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2월 중순경 김 마리아(1910년경 수피아 교사 재직, 여성 독립 운동가)가 수피아여학교에 들러서 당시 교사로 있던 언니 김함나에게 2․8 독립 선언서를 전해주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광주에서도 지역의 기독교인들과 수피아여학교를 비롯하여 숭일학교 등 기독교계 학교를 중심으로 3․1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3월 5일 밤 광주면 양림동에 있는 금동교회의 남궁혁 목사 집에서 3월 8일 광주 큰 장날에 학생, 시민을 총동원하여으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하였으나 준비가 미흡하여 3월 10일 작은 장날 오후 3시로 연기하였다.
수피아여학교의 교사 박애순은 3월 3일경에 학생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매일신보의 기사를 읽어주고 “만국 강화회의 의하면 우리나라도 독립이 승인되었고 각지에 독립운동이 전개되고 있으니 우리들도 이 운동을 벌여 대한독립만세를 불러야 된다.”고 말함으로써 학생들의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전교생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다.
광주에서 독립운동을 갖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은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은 기숙사 지하실에서 밤 12시가 넘은 뒤 몰래 태극기를 만들었다. 3월 10일 박애순은 당일 김강에게 받은 독립선언서를 수피아여학교 학생 홍순남, 박영자 등에게 50부를 나누어 주고 오후 2시까지 부동교(不動橋) 밑 작은 장으로 모이도록 하였다.
그 당시의 작은 장터는 지금의 부동교 밑 하천변으로 거사일인 10일 오후 2시경 기독교인, 숭일․수피아여학교 학생, 일반시민, 농업학교 학생과 시민들 천여명의 군중이 운집하였다. 그 곳에서 오후 3시 30분에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은 운집한 시민, 학생들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하였다. 저마다 가슴에 태극기를 품은 수피아 여학생들이 양림동 쪽에서 광주 천변으로 뛰어 내려와 장날에 모인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꺼내주며 만세를 불렀다. 양림동 쪽에서 기독교인과 숭일,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이 광주천을 타고 장터를 향하여 내려오고 일반시민은 서문통으로, 농업학교 학생과 시민들은 북문통을 거쳐 삽시간에 천여 군중이 장터에 운집하여 시위를 벌였다. 시위 행렬은 서문을 지나 우체국 앞을 돌아 충장로로 내려가서 지금의 충장로 파출소 앞에서 금남로로 들어섰다. 또 구 법원 앞을 지나 지금의 중앙 다실 자리에 있었던 광주경찰서 앞에 몰려들었다.
만세운동은 다음 날인 11일에도 일어났다. 이날 오후 5시께 숭일학교 학생과 농업학교 학생이 선두가 되어 3백 명 가량의 군중이 대열을 지어 만세를 부르며 가두 시위를 했다. 13일 큰 장날에는 장꾼군들을 포함한 약 1천 명의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불렀고, 그 중 일부는 시위행진도 하였다. 11일에는 23명이 구속되었고, 13일에는 20명이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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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광주 3․1운동의 주동 인물과 참여한 사람들의 신분을 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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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2
광주 3․1운동의 주동 인물과 참여한 사람들의 신분을 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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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3
내가 박애순 교사에게 수업을 받는 학생이라는 가정하에 만세운동에 참가 여부와 그 이유를 써봅시다.
3·1 독립운동 이후에도 수피아여학교에서는 ‘열세집’이라는 가극을 만들어서 애국 애족의 정신을 고취시켰다. 열세집의 열 셋이란 조선의 13도를 말하고 집은 우리나라를 가리켰다. 이 가극을 통해 광주시민들에게 조선 독립의 의지를 고취시켰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긴 머리를 풀고 깨끗한 흰 옷을 입은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이 팔도강산의 모양을 뜬 틀을 가슴에 안고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무대 위에 나타난다. 가슴에 안아 고이 간직한 형형색색으로 단장한 땅덩이는 안에 불이 켜져 있고 겉은 종이로 발라져 있다. 여학생들이 안은 작은 집은 단심줄로 팔도의 큰집과 연결해 놓았다. 이제 한 사람이 각 도의 특유한 상징적인 노래를 부르면서 앞으로 나선다. 합창이 흘러나오고 여학생들은 땅덩이를 안은 채 노래에 맞춰 춤을 추면서 중앙에 짜여 있는 나라 전체의 모양으로 만들어진 틀의 제 위치에다 가져다 맞춰 놓는다. 이제 다른 도의 음악이 시작되면, 다른 여학생이 또 나타난다. 이렇게 해서 순서대로 팔도강산이 이루어져 나간다. 마지막 도를 갖다 붙여 팔도강산이 이루어지면 관중석의 불은 꺼지고 나라의 땅덩어리에는 오색찬란한 촛불이 켜지는데, 삼천리 금수강산, 우리나라의 땅덩이는 단심줄을 잡아당김으로써 서서히 공중으로 솟아오른다.
또한 수피아여학교에서는 반일회(班日會)라고 하여 반에서 하루를 특별히 모여서 여러 가지 순서로 하루를 즐기는 행사를 하였다. 대개 졸업식 전야나 크리스마스이브에 모임을 가졌는데 장발장, 베니스의 상인, 바보 온달 그리고 성극 등 학생들이 배운 것을 여러 사람 앞에서 공연하였다. 반일회는 ‘反日會’ 즉 일본에 반대하는 모임이라는 숨은 뜻이 담겨 있어서, 수피아여학교의 항일 민족운동의 전통이 이어짐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였다.
1930년 2월경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이 백청단(白靑團)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백청단이라는 뜻은 백의민족의 청년들이라는 것이다. 일본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백청단 단원들은 은가락지를 끼게 하여 서로가 한 단원임을 표시하였으며, 연락사항도 1대 1로만 하였다고 한다. 단원들은 항상 태극기를 몸에 지니고 다니다가 장소나 시간에 관계없이 동네 여인들이나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글을 가르치고 태극기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그러나 1932년 12월경 단원 중의 한 학생이 사상혐의로 가택수색을 당하자 발각되어 이듬해 1월 9일 조아라 등 9명의 학생이 체포되고 학교는 무기 휴학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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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수피아여학교에서 공연한 ‘열세집’이라는 가곡의 의미와 이를 공연한 목적을 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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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2
학생이 ‘반일회’ 행사를 준비하는 학생회 간부라면 항일의식의 고취를 위해서 어떠한 프로그램을 기획할 것인지 세 가지 이상 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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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3
백청단이 사람들에게 우리말과 태극기에 대해서 알리고자 했던 이유를 써봅시다.
(1) 신사참배 거부와 폐교
일제는 1925년에 서울 남산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건립한 후 모든 행정구역마다 신사를 세우고 일본의 신을 경배하도록 하였는데 광주에도 1935년에 신사를 건립하였다.
신사참배 강요는 일제말기에 이르러 더욱 심해졌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한국인을 일본화하는 데 유력한 수단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 들어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심해지자 남장로교 선교회는 1937년 2월 말 학교를 폐쇄하기로 결정하고, 이들이 경영하고 있는 남장로교 선교회 산하의 중등학교 10개 교는 1937년부터 신입생을 받지않고 재학생들에게는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않는 범위에서 교육을 계속해 나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일부 한국인들과 학생들은 신사참배 문제로 인하여 많은 기독교 계통의 학교들이 폐쇄되면 교육이 중단될 것을 우려하여 학교가 계속 운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37년 9월 6일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은 예정대로 신사참배에 참가하였고 결국, 남장로회에서는 폐교를 단행하였다.
(2) 폐교 당시 수피아여학교의 상황
아래 내용은 당시 교장이었던 유화례의 회고담이다. 여기서 남장로회의 폐교 결정에 당황해하던 학생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937년 2월 남장로회 미국 선교회 본부에서 총무가 오고 광주, 목포, 순천, 군산, 전주 등 각 학교 대표가 전주에서 모였다. 우리는 전주회의에서 사태의 심각함에 대해 오랜 시간 논의하였다. 특히 학교 폐교문제는 가장 큰 문제로 얘기가 오고 갔다.
그리하여 확실한 사항들이 결정되었다. 가장 큰 것은 교육을 받고 있는 믿는 사람에게 신사참배란 있을 수 없다는 결정이었다.
그래서 첫째, 3월 31일까지 수업은 끝마치고, 둘째는 남아있는 1, 2, 3학년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교육을 마칠 수 있도록 하며, 셋째로 입학생은 받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또 만약에 하지 않기로 결정한 사항인 신사참배를 일본인들이 계속 강요, 억지로 하도록 했을 때는 즉시 폐교할 것을 결의사항으로 했다.
이 같은 결정 사항들을 영문으로 인쇄하여 회의에 모인 교장들에게 배부했다. 나는 결의사항이 인쇄된 서류뭉치를 들고 광주에 왔다. 내가 학교에 도착했을 때 학교는 온통 술렁술렁했다. 교장실에 들어섰을 때 “학생들이 강당에 모여 기다리고 있습니다.”하고 어떤 선생이 알려 주었다. 학생들은 이미 내가 그때쯤 해서 돌아올 줄 알고 나를 기다린 것이다. 내게 전주회의의 내용을 보고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오 6시까지 번역을 마쳤다. …드디어 김 선생(당시 교감)의 결정사항 낭독이 끝났다. 끝나자마자 금방 분위기는 곧 함성이라도 터질 듯한 팽팽함이 감돌고 있었다.
김 교감이 교단에서 내려오자 나는 강당을 나가기 위해 일어섰다. 그때 학생들의 눈은 모두 일어선 내게 집중됐다. 모두들 눈동자가 날카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웅성거리던 학생들이 내가 가는 길을 막아섰다. 처음 몇몇 학생이 길을 막았으나 금방 모든 학생들이 나와 김 교감을 둘러싸 버렸다. 학생들 속에서 “그 결정은 따를 수 없다. 죽어도 그 결정에 반대해야 한다.”라는 함성이 들려왔다. 나는 털썩 의자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날 밤 12시까지 160여명의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은 선교회의 폐교 결정에 반대하는 항의 시위를 벌였다. 수피아여학교는 학생들을 선동한 교사 3명을 퇴직시키기 위해서 잠시 휴교에 들어갔다. 고등과 18회 졸업생 27명은 졸업식도 못하고 교장실에서 졸업장을 수여하였으며, 5월 1일 다시 문을 열었으나 폐교 문제로 불안한 학생들이 다른 학교로 많이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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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일제는 왜 광주를 비롯한 전국의 각 지역에 신사를 세우고 신사참배를 강요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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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2
학생이 그 당시 수피아여학교 학생으로 신사참배에 참가했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지 솔직하게 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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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3
그 당시 남장로회는 어떤 입장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했으며 신사참배 거부가 학생들에게 끼친 영향을 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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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4
회고담을 읽어보고 남장로회와 수피아여학교 학생들간의 학교 폐쇄에 대한 입장 차이와 그 이유를 써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