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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섭 생가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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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을 품고 일본 왕궁에 달려들었으나

십 년 동안 꾸민 일이 하룻밤에 헛되었도다

뜻 있어도 무능하니 단지 죽을 뿐이나

부끄러움과 욕됨을 참고 구차하게 목숨을 이어간다

외로운 영혼 끊어지려 하니 어디로 돌아갈까

그나마 짧은 혀가 있어 오히려 불평한다

원컨대 훗날 동경으로 건너오는 의사들이여

내가 한 일을 거울삼아 그대는 공을 이루라

 

 의열투쟁은 성패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지향하는 진정한 목적이 암살이나 파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 전달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김지섭의 니주바시 투탄 의거는 성공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의거로 한민족의 독립의지와 반침략 평화주의를 일본은 말할 것 없이 세계만방에 널리 알렸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폭탄은 터지지 않았고, 그에 대한 회한은 남는 것이다. 그래서 김지섭 스스로도 실패한 것으로 보았고, 그 심정을 옥중에서 한 편의 시로 남겼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369
현재 상태 집은 없어졌고, 그 터에는 새 주택이 들어 서 있다.

김지섭(金祉燮, 1884~1928)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호는 추강(秋岡)이다. 보통학교 교사를 거쳐 법원 서기 겸 통역으로 일하다가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을 빼앗기자 고향으로 돌아가 동전(東田) 김응섭의 변호사사무소 서기 등을 지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뒤 압록강을 건너 지린, 베이징, 상하이로 왕복하며 독립운동에 노력하다가 1922년 중국 상하이에 있는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1923년 9월 일본이 도쿄 대지진을 빌미로 조선인들을 학살하자, 그는 의열단 기밀부가 준 폭탄 3개를 품고 화물선에 숨어 동경으로 향했다.
1924년1월, 왕궁으로 들어가는 니주바시[二重橋]에 이르러 김지섭은 세 발의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었고, 그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김지섭은 ‘무죄 방면이 아니면, 사형을 언도하라’는 법정 투쟁을 벌였다. 자신이 일제의 입장에서는 대역 죄인이지만 한국인으로서 무죄라는 것이다. 결국 김지섭은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1928년 2월 20일 옥중에서 죽음을 맞았다.
니주바시 의거로 불리는 김지섭의 거사는 일본왕을 처단 대상으로 삼은 첫 투쟁이었으며, 식민지 해방투쟁사에서 빛나는 의열투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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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기유각서에 따라 통감부 재판소 관리가 된 김지섭은 1909년 11월부터 금산구(錦山區) 재판소 통역생 겸 서기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런데 1910년 8월에 경술국치를 당하여 나라가 망하고, 이에 저항하여 금산군수 홍범식(洪範植)이 자결하였다.
  1871년 충북 괴산군 괴산면 인산리에서 태어난 홍범식은 1909년부터 금산군수로 근무하고 있었다. 홍범식은 국유화될 위기에 놓인 민간 개간지를 사유지로 확정해 주는 등 백성들을 위한 행정을 펴서 칭송이 자자했다. 그런데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아아! 내가 이미 사방 백 리의 땅을 지키는 몸이면서도 힘이 없어 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니 속히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탄식하고는 자결로 순국을 결심한 듯 미리 유서를 써 놓았다.
1910년 8월 29일, 이른바 ‘한일합방’ 조약이 공포되자 이날 저녁 홍범식은 금산구 재판소 서기로 있던 김지섭에게 상자를 하나 들려 집으로 돌려보내고 객사로 갔다. 그리고 시종하는 고을 사령을 밖에 머물게 하고 객사 안으로 들어가 북향하여 임금에게 예를 표한 뒤 목을 매어 자결하려 하였다. 이때 이를 알아챈 고을 사령이 통곡하며 만류하자 홍범식은 화를 내며 그를 밀치고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고을 사령이 다시 뒤따라가자 그에게 모래를 뿌려 앞을 못 보게 한 뒤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김지섭이 집으로 가 홍범식이 맡긴 상자를 열어 보았더니, 거기에는 가족에게 남긴 유서와 함께 “나라가 망했고. 나는 죽음으로써 충성을 다하련다. 그대도 빨리 관직을 떠나 다른 일에 종사하라”는 편지가 들어 있었다. 이에 경악한 김지섭은 홍범식의 행방을 수소문하다가, 그를 찾고 있던 고을 사령 일행과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객사 주변을 나누어 수색하다가 객사 뒤뜰 소나무 가지에 목을 맨 채 죽어 있는 홍범식을 발견하였다. 순국 당시 홍범식의 나이는 갓 마흔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홍범식이 가슴에 품고 있던 유서는 염탐하던 일본인이 탈취해 갔으나, 김지섭에게 미리 맡겨 놓은 것은 장남인 벽초 홍명희에게 온전하게 전달되었다. 이런 인연으로 홍명희는 8․15 광복 뒤 의열단 동지들과 각계 인사들의 발의로 김지섭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다시 지낼 때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홍범식은 유서를 맡길 정도로 김지섭을 끔찍이 아꼈다. 관향(貫鄕)이 같은 풍산이기도 하지만, 김지섭의 지사적 풍모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홍범식의 자결은 김지섭에게 조국과 민족을 다시 생각하게 한 충격적인 사건이었음이 틀림없다. 더욱이 자신에게 우상과 같은 존재인 김응섭이 1911년 1월 평양 지방재판소 검사로 전보되었다가, 일제의 앞잡이로 살 수 없다며 1912년 6월 사직하고 평양에서 변호사 사무소를 내고 있었다. 김지섭도 1913년 1월 영동구(永同區) 재판소 통역생 겸 서기를 사직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 질문1 홍범식이 자결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 질문2 홍범식은 왜 자신의 유서를 김지섭에게 맡겼을까요?
  • 질문3 홍범식의 죽음은 김지섭의 이후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읽기자료 2

  김지섭은 3․1운동이 일어난 뒤 중국에 망명하여 1921년 가을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에, 1922년 여름에 상하이에 있는 의열단에 가입하여 열성으로 활동하였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김원봉(金元鳳)의 주도로 만주 길림성에서 발족되었다. 이때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원들은 조국광복과 민족해방을 위해 생명을 바쳐 헌신할 것을 맹세하면서 다음과 같은 ‘의열단 공약 10조’를 결의하였다.

1. 천하의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천하기로 함
2.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3.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야 단원이 됨
4. 단체의 의(義)를 앞세우고 단원의 의(義)를 급히 함
5.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6.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매월 한 차례씩 사정을 보고함
7.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부르면 반드시 응함
8. 죽음을 피하니 아니하며 단체의 뜻을 끝까지 따름
9. 하나가 아홉을 위하여, 아홉이 하나를 위하여 헌신함
10. 단체의 뜻을 배반하는 자는 처단하여 죽임

  아울러 이들은 ① 조선총독 이하 고관, ② 군부 수뇌, ③ 대만 총독, ④ 매국적, ⑤ 친일파 거두, ⑥ 적의 밀정, ⑦ 반민족적 친일 관리와 지주 등을 의열단의 ‘일곱가지 처단 대상[7가살(可殺)]’으로 규정함으로써 구체적인 암살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파괴 대상을 ① 조선총독부, ② 동양척식주식회사, ③ 매일신보사, ④ 각 경찰서, ⑤ 기타 왜적의 중요기관 등 일제 식민통치 및 수탈기관으로 하였다.
  타격대상을 확정한 의열단은 곧 본부를 베이징[北京]으로 옮긴 후 대대적인 암살․파괴활동을 계획하고 실천하여 갔다. 의열단은 1920년 3월부터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일보사 등 세 곳을 폭파하려는 계획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실행 단계에서 비밀이 누설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월 14일에 부산경찰서를 폭파하였고, 12월 27일에는 밀양경찰서를 폭파하는 등 연쇄적으로 일제 식민통치 기관을 공격하였다. 급기야 1921년에 김익상(金益相)은 식민통치의 심장부인 조선총독부를 폭탄으로 공격하기도 하였다. 1923년 1월 12일에는 김상옥(金相玉)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뒤 10여일 동안 신출귀몰하게 총격전을 전개하면서 일본 경찰 여러 명을 응징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의열단에 가입한 김지섭은 대규모 암살, 파괴 공작에 참여하였다. 김지섭은 김시현, 유석현(劉錫鉉)과 함께 국내 암살, 파괴 공작을 펼쳤다. 이들은 총독부를 비롯하여 경찰서, 재판소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등을 파괴하고 일제의 요인을 암살하기 위하여 서울까지 대형폭탄 6개, 소형폭탄 30개를 국내로 반입하였으나 마지막 단계에서 밀정의 밀고로 1923년 3월 15일 김시현, 유석현 등 주동자들이 일제히 체포됨에 따라 실패하고 말았다. 김지섭과 동지들은 동시에 군자금 모금도 추진하였다. 군자금 모금 활동은 김지섭이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마저 실패하고 말았다.


  • 질문1 의열단이 조국 광복과 민족 해방을 위해 어떤 활동들을 하려고 했는지 정리해 봅시다.
  • 질문2 의열단에서 암살 대상으로 꼽은 사람들의 공통점을 찾아봅시다.
  • 질문3 김지섭이 국내에서 시도했던 의열투쟁은 무엇이며, 왜 실패하고 말았는가?

읽기자료 3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여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지자 일제는 그 돌파구로 재일동포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일제는 이 재난을 틈타 한인들이 우물이 독극물을 살포하고 폭동을 일으켜 일본인들을 학살하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유포하였다. 이렇게 되자 일본인들이 한인들을 무차별 폭행하고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러 6천 여 명의 재일동포들이 희생되는 참극이 벌어졌다. 의열단의 지도부와 김지섭은 이 같은 일제의 만행을 심판하고, 연이은 대규모 암살․파괴 활동의 실패를 만회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던 중 의열단 기밀부 간부인 윤자영 등이 착안한 것이 1924년 초에 개회할 일본 제국 의사당 급습이었다. 정․관계 요인과 군부 수뇌, 조선총독 등이 당연히 회의에 출석할 터인데, 회의장 방청석에 잠입하여 폭탄을 던져 일제 고관들을 암살하면 동포들의 원혼에 위로가 될 뿐만 아니라 세계의 이목과 여론을 한국독립 문제로 끌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의열단의 동정에 대한 일제 관헌의 감시와 정탐이 워낙 심해서 검문을 피하기가 어렵고 자금사정도 너무 열악하므로, 극비리에 일을 추진하면서 소요 경비를 최소화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다다른 결론은 1~2명의 희생적 의거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김지섭이 혼자 맡겠다고 자원하여 막중한 임무가 맡겨졌다. 경비로는 겨우 마련한 일본화폐 40엔이 지급되었고, 폭탄은 수류탄 3개를 쓰기로 하였다. 
  일본까지는 아편 밀수차 중국을 다녀가는 일본인인 것처럼 속이고 석탄창고에 몸을 숨겨 밀항하였다. 1923년 12월 20일 상하이를 출발하여 12월 31일 후쿠오카현[福岡縣] 야하타[八幡] 제철소 앞 부두에 도착했다. 김지섭은 여관에 투숙하여 기운을 차린 뒤, 시계·외투·담요까지 죄다 전당포에 맡기고 여비 15원을 마련하여 1월 3일 도쿄를 향해 떠났다. 그러나 기차 안에서 읽은 신문기사를 통해 제국의회가 휴회 중임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개회 시일을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지리에 어둡고 수중에 돈도 없는데다, 폭탄을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 언제 발각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제국의회 대신 황궁에 가서 폭탄을 던지기로 작정했다.
  1월 5일 새벽에 도쿄에 도착한 김지섭은 지도를 사서 황궁의 위치를 확인하고, 낮 시간을 식당에서 보낸 후 석양 무렵에 궁성 앞 광장으로 갔다. 양복 주머니에 폭탄을 넣어둔 채 배회하던 그는 황궁 정문으로 통하는 니주바시 쪽으로 접근해 갔다. 이 모습을 목격한 순찰경관이 다가와 검문하려 하자 그는 불응하고, 갑자기 니주바시로 뛰어들며 폭탄 1개를 힘껏 내던졌다. 폭탄은 뇌관에 발화만 되고 터지지를 않았다. 다리 난간에 올라선 그는 두 번째의 폭탄을 궁성 정문 쪽으로 던졌다. 폭탄은 이번에도 불발이었다. 달려온 보초병과 격투 중에 그는 마지막 한 발을 내던졌다. 그러나 이 또한 불발이었다. 아마도 장기 보관이나 항해 중에 습기가 들어서 도화선이 작동하지 않은 때문이었다. 김지섭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신(神)처럼 떠받들던 ‘천황’이 사는 황궁 입구에 폭탄이 투척되었으니, 그야말로 경악과 충격 그 자체였던 것이다. 1923년 신채호가 「조선혁명선언」에서 ‘일본 천황’을 암살 대상의 하나로 꼽은 후, 박열이 그 해 가을 천황암살 음모를 꾸몄다 하여 체포되었지만, 모의 이상의 직접행동으로 왕실과 정부의 권위를 추락시켜버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김지섭은 재판에도 드높은 기개로, 식민통치의 부당성과 경제수탈의 실상을 낱낱이 지적하고, 한국민족이 벌이는 대일항쟁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인은 조선의 독립을 절대로 요구”하며 “최후의 한사람이 최후의 순간까지 싸우고야 말 것”이라고 하였다. 일본인 변호사도 “김지섭은 조선민중 전체의 의사를 대표한 사람”이라며 열렬히 변론하고, 폭탄이 불발했으니 무죄라고 주장했다. 김지섭 자신도 “법률의 정신은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인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함에 목적을 두고 있음에 따라 나는 조선민중의 생명·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그 같은 행동을 취한 것”이라고 당당하게 웅변하며 끈질기게 법정투쟁을 벌였다.
그럼에도 일제 검찰과 법원은 아예 귀를 막고, 사형 구형에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김지섭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결단코 항복하지 않겠다. 무죄면 무죄, 사형이면 사형이지, 무기징역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며 항소했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끝끝내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 상고가 무의미하다고 여기어 취하케 하고 복역 중이던 김지섭은 1927년 징역 20년으로 감형되었으나, 1928년 2월 20일 돌연한 의문사로 순국하였다.

  • 질문1 김지섭이 의열 활동을 목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 질문2 김지섭의 니주바시 투탄에 대하여 당시 일본인이 받은 충격이 특히 컸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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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다음은 금산구 재판소 시절의 김지섭 부부의 사진이다.

  • 질문1 김지섭이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떠날 때 그의 부인은 어떤 심정이었을지 말해봅시다.

시각자료 2

다음 문서는 김지섭에 대한 의열단 신임장이다.

  • 질문1 김지섭이 많은 독립운동 단체 가운데 굳이 의열단을 택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추정해 봅시다.
  • 질문2 의열단 가입 당시 김지섭이 가졌을 것 같은 심경을 이야기해 봅시다.

시각자료 3

일본 도쿄에 있는 니주바시의 모습이다. 이곳에서 김지섭은 일본 황궁을 폭파시키려는 목적으로 폭탄 3개를 던졌다.

  • 질문1 김지섭이 이곳에 폭탄을 던지게 된 과정을 정리하여 이야기해 봅시다.
  • 질문2 김지섭이 폭탄을 던질 장소로 이곳을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3 폭탄 3개가 모두 불발되는 순간 김지섭은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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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홍범식의 자결을 목격하는 날 저녁에 김지섭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일기 형식으로 써서 발표해봅시다.
모둠활동 2
의열운동의 정당성에 대하여 찬성측과 반대측으로 나누어 서로 토론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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