군 제25여단 및 독립 제7연대 소속 약 4,000명 규모였으며, 장교 및 준사관은 대부분 중국군에서 근무했던 뛰어난 전투경험자들이었다. 그 가운데 1,750명이 전사하였으니 104고지에서의 승리는 큰 승리가 아닐 수 없었다. 다만, 우리 측 피해도 적지 않았는데, 178명이 전사하여 해병대 1개중대원 가운데 26명만이 살아남았다. 이런 처절한 희생과 큰 성과로 국군과 연합군은 연희104고지를 점령함으로써 수도 서울을 수복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 질문1 연희104고지 전투가 벌어진 날짜(몇 월 몇 일)인지 써봅시다.
  • 질문2 연희104고지는 언제쯤 공격을 시작하여 언제쯤 완전히 점령하였는지 써봅시다.
  • 질문3 연희104고지 점령이 갖는 의미를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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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왼쪽 사진은 ‘해병대104고지전적비’ 모습이고, 오른쪽 사진은 ‘104고지전첩기공비(104高地戰捷紀功碑)’ 모습이다.

  • 질문1 이들은 무슨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인지 써봅시다.
  • 질문2 이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군대는 어느 군대(육군․해군․공군․해병대․유엔군)인지 기념비의 이름을 참고하여 써봅시다.
  • 질문3 이곳은 연희산, 염산, 궁동산이라고도 부르는 산이다. 산을 군대에서는 어떻게 부르는지 기념비의 이름을 참고하여 써봅시다.

시각자료 2

『경향신문』(1962.06.25.자) ‘흘러간 12년-6·25앨범’에 소개된 기사이다.
 

연희고지
수륙탄 육박전만 사흘
-간사람 말없어도 그빛은 길이남아-
눈물없인 기록못할 격전터

○-서울서북방의 연희고지와 그 옆의 104고지는 수도탈환작전에서 가장 처절한 전투가 붙었던 격전지의 하나다.
서울에서 수색을 거쳐 개성쪽으로 빠지는 길목이 되어있는 연희고지에서 벌어졌던 1950년 9월22일의 전투. 이것은 “눈물없이는 기록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고 당시의 전사는 말하고 있다.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유엔군과 한국군은 즉각 서울을 탈환하기 위한 작전을 전개, 관악산에서 한강을 도하하는 주력과 …(중략)…

 

출처_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newslibrary.naver.com)

  • 질문1 기사 내용으로 보아 서울 서북방 연희산 지역에서는 104고지 전투 이외에 또 무슨 전투가 있었는지 찾아봅시다
  • 질문2 연희고지전투와 104고지 전투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기사내용을 찾아서, 해당 문장을 옮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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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6․25전쟁 당시 연희고지(연희산, 궁동산)에서는 ‘연희104고지 전투’ 이외에 ‘연희고지 전투’가 또 있다. 연희104고지 전투와 연희고지 전투의 상황을 비교․정리하여 보고서로 제출해 봅시다.
모둠활동 2
왼쪽 사진은 국군이 서울 연희104고지를 점령하였던 당시의 모습이고, 오른쪽 사진은 영화 <고지전>에 나오는 하나의 장면이다. 이들 사진을 통해 고지전에서 나타나는 전투의 특징을 추측해 봅시다.
모둠활동 3
자신이 사는 주변에 6․25전쟁에 참여하신 분들이 적지 않게 계십니다. 6․25전쟁 에 참전한 분을 찾아가 그들의 경험담을 듣고 그 내용을 정리하여 보고서로 제출해 봅시다.
모둠활동 4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 주변에서 일어난 6·25전쟁 당시의 전투를 조사해보고, 그곳에 기념비를 세운다는 가정 아래 기념비에 쓸 글을 작성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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