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영역

본문영역

  • 도입
  • 역사적 배경
  • 읽기
  • 시각자료
  • 모둠활동

주요사적지 배움터

이상정 집

도입

부모님의 생각과 나라 생각에
더운 눈물 여침(旅枕)을 적실 뿐이네
병든 몸이 이향(異鄕)에 십년 손 되니
아! 나의 속 타는 것 뉘라 알이거나

 

 위의 시는 이상정이 중국에 망명하여 쓴 것이다. 다른 가족들을 두고 홀연히 중국으로 떠나 활동하였던 이상정의 내면적 갈등이 드러나고 있다.
  이상정을 언급할 경우에는 흔히 그의 형제들과 함께 논의된다. 장남인 이상정에 이어, 차남 이상화(李相和, 1901~1943)는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이름 높은 저항시인이었고, 3남 이상백(李相佰, 1904~1966)은 역사학자인 동시에 사회학자이며 체육인으로도 저명하였다. 4남 이상오(李相旿, 1905~1969)는 수렵가이면서 저술가로 알려져 있다. 4형제가 각기 한국근현대사에서 일정한 위상을 갖춘 전문가이며 문필가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 90
현재 상태 건물은 1920년대에 지어졌으나, 현재 음식점으로 사용되고 있어 일부 변형되었다.

  이상정(1897~1947)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독립 운동가는 아니지만, 1920년대 중반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중국군에 복무하거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며 항일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인물이다.
  1926~1927년에는 펑위샹[馮玉祥]의 서북국민부대에서 준장급 참모로 활약하고, 장제스[蔣介石]의 부대와 통합됨에 따라 국민정부 정규군 소장으로 항일전선에서 활동하였다. 또 김구․김규식 등의 독립지사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충칭육군참모학교의 교관을 지내고, 1938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및 외교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 1940년 9월에는 한국광복군 창설을 적극 지원하였다. 1942년 8월 임시정부에서는 외무부 내에 외교연구위원회를 살치하자, 그는 신익희, 장건상, 이현수 등과 함께 연구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또한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충칭에서 중국 육군 유격대훈련학교 교관에 취임하여 후진 양성에 노력하였으며 중국군 중장으로 진급하여 광복 후에는 북지방면(北支方面)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도왔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읽기

읽기자료 1

  이상정(李相定)은 1897년 6월 10일 대구에서 상당한 재력을 가진 이시우(李時雨)의 아들 4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유명한 저항시인 이상화(李相和)의 형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1908년 사망하여, 그와 형제들은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이일우(李一雨)의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이일우는 대구에 우현서루(友弦書樓)라는 도서관을 설립하고 당대의 우국지사들과 교류하였다. 우현서루는 동서양의 서적을 구비한 도서관이었다. 이러한 백부의 영향 속에서 이상정은 신구학문을 수학하였을 것이다.
  이상정은 1912년 일본에 유학하여 역사학과 미술, 상업, 그리고 군사학 등을 공부하였다. 1917년 무렵 귀국하여 1919년 3․1운동 전후까지 대구 계성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였다. 1919년 6월 큰아버지 이일우가 재판정에서 이상정에 대해 “죽은 동생의 아들 이상정이란 자는 일본에서 부기공부를 했다는데, 그는 원래가 방탕무뢰하여 항상 내가 감독을 하고 있으나 지금부터 한 달 쯤 전에 가출하여 현재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라고 언급하였다. 이 발언에 의하면 이상정은 3․1운동을 전후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대구를 떠났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그의 성격이 자유분방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상정은 대구에서 서양화 개인전도 열었다고 하며,

  • 질문1 이상정이 3․1운동을 전후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대구를 떠났던 이유가 무엇일지 추측해서 말해봅시다.
  • 질문2 일본 유학으로 여러 방면의 공부를 마친 이상정이 교사의 길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 질문3 용진단에 가입하고 삼민주의에 공감했다는 기사를 토대로, 이상정이 어떤 사상을 바탕으로 민족해방운동을 하려고 했을지 추론해 봅시다.

읽기자료 2

  이상정은 망명 직후 중국 동북지방의 하얼빈으로 가서 중국인 지인들을 만나고 한국인 학교를 맡아 교육활동에 참여했다. 이로 보아 그는 사전에 중국어 학습도 하고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세력과도 연계되어 일정한 기간을 두고 망명 준비를 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후 40여 일간 동북지역 3,700리를 여행하고 1926년에는 허베이 성[河北省] 장자커우[張家口]로 갔다. 장자커우에서 평양 출신의 권기옥(權基玉)과 교제하였던 것 같다. 권기옥은 3․1운동에 참여하여 실형을 산 후 중국에 망명하여, 이 무렵에 펑위샹[馮玉祥] 군대의 항공대에서 복무하고 있었다. 이 무렵 이상정 또한 펑위샹의 서북국민부대에서 준장급 참모로 활약하고 있었다. 1926년 10월 이상정과 권기옥은 혼례식을 하고 동거에 들어갔다. 이들은 해방 될 때까지 함께 중국군에 관여하거나 임시정부에 참여하며 항일운동에 투신하였기 때문에, 단순한 부부로서의 역할보다 동지로서의 움직임으로 이해된다.
1928년 6월 1일자『동아일보』에 이상정의 근황에 대한 기사가 보도되었다. 이 기사에 의하면, 1928년 이상정과 권기옥, 그리고 손두환(孫斗煥) 등이 공산당 혐의로 중국관헌에 체포되어 난징[南京] 일본영사관에 넘겨졌다는 것이다. 손두환은 의열단원들의 황포군관학교 입학을 적극 지원하였으며, 쟝제스[蔣介石]와 연계된 인물이다. 이들은 40여일 일본영사관의 조사를 받고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보아 이상정과 권기옥은 의열단과 관련되었다고 하겠다. 권기옥은 의열단의 여자부 연락원으로도 언급된다.
  이상정은 권기옥과 1920년대 후반부터 난징에 거주하는데, 국민정부군 사단 훈련처 책임자, 베이핑[北平]대학 청강생, 광둥[廣東]정부의 항공대 통역생 교육, 난창항공협진회[南昌航空協進會] 위원 등 다양한 활동에 대한 기록이 있다. 1933년 7월 권기옥이 항저우항공국[杭州航空局]으로 부임하면서 항주를 자주 오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1920년대 후반 이후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이상정은 관직보다는 은일(隱逸)의 삶을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정은 중일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민족전선 통일운동의 선두에 섰던 것으로 보인다. 1937년 우파세력은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였고, 이어 11월 이에 대항하여 좌파세력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였다. 이상정은 조선민족전선연맹의 출범을 주도하였다. 또한 이상정과 권기옥은 조선민족혁명당의 당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정 내외는 김원봉 등과 같이 이동하지 않고 1938년 충칭[重慶]에 도착하였다. 이상정은 국민당 정부의 육군참모학교의 소장교관(少將敎官)으로 취임하였고, 아울러 중화군사령부(中華軍司令部)의 막료직도 겸하였다. 국민당은 일본이 항복한 직후 중국군이 일본에 진주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통이고 중국역사에도 정통한 이상정을 필요로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이상정은 중국의 전쟁승리는 조국혁명이 성공하는 것이므로, 중국혁명에 협력하는 것이 조국혁명의 노력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해방 후 즉각 국내에 들어오지 않고 1946년 1월 상하이로 가서, 한인의 권익보호에 진력하였다. 그가 전후 중국의 일본진주군사령부(日本進駐軍司令部)의 중장막료(中將幕僚)로 내정되었다가, 중국의 일본진주가 중지되자 중국 거주 한인문제에 전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 질문1 이상정과 권기옥이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은 각각 어떤 일을 하고 있었나요?
  • 질문2 이상정이 조선민족전선연맹의 결성에 적극 가담하여 활동한 이유를 말해봅시다.
  • 질문3 이상정이 중국군에 들어가 활동한 것은 한국 독립의 방안에 대해 어떤 논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까요?

읽기자료 3

  1934년 1월 항저우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는 경사도의원으로 이상정을 선출하였다. 그러나 이상정의 불참으로 의원 선출이 무효가 되었다. 1940년 전반 독립운동세력이 충칭에 집결한 이후에는 임시정부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상정은 1942년 8월 임시정부 외무부 외교연구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이어 10월 경상도 지역 의정원의원에 선출되었다.
  이상정은 의정원의원에 선출된 직후 1942년 10월 말에 의정원에 “우리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최단기간 내에 중․일․영․소 등 연합 각국정부에 향하여 정식으로 우리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할 것”이라는 주문의 ‘임시정부 승인에 관한 건’ 제의에 대표제안자로 나섰다. 그는 1943년에도 임시의정원 제2분과위원, 의정원법 개정위원, 제1과위원장 등으로 활약하였다. 1944년 6월에는 외무부 외교연구위원으로 재선임되었다. 1944년 그는 의정원의 제4분과위원에 김원봉, 이청천, 유동열, 조성환과 함께 선임되었는데, 군무․교통을 담당하는 이 분과위원회 구성으로 미루어 그가 임시정부 내 군사부문의 대표적인 전문가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그는 중국군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국광복군의 자주적 활동을 위한 9개 준승의 취소를 여러 차례 강조하였다. 즉 9개 준승을 취소하고 중국과 평등조약을 체결하자고 주장했다. 이상정은 한국과 중국의 연대를 위하여 중국군에 복무했는데, 한국과 중국이 평등한 관계를 유지해야만 연대가 제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945년 2월 이상정은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의 창당에 참여하였다. 이 정당은 한국독립당 1당 위주의 임시정부 운영을 비판하는 세력들이 주도한 것이었다. 신한민주당은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의 개혁, 그리고 독립운동자대표대회의 소집을 주장하였다. 또한 이상정은 1945년 5월 충칭에서 흥사단의 예비 단우(豫備團友)로 입단하였다. 권기옥도 흥사단에 입단한 것 같지는 않지만, 1945년 3월 안창호 서거 7주기 기념식에 참여하였다.
  1940년대에 임시정부에 참여한 이래 이상정은 임시정부의 개조와 통합을 통한 독립운동 노선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나라 혁명지사들의 의견이 극좌에서 극우까지 수십 종의 의견과 십 수 종의 당파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대중의 대변하는 정당만이 대중과 함께 새 시대를 건설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대중의 자각과 비판 하에서 대중을 대변하는 정당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상정은 일제의 항복이 알려진 1945년 8월 13일 임시의정원의 권한을 장차 성립될 전국 통일적 임시의회에 봉환(封還)할 것을 요구한 신한민주당과 조선민족혁명당의 제안에 참여하였다. 이어 8월 23일에는 내각 총사직을 통한 ‘과도내각’의 조직을 주장하는 제안에도 동참하였다. 임시정부 내에서 좌우세력이 전개한 권력투쟁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이상정은, 1930년대 이래 관심을 가져온 민족전선 통일운동의 관점에서 해방 이후의 정치적 지향을 권력투쟁보다 대중을 우선하는 노선에 중점을 두었다.

  • 질문1 한국광복군의 9개 준승 중 이상정이 특히 취소해야 한다고 생각한 항목은 무엇일지 추정해 봅시다.
  • 질문2 임시정부 내의 이념대립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이상정이 제시한 견해에 대해 평가해 봅시다.
  • 질문3 1945년 신한민주당의 창당에 참여하며 이상정이 바라는 임시정부의 운영 방식은 무엇이었을까요?

읽기자료 4

  권기옥(權基玉, 1903~1988)은 평양에서 몰락한 양반 집안인 권돈각(權敦珏)의 1남 4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11살 되던 해인 1912년에 은단공장에 취직하여 집안 살림을 돕던 권기옥은 이듬해 12살의 나이로 장대현 교회(章臺峴敎會)에서 운영하던 숭현(崇賢) 소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한 후 기독교 계통 학교인 숭의학교 3학년에 편입하였다. 권기옥은 숭의 여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박현숙의 영향을 받아 반일 비밀 결사인 송죽회에 참가해 활동했다. 1917년 5월 미국인 아트 스미스의 평양 곡예비행을 구경한 뒤로 비행사가 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항일투쟁에는 무조건이었습니다. 감옥이 아니라 죽음도 두렵지 않았지요. 나이가 어리고 여자라는 게 참으로 원통했습니다. 그때 하늘을 날며 왜놈들을 쉽게 쳐부술 수 있는 비행사가 되려고 마음을 다졌지요.” 환갑 나이이던 1961년 권기옥은 당시를 그렇게 회상했다.
  1919년에 숭의학교 졸업반으로서 3․1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주일동안 구류되었다. 그후 동창유지 및 임시정부 연락원인 임득삼(林得三)・김정직(金鼎稷), 김순일(金淳一), 김재덕(金在德) 등과 공모하여 군자금을 모집하고 임시정부 공채를 대량으로 판매하여 그 자금을 임시정부로 송금하는 등의 일에 관련하여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소위 제령위반(制令違反)이라는 죄목으로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고 출감하였다. 출옥한 후인 1920년 8월에 문일민(文一民), 장덕진(張德震) 등을 도왔으며, 또한 전국에 흩어져 있는 애국 동지들과의 접선을 하기 위한 방편으로 평양청년회 여자 전도단을 조직한 후 여자전도대장으로서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을 하고, 비밀공작도 전개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발각되자 1920년 9월에 목선을 타고 상하이로 탈출하였다. 상하이에 도착한 후, 이승만(李承晩), 안창호(安昌浩) 등을 만나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중, 독립전쟁을 위한 군관 양성의 일환으로 임시정부의 추천을 받아 1923년에 윈난육군항공학교[雲南陸軍航空學校]에 제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1925년 졸업 후에는 임시정부의 소개로 혁명 기독장군 펑위샹 휘하 공군에서 최초의 여자비행사로서 복무하였다. 1927년 쟝제스가 북벌(北伐)을 단행할 때, 동루항공사령부[東路航空司令部]에 최용덕(崔用德)과 함께 참여하는 등, 10여 년 동안 중국 공군에서 복무하였다. 또한 1928년 5월 31일에는 난징[南京]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충칭에 있는 국민정부 육군참모학교의 교관으로 임명되어 후진 양성과 함께 적의 정보를 연구하여 직접 가르치기도 하였다. 1943년에는 충칭에 있는 임시정부 직할로 김순애(金淳愛), 방순이(方順伊), 최선화, 최애림(崔愛林), 최형록(崔亨祿) 등과 함께 한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사교부장(社交部長) 등으로 활동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썼다. 광복을 맞이하게 되자 1949년에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여사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하였다.

  • 질문1 권기옥이 운남육군항공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심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나요?
  • 질문2 권기옥의 삶을 보았을 때, 그녀가 이상정과 평생을 같이 생활하려고 했던 중요한 이유를 추정하여 써봅시다.

읽기자료 5

  이상화(1901~ 1943)는 대구 출신 이시우의 아들 4형제 가운데 둘째이며, 이상정의 동생이다. 1918년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지금의 중앙고등학교)를 수료하였다. 1919년 3월 8일 백기만(白基萬) 등과 함께 대구 거사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배후 조종 혐의로 일제 관헌의 추적을 받아 서울로 도피하여 친구 하숙집에서 머물게 된다. 그러나 곧 다시 귀향하여 큰아버지의 명으로 결혼을 하였다. 1921년에 다시 상경하여 고향 친구인 현진건(玄鎭健)의 소개로 박종환(朴鍾和)를 만나 의기투합하여『白潮)』동인에 가담하였다.『백조』동인 가담과 ‘말세(末世)의 희탄(欷嘆)’, ‘단조(單調)’ 발표로 인해 비로소 시인 이상화가 탄생하였다.
  그후 프랑스에 유학할 기회를 얻으려고 일본으로 갔다가 1923년 참혹한 간토대지진을 겪으면서 망국민의 비애와 절망을 절감하였다. 간토대지진의 몸서리치는 참상을 보고 민족적 절망을 겪은 나머지 1924년 동경으로부터 귀국하였다. 식민지 종주국이자 적국인 일본에서  천재 지변과 민족 수난의 참상을 겪은 그는 현실주의․진보주의 문학으로서 계급주의 문학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김기진과 더불어 그는 문학의 현실적․사회적 기능에 관심을 갖고 민족 현실과 민중 생활에 보다 적극적으로 문학적 투신을 하였다. 1925년 8월에는 카프(KAPF : Korea Proletarian Artist Federation)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6년에는『개벽(開闢)』 6월호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였다.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는냐 누가 부르드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 중략 )…………………
내 손에 호미를 쥐여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어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시 닿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데로 가느냐 옷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웃음 푸른설음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신령이 접혔나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 시로 인해 일제 당국은『개벽』에 폐간 조치를 내렸고, 1927년 이상화는 대구로 돌아왔다. 이후 고향친구들을 만나 문학, 인생, 시국 등을 얘기하며 심회를 달래야 했다. 1933년에는 교남학교(지금의 대륜고등학교)에서 조선어와 영어, 작문 과목을 가르치며 교사로 근무하다 이듬해 사직했다.
  1937년에는 형인 이상정을 만나러 중국에 3개월간 다녀왔다가, 귀국 직후 대구경찰서에 체포되어 2개월간 고초를 겪었다. 출감한 후 교남학교에서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였다. 영어와 작문을 가르치면서 4년여를 보낸다. 그는 오랜 신산스런 삶과 고통스런 정신생활 속에서 마침내 병을 얻게 되었고 건강은 나날이 악화되었다. 1943년 3월에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4월 25일 경상북도 대구 자택에서 숨졌는데, 이상화의 오랜 친구인 소설가 현진건도 같은 날 경성부에서 장결핵으로 숨을 거두었다.
  1948년 3월 14일 김소운이 발의하고 이윤수, 구상 등이 참여하여 이상화를 기리는, 대한민국 최초의 시비를 달성공원에 세웠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질문1 프랑스 유학의 포부를 갖고 일본에 갔던 이상화가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오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 질문2 1923년 간토대지진 목격 이후 이상화의 시 세계는 어떻게 바뀌게 되었을까요?
  • 질문3 일제가 동인지『개벽』을 폐간 조치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시각자료

시각자료 1

이상정의 가족 사진(왼쪽부터 상화, 상백, 어머니, 상호, 뒤에 서 있는 사람이 상정)

  • 질문1 아버지를 일찍 잃은 이상정, 이상화 형제가 보냈을 어린 시절의 모습을 상상하여 서로 얘기해 봅시다.
  • 질문2 큰 아들로 가정을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과 민족해방운동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조국애 사이에서 이상정이 느꼈을 갈등을 이야기해 봅시다.

시각자료 2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비행사 권기옥(왼쪽에서 두 번째)

  • 질문1 이상정의 아내로서 독립운동가로서 권기옥의 하루 생활을 상상하여 일기 형식으로 정리해봅시다.

시각자료 3

1935년 이상화(왼쪽)가 형 이상정(오른쪽)을 만나러 중국에 다녀오면서 찍은 사진
    (이 때 중국에 다녀온 후 이상화는 대구경찰서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 질문1 독립운동가인 형과 저항시인인 동생이 오랜만에 상봉하여 나누었을 얘기를 대화 형식으로 써봅시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모둠활동

모둠활동 1
이상정이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일생 동안 노력하였던 데 비하여 일반인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상정과 비슷한 처지의 독립운동가를 찾아 정리해봅시다.

모둠활동 2
중국군에서 장군으로 활동했던 이상정과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비행사였던 권기옥이 결혼을 결정하면서 나누었을 대화 내용을 상상하여 서로 얘기해봅시다.

페이지 상단으로 가기

하단영역

관련사이트

주소: 31232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독립기념관로1  전화: 041-560-0405 팩스 : 041-560-0426 
 Copyright 2021 THE INDEPENDENCE HALL OF KOREA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