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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독립운동기지로-이상설 생가

도입

 “이 분의 포부는 매우 크며, 세계 대세에 밝고 동양 시국을 간파하고 있다. 이범윤 같은 인물 만인을 모아도 이상설 한 분에 못 미칠 것이다. --- 수차 만나서 그 인물을 보니 기량이 크고 사리에 통하는 대인물로서 대신(大臣)의 그릇됨이 부족함이 없더라. --- 세계 대세에 통하고 애국심이 강하며, 교육 발달을 기도하고 국가 백년대계를 세우는 사람은 이 분일 것이다. 또한 동양 평화주의를 갖는 점에 있어서 이 분과 같이 초절한 마음과 뜻을 가진 사람은 참으로 희귀한 것이다.”


  이 글은 안중근 의사가 뤼순[旅順] 감옥에서 처형에 즈음하여 쓴 이상설에 대한 인물평이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134-2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이상설안길 10)
현재 상태 복원, 1988년 새롭게 복원 정비되었다. 생가 안에는 사당과 동상, 숭모비, 초혼묘 등이 조성되어 있다

  이상설(李相卨, 1870~1917)은 1870년에 이행우와 벽진 이씨 사이에서 출생하였고, 1876년 7세 때에 동부승지 이용우의 양아들이 되어 한성부 남부 장동 장박골로 갔다. 1894년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교수, 한성사범학교 교관 등을 역임하였고, 외국어나 산술에 뛰어났다.
1904년에는 대한협동회를 조직하여 민족운동을 하였으며, 탁지부 재무관 법부협판을 거쳐 1905년에는 의정부 참찬에 발탁되었으나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1906년 4월에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설 것을 결심하고 이동녕, 정순만과 같이 망명길에 올라 상하이[上海]를 거쳐 북간도 룽징[龍井]으로 가서 서전서숙을 건립하고 항일민족교육을 하였다. 1907년 6~7월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위임장을 받고 이준, 이위종과 함께 참석하여 일제침략의 부당성과 잔혹상을 국제여론에 호소하려다 실패했으며 이준은 현지에서 순사하였다.
  이상설은 귀국하지 않고 영국·프랑스·독일·미국 등지를 다니면서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이 동양평화의 열쇠라고 주장하였다. 1910년 국권피탈 후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여 한흥동에 한인마을을 건설하고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14년 연해주 한인 이주 50주년을 맞이하여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하고 항일 무장투쟁을 계획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무산되었다. 1915년에는 신한혁명단을 조직, 고종의 중국 망명을 추진하고 독일과 손잡고 일본과 싸울 것을 계획하던 중 탄로나 실패했다.
  이에 병을 얻어 1917년 3월 48세 때 니콜리스크에서 사망하였다. 1916부터 피를 토하는 중병을 얻어 투병하면서 마지막에는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는 내 몸을 화장하여 그 재를 바다에 뿌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임종을 지킨 이동녕, 백순, 조용철, 김완수, 이민복 등은 그의 유언에 따라 문고, 유품과 함께 아무르 강가에서 화장하여 재로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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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이상설은 1870년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134-2번지에서 태어나 1876년 7세 때에 이용우의 양자로 서울로 올라왔다. 이상설의 가계는 하곡 정제두로부터 시작되는 강화학파의 학문적 계보를 잇고 있었다. 1894년 조선의 마지막 과거인 갑오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학사로 시작하여 여러 관직에 임명됐으나 실제 관직에 나간 적은 드물었고, 1개월 이내 사임하는 경우도 많았다. 국내 정치의 불안과 외세의 침투 등으로 적극적으로 관직에 나아가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1904년 6월 일본은 한국 정부에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였다. 이상설은 이에 반대하여 박승봉과 함께 반대 상소를 올렸다.
  이상설은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고 재물은 민생의 근본이라고 전제하고 우리는 국가가 원래 빈약하여 재원과 토지가 부족하여 외국에게 토지를 주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며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이자고 하는 주장은 국민에 대한 죄인이자 나라와 임금에 대해 죄를 지는 매국 행위라고 비판하였다. 이와 같은 이상설의 상소는 일본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대한 논리정연한 반대논리로서 보안회를 비롯한 반대 운동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제에 의해 보안회는 해산되었으나 회원들은 대한협동회를 조직하여 이상설을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대한협동회는 이준, 정운복, 이상재, 이동휘, 이승만, 양기탁, 허위 등 당시 애국 계몽 운동 세력과 독립 운동을 주도하던 세력들을 망라한 단체로 이상설의 위상을 알 수 있다.

  • 질문1 이상설의 가계는 어떤 학문적 계보를 잇고 있나요?
  • 질문2 이상설과 박승봉이 상소를 올린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3 이상설이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를 받아들이자는 세력을 비판한 요지는 무엇인가요?
  • 질문4 이상설이 회장으로 추대된 단체이름을 써봅시다.

읽기자료 2

  이상설은 일제가 1905년 11월 17일 강제로 대신회의를 열고 을사늑약을 강제할 당시 대신회의를 담당하는 의정부 참찬으로 회의에 참가해야 했으나 일제의 제지로 참가하지 못하였다. 이상설은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관직을 버리고 고종의 인준 절차가 남아 있음을 알고 을사늑약 파기 상소를 올렸다. 이상설은 을사늑약은 인준을 해도 나라가 망하고 인준을 하지 않아도 망할 것이니 황제에게 이왕 망할 것이면 인준을 거부하고 종묘사직을 위해 따라 죽으라는 직언을 하였다.
  이상설은 관리 및 유생들과 연명하여 5번에 걸친 상소를 올렸다.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조병세에 이어 민영환까지 자결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이상설은 복합 상소를 마치고 종로거리에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는 연설을 하며 통곡하였다. 머리를 땅에 찧어서 실신하였다. 집에 옮겨진 후 조상을 뵐 면목이 없다며 음식을 끊고 실성한 사람이 되어 집에서 여러 달 동안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상설의 을사늑약 반대 운동은 전국 유생의 상소를 선도하였고 의병의 봉기를 촉발하여 일제의 통치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이상설은 을사늑약 반대운동 이후 1906년 저동의 자택을 처분하고 이동녕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다.

  • 질문1 이상설은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어떤 활동을 하였나요?
  • 질문2 이상설은 을사늑약에 대해 황제에게 어떠한 조치를 취할 것을 주장했나요?
  • 질문3 이상설의 을사늑약 반대운동이 끼친 영향을 써봅시다.

읽기자료 3

  이상설은 민족운동은 민족주의 교육으로 시작된다는 신념으로 북간도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1906년 이동녕, 정순만, 여준 등과 함께 옌지현[延吉縣] 룽징[龍井]에 설립하였다. 서전서숙의 운영 경비는 모두 이상설이 부담하여 무상교육을 실시하였다.
  서숙의 건물은 70평 정도였고 처음에는 인근의 한인 청소년 22명으로 시작하였다. 처음에 학생들을 갑․을 반으로 나누었는데 갑은 고등반, 을은 초등반이며 갑반에는 20세 전후의 생도들이 있었다고 한다. 산술, 역사, 지리, 한문, 정치학, 법학 등을 가르쳤는데 신학문을 중심으로 한 철저한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서전서숙은 1907년 이상설이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면서 재정난과 통감부 간도 출장소의 감시와 방해로 문을 닫았다. 이 영향으로 1908년에는 이웃 명동촌에 김약연 등이 명동학교로 발전하는 명동서숙을 세웠고 1911년에는 서간도에 이회영, 이동녕 등이 중심이 되어 신흥강습소를 세우게 되었다.
  서전서숙은 단순한 신교육기관이 아니라 독립군을 양성하여 일제와 무장 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인재 양성의 일환이었다.

  • 질문1 이상설이 북간도에 설치한 교육기관은 무엇인가요?
  • 질문2 이상설이 서전서숙을 설립한 목적을 써봅시다.
  • 질문3 서전서숙에서 가르친 과목의 특징을 써봅시다.
  • 질문4 서전서숙 설립과 운영은 어떤 영향을 끼쳤나요?

읽기자료 4

  일제는 을사늑약을 강요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두자 한국인은 죽음으로 싸웠다.
  1907년 6월 15일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제 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를 발의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고종에게도 비밀리에 초청장을 보내왔다. 고종은 이것을 구미 열강의 도움으로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여 전 참찬 이상설을 정사로, 전 평리원 검사 이준과 전 러시아주재 공사 이범진의 아들로 외국어에 능한 이위종을 각각 부사로 하는 3인의 특사를 파견하였다. 한편 한국 독립운동의 은인이라고 불리는 헐버트를 별도로 파견하여 특사들의 활동을 돕도록 하였다.
  이상설 등 3인 특사의 헤이그에서의 당면과제는 을사늑약의 파기와 일제의 침략상을 각국에 알려 여러 나라의 후원으로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고종은 위임장에서 “① 몇몇 각료들의 서명은 위협과 강압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② 짐은 각료들에게 이 문서에 서명할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 ③ 조약이 조인된 각료회의는 불법이다. 이 회의는 짐이나 총리대신의 요청에 의한 것이 아니고, 일본인들이 소집한 것이다.” 라고 주장하여 열강의 후원을 호소하였다.
  이상설 등 3인 특사는 을사늑약에 의하여 외교권이 없다는 이유로, 그리고 일본의 방해공작으로 인하여 본회의에는 참석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연명으로 작성하여 만국평화의회 의장과 각국 대표에게 전달한 「공고사(控告詞」와 각국 신문기자단으로 구성된 국제협회에서 이위종이 프랑스어로 연설한 ‘한국의 호소’는 을사늑약의 불법성과 일본의 침략상을 국제 사회에 명확히 알려 큰 반향을 일으킴으로써 일본에 큰 충격을 주었다. 「공고사」는 을사늑약과 일제의 침략에 대하여 대한제국 정부가 당사자를 내세워 공식 입장을 표명한 최초의 외교 문건이다. 「공고사」는 특사들과 헐버트의 노력으로 『평화회의보』에 전문이 게재되었으며 『런던 타임스』나 『뉴욕 헤럴드』등에도 보도되었다.
  헤이그 특사 파견 기사는 1907년 7월 3일 『대한매일신보』에 의하여 국내에 처음 알려졌다.
  그러나 7월 14일 이준이 돌연히 순국하였다. 이상설은 7월 17일 이준의 유해를 아이큰다우 공동묘지에 가매장하고 특사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채 다음 임무 수행을 위해 구미 열강 순방길에 올랐다.

  • 질문1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헤이그 특사로 파견한 목적은 무엇인가요?
  • 질문2 고종이 특사들에게 준 위임장에서 주장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세 가지로 정리해 봅시다.
  • 질문3 3명의 특사가 연명하여 작성, 배포한 「공고사」의 의의를 써봅시다.

읽기자료 5

  1907년 7월 19일 경 이상설은 영국을 시작으로 구미 순방길에 나섰다. 이상설은 순방길에 앞서 헤이그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들은 황제의 특명으로 왔으며 일본에게 독립권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고 일본의 보호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구미 각 국에 알리고 특사의 임무가 실패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이상설은 각국의 원수, 정치 실력자, 언론인 등을 만나 일제의 한국 침략의 불법성을 알리고 한국의 독립을 위한 국제 협력을 요청하였다. 또한 극동지역의 평화유지를 위해 한국이 네덜란드, 벨기에, 스위스와 같은 영세 중립국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미국과 구미 열강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 같은 특사의 구미 순방 외교에 대하여 구미 열강은 공식적으로는 자국의 이해와 일본과의 외교 관계 등을 고려하여 외면하였다. 그러나 특사의 활동은 구미 열강에게 일제의 한국 침략에 대한 실상을 제대로 알리고 한국의 독립과 극동의 평화가 직결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상설이 구미 순방 외교를 벌이는 기간에 국내에서는 일제가 헤이그 특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고, 정미7조약이 강제되었으며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또한 이상설 자신도 이 사건으로 궐석 재판이 진행되어 사형이 언도되기도 하였다.
  1908년 2월 이상설은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정부를 대상으로 독립 지원을 호소하는 외교활동을 전개하면서 한인사회의 독립운동에 대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데 공헌하였다.
  미주 한인사회에서는 헤이그 특사의 활동과 이준의 순국 이후 독립운동 단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상설은 미주지역 독립운동 단체의 조직과 정비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상설은 1908년 7월 미국에서 박용만, 이승만, 이관용 등 미주 한인사회의 대표자들이 발기인으로 열린 애국동지대표회에 참석하였다. 이 대회는 미국 내의 각 지방의 여러 단체의 통합과 적극적인 독립운동의 방안을 마련하였다. 그 방안으로는 근대 산업의 진흥과 군대 양성이었다.
  또한 이상설은 미주 독립운동의 중추적 기구인 국민회 결성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이상설이 1909년 2월 미국 본토와 하와이 지방총회의 공동 결의로 국민회 총회장으로 당선된 정재관과 함께 극동지역 특파원으로 파견된 것은 이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이상설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간 뒤 국민회에서 그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해 준 것은 군대 양성과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이상설 등의 구미 순방 외교는 나름대로 결실을 거두었다.

  • 질문1 이상설이 한국의 독립과 극동평화를 위해 주장한 국제법상 국가의 존재 형태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이상설의 구미 순방 외교의 성과는 무엇인가요?
  • 질문3 이상설의 구미 순방 외교 기간에 국내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나요?
  • 질문4 이상설이 조직과 정비에 큰 역할을 한 미주지역 독립운동 단체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6

  이상설은 망명 당시부터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목표로 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 온 이상설은 한인 지도자들을 규합하는 한편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주력하였다. 중국과 러시아 접경지대인 밀산부 봉밀산에 미주 국민회의 지원금을 바탕으로 이승희와 함께 1백 여의 한인 가구를 이주시켜 ‘한흥동’을 개척하고 한민학교도 세워 민족교육을 전개하였다.
  이상설의 밀산부 독립운동기지 건설은 궁극적으로는 한인 청소년을 모아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이상설의 민족교육과 독립군 양성, 독립운동기지 개척과 한인사회의 결속 등은 항일무장투쟁이라는 큰 구도 속에 진행된 민족운동이었다.

  • 질문1 이상설이 밀산부에 세운 독립운동기지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이상설이 세운 독립운동기지 건설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7

   이상설은 1910년 6월 이범윤, 이남기 등과 함께 러시아 영토 안에 있는 의병은 물론 국내의 의병까지 포함하는 통합군단의 편성을 위해 13도 의군을 편성하였다. 도총재에 유인석을 추대하고 이범윤, 정남기, 우병열, 홍범도, 이진룡, 안창호, 이갑 등으로 지도부를 구성하였다.
  이상설은 7월 도총재 유인석과 연명하여 군자금의 지원과 고종의 러시아 망명을 요청하는 상소문을 고종에게 올렸다.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주장이었지만 이상설이 망명정부 수립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상설은 1910년 8월 외신을 통해 국권피탈 소식을 듣고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한인학교에서 한인대회를 열고 성명회를 조직하였다.
  ‘대한의 국민된 사람은 대한의 광복을 죽기를 맹세하고 성취한다’는 목적 아래 ‘일본의 죄를 성토하고 우리의 원한을 밝힌다.’는 뜻으로 성명회라는 단체의 이름을 만들었다. 성명회는 취지문에서 결코 일제의 노예가 될 수 없음을 천명하고 우리와 친교 동맹을 체결한 나라에 공명정대한 여론을 구하는 것이 제일급선무라고 하며 동포들의 협력을 촉구하였다.
  성명회는 일본 정부에 국제공약에의 배신을 책망하는 공한을 보내고, 각국 정부에는 합병 무효 선언서를 보내기로 하였다.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이해시키고 일본의 침략성을 고발하면서 일본의 한국 강제 합병을 반대해 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성명회의 활동은 9월 초에 중지되었다. 일본의 강력한 항의 제기와 주동 인물들의 체포 및 인도 요구에 러시아 정부가 굴복하여 성명회와 십삼도의군 대표 20여명을 체포, 투옥하였다가 이상설 등을 니콜리스크로 추방하였다.
  이상설은 한인의 시베리아 이민 50주년에 맞추어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국권 피탈 이후 최초의 망명정부라고 할 수 있는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하였다. 주최 측은 한민족이라는 관념을 강조하고 자제들에게 교육과 사고의 확대를 통해 러시아인과 평등한 국민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향후 50년간의 활동 방향을 설정하고자 하였다. 특히 이 시기를 이용하여 민족의식을 높이고 독립군 군자금도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제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일본과 동맹을 맺었던 러시아의 탄압으로 구척적인 활동은 할 수 없었다.
  이상설은 1915년 3월 경 상하이에서 박은식․신규식․조성환․유동열 등과 함께 신한혁명단을 조직하여 독립군의 무장과 독립전쟁의 추진 방략을 논의하였다. 신한혁명단은 베이징에 본부를 두고 이상설을 본부장으로 추대하였다. 군자금은 국내외에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마련하기로 하고 중국과 국내에 지부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 질문1 이상설이 러시아 영토와 국내의 의병을 포함하는 통합군단의 편성을 위해 조직한 단체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이상설이 1910년 8월에 조직한 단체 이름을 ‘성명회’라고 지은 뜻을 써봅시다.
  • 질문3 성명회의 주요활동과 목적을 써봅시다.
  • 질문4 이상설이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에 세운 국권 피탈 이후 최초의 망명정부는 무엇인가요?
  • 질문5 이상설이 1915년 3월 경 상하이에 군자금 조달과 독립전쟁 수행을 위해 만든 단체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8

 이상설은 니콜리스크로 유배되었다 풀려나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1911년 12월 권업회를 조직하고 기관지로 『권업신문』발행을 주도하였다. 권업회는 표면적으로는 한인 교포의 산업을 권장하고 교민의 직업과 일터를 알선하며 교육 보급을 목적으로 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조국의 독립을 위한 항일투쟁 단체였다. 권업회는 『권업신문』을 통해 한인사회를 계몽시키는 한편 한인 거주지마다 지회와 분사무소를 설치하여 한인사회의 조직화에 힘썼다.
  하지만 권업회에는 출신지역별 계파간 연합 조직으로 갈등이 존재하였다. 이 같은 갈등 속에서 이상설은 1913년 말 일제의 밀정으로 몰리게 되자 모든 직함을 내놓고 하바로프스크로 이동하였다.
  권업회의 표면적 활동은 1914년 8월, 창설된 지 3년 만에 제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러시아의 탄압으로 멈추었다.

  • 질문1 이상설이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한 한인 단체는 무엇인가요?
  • 질문2 권업회의 표면적 목적은 무엇인가요?
  • 질문3 권업회의 활동 내용을 써봅시다.
  • 질문4 권업회의 실질적인 목적은 무엇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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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서전서숙

  • 질문1 서전서숙의 설립과 운영을 주도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 질문2 서전서숙을 설립한 목적은 무엇인가요?
  • 질문3 서전서숙이 1년도 안되어 문을 닫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시각자료 2

이준, 이상설, 이위종의 모습

  • 질문1 이들이 1907년 6월 15일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제 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고자 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 질문2 이들 중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은 누구인지 사진에 표시하여 봅시다.

시각자료 3

  • 질문1 이 기사의 내용을 정리하여 봅시다.
  • 질문2 이 기사가 게재된 신문명과 게재된 연월일을 서기로 적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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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모둠별로 이상설이 중심이 된 헤이그 특사 사건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작성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2
모둠별로 1917년 니콜리스크에서 죽음을 맞이한 이상설의 입장에서 한국 청년에게 보내는 유서를 작성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모둠별로 이상설의 독립운동을 UCC로 만들어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4
모둠별로 이상설 독립운동의 자취를 답사하기 위한 답사계획서와 자료집을 작성하여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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