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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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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익 활동을 놓고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몽양 여운형이 독립운동을 한 것은 분명하다. 여운형은 1918년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단 조직을 주도하여 총무로서 김규식을 파라강화회의에 파견하여 우리의 독립을 주장케 한 것, 민족자결주의의 주장을 가능하면 우리에게 적용시킬 수 있는 독립운동(3·1운동)이 일어나도록 다방면에서 지원한 것, 상하이에서 인성학교를 세워 중국에 사는 교포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준 것, 일본 도쿄를 방문하여 독립의 정당성을 널리 알린 것,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 시상식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운 일장기 말소 사건을 동아일보보다 먼저 한 것,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하여 일본의 패망에 대비한 것 등 수많은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 선언을 함으로써 나라를 되찾은 이후 혼란해질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건국준비위원회 조직, 신탁통치를 결정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에서 임시민주주의 정부 수립에 주안점을 두었고, 남북 분단을 막고 자주 독립 국가를 수립하려는 노력은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의 총격으로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면 여운형은 독립을 위해 어떻게 노력을 했는가에 대해 알아봅시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덕궁1길 25(서울 종로구 계동 140-8)
현재 상태 부분 변경. 도로 확장 과정에서 건물의 절반이 잘려나갔고, 현재는 안동칼국수라는 음식점이 되었다. 1947년 3월 18일자의 동아일보에 “17일 사오 1시경 시내 계동 140번지의 8호 여운형씨 댁 사랑채 2평이 돌연 대폭음과 함께 폭발하였다”는 기사를 통해 광복 전후 여운형이 살았던 집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36년 손기정의 일장기말소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는 자진 폐간되었다. 이때 조선중앙일보 주주들이 집이 없었던 여운형에게 사준 집이 바로 계동 집으로, 그는 1947년 7월 19일 서거할 때까지 거처하였다.
  이 집에 사는 동안 여운형은 1944년에 건국동맹을 결성하고, 1945년에는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좌우합작위원회를 조직하여 통일된 독립 국가를 위해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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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여운형은 어려서부터 배재학당·흥화학교 등에서 신학문을 배웠으며, 1907년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동하여 1908년 부친이 돌아가시자 집안의 노비들을 해방시켰다. 1910년에는 강릉의 초당의숙에서 동생 여운홍과 함께 민족교육을 실시도 하였다. 1911년 기독교 목회자가 되기 위해 평양의 장로교연합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중국을 여행하던 중에 생각을 바꿔 1914년 중국 난징[南京]의 금릉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1917년부터 상해로 옮긴 후 1918년 상해고려인친목회를 조직하여 총무로 활동하면서, 기관지 『우리들 소식』을 발행하였고, 1918년 8월 터키의 케말 아티투르크가 결성한 터키청년당을 본받아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총무로 활약하였다. 마침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의가 열리게 되자, 그는 텐진[天津]에 있던 우사 김규식을 초빙하여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여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독립문제를 크게 부각시키기 위해 거족적인 민족운동을 계획 추진했으니, 그것이 3・1운동의 태동이었다. 이런 의도에 따라 장덕수는 일본에 가서 2·8독립선언을 촉발하였고, 김철·선우혁 등은 국내로 잠입하여 종교계 인사들과 접촉하였으며, 여운형은 간도·시베리아 방면으로 가서 만세운동의 분위기를 진작시켰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3・1운동이 일어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임시정부 문제에 있어서 여운형은 만주와 노령 등에서 독립운동은 하지만 중앙 기관은 외교에 편한 상하이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통일된 조직형태보다는 독자적인 당에 의한 결합을 주장하였다.
  3・1운동 직후 1919년 4월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외무부 차장, 임시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1919년 11월에는 적국의 심장부인 일본 동경을 방문하여 일본 고위 관료들을 상대로 한국독립을 역설하여 일본은 물론 국제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상하이에 인성학교 설립과 동교 교장으로서 민족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1920년 여름 국제공산당 위원 보이친스키가 공산주의 선전을 위해 상하이에서 한인독립운동자 중 유력자회의를 개최하고자 할 때, 여운형은 김만겸을 통해 보이친스키와 회견을 가졌고, 이어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이때 고려공산당 입당은 ‘독립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써 공산당의 원조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921년 김립의 노농정부 자금횡령사건으로 그는 이동휘와 결별하고, 김만겸이 주도한 이르쿠츠크파와 고려공산당 상해지부에 참가하였다.
1921년에는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 결성에 참가하여 한·중 양민족의 공동 투쟁과 이해 증진을 모색하였다. 한·중 연대를 통한 독립운동의 방도를 강조했던 그는 국제정세의 흐름에서 한국독립운동의 나아갈 방향을 찾고자 했다. 그리고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극동피압박민족대회가 열릴 때 조선민족 대표의 일원으로 참석하여 조선독립을 역설하였다.
  1922년 10월 독립운동의 장기적 구도 아래 백범 김구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여 군사적 투쟁도 준비하였다. 이 모임은 ‘10년 동안 1만명의 노병 양성과 백만 원 이상의 전비 확보’를 목표로 하여 조직한 단체였다.
  이 무렵 이승만의 국제연맹에 신탁통치 청원, 대통령 직무 수행을 놓고 갈등이 있자 이승만을 대통령에서 탄핵한 후 임시정부의 재편 문제를 놓고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안창호 등과 함께 ‘임시정부 개조’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자 중국의 국공합작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중국의 쑨원과 소련의 고문단 등과 계속 접촉하면서 중국의 국공합작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에게 한국 독립운동의 역할과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 질문1 여운형이 중국의 국공합작에 관심을 가진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읽기자료 2

  1936년 8월 10일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2시간 29분 19초라는 당시로는 세계 신기록을 세우면서 우승했다는 소식은 식민지의 울분이 일시적으로나마 풀릴 쾌거였다. 그러나 가슴에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를 달고 시상대에 오른 손기정의 모습은 우승자의 웃음이 없었다. 조선중앙일보는 이 사진을 조잡한 인쇄술을 핑계로 1936년 8월 13일 일장기를 지우고 발행하였으나 아무 일이 없었다. 같은 달 25일 동아일보의 이길용이 일장기가 지워진 선명한 사진을 동아일보에 실은 것을 조선총독부가 알고, 조사를 하다가 이미 조선중앙일보가 먼저 일장기를 말소했다는 것이 밝혀져 두 신문 모두 정간되었다. 이에 조선중앙일보 사장 여운형은 책임지고 사장에서 물러나고 사주들과 협의하여 신문을 폐간하였다. 동아일보도 사장 송진우와 주필 김준연, 편집국장 설의식 등 8명의 간부가 사직 당했다. 송진우는 “소수의 기자들의 행동은 사측의 입장과 무관한 것이었다.”라고 주장하여 일장기 말소 사건을 주도하여 구속된한 동아일보 기자 이길용, 동아일보 사회부장 현진건, 신동아 편집부장 최승망, 사진과장 신낙균, 사진부 서영호 등은 “언론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쓴 후 40일 만에 풀려났다. 그 후 동아일보 1937년 6월 2일자 신문을 속간하였다.

  • 질문1 일장기 말소 사건에 관한 자료를 찾아서 읽어보고 그 구체적인 내막에 대해 알아봅시다.

읽기자료 3

  1943년 이탈리아가 연합국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알게 된 독립운동가들은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였다. 국외에서는 이에 대한 대비를 했지만 국내에서는 독립을 준비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1940년대에도 다른 직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감시가 느슨한 언론인 출신이었던 여운형은 활동할 여지가 있었는데,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비밀리 결성한 것이 바로 조선건국동맹이다.
  1944년 8월 10일 서울 경운동 ‘삼광한의원’ 현우현 집에 여운형, 조동호, 현우현, 황운, 김진우, 이수목, 이석구 등이 모여 비밀 결사인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을 조직하였다. 창립 직후 이걸소, 최병철, 이여성, 박승환, 김문갑, 이상백, 허규, 이만규, 정재철 등을 영입해서 상위 지도부를 형성하였다.
그들은 맹서를 굳게 하고 실행은 비밀로 하자고 결의한 뒤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는 불명(不名), 거처를 말하지 않는다는 불거(不居), 문서를 남기지 않는다는 불문(不文) 등 삼불맹서를 철칙으로 했다. 이것은 일부 희생이 생겨도 연루의 피해가 없게 체제를 갖추기 위함이었다.
  1944년 10월경에 내무, 외무, 재무의 3개 부서를 조직하고, 내무부는 조동호, 현우현, 외무부는 이걸소, 이석구, 황운, 재무부는 김진우, 이수목이 맡았다. 이때 강령도 만들었는데, “① 각인 각파를 대동단결하여 거국일치로 일본 제국주의 제 세력을 구축하고 한국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할 일, ② 반구축제국과 협력하여 대일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저해하는 일체 반동세력을 박멸할 일, ③ 건설부면에 있어서 일체 시위를 민주주의적 원칙에 의거하고 노농대중의 해방에 치중한 일” 등을 정하였다.
  건국동맹의 간부들은 매주 토요일에 정기중앙위원회를 열고, 연락처를 서울 경운동 삼광한의원(현우현의 집)에 두었으며 국내외의 정세를 수집 분석하고 그에 대처하는 등 항일 민족 투쟁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각도 대표의 책임위원을 선출하였다. 충청남북도에 진표성, 김종우, 유웅경, 장준, 경상남도에 명도환, 경상북도에 이상훈, 정운해, 강원도에 정건화, 정재철, 전라남북도에 황태성, 황해도에 여권현, 평안남도에 김유창, 평안북도에 이유필, 함경남도에 이증림, 함경북도에 최주봉 등을 선임하였다.
  조선건국동맹은 항일투쟁이라는 지상목표 달성을 위해 1945년으로 접어들면서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건국동행은 일제의 패망을 앞당기고 독립과 건국을 준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정보 수집 및 계획 수립과 활동을 전개하였다.
  중국 연안의 조선의용군(독립동맹군)과 화북의 독립연맹과 합동작전을 전개할 목적으로 긴밀히 연락하였고, 중국에서 독립군들이 국경을 넘어올 때 착오가 없도록 비밀리 연락체계를 갖추었고, 혹시 필요할지 모를 식량을 확보할 대책을 찾았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위해 노농군의 결성을 논의하여 ‘군사위원회’를 조직하였고, 미국 공군이 일본을 폭격할 때 제공할 목적으로 인천, 부평, 소사 등에 있는 주요 군수품공장 전부를 상세히 기재한 비밀공장도를 입수하였고, 징병과 징용에 걸린 청년 수십 명을 경기도 양평의 용문산과 예봉산 일대에 피신시키거나, 담당의사와 짜고 신체검사 기록을 바꿔 수십 명의 청년들에게 징병과 징용을 가지 않을 수 있게 하였다.
  이렇게 광복에 대비하여 그 대책을 실천하던 중 미군이 오키나와에 상륙한 이후 정세가 급박하게 되어, 주요한 일들을 토의 결정하고자 회의를 계속하던 중 1945년 7월 24일 조문기, 강윤국, 유만수, 우동학, 권준 등이 서울 부민관에 폭탄을 던진 의거가 일어나 건국동맹 회원 일부가 연행되어 중앙 간부들이 피신하였다. 그렇지만 이것이 일본 패망의 징조로 여겨 최근우, 김세용, 이여성, 이상백, 김기용, 이만규 등을 새로운 중앙 간부로 임명함으로서 지도부를 재건하여 투쟁에 박차를 가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 질문1 조선건국동맹이 추진했던 여러 독립 운동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자료를 찾아서 알아봅시다.

읽기자료 4

  건국준비위원회는 1945년 8월 15일부터 9월 7일까지의 군정기에 여운형, 안재홍 등이 조선총독부로부터 행정권을 인수받아 행정 및 치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만든 조직이다. 남한에는 여운형과 안재홍 등이, 북한에는 조만식 등이 주축을 이루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항복선언을 하면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가 서울 필동에서 여운형을 만나 치안권과 행정권 등 모든 권한을 이양할테니 한반도내에 철수하는 일본인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 요구하였다. 이에 여운형은 다음과 같이 조건을 제시하였다.

1. 전국을 통하여 정치범, 경제범을 즉시 석방할 것.
2. 8월, 9월, 10월 3개월간의 식량을 확보할 것.
3. 치안유지와 건국운동을 위한 정치활동에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
4. 학생과 청년을 훈련 조직하는데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
5. 노동자와 농민을 건국사업에 조직 동원하는데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

  여운형은 일본군이 철수하기 전에 조선인들을 마구 학살하고 떠난다거나 해방 직후에 민중 내에서 친일파를 처단한다는 이름으로 사적인 감정에 기인한 마구잡이식 보복성 살인으로 사회 분열이 일어나고 혼란이 일어나 힘없는 사람들이 거기에 말려 억울한 피해를 입을 것을 걱정하였다. 총독부 정무총감은 당시 일제의 패망으로 항복한 상황이라서 여운형이 제시한 이 조건에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여운형은 자신이 이미 1년 전에 결성했던 지하 비밀 독립운동 단체인 건국동맹을 모체로 해서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를 발족시켰다. 이어서 여운형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독립운동가들을 석방시켜 건준에 편입시켰다. 건국준비위원회 발족한 지 이틀이 지나자, 체계적인 조직망을 갖추면서 여운형이 위원장을, 안재홍이 부위원장을 맡았다.
  온건우파와 온건좌파들이 결집한 건준은 광복 이후 뒤숭숭한 분위기속에 매우 혼란스런 치안상태와 행정, 실무 등을 해결하고자 치안대와 행정업무 등 식량 확보에 주력을 하였고, 이어서 전국적 지부를 조직하였으며 자주적 질서유지 활동을 하여 8월 말까지 전국적으로 140여개의 지부가 확장되어 설립되었다. 북한 지역에서는 평양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에도 '비폭력적이면서도 비타협적인 노선을 견지한' 민족주의 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던 조만식이 주도하였다.
각 지역의 조직은 주도권을 차지한 세역에 따라 명칭을 달리하거나 구성에서 다소 차이가 났지만, 그 목표는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위한 기초를 마련한다는 점,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자치조직'이라는 점에서는 큰 의미가 있다.
  그러나 김성수, 송진우 같은 국내의 우익세력들은 '중경 임정 지지'를 선언하면서 불참하였고, 1945년 9월 4일에 열린 건준 전체회의에서 박헌영의 공산당계열이 주도권을 잡자, 안재홍이 탈퇴함으로써 중도적인 정치노선이 변질되었다. 게다가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하면서 '맥아더 포고령 1호'를 발표하여 국내의 모든 정치 세력을 부정함에 따라 정치적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중국의 붉은 별’이란 저서를 남긴 미국의 저널리스트 에드거 스노는 1945년 8월 이후 2개월간 한국에 머무르면서 정세를 알아보고 귀국한 뒤 “미국은 아무 준비가 없이 조선에 상륙하였다. 그러나 조선에는 건국준비위원회가 있었다. 곧 정치적 준비가 있었다. 미국인이 만일 건국준비위원회를 살렸더라면 조선의 건설은 더 신속하고 유리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은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개편된 것은 여운형의 치명적인 잘못이라고 비판하였다.


  • 질문1 건국준비위원회의 역할에 대해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비교하여 당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했으면 좋았을까에 대해 토론해봅시다.

읽기자료 5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는 한반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조선에 관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서
1. 조선을 독립국가로 재건설하며 그 나라를 민주주의적 원칙하에 발전시키는 조건을 창조하고 가급적 속히 장구한 일본의 조선통치의 참담한 결과를 청산하기 위하여 조선의 공업, 교통, 농업과 조선인민의 민족문화의 발전에 필요한 모든 시책을 취할 임시 조선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2. 조선 임시정부 구성을 원조할 목적으로 먼저 그 적의한 방책을 고출하기 위하여 남조선 합중국 관구, 북조선 소련 관구의 대표자들로 공동위원회가 설치될 것이다. 그들의 제안 작성에 있어 그 위원회는 조선의 민주주의 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하여야 한다. 그 위원회가 작성한 건의서는 이 공동위원회에 대표를 가진 정부가 최후 결정을 하기 전에 미, 영, 소, 중 제국정부에 그 짐작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제출되어야 한다.
3. 조선인민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진보와 민주주의적 자치 발전과 또는 조선 국가독립의 수립을 원조 협력 후견할 방책을 작성할 것도 또한 임시 조선민주주의 정부 및 조선민주주의 단체의 참여하에 공동위원회가 수행할 과업이다.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최고 5개년 기간의 4개국 후견의 협약을 작성하기 위하여 미, 영, 소, 중 제국 정부의 공동 짐작에 이바지하도록 임시 조선정부와 협의한 후 제출되어야 한다.
4. 남북 조선과 관련된 긴급한 제분제를 고려하기 위하여 또는 남조선 합중국 관구와 북조선 소련군 관구의 행정 경제 면의 항구적 균형을 수립하기 위하여 2주일 이내에 조선에 주둔하는 미, 소 양군 사령부 대표로서 회의를 소집할 것이다.

 

  이에 대해 김구를 비롯한 민족주의 계열에서는 신탁통치는 식민지의 연장이라면서 반대하였다. 좌익도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임시 조선민주주의 정부에 중점을 두고 찬성으로 돌아서 이 문제를 놓고 좌익과 우익이 갈등하였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라 열린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이 반탁하는 정당은 임시 민주주의 정부에 참여할 수 없다고 주장하자, 곤란해진 미군정은 우익의 정당을 임시 민주주의 정부에 참여시키길 의도를 갖고 좌우 합작을 지원하였다. 중도 계열에서도 신탁통치를 놓고 갈등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여겨 1946년 7월 경에 중도 우파의 김규식과 중도 좌파인 여운형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이 추진되었다. 이들은 몇 차례의 모임을 갖고 협의한 결과 1946년 10월 1일에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하였다.

 

1. 조선의 민주독립을 보장한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2. 미국-소련 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할 것.
3. 토지개혁에 있어 몰수 유조건 몰수 체감 매상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여하여 시가지의 기지와 대건물을 적정 처리하며 주요산업을 국유화하여 사회 노동법령과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자치제의 확립을 속히 실시하며, 통화 및 민생문제 등을 급속히 처리하여 민주주의 건국 과업완수에 매진할 것.
4.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본 합작위원회의 입법기구에 제안하여 입법기구로 하여금 심리 결정하여 실시케 할 것.
5. 남북을 통하여 현 정권하에서 검거된 정치 운동자의 석방에 노력하고, 아울러 남북 좌우익 테러적 행동을 일체 즉시로 제지토록 노력할 것.
6. 입법기구에 있어서는 일체 그 권능과 구성방법, 운영 등에 관한 대안을 본 합작위원회에서 작성하여 적극적으로 실행을 기도할 것.
7. 전국적으로 언론, 집회, 출판, 교통, 투표 등의 자유가 보장되도록 노력할 것.

 

  이 결과 잠시 중도 계열이 힘을 얻는가 싶었지만 극우 계열과 극좌 계열이 지속적으로 방해하고 1947년 7월 19일 합작 추진의 주체였던 여운형이 피격으로 사망하면서 그 힘을 잃고 말았다.


  • 질문1 좌우합작 7원칙이 갖는 역사적 의의에 대해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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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1946년 10월 28일 좌우합작운동을 풍자한 시사만평. 극좌 세력과 극우 세력이 합작을 방해하고 있다. 그림에서 왼쪽은 여운형, 오른쪽은 김규식이다.

  • 질문1 이 시사만평을 보고 당시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했던 세력들을 찾아보고 그들의 지향점에 대해 토론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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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여운형처럼 일제 강점기에는 자주독립을 위해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를 넘나들면서 활동했던 사람들을 모둠 별로 나누어 찾아보고, 그들이 실패한 이유를 토론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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