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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과 육군이 탄생하다 – 국군 및 육군사관학교 창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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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슴엔 조국을, 두 눈은 세계로!”
우리나라 육군 장교를 양성하는 곳, 육군사관학교의 상징 구호이다. 이 구호에는 인격과 능력을 모두 갖춘 미래 육군의 지휘관을 양성하고자 하는 육군사관학교의 교육 이념과 목표가 잘 담겨 있으며, 또한 투철한 조국애를 바탕으로 국가 안보와 세계 평화 유지의 꿈을 키워 간다는 육군사관학교의 의지가 잘 담겨 있다.
  또 육군사관학교에는 ‘무락카’라는 구호가 있는데,

“무락, Veni, Vidi, Vici
 억쎈 M.A, Vital, Vigor
 카슈까라, Leben, 獅子 호랑나
 Caress Caress, 陸士 陸士”
(무락, 베니 비디 비키
 억센 엠에이, 바이터러 비거러
 카슈까라, 레벤, 사자 호랑나
 카레스 카레스, 육사 육사)

가 바로 이것이다. 이 무락카는 육군사관학교의 응원구호로, 무락카에는 국어, 영어, 라틴어, 독일어, 한자 등 여러 나라의 말이 함께 사용되어 있다. 무락(Mul-ac)과 M.A.는 Military Academy, 즉 육군사관학교를 가리키는 말이다. ‘억센’은 ‘억세고 강한’, ’카슈까라’는 ‘적에게 달려가서 까라, 무찌르라’라는 뜻의 우리말이며, ‘veni vidi vici’는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소아시아에서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원로원에 보낸 글로,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뜻이다. ‘Vital, Vigor’는 ‘지칠 줄 모르고 생동하는 정열, 활력, 샘솟는 생명력, 불굴의 용기와 투지’를 의미하는 영어, ‘Leben’은 ‘항복하는 자는 살려주라’는 뜻의 독일어로 기사도 정신에 따라 약자에게 포용력을 가지라는 뜻이다. 그리고 ‘Caress’는 ‘애무하다, 어루만지다’라는 뜻의 영어로써 ‘Caress, 陸士’는 육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껴안고 사랑하자는 다짐, 육사를 사랑하자는 애교(愛校) 정신과 화랑대 정신의 계승을 다짐하는 영어와 한글로 이루어진 말이다. 이를 종합해 풀어보면,
 “육사!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억세고 강한 육사! 힘차고 용맹하게
  달려가 까라. 항복하는 자는 살려주며, 사자나 호랑이처럼
  나의 사랑 우리의 사랑 육사! 육사!“
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무락카는 ‘육사 필승’의 힘찬 결의와 함께 아량과 포용력도 강조하고 있어 평소 육사인의 단결과 승리의 기쁨을 표현할 때는 물론,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애용되어온 구호로써 ‘육사의 투혼’을 불러일으켜 온 주문과 같은 존재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무락카를 외치며 ‘가슴엔 조국을, 두 눈은 세계로’ 향하며 대한민국 국군을 책임질 이들을 양성하는 육군사관학교! 현재 육군사관학교는 태릉과 태릉선수촌이 있는 서울특별별시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 육군사관학교 자리는 대한민국 국군이 창설된 곳, 즉 처음 만들어진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육군사관학교 안에는 육군박물관이 세워져 있기도 하다.
  육군박물관은 1956년 10월 3일 ‘육군사관학교 기념관’으로 개관, 1966년 10월 4일 ‘육군사관학교 군사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81년부터 크게 공사를 시작하여 1985년 5월 1일 육사 개교기념일에 맞춰 다시 개관, 군사문화재의 보존과 군 정신교육의 도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2동 16 육군사관학교
현재 상태 변형 / 육군사관학교는 여러 건물들이 새로 지어져 당시 모습을 지형상으로나마 알 수 있다.

  1948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우리나라가 해결해야 할 문제 가운데 하나는 독립한 나라를 지키는 군대를 창설하는 일이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이들과 국내에 남아있던 군 경험자들은 군대를 만드는 일에 앞을 다투어 나섰다. 그러나 광복 이전 군인으로 이들이 했던 일의 성격은 매우 달랐다. 이들 중에는 독립을 위해 일본군과 맞서 싸운 사람들도 있었고, 반대로 일본군에 속해서 그들의 침략전쟁에 참가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 때문에 국군을 창설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들이 하나의 군대로 뭉치는 것은 어려웠다. 당시 한반도에는 일본군·관동군·국민혁명군·팔로군·광복군 출신자들을 중심으로 한 조선국군준비대 등 사설 군사단체나 비슷한 군사단체가 여기저기 생겨 그 수가 무려 60여 개나 되었다.
  독립을 위해 싸운 대표적인 군사조직 가운데 하나로, 남한 사회에서 인정을 받고 있던 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한 한국광복군이었다. 대중들도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한을 다스리던 미 군정청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을 국군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좌·우익 가릴 것 없이 모든 군사단체들에게 해산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해방 후 여기저기 생겨난 각종 군사단체들은 1946년 남조선국방경비대(조선국방경비대)가 만들어지면서 거의 해산되었다. 미 군정청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군대를 조직해나갔다.
해방 후 미군정이 공식적으로 만든 첫 군대 조직은 국방사령부였다. 국방사령부는 <미군정법령 제 28호>에 따라 1945년 11월 13일 조직되었다. 국방사령부 아래에는 군무국과 경무국을 두었는데, 군무국은 다시 육군부와 해군부를 두어 경비대 창설 준비를 해나갔으며, 경무국은 경찰업무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나아가 1946년 1월 15일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현재 주소로는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에 1개 중대 규모로 남조선국방경비대가 창설되었다.
  군대의 창설과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는 군대를 이끌어갈 장교를 양성하는 일이었다. 당시 군 당국은 미국식 군사제도와 교육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후 우선적으로 언어적 장벽을 극복하는 일에 관심 갖게 되었다. 미 군정청과 원활하게 협조하기 위해 필요한 통역관을 양성하는 일이 시급하였으며, 더 나아가 앞으로 국군 창설에 대비하여 간부 양성도 필요하였다. 이러한 배경 아래 1945년 12월 5일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감리교신학교 자리에 군사용어학교(Military Language School)를 세웠다.
  군사용어학교는 영어교육을 위주로 하였기에 보통 군사영어학교라고도 불렸는데, 군사영어학교는 학생 정원을 60명으로 하여 광복군·일본군·만주군 출신 가운데 군사 경력을 쌓은 사람을 각각 20명씩 뽑으려 하였다. 입학자격은 장교나 군사관 경력이 있는 자로 제한하였는데, 출신 계열별로 파벌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려는 뜻에서 젊고 의욕이 왕성한 경력자만을 받아들였다.
  이 때 광복군 계열에서는 우리 국군은 당연히 광복군의 전통을 이어받아야만 한다고 주장, 일본군이나 만주군에 몸담았던 자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아가며 같은 수로 뽑도록 한 원칙에 반대하면서 지원하기를 꺼렸다. 결국 그들 가운데 소수만이 입학하였으며, 어떠한 군사단체에도 가담하지 않고 있던 이들은 개별적으로 응시하였다. 그리고 좌익 계열은 처음부터 이를 외면하였으므로 결국 입학한 학생의 대다수가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들로 채워졌다.
입학시험은 미 군정청 안에 있는 군사국에서 면접과 신체검사, 과거의 군사 경력을 확인하는 절차로 실시되었다. 입학한 학생들은 영어 실력에 따라 4개 반으로 나뉘었는데, 그들 중 절반은 영어잡지를 읽는 수준인가 하면, 나머지는 알파벳을 익히고 숫자를 배우는 수준 등 교육 수준이 고르지 않았다. 교육내용은 영어 이외에도 국사·참모학·자동차교육·소화기·기계훈련이 있었고, 매주 토요일에는 분열과 사열도 실시되었다.
  학생 수는 나중에 200명으로 늘어났으며, 학생 개개인의 경력과 영어 실력에 따라 짧게는 며칠간의 교육을 받고 장교로 임명되는가 하면, 길게는 몇 주일이 걸리기도 하였다.
  군사영어학교는 1946년 2월 27일 서울 태릉에 있는 국방경비대 제1연대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그 해 4월 문을 닫았는데, 폐교될 때까지 약 110명(일본육사 출신 12명, 학병 출신 72명, 지원병 출신 6명, 만주군 출신18명, 중국군 출신 2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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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우리나라의 공식적인 군사기구로 1945년 11월 13일 미 군정청 내에 조직된 국방사령부는 그 아래에 군무국과 경무국을 두었다. 군무국은 다시 육군부와 해군부를 두어 군대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고, 경무국은 경찰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또한 1946년 1월 15일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에 남조선국방경비대(조선국방경비대, 줄여서 국방경비대)를 창설하였다.
  이렇게 국방사령부 안에 군무국와 경무국을 함께 둔 것은 치안에 관한 일은 한곳에서 하는 것이 좋다고 미군정이 생각해서 그리 한 것이었으나, 군대 업무와 경찰 업무는 성격상 다를 수밖에 없었다. 서로 성격이 다른 업무를 하나의 기구 안에 묶어놓음으로써 적지 않은 모순과 마찰이 생겼다. 그리하여 미군정 당국은 1946년 3월 29일 <미 군정법령 제64호>에 따라 국방사령부는 국방부로 바꾸고, 그 아래에 군무국만을 관리하게 하면서 군무국 밑의 육군부와 해군부는 그대로 두었다.
  그런데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 측은 미 군정 당국이 한국임시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국방부라는 기구를 조직․사용하는 데 대하여 항의하였다. 이에 한국 측에서는 대한제국 때의 군사기구인 우영·후영·해방영을 통합한 이름인 통위영을 따서 1946년 6월 9일 국방부를 통위부로 바꿈과 동시에 군무국을 폐지하고, 그 밑의 2개 부를 조선경비국과 조선해안경비국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미 군정청은 국방의 개념을 국내 치안으로 바꾸기로 결정, 6월 15일 <군정법령 제86호>를 발표하여 국방부를 국내경비부로 변경하였다. 그럼에도 한국 측에서는 국방의 뜻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그대로 국내경비부를 통위부라 부르며 그대로 사용하였다.
  국방부가 국내경비부로 변경됨에 따라 1946년 6월 15일 남조선국방경비대도 남조선경비대로 그 이름이 바뀌었으며, 또한 남조선해안경비대(조선해안경비대)가 창설되었다. 조선해안경비대는 미 군정청의 인정을 받아 이미 1945년 11월 11일 창설된 해방병단(뒷날 대한민국 해군으로 계승됨)이 발전한 것이었다.
통위부는 미 군정 시기에 설치된 조선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를 한꺼번에 관리하는 최고 군사기구였으며, 미 군정 아래에서 군 창설과 관련된 대부분의 업무가 추진된 곳이었다. 통위부에는 오늘날 국방부장관에 해당하는 통위부장이 있었고, 조선경비대총사령부와 조선해안경비대총사령부가 설치되어 오늘날 육군과 해군의 기능을 가진 경비대를 지휘․통제하였다.
  1948년 7월 17일, 법률 제1호인 <정부조직법>에 따라 정부 11개 부서의 하나로 오늘날의 국방부가 설립되었다. 다만, 실제 국방부장관 취임식과 국방부 창설은 그 이후에 이루어졌는데, 국방부장관 취임은 정부 수립 다음날인 8월 16일 조선경비대총사령부에서 이루어졌다. 제1대 국방부장관으로는 이범석 장군이 취임하였으며, 같은 날 통위부로부터 국방부 업무를 넘겨받았다. 국방부 창설은 1948년 8월 31일 이루어졌으며, 미군으로부터 조선경비대에 대한 지휘권을 넘겨받는 날은 9월 1일이었다.
  군 통수권을 넘겨받은 것과 함께 조선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는 모두 9월 1일부로 국군으로 부르기로 결정되어 9월 5일 조선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는 각각 육군과 해군으로 바뀌었다. 국방부 설립을 시작으로 국방부는 1948년 11월 30일 <국군조직법>을 발표하고, 이에 근거해 조선경비대는 정식으로 육군이 되었다.
  정부 수립 직전까지 우리 군의 위치는 ‘경비대’라는 명칭이 말해주듯이 국내 치안을 유지하는 수준에 머물렀지만, 군 통수권을 넘겨받은 국방부는 이제야 비로소 국가안보를 위한 국방조직으로서의 공식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경비대가 정식으로 육군이 됨에 따라 조선경비대총사령부도 12월 7일 <국방부직제령>에 따라 이름이 육군총사령부로 바뀌었다. 육군총사령부의 부대는 보병 5개 여단(15개 연대)과 지원부대로 편성되었으며, 병력은 장교 1,403명, 사병 4만 9,087명 등 총 5만 490명이었다. 그 후 육군총사령부는 다시 육군본부로 바뀌고, 육군총사령관도 육군총참모장으로 바뀌었다.

읽기자료 2

  국방사령부와 미군 사이에 원활한 협조를 꾀할 수 있는 통역관 양성과 앞으로 군대를 이끌어갈 간부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1945년 12월 세워진 군사용어학교는 1946년 2월 서울 태릉으로 옮겼다가 그 해 4월에 문을 닫았다. 군사영어학교가 해체된 이튿날인 1946년 5월 1일,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라는 이름으로 서울 태릉의 옛 일본군 특별지원병 훈련소에 정식 사관학교로 개교하였다. 이에 5월 1일이 육군사관학교의 개교기념일로 사용되고 있다.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의 설립은 남조선국방경비대의 창설(1946.01.15.)과 관련이 있었는데,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는 미소공동위원회의 소련 측 항의에 따라 미 군정청이 1946년 6월 15일 국방부를 국내경비부(총위부)로 바꾸고, 남조선국방경비대를 남조선경비대(조선경비대)로 바꾸면서 6월 16일 다시 남조선경비사관학교로 바뀌었다.
  조선경비사관학교는 보다 체계적인 군사교육을 실시하여 정규 사관학교로서의 모습을 갖추어나갔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1948.08.15.)되기 직전까지 배출된 제1기에서 제7기까지의 약 1천 8백여 명의 사관후보생들은 기별에 따라 최단 45일 부터 최장 6개월 정도의 교육을 받은 후 임관, 즉 장교로 임명되었다.
조선경비사관학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것과 함께 1948년 9월 5일, 국군의 창설과 동시에 육군사관학교(Korea Military Academy)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교육 기간이 다소 연장되어 2년제였던 교육과정을 1950년 6월 1일 생도 2기부터 4년제로 바꾸어 선발하였다.
  그러나 2기 생도는 입학하자마자 전쟁을 맞이하였다. 당시 육군사관학교는 전쟁이 일어난 지 3일 후인 1950년 6월 28일 임시 휴교에 들어갔으며, 4년제 정규 사관학교 교육과정도 실현되지 못하였다. 졸업을 1주일 앞두고 있던 생도 1기(조선경비사관학교 10기생)와 4년 과정으로 입학한 지 20여 일 밖에 되지 않았던 생도 2기생들은 전선에서 싸울 병력이 부족한 상태였기에 생도 신분으로 전선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생도들은 연천-동두천-의정부 전선에 배치되어 북한군과 맞섰고, 89명의 희생자를 낸 후 다시 태릉으로 돌아왔다가 한강을 건너 후퇴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계기로 육군사관학교를 다시 개교하는 일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면서 당시 미 제8군사령관 밴 플리트(James A. Van Fleet) 장군의 지지 아래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미국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 West Point Academy)를 모델 삼아 1951년 10월 31일 경남 진해에서 4년제 대학과정으로 다시 개교하였다. 이에 제11기 생도가 입교하여 육군사관학교의 전통을 다시금 계승하게 되었다.
  육군사관학교는 1953년 7월 휴전과 더불어 전선이 안정되자 이듬해인 1954년 6월 21일 태릉으로 다시 자리를 옮겼으며, 새로운 교육환경을 정비해 나갔다. 교육시설의 확충, 교육제도의 개혁, 교육내용의 강화와 더불어 새롭게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학교 설립의 법적 근거인 <사관학교 설치법>이 1955년 10월 1일에 국회를 통과하여 <법률 제374호>로 공포되면서 육군사관학교는 수업 기간이 4년인 대학교육과정으로 인정받게 되어 졸업생에게는 이학사 학위가 주어졌다.
  또 1973년 이후에는 전공이 다양해져 문학사·공학사 학위도 받게 되었으며, 1994년 11월 이래 공군사관학교, 해군사관학교와 함께 군사과학대학원을 설치․운영하였으나, 2001년 대학원 5기 졸업생을 배출한 이후로 신입생 선발을 하지 않아 잠정적으로 운영이 중단되었다. 그리고 1998년 3월 1일에는 개교 이래 여생도(58기)가 최초로 입학함으로써 여자의 출입이나 접근을 금지하던 금녀의 벽이 깨지고 여성에게도 동등한 기회가 주어졌다.
  1957년 3월 이곳의 이름을 화랑 후예의 기상을 닦는 국방의 터전이라는 의미에서 ‘화랑대’라고 부르게 된 육군사관학교는, 2011년 3월 4일 제67기생이 임관, 현재까지 1만 8천여 명이 졸업하였으며, 그 가운데 9%에 달하는 1,620여명이 한국전쟁과 월남전 등 각종 전투에서 목숨을 희생하기도 하였다. 군사용어학교로 시작,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로 개교한 이래 조선경비사관학교로 불리기도 하던 육군사관학교는 대한민국 육군 장교를 양성하는 기관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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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서울 태릉에 있던 조선경비사관학교의 건물 일부이다

  • 질문1 학교 건물임을 확인 할 수 있는 것으로 무엇이 있나요?
  • 질문2 이 학교가 군대와 관련 있는 건물임을 짐작할 수 있는 것으로 무엇이 있나요?
  • 질문3 이 건물은 조선경비사관학교의 본부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조선경비사관학교는 그 전의 이름이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였다. 이름이 바뀐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각자료 2

육군사관학교 개교 30주년 기념우표이다.

  • 질문1 육군사관학교는 몇 년에 개교했을까요?
  • 질문2 우표에 그려져 있는 건물은 화랑사열대(1966.12.24. 건립)이다. 화랑사열대는 육군사관학교를 ‘화랑대’라고 부르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육군사관학교를 화랑대라고 이름 지은 까닭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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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해방 이후 한반도에는 일본군·관동군·국민혁명군·팔로군·광복군 출신자들을 중심으로 한 조선국군준비대 등 사설 군사단체 혹은 유사 군사단체가 여기저기 생겨 그 수가 무려 60여 개나 되었다. 당시 남한을 통제했던 미 군정청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을 국군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좌·우익 가릴 것 없이 모든 군사단체들에게 해산 명령을 내렸다. 미 군정청의 이 같은 결정을 지지하는 입장과 비판하는 입장, 두 모둠으로 나눠 서로 토론해 봅시다.
모둠활동 2
우리나라 육군사관학교의 기초가 된 한국영어학교는 처음 학생 정원을 60명으로 하여 광복군·일본군·만주군 출신 가운데 군사 경력을 쌓은 사람을 각각 20명씩 뽑으려 하였다. 이 때 광복군 계열에서는 우리 국군은 당연히 광복군의 전통을 이어받아야만 한다고 주장, 일본군이나 만주군에 몸담았던 자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아가며 같은 수로 뽑도록 한 원칙에 반대하였다. 이런 광복군 출신들의 주장을 지지하는 입장과 비판하는 입장, 두 모둠으로 나눠 서로 토론해 봅시다.
모둠활동 3
서울 태릉은 우리나라 국군이 창설된 곳이자 육군사관학교가 개교한 곳이다. 태릉과 관련 있는 역사적 사건들을 더 조사하여 보고서로 제출해 봅시다.
모둠활동 4
대한민국 국군을 대표하는 육군과 해군, 공군, 해병대는 어떻게 창설되었는지, 그리고 육군사관학교, 해군사관학교, 공군사관학교는 어떤 과정을 거쳐 개교하였는지 비교․조사․정리하여 보고서로 제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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