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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의 화신-윤봉길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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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복이 재앙을 만남을 어찌 다 말하랴.
날뛰는 왜구 놈들이 우리 국병을 훔쳤네.
특히 그대는 오랑캐 백성 됨을 수치로 여겨
분격해 압록강 건너 임시정부에 들어갔네.
백범은 의사의 뜻에 감읍하고
황포강가에서 저격할 폭탄을 주었도다.
장황한 오랑캐 기세를 아이들 놀이처럼 내려놓고
벼락같은 폭탄 던져 의기 펼쳤네.
안중근 의사가 가신 후 그대가 또 있으니
온 나라 사람들 꿈에서 막 깨게 했도다.
이제사 고국산하 제자리 되찾으니
; 진정 선열들 중에 공적 견줄 이 없도다.
내 이제 충의사에 와보니
송백이 빽빽하고 섬돌에 꽃 가득한데
지난날 강습했던 일을 추억하니
눈물 금할 길 없어 절로 숙연해지네.

 

유교부식회 회원으로 윤봉길의 의사에게 가르침을 주었던 전용욱이 광복 후 충의사 건립에 즈음하여 윤봉길 의사의 영전에 바친 한시이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일원(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부흥길 일원)
현재 상태 복원, 1974년 복원 정비되었다. 광현당, 저한당, 부흥원 등이 있다.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은 1908년 6월 21일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태어났다. 봉길은 별명이고, 본명은 우의(禹儀)이며, 아호는 매헌(梅軒)이다. 생가인 광현당은 사방으로 냇물이 둘러 있어 윤봉길이 왜놈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라 하여 도중도(島中島)라 하며 정신 수양을 하던 곳이다.
  윤봉길은 1932년 4월 상하이로 망명하기 전 농촌계몽운동에 전념했다. 1919년 덕산공립보통학교를 자퇴하고 오치서숙을 다니던 중 공동묘지 묘표사건을 겪게 되었다. 그는 일제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무지’임을 깨닫고 야학을 개설해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문맹퇴치는 농촌계몽을 위해 가장 시급한 문제로 여기고 자신의 사랑방에 야학을 개설해 문맹 퇴치와 경제자립 운동을 펼쳤다.
  윤봉길은 자신의 사랑방에 개설했던 야학을 확대하고, 경제자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28년 2월 부흥원을 설립했다. 그는 1928년 10월 위친계를 조직하고 다음해 4월 월진회를 조직해 야학의 지속적 추진, 농가소득증대, 학예회와 강연회 개최 등을 통해 일제의 탄압과 식민지 체제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1929년 봄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토끼와 여우’라는 학예회를 열고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농촌 계몽 운동의 한계를 느꼈다.
  윤봉길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영향을 받고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글을 남겨놓고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1932년 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를 찾아가 민족의 광복을 위해 신명을 바치겠다는 결의를 밝히고 그 해 4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1932년 4월 29일 천장절과 일본군 상하이점령 전승 축하식을 거행하던 홍커우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 가와바타[河端貞次] 상하이 일본인 거류민단장 등을 죽이는 의거를 일으켰다.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은 5월 25일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1월 18일 상하이를 출발해 오사카[大阪]의 육군 위수 형무소로 옮겨졌다. 12월 18일 밤 가나자와[金澤]로 이송되었으며 19일 아침 7시 40분 가나자와 시외의 미츠코지[三小牛] 육군작업장에서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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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윤봉길은 1908년 5월 19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부친 윤황과 모친 김원상 사이에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7살 되던 해에 어머니의 뜻에 따라 큰 아버지에게 『천자문』, 『동몽선습』, 『소학』 등을 배웠으며 공부를 잘하지는 못했다. 성격이 급하여 발음할 때 더듬거려 동네사람들은 ‘혀가 잘 돌아가지 않는 아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공부에 대한 천재적 소질은 없었으나 꾸준한 인내력과 어머니의 노력으로 7살에 이미 인근에서 학문적으로 뛰어난 아이로 인정받았다.
  반면에 성격이 굳세고 조급하여 또래와 싸워 한번도 진 적이 없었다. 또한 고집도 세어서 서당에서 잘못하여 종아리를 맞아도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선생을 똑바로 쳐다보며 매를 맞을 정도로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였다.
  11살이 되던 1918년에는 근처의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윤봉길이 신학문에 대한 흥미보다 일제의 식민지 교육 정책에 회의를 느끼고 있을 때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예산에서도 3월 3일부터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고, 3월 하순에는 이웃마을인 대치리에서도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윤봉길은 덕산장터에서 3․1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한 이후 식민지 교육에 대한 실망으로 결국 학교를 자퇴하고 최병대 선생의 문하에서 한문을 배웠다.
  한편, 신학문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동아일보』, 『조선일보』등의 신문과 『개벽』과 같은 잡지를 읽었으며 새로운 잡지와 서적을 구하여 읽었다.
  14살이 되던 1921년부터는 오치서숙에서 학문과 인격을 고루 갖춘 유학자 매곡성주록 선생으로부터 『대학』, 사서삼경, 『고문진보』, 『국조명신록』등을 배웠다. 단순히 한문과 유교경전만을 수학한 것이 아니라 의리론과 애국론을 배웠으며 선생으로부터 시대의 흐름과 변화까지도 배웠다. 청소년기 윤봉길의 인격 형성과 학문 수양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성주록 선생이었다.
  이 시기에 윤봉길이 『일어속성독본』을 사다가 독학하여 일본어를 불편없이 구사할 수 있게 된 것은 변화된 세상에 적응하고 새로운 지식을 익히려는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였다.
  16살에는 한 살 위인 배용순과 결혼하고 17살이 되던 1924년에는 7~8명의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서당 훈장이 되었다.

  • 질문1 공부에 대한 소질이 없었던 윤봉길이 학문적으로 뛰어난 아이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윤봉길이 11살이 되던 1918년에 입학한 덕산공립보통학교를 1년도 안되어 자퇴한 이유를 써봅시다.
  • 질문3 윤봉길이 신학문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어떻게 노력했나요?
  • 질문4 오치서숙은 윤봉길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나요?

읽기자료 2

   윤봉길이 서당 훈장으로 지내던 중 글을 모르는 청년이 공동묘지에서 묘지의 팻말을 한아름 뽑아와 윤봉길에게 아버지의 팻말을 찾아달라는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다. 윤봉길은 이 사건을 경험하면서 우리 민족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일제가 아니라 무식이라는 점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이 공동묘지 묘표 사건을 계기로 윤봉길은 문맹퇴치를 위한 농촌계몽운동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때를 전후하여 스승인 성주록 선생이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으니 다른 스승을 찾아가라며 매헌(梅軒)이라는 호를 선물하였다. 자신의 호인 매곡에서 ‘매’를 따고 성삼문의 호인 매죽헌에서 ‘헌’을 딴 것이었다.
  윤봉길은 오치서숙의 동학들과 사춘형인 윤순의 등과 농촌계몽운동의 방도를 협의하여 자신의 사랑방을 개조하여 야학당을 열었다. 윤봉길의 노력으로 자리를 잡은 야학은  갑․을 반으로 나누어 초급반인 갑반에서는 한글을 가르쳤고, 을반에서 우리 역사, 수학, 과학, 영농지식 등을 가르쳤다.
  윤봉길은 단순히 아이들에 대한 계몽뿐만이 아니라 학부형과 동네 청년들을 대상으로 학예회와 월례회를 개최하여 신지식의 향상을 꾀하는 등 농촌계몽운동을 추진해 나갔다.
  1920년대 중반부터 야학이나 강습소를 통하여 농민의 무식을 타파하고 지적 수준을 높이기 위한 농촌계몽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천도교에서는 1925년 10월 조선농민의 교양과 훈련을 목적으로 조선농민사를 창립하고 사회지도층 인사를 발기인으로 하는 『조선농민』을 그 해 12월에 발간하였다.
  조선농민사는『조선농민』을 통해 농촌계몽운동을 진행하는 한편 농민들의 문맹퇴치를 위해 1927년 1월 이성환의『농민독본』상․중권을 발행하였다.
  윤봉길 역시 『농민독본』3권을 저술하여 야학 교재로 사용하였다.
  『농민독본』1권은 자음과 모음을 소개한 '소리의 갈래'와 한글 맞춤법을 설명한 '조선글 마침법'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농민독본』2권은 이은(상말) 격언, 인사투, 영웅의 야심, 낙심말아, 백두산, 조선 지도, 기경한 현대 등 7개의 항목으로 구성하여 자신이 습득한 신지식을 농민의 현실에 맞게 활용하여 이들이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과 기개를 잃지 않고 당당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강조하고 있다.
  『농민독본』3권은 농사짓는 방법을 비롯하여 농민과 노동자의 사회적 중요성과 평등, 농민의 정체성 함양과 농민과 개개인의 자유, 공동경작과 공동 판매와 같은 농민의 공동 정신의 함양을 강조하고 있다.
  윤봉길은 『농민독본』에서 농민의 일치단결된 농촌 개혁을 통하여 상부상조하는 유기체적인 민족 공동체의 건설이라는 농촌계몽운동의 이상향을 제시하였다. 윤봉길은 농촌계몽운동을 통하여 단순히 농민에게 한글터득과 교육하는 데에 머물지 않고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 질문1 윤봉길이 문맹퇴치를 위한 농촌계몽운동을 추진하는 계기가 된 사건은 무엇인가요?
  • 질문2 윤봉길의 호인 매헌(梅軒)은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 질문3 윤봉길이 야학당을 열어서 추진한 일을 써봅시다.
  • 질문4 윤봉길이 야학 교재로 사용하기 위하여 저술한 책은 무엇인가요?
  • 질문5 윤봉길이 농촌계몽운동을 통하여 추구한 목적은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3

  윤봉길은 야학이 자리를 잡자 21살 때인 1928년 농촌을 부흥시킨다는 의미에서 부흥원이라는 농민운동 본부를 만들었다. 부흥원은 생산량 증가 운동, 구매 조합 운동, 토산물 애용 운동 그리고 각종 부업을 장려하였다.
  윤봉길은 부흥원 설립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매월 14일 계몽강연회와 독서회를 열었고 수암체육회를 만들었다. 수암산 기슭 1,000여평에 운동장을 만들어 축구와 달리기를 통하여 체력 증진은 물론 농촌 청년들의 협동심과 경쟁심을 기르려는 것이었다.
  22살 때인 1929년 2월에는 자신의 집에서 상부상조를 통하여 경로위친의 미풍양속을 고취하기 위해서 위친계를 조직하였다. 재산을 같이 모으고 늘려 회원들의 애․경사에 활용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고향 농촌의 상부상조를 통한 단결심의 확보와 공동재산을 늘리고자 하였다.
  1929년 4월 23일 윤봉길은 정종갑, 정종호, 윤순의, 김홍기, 이성래 등 37명과 함께 부흥원에서 월진회를 결성하여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윤봉길은 상부상조와 자급자족을 실천하고 나아가 농촌의 부흥은 물론이고 약육강식이라는 일본의 지배에서도 빨리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기 위하여 월진회를 조직한 것이다.
  윤봉길은 월진회를 통하여 야학의 지속적 추진, 농가부업과 양계, 양돈, 그리고 저축의 장려, 과수재배를 통한 농가소득증대의 장려, 교양을 높이고 정서 함양을 위한 학술 토론회, 독서회와 학예회의 개최, 농촌의 가정 위생과 청결을 위한 보건위생운동 등의 사업을 중점적으로 추진하였다.

  • 질문1 윤봉길이 부흥원이라는 농민운동 본부를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윤봉길이 체력 증진은 물론 농촌 청년들의 협동심과 경쟁심을 함양하기 위해서 만든 단체는 무엇인가요?
  • 질문3 윤봉길이 위친계를 조직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4 윤봉길이 결성한 월진회의 사업내용을 정리해 써봅시다.

읽기자료 4

  1929년 3월 부흥원의 낙성식을 기념하는 학예회를 개최하고 아동 우화인 토끼와 여우를 공연하였다. 극본은 『이솝우화』를 바탕으로 윤봉길이 직접 쓴 것으로 헐벗고 굶주리는 우리 농촌의 실태와 강압적인 일제를 비유하여 풍자화한 연극이었다. 윤봉길은 공연 이튿날 덕산주재소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이후에도 일제는 수시로 야학의 수업 내용을 조사하는 등 윤봉길의 행동을 살폈다.
  윤봉길은 일제 식민지하에서 농민운동의 한계를 절감하게 되었고 민족의 현실을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윤봉길이 월진회 활동과 농민운동으로 일제의 끊임없는 간섭과 탄압을 받으며 민족의 현실을 번민하던 중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윤봉길은 광주학생운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뒤이어 보도된 함흥지역 한국인 3명의 타살사건에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되었다.
   또한 윤봉길은 스승인 오치서숙 성주록 선생의 안내로 유교부식회(儒敎扶植會)의 강연회에 참석하면서부터 사상적 전환을 가져오게 되었다. 유교부식회는 1927년 홍주의병장이었던 김복한의 아들과 그 문인들을 중심으로 유교를 부흥시켜 시대에 적합한 충성심과 의리를 높이고자 조직한 단체였다. 유교부식회는 강연회와 『인도』라는 기관지를 창간하여 활동하였다. 윤봉길은 김복한의 수제자인 전병욱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윤봉길은 농민운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광주학생항일운동과 함흥지역 한국인 3명의 타살사건에 대한 충격, 유교부식회의 영향 등으로 고민을 거듭한 끝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망명을 결심하고 1930년 3월 고향을 떠났다.

  • 질문1 윤봉길이 토끼와 여우를 공연하고 이튿날 주재소로 끌려간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윤봉길이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어느 단체를 참석하면서부터인가요 ?
  • 질문3 윤봉길이 망명을 결심하게 된 계기를 세 가지로 정리해 봅시다.

읽기자료 5

  윤봉길은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결심하고 1930년 3월 6일 고향을 떠나 상하이로 떠났다. 신의주를 거쳐 안동(오늘날 단둥[丹東])을 지나 칭따오[靑島]에 도착하여 일본인이 운영하는 세탁소에서 1년간 일했다. 여비가 마련되자 1931년 5월 8일 칭따오를 떠나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윤봉길은 상하이에 도착하자 프랑스 조계에 있는 대한인교민단 사무소를 찾아가 김구 등을 만나 독립운동에 참여할 뜻을 전하였다.
  윤봉길은 생활을 위해 한국인 박진이 운영하는 말총으로 모자와 생활용품을 만드는 공장에 취업하였다. 윤봉길은 거기에서 한국인 노동자 17명으로 한인공우친목회를 결성하여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32년 들어 베이징으로부터 말총의 반입이 끊어지고 박진과의 사소한 오해로 윤봉길은 공장에서 해고되었다. 이후 전차표 검사일을 하고 있는 계춘건과 함께 채소장사와 밀가루 장사를 하기도 하였다.
  윤봉길은 박진의 공장에서 매주 1회씩 김구가 찾아올 때마다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시국문제를 토론하였고 방문하지 않을 때는 밖에서 김구를 만나 독립운동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으며 이봉창이 도쿄로 파견되었다는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둘은 신뢰하는 사이가 되었다.
  윤봉길은 김구를 만나 자신이 상하이에 온 목적을 밝히고 이봉창 의사와 같은 역할을 담당할 각오가 되어 있으니 자신을 지도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마침 김구도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 기념일이 상하이에서 열린다는 것을 알고 이봉창의 도쿄 의거와 같은 거사를 계획하고 적임자를 찾지 못해 고민하고 있었다. 김구는 윤봉길을 몇 차례 만나 독립운동의 결연한 의지를 확인하고 한국애국단 가입과 김구 자신의 계획을 언급하였다. 이에 윤봉길은 흔쾌히 응하였다.

  • 질문1 윤봉길이 상하이로 가기 위해 거쳐 간 도시 이름을 차례로 써봅시다.
  • 질문2 윤봉길이 김구를 만난 장소는 어디인가요?

읽기자료 6

     김구는 1932년 4월 20일 천장절 행사에서의 의거를 윤봉길에 맡길 것을 결심하고 상하이 공병창 주임으로 근무하는 김홍일을 찾아가 의거에 사용할 물통형 폭탄과 도시락형 폭탄을 각각 1개씩 만들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김구는 4월 26일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 계획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 보고하여 만장일치로 승인을 받았다.
  윤봉길은 4월 26일 안공근의 집에서 김구를 다시 만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가입선서문을 김구에게 제출하였다. 윤봉길은 선서문에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중국을 침략하는 일본군 장교를 죽일 홍커우 공원 의거를 결심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한인애국단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31년 9월말에 열린 국무회의 의결을 통해 결성된 임시정부 산하의 특무대였다. 임시정부는 한민족 독립운동을 고양시키고 일제의 만보산 조작 사건으로 조성된 중국인의 반한 감정의 해결과 만주사변과 상하이사변으로 조성된 위기 타결책으로서 김구를 대장으로 하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한 것이다.
  4월 27일 윤봉길은 3장의 사진을 찍고 일본 보자기를 구입한 다음 김구의 지시대로 숙소를 동방공우로 옮겼다. 이날 저녁 7시 30분 김구가 동방공우로 찾아와 폭탄 사용법을 알려주고 거사에 사용할 폭탄은 4월 29일 전해줄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4월 28일 윤봉길은 김구와 중국기독교청년회관에서 만나 점심 식사를 한 후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대장과 제 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의 사진과 일장기를 구입하였다. 오후에는 홍커우 공원을 현장 답사하면서 다음날 폭탄을 던질 장소까지 물색하였다. 윤봉길은 이날 오후 7시 30분 동방공우를 찾아온 김구의 요청을 받고 「자서약력」과 김구 선생을 기리는 시 1편, 조국청년들에게 남기는 유시 1편, 두 아들에게 남기는 유시 1편을 써서 오후에 홍커우 공원을 현장 답사하면서 쓴 「신공원을 답청하며」의 감상시와  함께 김구에게 남겨 두었다. 윤봉길은 김구와 함께 김해산의 집으로 가서 폭탄 사용 방법을 배우고 김구와 헤어져 동방공우로 돌아왔다.

  • 질문1 윤봉길이 홍커우 공원 거사 전 가입한 단체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윤봉길이 홍커우 공원 거사를 결심한 목적은 무엇인가요?
  • 질문3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한 이유를 써봅시다.

읽기자료 7

  윤봉길은 4월 29일 아침 6시경 동방공우를 나서 김해산의 집으로 가 김구, 김해산과 마지막 아침 식사를 하였다. 윤봉길은 도시락 폭탄, 물통형 폭탄 그리고 일장기를 지니고 김구와 함께 걸으면서 자신이 새로 산 회중시계를 김구의 시계와 바꾸었다. 윤봉길은 자신의 시계는 1시간 밖에 쓸 일이 없으니 김구의 오래된 시계와 바꾸자고 한 것이다. 김구도 윤봉길의 시계를 이승에서 헤어지는 기념품으로 생각하고 바꾸었다. 김구는 이 때 가능하면 기회를 포착하여 폭탄 2개를 모두 투척할 것을 부탁하였다.
   윤봉길은 김구와 헤어지고 자동차를 타고 오전 7시 45분경에 홍커우 공원 입구에 도착하였다. 윤봉길은 일본인으로 행세하며 입장권을 보여 달라는 중국인 수위의 요구를 일축하면서 공원에 입장하였다.
  식단에는 천장절 행사를 위하여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대장, 제 9사단장 우에다 중장, 가와바타 상하이 일본인 거류민단장 등 총 7명의 군부와 정계의 수뇌부가 도열해 있었다. 이날 기념식장에는 일본인 1만여 명과 일본군인, 각국 외교관과 무관들이 초청되어 총 2만여 명이 참관하고 있었다.
  천장절 행사는 1부와 2부로 나뉘어 진행 되었는데 1부 행사인 관병식이 9시 30분에 시작하여 11시 30분에 종료되었다. 그리고 잠시 뒤 제 2부 행사인 관민합동의 축하식이 계속되었다. 윤봉길은 중앙 식단의 후면에서 관병식과 축하식을 지켜  보면서 폭탄을 던질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나 경비가 삼엄하여 두 개의 폭탄을 던질 기회가 마땅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여 어깨에 맨 물통형 폭탄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개회사와 축사가 있은 후에 비가 심하게 내리기 시작하고 일본국가인 기미가요 합창이 시작되어 참관자들이 한 눈을 팔지 않게 되자 기미가요가 거의 끝날 무렵 도시락 폭탄을 내려놓고 2-3명을 어깨로 밀면서 4m 정도 앞으로 나아가 19m 거리에서 물통형 폭탄을 단상을 향해 던졌다. 폭탄은 정확히 단상의 중앙에 떨어져 7명의 수뇌부는 모두 자리에 쓰러지고 행사장은 엄청난 혼란에 휩싸였다. 1932년 4월 29일 11시 50분의 일이었다.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대장과 가와바타 상하이 일본인 거류민단장은 사망하였고 나머지 5명도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의 홍커우 공원 의거는 일본의 군부와 정계 인사 7명을 일거에 섬멸한 쾌거였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케 하는 한인애국단의 성공적인 특무 공작이었다.

  • 질문1 윤봉길이 의거 장소로 가면서 가지고 간 것은 무엇입니까?
  • 질문2 윤봉길은 행사장에 어떠한 방법으로 입장했나요?
  • 질문3 천장절 기념식에 참여한 일본 주요인사와 참관인원은 몇 명인가요?
  • 질문4 윤봉길이 물통형 폭탄만을 사용하기로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5 윤봉길의 홍커우 공원 의거의 의의를 써봅시다.

읽기자료 8

   윤봉길 의사는 현장에서 붙잡혀 상하이 파견 일본헌병대사령부에 감금되었다. 여기에서 두 차례의 신문을 받았고 5월 25일에는 상하이 파견 일본군 군법회의에서 살인, 살인미수, 폭발물 단속 벌칙 위반죄 등으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의거 이후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은 소속 경찰을 총동원하여 프랑스 조계의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무차별 수색과 검거를 단행하였다. 이에 안창호를 비롯한 12명의 독립운동가를 붙잡아 가혹한 신문을 진행하였다. 이에 김구는 의거와 관련이 없는 상하이 한국 동포에 대한 무차별의 체포를 걱정하여 홍커우 공원 의거의 배후는 자신과 한인애국단이며 의거 집행자는 윤봉길이라는 사실의 「홍커우공원 작탄안의 진상」이라는 편지를 영문으로 각 신문사에 발송하였다.
  윤봉길 의사는 11월 18일 삼엄한 경비 속에 일본으로 호송되어 오사카의 육군위수형무소로 이감되었다. 12월 18일 밤 가나자와로 이감되었으며 12월 19일 아침 7시 40분 가나자와 시외의 미츠코지 육군작업장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
  일제는 윤의사 순국 직후 그곳에서부터 3Km 떨어진 가나자와시 노다산[野田山] 육군 묘지와 인접한 가나자와시 공동묘지 북쪽 한모퉁이에 암매장하고 봉분임을 알지 못하게 평평하게 위장하였다. 그곳은 공동묘지 참배객의 길이며 묘지관리소 바로 아래 한가운데로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할 장소였다. 일제는 총살 전에 이미 구덩이를 파놓고 대기하고 있다가 총살집행을 끝나자마자 서둘러 입관 운반하여 십자가 형틀과 함께 묻어 흔적조차 없애려 한 것이다.
  윤봉길 의사의 유해 발굴은 1946년 3월 6일 한국에서 파견된 서상한 대표를 비롯한 4명의 임시정부 유해발굴단에 의해 이루어졌다. 매장할 때 독경을 했다는 일본 여승의 고증으로 십자가 형태의 나무틀, 구두, 관, 피 묻은 옷, 유골 등을 발견하였다.
  윤봉길 의사의 유골은 3월 8일 가나자와를 떠나 다음날 임시정부 출장소에 도착하여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박열을 비롯한 수많은 동포들과 학생들의 참배가 있었다.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5월 중순 부산에 도착하여 5월 21일에는 대규모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봉환된 윤봉길 의사의 장례는 7월 7일 임시정부 주최 국민장으로 거행되었고 유해는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 질문1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파견 일본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 받은 죄목은 무엇인가요?
  • 질문2 김구가「홍커우 공원 작탄안의 진상」이라는 편지를 신문사에 발송한 무엇인가요?
  • 질문3 윤봉길 의사의 유해 봉환 경로를 차례로 써봅시다.
  • 질문4 윤봉길 의사가 순국한 시간과 장소를 써봅시다.
  • 질문5 일제가 윤봉길 의사의 유해를 암매장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읽기자료 9

 첫째, 일제의 만보산사건 조작으로 금이 간 한국과 중국 양민족의 연대를 다시 회복하였고 중국 영토 안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에 가능케 하는 여건을 만들었다. 한국인에 대한 중국인의 적대감은 없어지고 도리어 한국인에 대한 협조로 바뀌어 만주와 중국 관내에서 한국 독립운동의 유리한 조건을 만들었다.
   둘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침체에서 부활시키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고무된 국내외 동포들은 임시정부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재정적 지원을 재개하였고 중국 국민당을 비롯한 각 단체는 재정적 지원과 각종 편의를 제공하였다. 중국 중앙군 사령관 장제스[蔣介石]은 ‘중국군 30만 명이 해내지 못할 일을 한국청년이 해내었다’고 칭찬하면서 중국군 사관학교에 한국인의 입학을 허가해 주었다.
   셋째, 중국 상하이를 침략한 일본의 수뇌부를 섬멸하여 군사적, 정치적으로 일제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일본군이 중국 관내로의 확전을 중지하고 1932년 5월 5일 긴급하게 중국측과의 정전협정 체결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큰 영향을 미쳤다.
   넷째, 일제의 잔혹한 식민통치에 신음하고 있던 한국민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한국민족의 독립운동이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전세계에 알리는데 공헌하였다.

  • 질문1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의 역사적 의의를 정리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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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농민독본』2권 표지와 내용

  • 질문1 윤봉길이 『농민독본』을 저술한 목적은 무엇인가요?
  • 질문2 오른쪽 이은(상말) 격언 중 5개를 골라 써봅시다.

시각자료 2

사진은 윤봉길이 조직한 월진회 취지서이다.

  • 질문1 윤봉길이 월진회를 설립한 이유를 ‘읽기-3)을 참고하여 써봅시다.

시각자료 3

  • 질문1 왼쪽 사진에서 윤봉길 의사가 일본 군인에게 끌려가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오른쪽 사진을 보고 윤봉길 의사가 홍커우공원 의거를 감행한 이유를 써봅시다.
  • 질문3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와 관련된 단체를 오른쪽 사진에서 찾아 써봅시다.

시각자료 4

왼쪽은 1932. 4. 27 촬영한 것이고 오른쪽은 1946. 4. 26 촬영한 것이다.

  • 질문1 왼쪽 사진에 등장하는 두 사람의 이름을 써봅시다.
  • 질문2 왼쪽 사진을 찍은 지역은 어디이며 찍은 목적은 무엇인가요?
  • 질문3 오른쪽 사진에서 김구가 방문한 곳은 어디이며 그 목적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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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모둠별로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에 대한 당시 한, 중, 일 삼국의 보도 기사를 검색하여 비교,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2
모둠별로 윤봉길 의사처럼 한국 청년에게 보내는 시와 아들에게 보내는 시를 공동 창작하여 발표하여 봅시다.

모둠활동 3
모둠별로 윤봉길의 홍커우 공원 의거를 UCC로 만들어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4
모둠별로 윤봉길의사의 발자취를 답사하기 위한 답사계획서와 자료집을 작성하여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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