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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역사는 선생이 예견된 대로 진행되었습니다. 일본은 입으로는 조선의 자주, 독립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국권을 침해하고, 또 청․일전쟁, 러․일전쟁으로 청국과 러시아 세력을 배제하고 --- 1905년 기미보호조약(을사늑약)을 강요하여 조선국을 실질적으로 멸망시켜 버렸습니다. 면암 선생의 생애는 후인에게 커다란 감명을 줍니다. 나는 선생을 괴롭혀 선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일본인의 자손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니 나의 가슴은 괴로워집니다. 나는 일본의 역사에 대하여 반성하면서 선생을 추모하여 생각하고 선생에 대해 깊은 존경을 표합니다.”(1983. 11. 14)
이 글은 일본의 하타나[旗田魏] 교수가 면암 최익현을 추모하여 쓴 글이다.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은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고, 호는 면암(勉菴)이다. 화서 이항로의 위정척사 사상을 이어받아 민족주의 사상으로 체계화한 한말의 실천적인 지식인이다. 1876년에는 도끼를 메고 대궐 앞에 나가 ‘5불가소’를 올려 강화도조약을 반대하였다.
최익현은 관직을 사양하고 1900년 4월 충남의 정산으로 옮겨 거주하면서 1905년 을사늑약 반대 상소를 올렸으며, 1906년 늙은 몸을 이끌고 전라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켜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그는 대마도에서 함께 유배된 ‘홍주 9의사’와 단식 투쟁을 전개하는 등 일제에 항거하다가 그 해 11월 유배지에서 생애를 마쳤다.
중화당은 최익현이 68세인 1900년부터 살던 집이다.
역사적 배경
현재 주소 | 충청남도 청양군 목면 송암리 17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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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태 | 변형, 1914년 건립된 모덕사가 집 주위를 감싸고 있으며, 청양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
최익현은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나 9세 때 김기현의 문하에서 유학의 기초를 공부하였고, 14세 때 벽계로 은퇴한 성리학의 거두 이항로의 문하에서 성리학의 기본을 습득하면서 이항로의 애국과 호국의 정신을 배웠다.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이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수봉관, 지방관, 언관으로 재직시에는 불의와 부정을 척결하여 자신의 강직성을 발휘하였다. 1868년(고종 5)에는 경복궁 중건의 중지,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려 관직을 쫓겨났다.
1873년 동부승지로 기용되자 명성황후 세력과 손을 잡아 서원 철폐 등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호조참판으로 승진되자 다시 대원군의 실정 사례를 열거하여 왕의 친정과 대원군의 퇴출을 주장함으로써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으나, 임금의 아버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1875년에 풀려났다.
이후 1876년에는 도끼를 메고 대궐 앞에 나가 ‘5불가소’를 올려 강화도 조약을 반대하다가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1879년 석방된 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날 때까지 약 20년 동안 침묵을 지켰다. 이 시기는 일본과의 개국 이래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등 사건이 일어나 국내의 정세가 대단히 복잡하였다. 당시 항일 투쟁도 이제까지의 상소라는 언론 수단에 의한 개인적, 평화적 방법이 아닌 집단적, 무력적인 방법으로 바뀌었고 위정척사사상도 외국을 배척하는 국수주의에서 민족의 자주의식을 바탕으로 한 민족주의를 내세웠다.
그의 항일 구국이념은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폭발하였다. 그는 침묵을 깨고 상소를 올려 항일척사운동에 앞장섰다. 1898년(광무 2)에는 궁내부특진관이 되고 이어 중추원 의관, 의정부 찬정, 경기도 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1900년 충남 정산으로 옮겨 후진 교육에 힘썼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고종의 비밀 편지를 받고 서울로 올라와 왕의 자문에 응하였고 일본으로부터의 차관 금지, 외국에 대한 의존 금지 등을 상소하고 친일세력의 처단을 강력히 요구하다가 두 차례나 일본 헌병들에 의해 시골로 잡혀갔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를 올려 의거의 심경을 토로하고, 8도 백성에게 포고문을 내어 항일투쟁을 호소하며 납세 거부, 철도이용 안하기, 일체의 일본상품 불매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6에는 74세의 고령으로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순창에서 관군의 포위를 당하자 같은 동족과는 싸울 수 없다며 전투를 중지하였다. 서울로 호송된 그는 쓰시마섬[對馬島]에 유배되었으나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하면서 단식을 계속하다가 순국하였다.

읽기
읽기자료 1
최익현은 1833년 12월 5일 경기도 포천군 내북면 가채리에서 의정부 참정을 지낸 부친 최대와 경주 이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6세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총명함과 근면함으로 학문에 매진하였다. 14세부터 위정척사파의 거두인 화서 이항로의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학문을 배웠다.
화서 이항로는 당시 유림의 거두로서 성리학의 정통 석학으로 숭앙받던 인물이었다. 이항로는 외세의 침략적 도전으로 우리의 전통적인 법도와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개탄하면서 나라의 기강 법도와 정통성 회복을 위한 위정척사를 주장하였다.
이항로는 최익현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각별한 가르침을 베풀었다. 15세 되던 해 최익현이 이항로를 떠날 때 면암(勉菴)이라는 호를 주었다.
그 후에도 학문과 과거를 위한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동문들 사이에서도 높은 학문과 인격으로 존경받았다.
20세 되던 해 가정이 어려웠던 최익현은 스승인 이항로의 도움으로 관례를 치루었고 이 해에 청주 한씨와 결혼하였다.
그 후 성균관에 머물면서 경서 공부에 매진하였으며 형이 양자로 가면서 어려운 가정 살림에 부모님을 모시는 처지가 되자 과거를 통해 관직을 나가고자 하였다.
1855년 23세 되던 해에 명경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를 시작으로 사간원 정언, 신창현감, 사헌부 장령 등 여러 벼슬을 거쳤다.
- 질문1 화서 이항로의 문하에서 공부하기 시작한 때는 언제인가요?
- 질문2 최익현의 스승인 이항로의 사상을 정리해 봅시다.
읽기자료 2
“곧 저들의 물화는 그 생산하는 방법이 손으로 하는 공산품이기 때문에 일일생산량으로도 남음이 있지만, 우리의 물화는 그 생산하는 방법이 토지를 중심으로 하는 농산품이기 때문에 일년 생산량으로도 오히려 부족하다. 부족한 것으로 유여한 것과 교역한다면 우리가 어찌 인궁(因窮)해지지 않겠으며 일계(日計)로 세계(歲計)를 접할 수 있다면 저들이 어찌 넉넉해지지 않겠는가
특히 서양문물에 대하여는 위와 같이 서양과의 교역은 조선의 열악한 경제상황에서는 파멸만을 가져올 것이라는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양물배척론(洋物排斥論)을 제기함으로써 서양의 침투에 직면하여 대항할 수 있는 현실성 있는 경제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최익현에 있어서의 이러한 의식은 그의 스승인 화서 이항로의 의식과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 질문1 최익현은 서양과의 교역에 대하여 어떠한 입장을 가지고 있나요?
- 질문2 최익현이 Q1과 같은 주장하는 논리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3
최익현은 36세 때 사헌부 장령으로 임명되었다. 이때는 대원군이 내정의 혁신을 단행하면서 정부의 고관들을 많이 바꾸고 서원을 철폐하며, 경복궁을 중수하고 세제를 크게 개혁함으로써 많은 선비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그는 당시의 잘못된 점을 없애는 방법으로 토목역사의 중지, 과도한 세금 수취의 중지, 당백전의 혁파, 사대문세의 금지 등 4조목을 요청하는 “장령시언사소(掌令時言事疏)”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첫째, 경복궁의 무리한 중건을 중단함으로써 토목의 역(役)을 중지할 것과 둘째로, 원납전의 철폐와 아울러 취렴(聚斂)을 파(罷)할 것, 셋째 당백전을 폐할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성의 사대문을 드나들 때 거두는 문세를 폐지하라는 것이었다. 이 상소문은 당시 집권하던 대원군의 개혁정책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이었기에 곧바로 탄핵받아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 질문1 최익현이 시폐4조의 상소를 올린 시대적 배경은 무엇인가요?
- 질문2 최익현이 상소를 올린 시폐 4조의 내용을 정리해 봅시다.
읽기자료 4
“황묘(皇廟)의 철거는 군신의 윤리가 무너진 것이므로 복구하여야 한다. 서원의 혁파는 사제 간의 의리가 끊어진 것이므로 전과 같이 거행해야 하며, 죽은 자가 양자를 가는 것은 부자간의 윤리가 문란하여진 것이므로 이를 금하고, 국적(國賊)들을 신원(伸寃)한 것은 충신과 역적의 분별이 혼동된 것이므로 이를 소급하여 죄주어야 한다.”
최익현은 1873년 호조참판을 사직하면서 대원군의 하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계유상소를 올렸다.
최익현은 대원군의 정책이 인륜과 명분의 기강을 근본적으로 파괴한 것이라 비판하였다. 이로 인해서 대원군의 극적인 하야가 이루어졌지만, 대원군에게 가까운 대신 이하 모든 관료가 그들의 진퇴를 걸고 강경하게 최익현이 골육을 이간하였다 하여 그를 엄히 벌할 것을 주장하며 다투어 상소를 올려 왕도 할 수 없이 최익현을 제주도로 유배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 질문1 최익현은 계유상소에서 대원군의 정책을 무엇이라고 비판하고 있나요?
- 질문2 최익현의 계유상소 결과 어떠한 정치적 변화가 초래되었나요?
읽기자료 5
1876년 1월, 일본군함 운요호가 강화도에 들어와 위협하자, 조선정부는 일본사신 구로다 교타카의 요구에 응하여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에 최익현은 도끼를 지니고 궁궐 앞에 엎드려 화의(和議)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는 강화도조약의 부당성을 5개 항목에 걸쳐 강조한 오불가지론(五不可之論)으로 요약된다.
첫째, 일본의 무력적인 위협에 조약을 맺게 되면 조선의 약함을 상대에게 알려주는 것이 되고, 이에 그들의 요구는 끊임없이 계속되어 장래에 어려운 문제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둘째, 우리나라와 일본의 근본적인 산업 구조의 차이로 인하여 생기는 교역의 위험성을 지적하였다. 일본의 공산품과 조선의 공산품이 서로 교역하는 것은 조선 경제의 파멸과 농촌사회의 황폐화를 가져온다고 하였다.
셋째, 천주교의 유입으로 인하여 우리의 정통사상과 전통적인 미풍양속이 파괴될 위험이 있다는 지적이다. 일본은 서양세력과 같아서 그들과 교역을 하게 되면 서학과 천주교가 유입되어 인륜 도덕이 파괴될 것이라고 하였다.
넷째, 일본사람이 자주 왕래하거나 거주하게 되면 조선 사람의 재산이나 부녀자들이 겁탈 당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다섯째, 과거 청과의 강화를 사례로 들어 일본과의 조약체결을 정당화하는 사람을 비판하고 있다. 조선과 일본의 조약은 아무리 불안한 점이 따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신뢰성이 없는 짐승과 같은 일본과는 교역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성리학의 중화사상에 기반한 것이다.
이 상소를 통하여 최익현의 척사사상이 보다 구체화되며, 보수적․배타적 입장을 넘어서 새로운 민족적 자주의식을 표방하게 되었다. 즉 일본의 무력적 위협으로부터 화약(和約)한다는 것은 일본의 침략을 계속 유도할 것이라는 조약의 불평등성과, 일본의 침략성을 간파하고 자주적 입장에서 동등한 화약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최익현의 인식은, 제국열강의 식민지침략의 첫 단추가 불평등조약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역사적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적․정치적 자주성을 제시함으로써 최익현의 사상이 배타적인 입장을 넘어 자주의식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상소로 최익현은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최익현은 이때부터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기 전까지 20년 동안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 질문1 병자지부소를 올리게 된 역사적 사건은 무엇인가요?
- 질문2 강화도조약의 부당성을 강조한 오불가지론(五不可之論)을 요약, 정리해 봅시다.
- 질문3 병자지부소가 가지는 의의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6
최익현이 그 간의 침묵을 깨고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청토역복의제소를 올려 갑신정변의 주모자 처벌과 그 배후세력인 일본에 대한 성토, 의복의 복고를 주장하였다. 또한 친일정권에 의해 추진된 개화정책의 모순을 지적하여 외세에 의한 개화나 자주는 무의미하며 결과적으로 파멸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최익현의 지적은 당시의 개화정책의 허구성을 예리하게 파악한 것으로 시대적인 급선무로서 외국 세력에 대한 반대가 개화보다 더 시급하다는 논리로 요약할 수 있다. 특히 이 시기 최익현의 사상변화에 있어서 주목할 점은 국제공법을 적용하여 일본을 단죄하자는 주장을 제기한다는 점이다.
최익현은 각 국이 화친을 맺어 소통하는 데는 ‘공법’과 ‘조약’이 있음을 지적하여, 이 공법과 조약에 따라 일본의 침략적 만행에 대해 만국공론의 비판을 받도록 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최익현의 인식은 서양과 대등한 관계의 국제사회를 긍정하는 현실적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최익현의 척사론은 결코 중국에 대한 예속적 사대주의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국제관계 속에 국가의 자주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국제질서의 유지를 목적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는 국가의 자주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새로운 국제질서를 능동적으로 찾아가고 있었다.
- 질문1 최익현이 청토역복의제소를 올리게 된 역사적 사건은 무엇인가요?
- 질문2 청토역복의제소에서 제기한 최익현의 주장을 써봅시다.
- 질문3 최익현의 국제공법을 적용하여 일본을 단죄하자는 주장이 가지는 사상적 변화의 의의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7
“…계약서는 다행히 폐하와 참정의 인가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저들이 가진 것은 역적들이 억지로 만든 헛된 조약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니 빨리 박제순 이하 다섯 역적의 목을 베어 매국한 죄를 바로 잡고 외무부의 관리로 하여금 일본 공사관에 빨리 조회하여 맹약을 강요한 거짓 문서를 없애도록 하고 또 급히 각국의 공사관에 통보한 뒤 담판하여 일본이 강세를 믿고 약국을 위협한 죄를 성토해야만 할 것이다.”
최익현은 1905년 10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11월 29일 상소를 올려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조약에 참여한 외부대신 박제순 등 5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일본을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하면서 조약을 국제사회의 정치문제로 보고 해결하고자 하였다.
- 질문1 청토오적소를 올리게 된 역사적 사건은 무엇인가요?
- 질문2 을사 5적의 이름을 써봅시다.
- 질문3 을사늑약 폐기를 위한 최익현의 주장을 세 가지로 정리해 봅시다.
읽기자료 8
최익현의 항일의병 도모는 1905년 2월 말 충남 노성의 궐리사 집회에서 나타났다. 최익현은 이 자리에서 친일세력에 대한 성토와 차단, 납세 거부 투쟁, 일본상품 불매운동, 연명 상소 투쟁 등 일치단결하여 국권회복에 동참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무렵 호남지방에서 고석진, 최제학, 임병찬이 의병을 도모하던 중 충남 정산의 최익현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최익현은 송병선의 순국에 충격을 받아 삼남의 우국지사들과 연계하여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항일의병을 전개하려는 전략을 계획하고 있었다. 특히 민종석의 홍주의병과의 연계에 힘을 기울였다.
최익현은 임병찬을 만나 의병모집, 군사물자 조달, 군사훈련, 타 지역과의 연계 등 일체의 군사 일을 맡기고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
최익현은 1906년 6월 4일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거의하기로 하고 5월 24일 서울로 북상하여 고종에게 일제 식민 통치 기관의 대표와 담판을 통해 국권 회복을 도모한다는 거의의 목적을 담은 상소를 올렸다.
74세의 최익현은 6월 4일 무성서원에서 창의 선언을 하고 즉시 80여명의 의병을 구성하였다. 태인 의병은 태인, 정읍, 내장사, 구암사를 거쳐 순창에 도착하였다. 백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순창으로 행군하는 동안 태인의병은 군사와 무기를 모아 전력을 강화해 나갔다.
순창에서 전력을 보강하고 곡성을 지나 남원 방면으로의 진출을 꾀하였으나 관군의 방비가 너무 강해 다시 순창으로 돌아와 진을 쳤다. 이 때 군사는 900여명에 달했지만 대부분이 유생이고 총을 휴대한 사람은 300여명에 불과하였다. 주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로 커진 외형에 비해 실질적인 전력은 빈약하였다. 일제는 태인 의병의 파급력을 고려하여 헌병과 수비대 군인을 파견하였으나 패하고 말았다.
이에 일제는 군부를 통하여 광주와 전주․안동의 진위대까지 동원하여 태인 의병을 탄압하였다. 6월 11일 광주관찰사 이도재는 의병 해산을 명하는 고종의 조칙과 관찰사의 조칙을 보내오면서 해산을 종용하였으나 의병장 최익현은 거절하였다. 하지만 정부의 지시를 받은 전주관찰사 한진창은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를 출동시켜 순창의 태인 의병을 압박하였다.
최익현은 이들을 일제의 군경으로 알고 전투태세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동족인 진위대 군인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함께 왜적을 섬멸하도록 설득했지만 진위대는 이를 무시하고 해산을 계속 종용하였다. 이에 최익현은 “동족끼리 서로 박해하는 것은 원치 않으니, 너희들은 즉시 해산하라”고 하여 부득이 의병들에게 해산을 명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해산하지 않은 의병은 100여명에 이르렀다. 진위대는 11일 오후 6시경 의병을 공격해왔다. 이에 최익현은 의병들에게 다시 한 번 떠날 것을 명령하고 순창 객관에 눌러 앉았다. 이 때 남은 의병은 22명이었다. 진위대는 의병 측으로부터 아무런 저항이 없자 사격을 중지하고 밤을 지새웠다.
6월 12일 최익현, 임병찬, 고석진, 최제학 등 13명의 의사는 체포되어 전주를 거쳐 18일 서울의 헌병대사령부에 구금되었다. 1906년 8월 14일 최익현은 3년, 임병찬은 2년을 선고받고 쓰시마섬에 유배되었고, 고석진과 최제학은 4개월, 나머지 의사들은 태형 100대를 선고 받았다. 74세의 고령으로 쓰시마섬에 유폐되었던 최익현은 1907년 1월 1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유해가 1월 5일 부산에 도착하자 수많은 인파가 애도하는 가운데 성주, 황간, 공주를 지나 정산의 집에 도착하여 망국민의 통분 속에 노성의 무동산(충남 논산시 상월면 지경리) 기슭에 묻혔다.
최익현의 의병 봉기는 호남지방의 의병 확산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의병의 전국적 확산에 기여하였다. 호남지방의 중기의병을 선도한 태인의병은 호서지방의 홍주의병과 함께 의병 전쟁을 전국적으로 확산, 고조시킨 대표적 의병 활동이었다.
- 질문1 최익현이 1905년 노성의 궐리사 집회에 주장한 내용은 무엇인가요?
- 질문2 최익현이 임병찬 등의 의병장 추대에 응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3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킨 날과 장소를 써봅시다.
- 질문4 태인 의병의 진격로를 차례대로 써봅시다.
읽기자료 9
최익현은 1906년 일본군사령부로 넘겨져 끈질긴 회유와 심문에도 굴하지 않고 저항하다가 임병찬과 함께 쓰시마섬에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임병찬에게 구술하여 유소를 전했다.
“--- 바라옵건데 폐하께서는 나라일이 할 수 없이 되었다고 속단마시고, 큰 뜻을 더욱 굳게 하여, 과감하게 용진하여 원수 왜놈들에게 당한 치욕을 되새겨 실속없이 형식을 믿지 마시고, 놈들의 무도한 위협을 겁내지 마시고, 간사한 무리들의 아첨을 듣지 마시고, 힘써 자주체제를 마련하여 길이 남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을 버리고 더욱 와신상담의 뜻을 굳게 하여 실력양성에 힘써서 영재를 등용하고 군인과 백성을 잘 돌보아 길러 사방의 정세를 보살펴서 일을 꾸미면 백성들은 진실로 임금을 높이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우러나올 것이요, --- 신이 죽는 마당에 이르러 정신없는 소리를 지껄인다고 속단마시고 더욱 보중하시기를 지하에서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유언으로 올린 상소에서 왕에게 남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을 버리고 자립정신을 굳게 할 것을 바라고, 국제 정세로 볼 때 일본은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 질문1 최익현이 유배된 장소는 어디인가요?
- 질문2 최익현이 죽기 전 고종에게 간청한 내용을 정리해 봅시다.

시각자료
시각자료 1

사진은 1992년에 세워진 병오창의기적비(왼쪽)와 1929년 일제의 눈을 피해 제자들에 의해 몰래 간행된 최익현의 일성도(14세부터 대마도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평생도) 중 일부이다.
- 질문1 이 비석이 세워진 곳은 어디인가요?
- 질문2 병오창의가 일어나게 된 역사적 사건은 무엇인가요?
- 질문3 병오창의와 관련된 의병장은 누구인가요?
시각자료 2

순창의병항일의적비
- 질문1 이 비의 현재 위치는 순창초등학교 앞이다. 의병이 주둔하였을 당시에는 어떤 건물이 있었나요?
- 질문2 현재 위치에 순창의병항일의적비를 세운 이유는 무엇인가요?
시각자료 3

사진은 74세의 최익현이 쓰시마섬으로 유배를 가는 모습(왼쪽)과 일성도의 일부이다.
- 질문1 최익현이 쓰시마섬으로 유배를 간 이유는 무엇인가요?
시각자료 4

- 질문1 오른쪽 사진은 1986년 세워진 최익현의 순국비이다. 왼쪽 지도에 위치를 표시해봅시다.
- 질문2 최익현의 순국비가 슈젠지(修善寺)에 세워진 이유는 무엇인가요?

모둠활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