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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실질적 준비자-이종일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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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화의 추세는 실로 편하지 아니하여 이 난관과 방해물을 제거하고 개화를 진행시켜 종국에는 개화이념과 이상을 성공시켜야 한다. 또 개화사상을 각계각층에 확대 보급시키려면 우선 국민 전체의 의식을 개조시키고 그 다음에 봉건적이며 낙후된 요인을 개혁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급선무는 이 개화사상을 전국민 각계각층에 추진시켜 신사상, 즉 실학사상을 호흡케 하고 여기에 개화사상과 연결시켜야 한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부강과 민권의식이 더욱 내외 각국 국민의 마음 속에 신장되면 저 사람들도 역시 우리 국민들의 개화발전사상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옥파 이종일은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아 동학과 개화사상을 갖게 되었고, 개화운동에 참여하면서 언론인, 교육자, 계몽운동가, 독립운동가로서 활동하였다.
  이종일(李鍾一, 1858~1925)은 1858년 태안에서 태어났으며 15세에 상경하여 한학을 공부했다. 1894년 보성보통학교 교장이 되었으며, 1896년에는 독립협회에 참여했다. 1898년 3월에는 이승만 등과 함께『경성신문』을 창간했으며, 8월에는『제국신문』을 창간하고 사장으로 취임했다. 1906년 천도교에 입교하여 천도교 월보과장과 보성인쇄주식회사 사장으로 활동하였다.
  이종일은 1919년 1월 하순부터 손병희의 집에서 독립운동을 위한 모임을 갖고, 2월 초순부터 3·1운동에 참가할 동지들을 규합하면서 독립선언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그는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 21,000장을 인쇄하여 한용운 3,000장, 인종익 2,000장, 안상덕 2,000장, 강기덕·김원벽 1,500장, 함태영 1,200-1,300장, 이경섭 1,000장을 직·간접적으로 배포하였다. 그는 박인호와 함께 독립선언의 취지를 전국에 보도하고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해『조선독립신문』을 발간하였다. 그는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참여한 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충청남도 태안군 원북면 반계리 808 (충청남도 태안군 원북면 옥파로 199-7)
현재 상태 복원, 1986년과 1990년에 복원되었다.

  이종일은 1858년 11월 6일 충남 태안군 원북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성주(星州), 호는 옥파(沃坡), 천도교 도호는 묵암(黙菴)이다.
  그는 일생을 조국의 개화 자강과 진정한 자주독립을 위해 바쳤다. 그는 실학의 영향을 받고 동학과 개화사상을 가지게 되었으며 개화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는 독립협회,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등 개화운동의 단체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대한제국민력회를 조직하여 『제국신문』의 창간을 비롯한 각종 언론 활동, 국문 보급 운동, 여성 해방 운동 그리고 교육 구국 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천도교 조직을 활용하여 각종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특히, 3․1운동 때에는 초기 계획 수립, 독립선언서 인쇄, 독립선언식 주도 그리고 『조선독립신문』의 발행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3․1운동으로 3년의 옥고를 치루고 출옥한 직후 또 다시 제 2의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는 등 굽히지 않고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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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읽기자료 1

 이종일의 전반기의 생애와 활동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종일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을 좋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하던 그는 15세이던 1872년 서울로 상경하였고 이듬해에 문과에 급제하였다고 한다. 그가 누구의 문하에서 공부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자신이 김윤식의 집을 드나들며 사제 관계를 맺고 개화사상을 배웠다고 한다.
  25세이던 1882년 그는 수신사 박영효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박영효, 서광범 등 일본의 개화에 많은 관심을 가진 개혁적 인사로 구성된 사절단을 수행하던 그 역시 메이지유신 이후 발전한 일본의 선진문물을 보고 개화에 대한 의지를 굳혔던 것으로 보인다. “개화라는 것은 인간의 지혜가 열리고 사상과 풍습 그리고 의식이 역사적 단계와 구조의 발전적 해명에 따라 발달하는데 의미가 있다”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종래의 성리학적 사고를 벗어나 개화사상에 기울게 되었다.
일본행을 통하여 그에게 개화사상의 형성과 개화운동 전개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후 1895년 내부 주사, 1898년 중추원 의관으로 근무한 기록으로 볼 때 1898년 『제국신문』을 창간할 때까지는 관직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07년에는 학부의 국문연구소 위원으로 임명된 기록이 보이는데, 실제의 활동여부는 알 수 없으나 한글 연구와 보급에 대한 그의 관심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 질문1 이종일의 개화사상에 영향을 준 사람은 누구인가요?
  • 질문2 이종일의 개화사상 형성과 개화운동에 매진하게 되는 계기가 된 사건은 무엇인가요?
  • 질문3 이종일의 국문연구소 위원 임명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2

  “『제국신문』을 창간하던 40대 초기에 나는 유학사상에서 새로운 진취적인 개화사상을 품게 되었다. 그 실학사상이 곧 개화사상의 태동을 암시한 것임을 스스로 깨닫고 터득하게 되었다. 20여년 전 나는 구사상에서 신민족주의사상을 체득한 결정적인 계기를 갖게 되었다. --- 독립사상이 개화사상에서 자강․근대지향성․개혁성의 강한 힘을 발산하였던 것이다.”
이종일은 『목민심서』, 『흠흠신서』, 『연암집』등을 읽으며 실학사상에 심취하였으며 박은식, 정교, 이동녕, 남궁억, 양한묵 등과 실학서적을 돌려보며 담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특히 『목민심서』의 애국애족사상에 감동을 받아 수령의 부패를 없애고 조정의 기강을 바로 잡는다면 우리나라도 잘사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실학의 이용후생정신을 개화사상의 기초로 삼고자 하였다.
  그는 “개화는 학문 배우기에 힘쓰고 근면 성실한 것을 근본으로 해서 때가 변하는 이치를 알아 예전의 그른 것을 고치고 새롭고 좋은 것을 받아들여 날마다 새롭고 또 날로 새롭게 하여 만물이 열리게 하고 천하는 화합되게 하는 것”이라 하면서  백성의 힘을 기르고 의식을 개조하며 자강자주(自强自主)를 개화의 목적으로 삼았다. 그 실천 방법으로는 신문의 창간과 학교의 설립을 중요시하였다. 그가 언론활동과 교육구국활동에 매진한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그 당시 대부분의 개화사상가들이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위정 척사 사상과 의병투쟁에 대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민족수호운동이며 충효의 애국사상이라며 긍정적으로 인식했다. 이는 나라를 지키고 구하기 위해서는 위정 척사 사상과 의병투쟁을 받아들이는 이종일의 사상적 포용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 질문1 이종일의 개화사상은 어떤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나요?
  • 질문2 이종일이 주장하는 ‘개화’의 정의를 정리해 봅시다.
  • 질문3 이종일이 말하는 개화의 목적은 무엇인지 세 가지로 정리해 봅시다.
  • 질문4 이종일이 제시한 개화의 실천적 방법은 무엇인가요?
  • 질문5 이종일의 사상 체계가 포용적임을 알 수 있는 사실은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3

  이종일은 이상재의 권유로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회원들에게 정약용의 실학사상과 동학의 보국안민(輔國安民)․구세제민(救世濟民)의 정신을 강조하였다. 독립협회의 간부직은 맡지 않았지만 독립협회의 고문으로 생각하며 활동하였다.
  1898년 3월에는 민권운동단체인 대한제국민력회를 조직하여 국권회복과 자주독립을 지키기 위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이 단체의 설립취지를 널리 알리고자 회원 30여명과 함께 종로에 나가 민중들에게 정부의 잘못을 비판하고 독립자주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백성의 힘을 하나로 합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우리나라는 탁지부의 재정과 군부의 재정을 바르게 집행할 것이며 --- 토지를 외국인에게 내어 주어서는 안될 것이다. --- 우리나라는 독립자주권을 지켜야 하며 민력을 총합하여 부강과 국력의 신장을 꾀하는 것만이 이런 일을 성숙하게 하는 것이다.”
  그가 관여한 독립협회와 대한제국민력회는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었다. 대한제국민력회는 독립협회와 공동으로 활동을 전개했거나, 별도로 하였더라도 만민공동회의 공동참여와 연설회 개최, 외국에의 이권양도 반대 상소 등 기본 성격은 같은 것이었다. 또한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으로 위축받았을 때는 회원들을 동원하여 독립협회를 지원하고자 하였다.

  • 질문1 이종일이 독립협회 회원들에게 강조한 내용은 무엇인가요?
  • 질문2 이종일이 주도하여 1898년 3월 자신의 집에서 조직한 민권운동단체는 무엇인가요?
  • 질문3 대한제국민력회의 설립 취지를 정리해 봅시다.
  • 질문4 대한제국민력회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던 단체의 이름을 써봅시다.

읽기자료 4

  이종일은 국력을 배양하기 위해서는 신문의 창간, 학교의 설립, 부녀자 층의 계몽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나라의 문명개화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신문이 제일이며 국민 대중에게 홍보하는 데에도 세상의 눈과 귀의 역할을 하는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또한 자강사상을 발전시켜 완전 독립과 강한 군대, 민권의 창달을 위해서는 신문의 창간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1898년 8월 10일 『제국신문』창간호를 발행하였다. 1898년에는 『매일신문』, 『황성신문』등 일반 시사 신문이 민간에서 간행되었고, 격일간이던 『독립신문』도 발행되어 일간 신문 시대가 열렸다.
   『제국신문』은 민중을 계몽하고 개화를 촉진시키며 또 민중의 의식 구조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이종일은 「고백」기사에서 “『제국신문』은 국가의 개명과 발전에 이바지할 것과 사실의 엄정한 기록을 통하여 훗날 과거를 반성하는 역사적 기록물로서의 소임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제국신문』의 창간 초기 직원은 10여명이었는데, 이종일은 경영자, 사원, 기자로서 1인 3역의 역할을 해냈다. 발행부수는 창간 시 2천부였으며, 3천부 또는 3천 5백부를 발행하기도 하였으나 다시 2천부로 돌아왔다. 이 신문은 창간 후 모두 13차례나 휴간, 정간되었다. 화재나, 사고, 검열 등 일제의 탄압과 재정난이 주요 원인이었다.
  이종일은 『제국신문』을 통하여 근대국가 수립을 위한 국민계몽에 힘썼다. 법률의 공정한 시행과 풍속의 개량을 국가 발전의 요체로 보았고 한글 전용을 통하여 문자 보급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여성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이종일은 『만세보』창간에 관여하였으며,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대한자강회월보』에 자강과 관련된 글을 실었고『대한협회월보』편집인으로 활동하면서 신문 발행을 통한 애국계몽활동에 힘썼다.

  • 질문1 이종일이 제시한 국력 배양의 방안 세 가지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이종일이『제국신문』을 창간한 목적은 무엇인가요?
  • 질문3 『제국신문』의 역할에 대하여 정리하여 써봅시다.
  • 질문4 이종일이 관여한 신문의 이름을 모두 써봅시다.

읽기자료 5

   이종일의『제국신문』창간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부녀자를 주 독자층으로 삼았다. 이종일은 창간이전부터 한글 전용과 부녀자 계몽지로서의 원칙을 강조하여 왔다.
 『제국신문』을 암신문이라 하고 국한문 혼용체로 지식인들을 독자층으로 발행되던 『황성신문』을 숫신문이라고 대비한 것은 당시의 생각을 보여 준다. 이종일은 봉건적 유생들의 공격과 성토에 개의치 않고 『제국신문』이 독립협회 여성회원들의 기관지임을 자원하였고, 사명감과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이종일은 여성의 중요성과 그들의 계몽을 강조하였다. 여성의 잠재적 재능을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보아 국익의 증진이라는 구국적 차원에서 강조하였으며 여성 계몽의 중요성은 미래의 인재인 어린이 양성에 있다고 보았다. 이종일의 여성 계몽도 국권회복과 부국강병이라는 목적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 질문1 이종일이 『제국신문』을 창간할 때 제시한 두 가지 원칙은 무엇인가요?
  • 질문2 이종일이 여성 계몽을 강조한 목적은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6

  이종일은 1906년 동학에 입교하였으나 1898년 손병희와 왕래하며 동학 입교를 권유받았으며 동학에 대한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는 민족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이상으로 동학을 받아들였다.
   1910년 『천도교월보』사장에 취임하였으며 『동경대전』을 비롯한 천도교 경전과 교리를 한글로 번역하여 민중의식을 일깨우는데 기여하였다. 이는 당시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 국권피탈 이후 민중들에게 천도교 교리를 전파시킴으로써 시대적 상황을 인식시켜주고자 하였다.
  이종일은 일제의 국권강탈에 자결과 같은 소극적인 대처보다는 적극적인 투쟁 방법 모색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그가 종래의 계몽적 애국운동을 지양하고 무력 투쟁을 포함한 적극적 독립운동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1911년 1월 손병희에게 천도교를 중심으로 거족적인 민중시위를 일으켜 일제의 침략을 타도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1912년 손병희와 범국민신생활운동을 추진하기로 합의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천도교도를 대상으로 민족문화수호운동을 추진하는 등 국권회복운동을 계속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14년에는 보성사 내에 천도구국단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취임하여 적극적이고 강력한 민중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기회를 삼고자 국제정세 분석에 노력을 기울였다. 해외의 독립운동을 주시하면서 한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하기 위해서라도 강력한 무장 세력을 양성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 질문1 이종일이 동학에 입교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이종일이 계몽적 애국운동을 지양하고 무력 투쟁을 포함한 적극적 독립운동으로 전환한 계기가 된 역사적 사건은 무엇인가요?
  • 질문3 이종일이 1914년 강력한 민중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보성사내에 조직한 단체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7

  이종일은 국권 피탈의 과정을 겪으면서 국권회복을 위한 근대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시대에 맞는 교육체계로 개혁할 것을 제안하였다. 교육이란 국민의 질과 의식수준을 향상시키고 문명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주장하였다.
  첫째, 근대 학교 설립과 어린이의 의무교육을 통해 국민의 의식과 문명 수준을 향상시키고자 하였다.
  둘째, 학제를 효과적으로 고칠 것을 주장하였다. 당시의 최고 교육 기관인 성균관이 전통 학문만 고집함으로써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진단하면서 신학문을 수용할 수 있는 학제의 개편과 외국 유학생의 파견을 통해 실용적인 학문을 받아들일 것을 제안하였다.
  셋째, 조선 양반사회는 대다수의 국민들에게서 교육의 기회를 박탈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교육의 기회를 균등하게 부여할 것을 주장하였다. 교육 기회의 균등을 통하여 국민들에게 각종 학교에 입학하여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신학문을 배우고 익혀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은 물론 국가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을 길러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넷째, 여성교육과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1894년에는 보성보통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898년에는 민영환 등과 함께 사립흥화학교를 설립하였다. 또한 김가진, 지석영 등과 함께 국문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매진하였다.

  • 질문1 이종일이 말한 교육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 질문2 이종일의 교육에 대한 주장을 네 가지로 정리해 봅시다.
  • 질문3 이종일이 설립에 관여한 학교 이름을 써봅시다.

읽기자료 8

  이종일은 1910년 국권피탈 이후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종교인이 앞장서고 노동자, 농어민, 상민, 학생층 등을 총동원하여 동학농민운동을 계승한 대중 봉기를 계획하였다. 1912년에는 생활혁신을 위한 범국민운동을 통해 독립운동으로 발전시키는 준비 단계라고 할 수 있는 범국민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신중론을 펴던 손병희를 설득하면서 1912년경부터 기독교, 불교계 등 종교계와의 연합을 추진하였다. 천도교 내에서는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와 천도구국단과 같은 비밀 결사 조직을 결성하여 평화적인 시위를 계획하는 한편 군자금 모집과 무기 구입을 통해 무장투쟁도 계획하는 등 본격적인 항일 독립운동을 준비해 나갔다.
  이종일은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의 인쇄와 배포를 담당하였다. 1919년 2월 10일 경에는 독립선언서의 기초를 끝냈으며, 검토를 거친 후 2월 20일부터 보성사에서 그의 책임아래 3․1독립선언서를 인쇄하기 시작하여 2월 25일에는 1차로 2만 5천 장을 인쇄하고 2월 27일에는 1만장을 추가로 인쇄하였다. 3월 1일 태화관의 독립선언식에서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따라서 그는 3․1운동의 계획단계에서 독립선언식까지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있으면서도 의연한 법정투쟁을 전개하였다.
 출옥 후 3․1운동 3주년이 되는 1922년 3월 1일을 기해 보성사 직원 50여 명과 3․1운동 기념식을 열기로 계획하고 그때 낭독할 제 2의 독립 선언문이라고 할 수 있는 자주독립선언문을 작성하여 인쇄토록 하였으나 사전에 일제에 탄로가 나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인쇄물도 압수당하였다. 

  • 질문1 이종일은 1910년 국권피탈 이후 계획한 적극적인 독립운동의 방안은 무엇이었나요?
  • 질문2 이종일이 종교계의 연합을 추진한 시기는 언제부터인가요?
  • 질문3 이종일이 조직한 천도교 내의 비밀 결사 조직과 활동 내용을 써봅시다.
  • 질문4 3․1운동 당시 이종일의 역할은 무엇이었나요?
  • 질문5 이종일이 1922년 3월 1일 삼일절 기념식을 위해 만든 선언문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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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사진은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있었던 3․1독립선언식의 기록화이다.

  • 질문1 책상 위에 놓여 있거나 손에 쥐어져 있는, 여러 장의 긴 종이는 무엇일까요?
  • 질문2 여러 장의 긴 종이의 인쇄와 배포를 받은 사람은 누구인가요?

시각자료 2

  • 질문1 『조선독립신문』이 보도하고 있는 사건은 무엇이며 창간 발행된 날짜는 언제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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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1925년 8월 31일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초가(草家) 거적 위에서 68세를 일기로 영양실조 끝에 서거하였다. 모둠별로 이종일의 일생을 8컷의 만화로 제작하여 발표해봅시다.
모둠활동 2
모둠별로 이종일의 입장에서 대한 국민에게 남기는 유서를 작성하여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모둠별로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던 최남선과 독립선언서를 인쇄, 배포하였던 두 사람의 일생을 비교 조사하여 발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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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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