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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희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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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그 때 생각으로는 내 평생에 조국광복을 보려니 생각 못하였고, 내 목이 다할 때까지 독립운동을 하다가 중원 천지에서 무주고혼(無主孤魂)이 되면 내아들·손자에게 유언하여 독립운동을 계속 시킬 심산 뿐이었다. 따라서, 어머님 유골을 매장하였다가 ······ 차라리 강물에 뿌려 유해라도 고국의 바다 기슭에 안착하여 꿈에 그리던 조국의 품안에 돌아가시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였다

 

  `임시정부의 진로가 그다지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못하자 신익희는 중국측과 연계하여 일제를 쳐부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그리하여 상하이를 떠나 한·중합작을 위해 장개석과 환담을 하고 중국의 한커우[韓口]·난창[南昌]·창사[長沙] 등지를 순방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중·일전쟁의 여파로 인하여 한·중합작은 여의치도 않았고, 노모(老母)의 상(喪)을 당하는 등 독립운동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신익희는 그의 회포를 이와 같이 표현했던 것이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서하리 160-1
현재 상태 약 200년 전의 한옥 건축 양식으로 잘 관리되고 있음

  신익희(申翼熙, 1894~1956)는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1908년 한성외국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1910년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政經學部)에 입학했다. 유학중 한국 유학생들과 학우회를 조직해 총무·회장 등을 지내면서 학생운동을 벌이고, 기관지로『학지광(學之光)』을 발간했다. 1917년 보성법률상업학교 교수로 취임했고, 1918년 말부터 최린, 송진우 등과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의했으며,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해외와의 연락업무를 맡았으며, 그 해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조직을 위한 비밀회의를 갖고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어 국호, 관제, 정부관원 및 임시헌장 등을 의결 선포하는 등 역사적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에 기여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내무차장, 외무차장, 국무원비서장, 법무총장, 외무총장, 문교부장 등을 지냈다. 내무부장 재임 중 8·15해방을 맞이해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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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신익희의 집안은 양명학의 가문이었고, 그 가운데도 강화학파에 속했다. 강화학파는 조선의 대표적인 양명학자였던 정제두(鄭齊斗)의 강화도 이주를 계기로 형성되었다. 정제두에게서 발원된 강화학파의 한 줄기는 손녀사위인 이광명(李匡明)과 그 종형제들인 이광신(李匡臣), 이광사(李匡師)로 이어졌는데, 이광신은 곧 한말 강화학의 대가인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의 고조부이다. 강화학파의 다른 한 줄기는 해공 집안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해공의 고조부인 신대우(申大羽)가 정제두의 손녀사위이자 학통 계승자였기 때문이다. 집안이 어려웠던 신대우는 강화도 학곡리에서 처가살이를 하며 정제두에게 양명학을 전수받았다. 그리고 그의 학문은 신진(申縉), 신작(申綽), 신현(申絢) 등 세 아들에게로 이어졌는데, 그 가운데 막내인 신현이 신익희의 증조부가 된다. 신현은 강화에서 광주 사촌으로 이주하여 광주의 신씨 문중을 열었고, 양명학을 가학(家學)으로 전수하였다. 신익희의 집안에서는 신대우 이래 권세에 아부하거나 타협하지 말고, 하늘과 국가와 민족과 후손을 사랑하라는 마음과 정신을 가르쳤다.
  신익희는 5세부터 맏형인 신규희(申揆熙)에게서 한학을 배웠으니, 그는 어려서부터 정통 양명학 집안에서 현실 개혁적이며 지행합일의 정신을 내면화 했을 것이다. 이러한 그가 을사조약 이후 국권이 상실된 후에는 신학문을 배우기로 결심하였다. 1908년 상경하여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그가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한 1910년 우리나라는 완전한 일제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나라가 식민지로 전락하자 신익희는 실력 양성을 바탕으로 한 독립운동으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일본 유학에 나섰다. “우리는 현실을 직시하여 바르게 보아야 한다. 우리가 원수인 적을 몰아내고 나라를 찾는 데는 부질없이 감상에만 흐르지 말고, 현대로 개화 진보한 일본에 가서 배워 그 놈을 이기고 일어서야 한다.”는 극일의 심정으로 일본 유학을 단행하여, 1912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하였다.

  • 질문1 양명학은 신익희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 질문2 신익희가 일본 유학을 결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2

  1913년 여름 방학 때 귀국한 신익희는 신규희, 신필희(申弼熙) 등 손위 형들과 함께 광주 생가에 광동의숙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광동의숙 설립취지서에서 다음과 같이 민족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땅에 종묘를 심고 김매고 북돋아주지 않고서 그것이 자라지 않는다고 근심하는 것은 사람을 가르치지 않고 그 성숙을 재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 그 문지기까지 경서(經書)에 능통함이 한(漢)나라의 융성을 가져왔다. …… 사람은 배우지 않고는 어떤 일도 이룰 수 없다. …… 나라의 원기를 배양하고 후진들의 성공을 위해 이 강숙을 세운다.

  교육이 없이는 개인의 성공도, 민족의 독립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신익희는 자신이 태어나 자라며 공부하던 사랑채에 강숙을 열고, 인근 마을에서 80여 명의 학생들을 모아 공부시켰다. 특히 이때 신익희는 관립학교의 교과서를 사용하면서도 애국․독립심을 고취시켰기 때문에 총독부가 금서로 정한『유년필독(幼年必讀)』을 가르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도 하였다.
  신익희는 1917년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하여 사립학교에 들어가 민족교육운동을 계속하였다. 최규동(崔奎東) 교장의 부탁으로 중동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리고 1년 후인 1918년 고려대 전신인 보성법률상업학교의 교수로 자리를 옮겨 비교헌법, 국제공법, 재정학 등을 강의하면서 민족교육운동에 앞장섰다. 그 효과는 신익희의 제자인 강기덕(康基德), 한창환(韓昌桓)이 학생대표로서 3․1운동의 추진과 전개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익희의 민족 교육에 대한 열정은 중국에서 활동했던 때에도 식지 않았다. 1932년 난징에서 한국혁명당을 창당하여 무장 독립투쟁을 준비하면서도『우리의 길』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여 한인동포들의 민족정신과 독립의지를 배양시켰다. 1935년 창당된 민족혁명당에 몸담고 있을 때도 중앙집행위원으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 졸업생들의 교양훈련을 맡았다. 이때 신익희는 ‘국내외 정세’라는 과목을 가르쳤다.
  교육운동에 대한 신익희의 열망은 해방 후에도 이어졌다. 1946년 3월 3일 신익희의 주도로 ‘국민대학설립기성회’가 발족되었다. 국민대학설립기성회에 참여한 인사들을 보면, 고문에 김구와 김규식, 명예회장에 조소앙, 회장에 신익희 등이었다. 임정 요인들을 중심으로 국민대학 설립이 추진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임정 세력의 움직임에 대응하여 미군정은 8월 27일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을 공포한 뒤 9월 1일 국립서울대학교를 개교하였다. 이날은 바로 임정과 신익희가 ‘국민의 대학’이자 ‘민족의 대학’으로 설립한 국민대학교의 개교일이었다. 국민대학은 임시정부가「건국강령」에서 밝힌 삼균주의적 교육이념을 실현할 ‘국민의 대학’으로 그리고 자주적 민족교육을 실천할 ‘민족의 대학’으로 설립되었다. 그리고 설립의 중심에는 임정의 내무부장으로서 끊임없이 민족교육을 실천해 왔던 신익희가 있었다.

  • 질문1 신익희가 형제들과 더불어 광동강숙을 설립한 목적은 무엇이었나요?
  • 질문2 총독부가 금서로 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광동강숙에서『유년필독』을 가르쳤던 가장 중요한 이유를 말해보시오.
  • 질문3 "국민대학교’ 설립의 주체 세력과 중심인물은 누구인가?

읽기자료 3

  1918년 6월경 국내에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알려지자 신익희는 최린(崔麟), 임규(林圭), 송진우(宋鎭禹), 최남선(崔南善) 등과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비밀리에 논의하였다. 그리고 그해 11월 국외 독립운동 단체 및 지도자들과 상의할 임무를 띠고 국외로 나갔다. 그는 만주, 노령의 독립군 지도자들을 만나 국내의 독립운동과 공조문제를 논의하고 3․1운동 발발 직후에 귀국하였다. 국내에 들어와 평양을 지나면서 3․1운동을 목격한 신익희는 곧 서울에서의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제자인 보성법률상업학교 학생인 강기덕, 한창환 등과 3월 5일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 앞 만세시위를 추진하였다. 이 만세시위는 3월 3일 고종의 인산에 참배하고 귀향하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어 3․1운동을 지방으로 확산시키는 데 그게 기여하였다. 이로써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된 신익희는 3월 14일 용산역을 빠져나와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19년 3월 19일 상하이에 도착한 신익희는 독립운동의 총괄기관인 임시정부 조직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4월 11일「임시헌장」을 제정하여 조각을 마침으로써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이때 신익희는 경기도 선출위원으로 임시의정원에 참여하여 이광수, 조소앙 등과 함께「임시헌장」제정 기초위원으로 활약하였다. 와세다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하였고, 보성법률상업학교에서 비교헌법을 강의했던 신익희는「임시헌장」제정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임시의정원의 결의를 거쳐 선포된「대한민국 임시헌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제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이를 통치함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귀천과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함
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종교․언론․저작․출판․결사․집회․신서(信書)․주소이전․신체와 소유의 자유를 향유함
제5조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 자격이 있는 자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음
제6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납세와 병역의 의무가 있음
제7조 대한민국은 신(神)의 의사에 의하여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발휘하며 나아가 인류의 문화와 평화에 공헌하기 위하여 국제연맹에 가입함
제8조 대한민국은 구황실(舊皇室)을 우대함
제9조 생명형(生命刑)․신체형(身體刑)과 공창제(公娼制)를 전폐함
제10조 임시정부는 국토회복 후 만 1개년 내에 국회를 소집함

  임시헌장은 근대 민주국가의 정치․경제․사회적 기본원칙과 정신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지금 보아도 손색이 없다.
  임시정부의 조각이 이루어지자 신익희는 초대 내무차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가 한성정부를 정통으로 하여 통합 운동을 전개할 때 법무차장으로 통합 임시정부의 헌법 초안을 마련하기도 했다. 상하이 임정의 헌법을 개정하여 통합임정의 헌법을 제정하는 일에도 앞장선 것이다.  이후 신익희는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대리, 외무총장 대리, 국무원 비서장, 법무총장 및 임시의정원 부의장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신익희는 국민대표회의 개최문제가 현안으로 떠올랐을 때, 국민대표회의 소집의 걸림돌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 운동을 일으키고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과 임정의 지도력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1923년 1월부터 5월에 걸쳐 개최된 국민대표회의는 개조파와 창조파의 첨예한 갈등으로 결국 독립운동 세력의 대립만 격화시킨 채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신익희는 국무원 비서장으로 임시정부를 정상화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자 새로운 독립운동의 방책을 찾아 임시정부를 떠났다.
  임시정부를 떠난 신익희는 독자적인 길을 걸으며 시안[西安]에서 중국 국민당 후징이[胡景翼]와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32년 7월 윤기섭, 성주식, 김홍일 등과 난징에서 한국혁명당을 창당하였다. 신익희는 대일 항전에서 민족의 역량을 결집시키기 위하여 자신이 속한 한국혁명당을 만주사변 이후 만주에서 중국 관내 지역으로 이동한 한국독립당과 합쳐 신한독립당을 창당하였다. 그리고 1935년에는 신한독립당, 의열단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대한독립당 등 5개 정당을 통일하여 민족혁명당을 결성하였고, 1938년에는 좌익 계열의 청년들과 함께 조선청년전위동맹을 조직하여 활동한 일도 있었다.
  이러한 신익희를 임시정부로 끌어들인 인물은 조소앙이었다. 상하이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할 때 같이 임시헌장을 기초했던 조소앙은 외무부장을 맡고 있으면서 신익희를 외교연구위원으로 임명하였다. 다시 조소앙의 추천에 의해 1943년 3월 4일 외무부 차장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신익희는 20여 년 만에 다시 임시정부로 돌아왔다.
  신익희가 임시정부에 복귀하였을 때는 중국 관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좌우익 독립운동세력이 대부분 임시정부 산하로 집결한 이후였다. 그는 좌우익 세력이 임시정부로 통일을 이루어 좌․우 연합정부를 구성할 때 임시정부의 내무부장으로 선임되었다. 내무부의 주요한 업무는 충칭을 중심으로 한 동포들과 임시정부의 안전을 보호하는 일이었다. 당시 충칭에는 많을 경우 600여 명에 이르는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임시정부의 세력기반이었다. 이들을 보호 관리하는 일이 곧 임시정부가 유지․운영되고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는 일이기도 하였다.

  • 질문1 신익희가 중국으로 망명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 질문2 1920년대 초 임시정부를 떠난 신익희는 어떤 활동을 하였나요?
  • 질문3 1940년대 초 신익희가 임시정부 합류를 제안하는 조소앙의 요청을 수락하게 된 중요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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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1945년, 광복 후 조국에 돌아온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들의 기념사진
                 (앞줄 왼쪽부터 김구, 김규식, 조소앙, 신익희)

  • 질문1 광복 후 돌아온 임시정부 요인들에 대한 인터뷰를 가상하여 질문과 대답을 만들어봅시다.

시각자료 2

  • 질문1 신익희의 어록비를 보고 그가 어떤 마음의 자세로 평생을 살았는지 말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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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기 임원이라고 가정하고, 앞으로 활동 방향을 논의해 봅시다.
모둠활동 2
자신이 몸담고 있는 가정이나 학급이 잘 운영될 수 있을만한 규칙을 제정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광복 직후 귀국을 한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이라고 가정하고, 앞으로 만들어 가려고 하는 독립국가의 모습에 대하여 모둠별로 이야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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