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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용성!
한국 근대불교의 대표적인 선사
3․1운동 때 불교계 대표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사람
민족불교를 지키려고 식민지 불교에 정면으로 저항한 승려
불교의 개혁과 혁신을 실천한 승려
선농불교를 실천한 승려
불교의 활성화를 위해 대각교를 창립한 주역
민중의 깨달음을 위해 대각사상을 제창한 사상가
불경을 한글로 번역한 선구자
역사적 배경
현재 주소 |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 2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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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태 | 1985년 백용성조사기념사업회가 생가 터와 주변 토지를 매입하여 생가를 복원하고 여러 건물을 세웠다. |
백용성(1864~1940)은 전라북도 남원군 하번암면(현재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출신이다. 그의 속명은 상규(相奎), 법명은 진종(辰鍾), 법호는 용성(龍城)이다. 유년 시절부터 불교와의 인연이 남달랐던 그는 열네 살에 남원시 덕밀암으로 출가를 단행하였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실패하고 열여섯 살에 해인사로 정식 출가를 하였다.
출가 후 그는 승려로서 기본 교육을 받고서 고운사, 보광사, 송광사, 표훈사 등지에서 치열한 구도의 길을 갔다. 그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었으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수행을 지속하였다. 당시 그는 경전의 열람, 선지식의 순방, 은둔을 통한 자기 성찰 등을 하였다.
그의 나이 48세 때인 1911년 서울에 올라와 한 신도의 집에서 본격적인 포교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1912년부터는 교화에 전력하여 3년 만에 3천 여 명의 신도를 모았다. 또한 대각사(大覺寺)를 설립하여 포교와 불교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에는 한용운과 같이 불교계를 대표하여 민족대표에 서명하였다. 그는 많은 저술과 불경 번역을 하였으나, 당시 불교계는 점점 고유의 정체성을 상실해 갔다. 백용성은 이러한 사회분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불교운동을 전개하고자 1921년 대각교(大覺敎)를 창립하고 계속하여 불경 번역과 저술 활동에 전념하며 교화와 민중 계몽에 전력을 다했다.
1940년 입적할 때까지 백용성은 일제에 의한 전통 불교의 일본화에 강력히 반발하였고, 포교의 현대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읽기
읽기자료 1
벡용성의 불교 포교활동이 민족운동과 연계된 것은 1912년 개교한 조선 임제종 중앙포교당(朝鮮臨濟宗中央布敎堂)의 개설과 연계된다. 이 포교당은 친일 승려인 이희광이 조선 불교를 조동종(曹洞宗)에 병합시키려는 음모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회광은 한국의 국권상실 직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불교의 한국 포교에 협조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한국 불교의 자주성을 손상시키는 내용의 조약을 조동종과 체결하는 데 앞장섰다. 그 조약의 내용이 우리나라 불교계에 알려지면서 이에 대한 반대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는데, 이것이 이른바 임제종 운동이었다. 임제종 운동은 1911년 초반부터 불붙기 시작하여 송광사, 해인사, 통도사, 범어사 등 주로 남방 지역의 사찰을 거점으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이 운동의 전개를 위하여 각처에 포교당을 개설하여 홍보에 나섰던 것이다. 그 중 1912년 5월, 서울의 인사동에 개설하였던 임제종 중앙포교당은 그 실세나 상징적인 측면에서 효과가 대단하였다. 5월 26일에 열린 포교당 개교식은 수천의 군중이 참여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이는 당시『매일신보』에서도 성황을 이루었다고 보도된 적이 있다.
백용성이 이 임제종 운동과 연결되었던 것은 개설 당일부터 개교사장(開敎師長)으로의 활동이었다. 개교사장은 포교당의 핵심적인 인사로서 정신적인 총책임자이며 상징적인 인물임을 의미한다. 이 때 한용운은 포교당의 주무(主務)로서 행사 전반을 진행하였다. 한용운이 백용성을 개교사장으로 초빙한 것은 백용성이 이미 1년 전부터 서울 중심부에서 포교 활동을 하였으며, 크게 깨달음을 얻은 승려라는 점, 그러면서도 본인보다 15세 연상의 어른이라는 점 등이 결합하여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후 한용운과 백용성은 1925년경까지 함께 활동을 하며 한국 불교의 전통을 수호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이 포교당은 일제가 한국 불교를 탄압하기 위해 1911년 6월에 제정한 사찰령에 의해 지속적으로 운영될 수가 없었다. 사찰령은 한국 불교의 자주성을 부정하며, 한국 불교를 일제의 행정 편의주의적인 구도에 끌어들이는 법이었다. 사찰령 체제에서는 한국 불교의 종명(宗名)을 선교양종(禪敎兩宗)이라는 기형적 종명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중앙포교당이 설립된 지 불과 1개월 후인 1912년 6월 21일 일제는 포교당의 주무인 한용운을 불러 ‘임제종’의 간판 철거를 명령하였다. 이에 한용운과 백용성이 주석하였던 포교당은 기존 임제종 포교당에서 선종포교당 명칭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일제는 포교당 건립 자금을 일제의 동의를 받지 않고 모금하였다 하여 한용운을 구금하고 재판에 회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용성은 그 포교당에서 포교 활동을 지속하였다. 한용운 역시 그 포교당에 있으면서 조선불교회, 불교동맹회를 불교청년들과 함께 결성하며 불교대중화의 활동을 지속하였다. 이처럼 백용성과 한용운은 이 포교당을 거점으로 항일불교, 불교 대중화의 노력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1915년 이후에 백용성과 한용운은 각기 포교당을 떠나 개별적인 행동으로 나섰다. 백용성은 1915년 초부터 서울 종로의 장사동에 선종임제파강구소(禪宗臨濟派講究所)를 설립하고 포교, 연구 활동을 하였다. 일제가 정한 선교양종에 대하여 임제선종임을 내세웠던 것이다. 이 무렵 조선총독부가 한국 불교의 종파에 대한 답변을 요청한 글에서도 임제종 종파의식에 대한 신념이 확고하였다. 이는 곧 한국 불교의 전통을 고수하겠다는 의지와 무관하지 않은 자주 불교의 지향이었다.
한편 백용성은 1916년부터 그가 구상하고 있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기 위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금광 사업을 하였다. 그러나 북청에서 금광 사업을 하는 것이 간단하지 않았기에 1918년에 중단하고 서울 종로의 봉익동에 머무르며 포교하였다. 금광을 시도하였다는 것은 그의 불교 자주화 추구가 얼마나 치열하였는가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이처럼 백용성은 항일 불교, 한국 불교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노력을 다하였다.
- 질문1 백용성이 임제종중앙포교당을 개설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일제시대 백용성과 한용운이 서로 신뢰하고 적극적인 협조를 하였던 배경은 무엇일까요?
- 질문3 일제는 한국불교를 탄압하고 일제에 예속시키기 위하여 1911년 사찰령을 제정하였다. 백용성은 일제의 이러한 움직임에 어떻게 대응하였는지 써 봅시다.
읽기자료 2
백용성은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했다. 그는 불교계를 대표하여 3․1운동의 최일선에서 활동하며 참여를 권하는 한용운의 뜻을 지지하여, 불교계의 대표로 자신을 포함시킬 것을 찬성하였다. 한용운과 함께 했던 수년 동안의 중앙포교당 활동이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백용성은 한용운처럼 일선에서 주도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즉 한용운은 일본을 시찰하다가 만난 최린과의 인연으로 33인의 선정, 거사 일정의 조정, 독립선언서 준비 등의 실무적인 일을 주도한 데 반해 백용성은 일선에 직접 나서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용운의 제안에 망설임 없이 참여를 결정한 것으로 보아 3․1운동 및 한국의 독립에 대한 그의 입장은 분명하였다.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았을 때 백용성은 당시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2월 27일 오후 8시경 한용운이란 사람이 나에게 와서 금번 구주전쟁의 결과 파리강화회의에서 각국은 독립을 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우리 조선도 독립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여 금명일내로 선언하려고 하니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하므로 그런 일이면 마땅히 찬성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백용성의 발언에서 그의 자주독립의식을 분명히 파악할 수 있으며, 한용운과의 긴밀한 상호 신뢰성을 엿볼 수 있다. 당시 그는 한용운에게 3․1운동의 의의를 물은 후 참가한다는 의사를 확실히 표명하였다. 이것은 그가 지금껏 걸어온 이력과 불교사상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하여 백용성은 한용운이 추진한 3․1운동에 기꺼이 동참하기로 작정하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도장을 기꺼이 건네주었다. 2월 28일, 한용운은 백용성을 찾아와 3월 1일 거사의 행동에 대한 연락사항을 알려 주었다. 이 대목은 백용성의 다음과 같은 법정 발언에 잘 나오고 있다.
그 후 2월 28일 한용운이가 와서 가입되었으니 내일 오후 2시에 명월관 지점으로 오라고 하므로 나는 생활이 곤란하여 양미를 구하러 인천에 갔다가 오후 2시에 명월관에 가니 벌써 동지들이 대부분 다 모였고 한용운의 인사말이 있은 후 만세삼창을 부르자 곧 경관이 와서 체포되었다.
백용성은 양식이 없어 3월 1일 당일에도 인천까지 다녀올 정도로 무소유, 청빈의 삶을 유지하면서도 불교 포교와 독립운동을 위해 애쓰는 치열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는 1919년 8월 고등법원 재판에서 “동양의 평화를 영원히 유지하기 위해서 조선의 독립은 필요하다”라는 발언에 이어 “불교 사상으로 보더라도 조선의 독립은 마땅한 것”이라고 하였다. 백용성의 독립정신은 배타적이거나 울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동양인 전체 구성원들의 자유와 평화를 위한 것이었다. 아울러 불교사상의 대자대비한 보살정신에서 우러나왔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백용성의 3․1운동 참여는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는 민족의 독립에 대한 투철한 민족의식이며, 둘째는 일부 타락되어가는 한국 불교계에 경종을 울리고 민족의 독립운동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인 불교지도자들을 반성케 함으로써 교단에 민족의식이 확산되도록 기폭제 역할을 한 점이다. 3․1운동으로 체포된 백용성은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루고 1921년 봄에 출옥하였다.
- 질문1 한용운이 민족대표의 불교계 인사로 백용성을 추천한 배경은 무엇인가요?
- 질문2 백용성이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3 우리 민족의 독립이 왜 동양평화를 실현하는 방법이 되는지를 써봅시다.
읽기자료 3
백용성은 승려들의 도덕적 타락과 중생 구제와는 유리된 삶이 불교 존립마저 위태롭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불교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른바 대각교 운동(大覺敎運動)으로 그것을 실현해 나갔다. 그는 먼저 불교가 조선에서 불교라는 이름으로 너무나 많은 폐단을 낳았기 때문에 조선불교와 구분되는 의미에서 ‘대각교’라는 새로운 명칭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불교 개혁 운동은 전개하였다.
그가 주장하는 개혁의 특징은 첫째, 불교 사찰이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제 승려들이 더 이상 걸식이나 시주금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필요한 것은 자기 노동을 통해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선(禪)과 농(農)을 겸하는 선농운동(禪農運動)을 주창하고 실천에 옮겼다. 실제로 그는 중국 길림성에서 농지를 매수하여 경작하였으며, 함경도에서 과수원을 경영한 적도 있다. 또한 경남 함양의 백운산에서 감, 밤 등 1만 여 그루를 재배하였으며 간도의 연길에 토지를 사서 선농운동을 15년 동안 실천하였다. 그는 용정에 대각교당을 설립하고 이를 통해 대각사상을 전파했을 뿐만 아니라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 자금도 전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사원이 가진 토지 등의 재산을 도시나 농촌에 공장을 건설하는 것에 재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래서 불교 자체의 경제적 자립기반을 확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불자들의 생활을 구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자주적인 불교의 건립을 요구하였다. 종교는 세속의 권력으로부터 독립되어야 하는데, 당시 조선불교는 일제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또 31개 본사(本寺) 제도에도 비판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상하의 차별을 두는 본말사(本末寺) 제도보다는 석가모니 당시의 평등한 승가제도를 회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승려의 대처식육(帶妻食肉)의 철저한 금지를 주장하였다. 이는 곧 일본 불교 모방의 핵심이자, 승려 타락의 근본 요인으로 지목된 승려의 결혼과 육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일제하 승려의 결혼문제는 구한말 당시 일본불교가 침투되면서 가시화 되어 3․1운동 이후에는 더욱 보편화 되어갔다. 특히 승려 결혼 문제는 승려의 타락, 명리 추구, 불교공통체의 내분 등과 맞물려 있었다. 백용성은 승려의 대처식육은 불교의 근본에서 어긋나며, 한국불교를 망치는 장본인으로 규정하고 그 저지를 위한 일선에 나서게 되었다.
셋째, 한문 불경을 현대 국어로 번역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문으로 된 불전이 아무리 많이 있더라도 읽을 수 없다면 그것은 휴지조각과 같다고 백용성은 말하였다. 그는 한문 경전을 모든 사회계층의 사람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한글로 번역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는 교화의 구심점을 다수의 대중, 그것도 하위층에 속하는 서민대중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백용성의 불경 번역 사업은 1922년부터 1936년까지 15년 동안 계속되었다. 또한 어려운 불교 용어를 새롭게 바꾸어 표현하기도 했다. 남녀 누구나 알 수 있는 쉬운 한글로 불경을 번역해서 중생들이 누구나 쉽게 경전을 읽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불교의 대중화에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 외에도 현대 악보에 의한 불교 노래를 직접 작사하고 작곡하여 불교를 접하기 쉽고 알기 쉬운 모습으로 개량하려 하였다.
- 질문1 백용성이 주장한 불교 개혁의 주요 내용을 말해보시오.
- 질문2 백용성이 불교를 널리 알리기 위해 기울였던 노력들을 말해봅시다.

시각자료
시각자료 1

다음은 1926년 5월 26일에 열린 조선임제종중앙포교당 개교식에 관한 보도기사이다. 당시 개교사장이었던 백용성은 개교식에서 교리를 설명하였다.
- 질문1 포교당 개교식에서 백용성이 개교사장을 맡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요?
시각자료 2

다음은 백용성이 비구승들과 함께 1926년 조선총독부에 올린 건백서이다. 이 건백서에서 백용성은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대처식육의 금지 등 불교계 정화를 주장했다.
- 질문1 백용성이 대처식육의 금지를 주장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 질문2 건백서의 내용과 같은 불교개혁을 통해 백용성이 실현하고자 했던 불교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시각자료 3

백용성이 혼신의 힘을 다해 번역하고 간행한『조선글 화엄경』
- 질문1 백용성이 한글로 번역한 불경과 서양음악의 양식에 맞추어 지은 노래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봅시다.
시각자료 4

백용성이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들
- 질문1 불경의 한글 번역과 노래의 작사․작곡을 통해 백용성이 이루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시각자료 5

다음은 1945년 12월 12일 김구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대각사를 찾아온 기념사진이다.
- 질문1 김구선생과 임시정부 요인들이 이 때 대각사를 찾아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모둠활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