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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중기의병의 요체-쌍산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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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사랑 - 쌍산의소 항일의병에 부침

명예를 탐하지 않았기에

호화로운 무덤이 필요 없었고

황금을 구하지 않았기에

빛나는 청석(靑石)을 원하지 않았다.

 

족보에 새기고

사서에 장식하고

공과 훈을 원하지 않았기에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슬프지 않았다.

 

캄캄한 하늘 아래

그 어느 꽃보다 더 눈부신 꽃

양귀비꽃 같은 그 붉은 마음을 안고

차마 눈 뜨고 바라보기마저 현기증 나는

저기 저 깨끗한 고결한 무덤 속 침묵을 보아라.

 

산 사람들 이욕에 눈멀어 변절하고

육신 아픔에 못 이겨 굴복할 때도

썩어 그 향기 진흙 속 연꽃으로

너무도 당당한 백골의 울부짖음

날이 갈수록 고와지는 저 숭엄한 증언을 들으라.

 

목숨보다 소중한

내 조국 내 고향

그 향기론 흙 속에 묻혀

날로 고와가는 그 붉은 마음

여기 영원히 썩지 않는 사랑이 있다.

 

  2007. 9. 14. 서은(瑞隱) 문병란 삼가 칭송함쌍산의소(雙山義所)는 의병들이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훈련하던 곳으로 그와 관련된 다양한 유적이 원형을 거의 간직한 채 남아 있기 때문에 한말 호남의병은 물론 한말의병사에서도 그 의미가 크다. ‘쌍산의소’란 명칭은 오래 전부터 현지 주민들이 계당산 일대를 가리켜 ‘쌍산’ 또는 ‘쌍봉(雙峰)’ ‘쌍치(雙峙)’라고 불러온 데에서 연유한 것이 다. 쌍산의소는 양회일이 집안 재산을 들여 결성한 것으로 능주와 화순을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증리 산12 일대
현재 상태 훼손, 의병성과 막사터는 증동 동편의 계당산 기슭에 구축되어 있는데, 현재 빈 터로 의병성과 막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흔적만 여기저기 남아 있다. 의병성은 돌담 모양의 석축열이 높이 80㎝ 내외로 길게 쌓여 있으며 그 내부에는 원형 또는 방형의 낮은 돌담들이 불규칙하게 늘어선 막사터가 군집을 이루고 있다.

 양회일(1856~1908)은 1906년 음력 10월 증동마을로 찾아와 며칠 동안 머무르면서 의병운동에 임노복을 비롯한 증동마을 주민들의 협조를 요청하였다. 왜냐하면 이 마을이 산간벽지에 위치해서 의병준비에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임노복은 양회일에게 인재와 무기, 군량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흔쾌히 협조하기로 약속하였다. 아울러 임노복은 의병의 적임자로서 보성 출신의 임창모를 추천하며 거병을 위한 준비에 적극 협조하였다.
  마을 뒷산에 의병의 막사지 등을 조성하고, 증동마을 동남쪽에 대장간을 개설하여 무기를 만들었다. 주변에는 현재 쌍산의소의 발의 장소가 복원된 증동마을과 의병의 훈련장소인 막사터, 그리고 유황 저장고인 유황굴 등이 함께 남아 있다. 무기를 제작하던 곳에는 활석을 이용하여 만든 축대 위에 야철로의 벽채와 쇳물덩이의 부스러기들이 흩어져 있다. 당시 쌍산의소 의병들은 이곳에서 무기를 직접 만들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의 의기투합과 증동마을 주민들의 적극적인 협조에 힘입어 쌍산의소의 거병준비는 수개월에 걸쳐 추진되었으며, 마침내 1907년 4월 의병투쟁에 돌입할 수 있었다.
  쌍산의소는 1907년 봄 양회일, 임창모, 임노복, 안찬재, 신재의, 이광선 등이 화순군 증리를 중심으로 조직된 의병부대이다. 쌍산의소란 명칭은 오래 전부터 현지 주민들이 계당산 일대를 가리켜 ‘쌍산’이라고 불러온 데서 연유한 것이라 한다.
  쌍산의소는 1907년 4월 능주 관아 공격을 시작으로 화순까지 점령한 뒤, 광주를 점령한 후 북상할 계획이었다. 이들은 예정대로 능주와 화순을 점령하여 무기와 군자금을 노획하였으며, 관아와 우편소, 경무서, 일본인 상가 등을 불태우고, 일제의 통신시설인 전주와 전선을 절단하였다. 이어 광주를 공격하기 위해 양회일 등은 판치를 넘으려는 순간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의진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쌍산의소의 주요 인물들이 다수 체포되었고, 의진은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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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쌍산의소는 양회일 의병장의 주도하에 전남 화순군 능주에서 1906년 음력 10월부터 1907년 4월까지 활동한 의진의 호칭으로, 호남지방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의진 가운데 하나이다. 이 의진의 활동내역을 비롯하여 의병장 양회일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자료인 『행사실기』에서 이 의진을 쌍산의소라 불렀다. 
  쌍산의소의 의병장이었던 양회일은 능주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일제침략으로 국권이 기울게 되자 이를 탄식하면서 구국의 방략을 강구했던 지사였다. 청․일전쟁 이후 전기의병이 봉기할 당시에도 그는 기우만과 정재규 등 기정진의 문인들에게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고 한다.
  1906년 최익현의 태인의병이 봉기하자, 양회일은 큰 충격을 받고 거의할 것을 결심하고 호남의 이름 높은 유학자로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던 고광순, 기삼연 등과 함께 연합전선을 구축해 항일전을 공동으로 전개할 계획을 세웠다. 능주의 양회일과 창평의 고광순, 그리고 장성의 기삼연 등은 상호 긴밀한 연계하에 각자의 활동거점에서 의병을 규합한 뒤 연합전선을 구축함으로써 전력의 극대화를 통해 항일전을 효과적으로 전개하려고 하였다.

  • 질문1 쌍산의소의 구체적 활동을 알 수 있는 책은 무엇인가요?
  • 질문2 쌍산의소의 의병장은 누구인가요?
  • 질문3 양회일이 1906년 거의를 결심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 질문4 양회일은 어떤 계획을 세웠나요?

읽기자료 2

   의병을 일으킬 준비에 착수한 양회일은 우선 각지의 동지들을 규합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양열묵, 이병화 등과 함께 화개의 이광언, 남원의 노현재, 보성의 임창모, 그리고 같은 고향의 신재의, 임노복, 최기표, 안찬재 등이 양회일과 더불어 거의에 동참하였다. 또한 쌍산의소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던 임낙균, 노응현, 박용계 등도 의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대체로 능주, 화순을 비롯하여 정읍, 보성, 남원 등지에 거주하고 있었다. 쌍산의소는 양회일이 중심이 되어 능주, 화순을 비롯한 정읍, 보성, 남원 등지의 항일지사들이 함께 편성한 의진이었다. 다만 이광선과 박용계는 이 지방 사람이 아니었다.
  양회일은 능주 증동을 중심으로 의병을 훈련시킬 생각을 갖고 1906년 음력 10월경 그곳 유지인 임노복을 찾아가 협의하면서 구체적인 거사 계획을 추진하였다.
  임노복은 양회일에게 인재를 규합할 것, 병기를 수집할 것, 그리고 군량미를 확보할 것 등 세 가지 의병 방략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방안에 따라 양회일은 무기구입에 전력을 기울였고, 증동에 의병을 집결시켜 군사훈련을 시켰다. 이러한 준비과정은 이후 1907년 음력 3월 초까지 계속되었고, 그 결과 증동은 의병기지로 바뀌어갔다. 광복 직후 인근 유림들이 공론으로 의병이 집결해 있던 중조산을 ‘의산(義山)’으로, 증동을 ‘의병촌(義兵村)’으로 명명할 것을 주장한 사실에서도 이러한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때 집결한 의병의 구성원 대부분은 화적을 방어하기 위해 당시 능주군에서 자체적으로 편성한 방도(防盜) 조직에 속한 장년들이었다. 최고 책임자였던 양회일은 방도조직을 의병세력으로 전환시켰다.

  • 질문1 쌍산의소에 참여한 인물들의 출신지역을 써봅시다.
  • 질문2 양회일이 능주 증동마을에 의병 기지를 만드는데 공헌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 질문3 임노복이 주장한 의병방략 세 가지를 써봅시다.
  • 질문4 쌍산의소에 참여한 의병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3

  양회일은 1907년 음력 1월 중순경 인근 각지로 격문을 발송하여 인근 주민들에게 의병에 동참하고 항일전을 원조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때는 능주의 의병과  연합전선을 펴기로 약속했던 양한규의 남원의병이 음력 설날 패했다는 소식이 들려온 직후였다. 이에 앞서 1907년 1월 초에 양회일의 핵심 참모이던 양열묵은 남원으로 가서 양한규 의병장, 창평의 고광순 의병장 등과 함께 항일전의 방략을 협의한 끝에 각 지역에서 거의해 공동으로 연합전선을 펴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양한규 의병의 소식은 양회일에게 충격을 주었다.
  양회일은 호남지방에서는 능주, 창평, 장성, 남원 등지의 의병세력이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공동전선을 형성한다는 커다란 전략 하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부서와 대오를 정하고 쌍산의소를 편성하였다. 쌍산의소는 선봉-중군-후군 등 3군 중심의 체제로 편제되었다. 명문유생 중심의 의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부대 중심으로 편제되어 있던 점은 특기할 만하다. 나아가 이 의진에는 다른 의진에서는 그 사례를 볼 수 없는 군의(軍醫)가 편제되어 있었다. 군의를 배치한 것은 이 의진이 앞으로 치열한 항일전을 전개하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 질문1 쌍산의소가 연합전선을 펴기로 한 지역은 어디인가요?
  • 질문2 쌍산의소 편제의 특징을 세 가지로 정리해 봅시다.
  • 질문3 쌍산의소에 군의를 편제한 의도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4

  전열을 정비한 쌍산의소는 곧 항일전에 나섰다. 능주와 함께 동시다발적으로 거의하기로 한 창평·장성 등지에서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때 거의하지 못한 채 독자적으로 활동에 들어가게 되었다.
쌍산의소에서는 항일전을 수행하기에 앞서 의병의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조목별로 제시한 「서고군중문」을 발표하여 의진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군율을 엄격히 하였다. 「서고군중문」은 의병들이 군자금 수집 등의 명목을 내세워 일반 주민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말도록 하고 방도조직이 사용하던 화포 등의 무기를 수집해 항일전에 사용하도록 한다는 것이며, 나아가 선봉장·중군장·후군장의 역할과 임무를 서로 명확히 하고 또 포군과 보군의 구별을 확실하게 함으로써 진중의 규율을 엄격하게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쌍산의소의 활동방략으로는 두 가지 주장이 제시되었다. 중군장 임창모는 본격적인 항일전을 수행하기 전에 전력강화를 위해 지리산에 들어가 먼저 군사훈련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신재의는 호남의 요충지인 광주를 즉시 공략하여 일본세력을 몰아냄으로써 민심을 움직일 수 있고 나아가 큰 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광주진위대의 해산군인들과 함께 광주를 점령할 수 있다는 방안까지 내어놓았다.
  결국 쌍산의소는 두 가지 주장을 절충하여 능주와 화순을 먼저 공격하여 일본세력을 몰아낸 뒤 동복에서 일정기간 훈련을 쌓을 계획을 세웠다.

  • 질문1 쌍산의소「서고군중문」의 내용을 다섯 가지로 정리해 봅시다.
  • 질문2 쌍산의소에 논의되었던 활동방략 두 가지를 써봅시다.
  • 질문3 쌍산의소의 최종적인 활동방략은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5

  쌍산의소 의병들은 1907년 4월 하순경 기습공격으로 능주와 화순을 일거에 점령하였다. 의병들은 두 부대로 나뉘어 능주와 화순을 동시에 공격하여 관아를 비롯하여 우편소, 경무서, 일본인 상가 등을 습격하였다. 또한 의병들은 여러 가지 문서류와 의복 및 침구류, 일본상인의 물품 등을 불태웠고, 서양식 총 등의 무기를 수거하였으며, 전선주를 파괴하고 전선을 자르는 등 통신시설을 파괴하였다.
 쌍산의소의 의병은 일본세력은 물론 친일관리들도 공격목표로 삼았다. 의병들이 관아 소재지였던 능주와 화순를 공격한 것은 그곳이 바로 친일관리와 일본세력의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동시에 의병들은 전투경험을 쌓고 양총과 같은 신무기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의병들은 이와 같은 전력보강을 통해 광주를 공격하고 나아가 호남의 일제 침략세력을 쫓아내려 했던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의진은 숲이 무성하고 골짜기가 깊으며 산천이 험한 동복으로 이동하여 휴식을 취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쌍산의소의 의병들이 광주를 공격하기 위해 판치(板峙)를 넘으려는 순간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의진이 무너지고 말았다. 의병장 양회일을 비롯한 의진의 핵심인물 6명은 체포되었고, 사상자도 다수 발생하였다. 의병장 양회일과 중군장 임창모는 15년형, 안찬재, 유태경, 신태환, 이백래는 10년형을 각각 선고받고 전남 신안군 지도로 끌려가 고초를 겪은 뒤 1907년 12월 특사로 모두 풀려났다.

  • 질문1 쌍산의소 의병들이 1907년 4월 하순경 점령한 지역은 어디인가요?
  • 질문2 쌍산의소에 의병이 능주와 화순을 공격한 이유를 써봅시다.
  • 질문3 쌍산의소가 능주와 화순 공격을 통하여 얻은 점은 무엇인가요?
  • 질문4 쌍산의소 의병이 광주를 공격하다가 일본군의 습격을 받은 곳은 어디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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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쌍산의소 전경

  • 질문1 숲속으로 둘러싸인 곳에 넓은 터가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엇을 하던 곳일까요?

시각자료 2

쌍산의소 대장간 터

  • 질문1 쌍산의소 대장간 터는 무엇을 만들던 장소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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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모둠별로 전기, 중기, 후기 의병의 특징과 전개과정을 조사하여 보고서를 작성해 봅시다.
모둠활동 2
모둠별로 쌍산의소의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써서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쌍산의소는 무기를 제작하였던 대장간터, 화약을 채취하였던 유황굴, 자연석으로 쌓은 의병성과 막사터, 훈련장, 호남창의소 본부 가옥 등이 남아 있다. 모둠별로 의병 전쟁의 애국심과 역사성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역사교육장 및 체험장을 만들기 위한 기획안을 작성하여 발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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