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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돌석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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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는 5척 6촌, 체격은 비대, 얼굴은 크고 넓었으며, 턱도 넓은 편이었다. 그의 피부는 검었으며, 얼굴에는 천연두 자국이 있었다. 그리고 턱수염은 적은 편이다.”


 이것은 투항자가 전하는 1908년 신돌석의 모습이다. 신돌석(申乭石, 1878~1908)은 경북 동해안 일대를 거점으로 활약하던 의병장으로 오늘날까지 이곳 주민들에게 ‘태백산 호랑이’ 혹은 ‘신장군’으로 불리며 전설적으로 구전되는 인물이다. 하루에 천 리 길을 달리며 수 십 장의 구릉을 한 걸음에 뛰어넘었다는 이야기들은 모두가 그의 탁월한 용력과 강렬한 의협심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결과라 하겠다. ‘돌석’이라 불린 데서도 짐작되듯이, 그는 한말 의병전쟁사에서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평민’ 의병장이다. 그의 생애와 활약상을 알려주는 직접적인 1차 자료가 엉성한 것도 이러한 한미한 신분적 배경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528-1
현재 상태 복원, 신돌석의 집은 없어지고, 그 터에 생가를 복원하였다. 마당에는 표석이 있다.

  영남지방에서는 1905년 말 지형적으로 활동이 유리했던 충청·경상도 접경의 산악지대를 거점으로 수십, 수백 명으로 이루어진 의병들이 우체소를 습격하고 전선을 절단하는 등 항전을 벌이고 있었다. 1905년 10월 중순 200여 명의 의병이 순흥 우체소를 습격하였으며, 같은 달 17일 300명의 의병이 영천 우체소를 습격하는 등 다른 지역보다 활발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때문에 일제는 한국 진위대에 의병을 진압하게 했던 종전의 방침을 바꾸어 10월 하순경부터는 헌병대를 직접 투입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이와 같이 항일의병의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던 상황에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의 기세는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되어 갔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1906년 전반기에 영남지역에서 특히 활동이 두드러졌던 의병 부대가 신돌석 의병이다. 전기의병에도 참여한 것으로 전해지는 신돌석은 1906년 4월에 영해에서 1~200명의 장정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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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신돌석은 1878년에 영해의 복평(福坪, 현 영덕군 축산면 부곡동)에서 신석주(申錫柱)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순경(舜卿)이며, 본관은 평산이다. 그의 본명은 신태호(申泰鎬)이고, ‘돌석’은 원래 아명이었으나, 의병에 투신한 후로는 이 이름을 더욱 세상에 날리게 되었다.
  신돌석은 고려 개국공신인 신숭겸(申崇謙)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선조에 들어와 그의 집안은 벼슬길이 막혔고, 7대조 때부터는 드디어 동해안의 영해로 내려와 이곳에서 대대로 세거하였다고 한다. 그의 조상이 영해에 정착한 이후 신돌석 당대에 이를 때까지 200년 가량 영해지역에 세거한 셈이다.
후손들이 전하는 이야기로는 7대조 신후종(申厚宗)이 진사였다고 한다. 그러나 소과(小科) 급제자 명부인 『사마방목(司馬榜目)』에 그의 이름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 사실은 확인할 수 없다. 이로 미루어 신돌석의 가문이 조선조의 지배계층인 양반관료를 배출한 집안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신돌석의 선대가 향리였다는 말이 설득력이 있다. 즉 그의 집안이 향리 신분으로 그 직책이 세습되다가 ‘읍신(邑申)’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읍신이라 함은 읍내에 거주하는 신씨라는 뜻도 되지만, 주로 신씨 향리 집안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의 가문이 원래는 영해지방의 향리였다는 주장에는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 뒤 신돌석의 부조(父祖)대에 이르러서는 향리로서 가지는 직임, 즉 직책조차 맡지 못하는 지위로 떨어진 것 같다. 신돌석의 집안을 몰락한 향리 출신이라는 의미에서 ‘잔서리(殘胥吏)’라고 부른 듯하다. 이 정도의 가문이라면, 결국 신돌석의 당대로 볼 때 그는 평범한 농민층으로 평민 신분에 속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신돌석의 집안이 몰락한 상태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근거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복디미’(또는 복더미, 복띠미)라 불리는 그의 고향 촌락이 대체로 신분이 그리 높지 않은 사람들이 사는 작은 동네였다는 점이다. 복디미 마을에서 동쪽으로 7~800미터 떨어진 국도변 양쪽에는 커다란 양반 마을인 진성이씨와, 무안박씨 집성촌이 각각 자리 잡고 있다. 도로 남서쪽에 진성이씨 양반촌이 있고, 북동쪽에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박의장의 마을이 있다. 이러한 주변의 양반 집성촌과 달리 신돌석의 생가 복더미에는 이름난 양반집이 없는 곳이다.
  다른 하나는 신돌석이 양반처럼 의관을 갖추었다가 봉변을 당했다는 다음과 같은 일화에서 찾을 수 있다.

  신돌석이 장가들어 갓을 쓰고 의관을 정제하여 집으로 돌아올 때, 이 모습을 본 이성화가 그의 갓을 벗겨 부수어버렸다. 봉변을 당한 신돌석은 내 스승의 동생만 아니었다면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면서 대들지 못하였다.

  이러한 일화는 신돌석이 갓을 쓰고 다닐 만한 신분이 되지 못할 정도의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다는 점을 짐작케 한다.
  신돌석은 이처럼 한미한 평민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부친인 신석주가 건실한 가계 경영에 힘입어 가산을 어느 정도 모을 수 있었고, 나아가 신돌석을 인근 마을의 서당에 보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돌석은 인근 상원 마을에서 교육하던 육이당 이중립(六怡堂 李中立)의 문하에서 기초적인 학문을 닦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뒷날 평해 월송정에 올라 지었다는 우국시는 이러한 학문적 토대 위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결국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난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상민’신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질문1 신돌석이 평범한 농민으로서 상민 신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신돌석이 양반 출신이 아니면서도 공부에 열중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읽기자료 2

  1906년 4월 의병을 일으킨 뒤 1908년 12월 신돌석 의병장이 순국할 때까지 그의 휘하에서 활동한 의병의 규모는 일정하지 않았다. 거병 당시 100~300명 정도의 규모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 적을 경우에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400~500명 정도가 그의 휘하에서 직접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해방 직후 신돌석 의병에 가담했던 인물들과 그 후손들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창의장명록」에는 핵심인물 61명의 명단과 직책이 기록되어 있어 의병 참여자에 대한 정보가 나타난다. 이러한 「창의장명록」과 함께 일제 군경의 정보자료 및 의병 판결문 등을 통해서 신돌석 의병에 참여한 인물들의 신분에 대해 대략적이나마 접근할 수 있다.
  신돌석 휘하에서 활동한 참모 병사들은 대체로 당시 신돌석과 비슷한 처지와 입장에 있던 평민층 특히 농민이 절대 다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창의장명록」에 기록된 명단 가운데 일부는 영해지역의 유력가문인 무안박씨·재령이씨·대흥백씨·안동권씨 등도 포함되어 있으나, 그 가문의 핵심인물이 아닌 방계인사들이었던 것으로 보여 일반 평민층으로 간주해도 무방할 듯하다.
  다음으로 소모장 이항의(李恒儀)에 의해 모병된 경우로 의병 귀순자 판결문에는 신돌석 의병의 귀순자 24명 가운데 신분 직업이 불명확한 4명을 제외하고 농업에 종사하던 인물이 14명으로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직업을 농업이라고 한 가운데는 신분을 사족(士族)·사인(士人)이라고 밝힌 3명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은 몰락잔반으로 평민과 크게 구분되지 않는 신분층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귀순자 명단 가운데 양반 4명, 유생 1명, 동몽교관(童夢敎官) 1명 등 6명의 경우는 권세 있는 양반은 아니라 하더라도 양반 유생층으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신돌석 의병에는 포수도 참여하고 있었다. 「창의장명록」에 ‘포대장(砲大將)’의 직책이 나타나 있는 점과 신돌석 의병에 가담해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907년 10월 교수형 판결을 받았던 남우팔이라는 인물의 전직이 포대장으로 기록된 점 등으로 포수의 가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신돌석 의병에 참가한 인물들 가운데 해산군인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1907, 8년 단계에서 활동했던 전국 대부분의 의병에는 어떤 형태로든지 해산군인이 가담하고 있었던 것이 일반적이었다. 포수와 더불어 해산군인의 가담 정도에 따라 의병의 전력이 좌우되던 실정이었다. 탁월한 기동성을 바탕으로 산악지대를 타고 유격전을 구사하던 신돌석 의병에 해산군인의 참여 여부가 확인되지 않는 것은 의외이다. 실제로 해산군인들이 가담하지 않았는지, 또는 가담했지만 현재 자료상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평민 의병장 신돌석 휘하에 다수의 양반 유생층 및 관인이 참여해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신돌석 의병 귀순자 명단 가운데 나오는 양반·유생·동몽·사족 등의 신분과 직업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나오는 동몽은 향촌사회에서 아이들을 훈육하는 책임을 맡은 하급관리인 ‘동몽교관’으로 보인다. 또 이러한 맥락에서 신돌석 휘하에서 핵심 간부로 활동했던 여러 인물 가운데 한영육과 백남수가 특히 주목된다. 참모로 활동했던 한영육은 ‘덕릉참봉(德陵參奉)’으로 불리던 인물로 상당한 학식을 갖추고 있던 양반 출신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군장과 후군장을 맡았던 의병의 핵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백남수는 전직 주사였다. 이들은 모두 하급직 관리이기는 하지만, 이를 통해서 신돌석 의병에 관리들이 가담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신돌석 의병은 평민 의병장 휘하에서 상층 지휘부나 하층 병사부 모두에 양반과 평민 계급이 동시에 가담해 활동하고 있던 의병 부대였다. 이와 같이 신돌석 의병이 양반과 평민 두 계급이 신분상의 한계를 극복하고 지휘부와 병사부 모두에 포진해 있었던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의병이 항일전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상하 신분상의 문제보다 국가와 민족 문제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이를 우선시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곧 일제침략으로 야기된 절박한 국가적, 민족적 위기상황 앞에서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민족 내부의 신분상 모순을 극복해야만 하는 과제가 우선적으로 요청되었고, 항일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모순이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신분상의 제약 극복을 통해 신돌석 의병은 전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었으며, 그만큼 일제 군경에 대해 큰 타격을 가할 수 있었다.

  • 질문1 신돌석 의병 구성원의 출신 신분을 모두 써 봅시다.
  • 질문2 양반 출신 인물들이 평민 출신인 신돌석 휘하로 들어간 이유를 추정하여 말해봅시다.
  • 질문3 이처럼 다양한 신분 구성이 신돌석 의병의 전투력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읽기자료 3

  신돌석 의병은 항일전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전력을 확보하기 위해 군사모집과 무기수집, 그리고 자금모집에 착수하였다. 이러한 전력강화 활동을 위해 태백산맥을 넘어 영양과 진보 방면으로 즉시 이동하였다.
  신돌석 의병은 우선 무기를 확보하는 일이 급했으므로 일반 주민들이 소지하고 있던 무기류를 수집하고, 관아를 습격하였다. 거의 초기인 1906년 3~4월 영양과 청송 등지에서 인력과 물자를 확보하여 전력을 보강한 뒤, 울진과 삼척을 공격대상으로 삼고 북상하였다. 동해안의 도시 가운데 울진은 일본이 그들의 교두보를 만들 예정으로 일찍부터 발을 붙이기 시작한 곳이다. 이미 189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본 어부와 수산업자들이 잠수기 어선을 동원하여 전복과 해삼 등 해산물을 쓸어가기 시작하였다. 전복 채취 잠수기를 사용하던 일본인들은 우리나라 어부들에 비해 10배 이상의 어획량을 거두던 실정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어부들은 일본인들의 이러한 어업침탈에 분개해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동해안의 어장이 일본인들에 의해 장악되어가고 있고, 또한 신돌석이 울진을 주된 공격대상으로 삼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신돌석 의병은 울진을 공격할 때 양반 출신 김하규(金夏奎)가 이끄는 삼척의병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였다. 양반 출신 인물이 거느리던 의병과 신돌석 의병이 연합했다는 사실은 당시 조건과 상황에 비추어 상당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점이기도 하다.
  1906년 5월 10일 전후 신돌석 의병은 영해지역으로 회군하였다. 영해·진보 일대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신돌석 의병은 1906년 6월 울진 방면으로 재차 북상하였다. 울진 일대에서 활약하던 의병은 북상을 계속하여 일제의 어업침탈 거점이던 장호관(莊湖館, 현 삼척시 근덕면 장호동)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인을 처단하거나 일본 어선들을 격파하고 그들의 가옥 40여 채를 불태우는 등 일제의 어업 침탈세력을 응징하기도 하였다.
일제 통감부는 정부에 압박을 가해 진위대를 파견하여 진압하게 하였다. 그러나 신돌석 의병은 파상적인 공세를 효과적으로 차단해냈다. 현지로 파견된 진위대가 남긴 기록에 “그저 구축해버렸을 뿐 그 수괴를 놓쳐버렸으므로 일시적 소강을 유지”하는 정도였다는 대목을 통해서도 의병들이 관군의 대공세를 적절히 막아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신돌석 의병은 6월 26일 영해읍의 서문을 공격하였다. 의병들의 기습 공격에 당황한 읍내의 관군은 미처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황급히 남문을 빠져나와 흩어졌다. 이때 선봉장 이하현이 불을 지르기 시작하자 신돌석은 “성 안의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다만 불의한 무리만을 처단하면 된다.”고 하면서 이를 제지했다고 한다. 영해읍을 점령하여 사기를 고양시킨 신돌석 의병은 다시 인접한 영덕으로 진출한 뒤 7월 초에 영덕읍을 공략하였다. 신돌석 의병은 영덕 관아를 점령한 뒤 군수를 단죄하고 관아 건물들을 파괴하였으며, 무기 등 군수물자를 확보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전들을 진중으로 끌고 갔다.
이후 신돌석 의병의 행적은 한동안 불분명하다가 1906년 9월 18일 영양군 순교청을 공격하면서 다시 등장하게 된다. 이어 10월 4일 신돌석 의병이 영양군 수비면 번동(翻洞)을 지날 때, 당시 소모장으로 이춘양(李春陽)이 활약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또 11월 4일 다시 영양 순교청을 공격하는 등 신돌석 의병은 계속 영양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신돌석 의병은 영해를 공격하여 출동한 대구진위대 관군과 격전을 벌인 끝에 이들을 격퇴시켰고, 의병의 공격으로 영해읍내가 텅 비게 되었다. 이후 관군의 압박이 계속되자, 신돌석 의병은 백암산과 일월산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그 뒤 겨울이 다가와 날씨가 추워지자, 1906년 11월경 일월산과 백암산·대둔산·동대산 일대로 근거지를 옮긴 뒤 일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겨울을 넘기고 1907년 4월 본격적으로 활동을 재개하여 그해 8월까지 영해·평해·영양·진보 등지를 전전하면서 일제 군경을 상대로 도처에서 영웅적인 항일전을 수행하였다.
신돌석 의병의 항일전 가운데 특히 1907년 8월에 영양읍을 다시 공격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8월 20일 신돌석 의병 3백 명은 영양군청 소재지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분파소를 포위하여 공격하였고, 나아가 관아까지 소각시켜 버렸던 것이다. 영양 습격 후 신돌석 의병은 즉시 그곳에서 철수하여 영덕을 다시 공략하기 위해 태백산맥을 넘어 행군하였다. 이에 영덕 거주 일본인들은 화를 면하기 위해 사방으로 탈출하던 지경이었다. 영양과 영덕을 차례로 유린한 신돌석 의병은 동지들을 규합하고 파죽지세로 9월 초에는 삼척 방면으로 북상하면서 그 길목에 있는 울진을 공략하였고, 이어 9월 7일에는 장호동까지 올라가 일본 거류민들을 습격하였다.
  이후에도 신돌석 의병은 활동을 지속해 갔다. 그리하여 이강년·유시연 등의 의병과 긴밀한 협조 하에 연합작전을 구사하면서 내륙 깊숙이 진출하였고, 1907년 11월 한때는 순흥까지 점령하는 등 경북 북동부지방을 전전하면서 신속한 기동력과 위력적인 유격전술을 바탕으로 활발한 항일전을 펼쳤다. 12월에 전국 13도의 의병이 연합하여 서울 공격을 목적으로 양주에 집결하였다. 신돌석도 경상도 의병을 이끌고 참가하였다. 그러나 당시 의병장은 대부분이 양반 출신이었기 때문에 평민 출신 의병장인 신돌석이 이끄는 부대는 13도 창의군의 편제에서 제외되었다. 다시 영해로 돌아온 신돌석은 계속하여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다가 1908년 10월에 날씨가 추워지자 이듬해 봄을 기약하고 의병을 해산하였다. 그 뒤 11월 18일 신돌석은 변절한 부하 김상렬(金相烈) 형제의 타살로 순국하였다.

  • 질문1 신돌석 의병이 공격 대상으로 삼은 장소나 인물은 어떤 성격의 것들인가요?
  • 질문2 신돌석 의병이 초기에 울진을 주요 공격 대상으로 삼았던 까닭을 말해보시오.
  • 질문3 신돌석 의병의 활동지역을 지도 위에 순서대로 표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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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다음 글은 신돌석이 평해의 월송정에 올라 지은 우국시이다.

 

누(樓)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잊고
낙목에 가로 놓인 단군의 터전을 한탄하노라
남아 27세에 이룬 일이 무엇인가
문득 가을바람이 부니 감개만 이는구나

  • 질문1 자신이 의병이라고 생각하고, 심경을 노래한 짧은 시를 한 구절 지어봅시다.

시각자료 2

다음 사진은 신돌석장군유적지에 있는 신돌석 흉상과 방명록이다.

  • 질문1 기념관을 방문할 경우 방명록에 적을 글귀를 적어봅시다.

시각자료 3

다음 사진은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는 의병들이 사용했던 무기이다.

  • 질문1 무기를 보고 여러 형태의 전투 방식을 추정하여 말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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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양반․유생의병장과 평민의병장이 이끄는 의병부대로 나누어 앞으로 활동방향을 논의해 봅시다.
모둠활동 2
일제의 침략에 대항했던 평민출신 의병들의 행적을 조사하여 발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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