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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년 내려오면서 죽기를 결단한 마음 이제 와서 어찌 구차하게 삶이 있으리 군대에 맹세하고 다시 나왔건만 종시 회복키 어려워 지하에서도 오히려 싸울 뜻을 가졌네 더디고 더딘 여름날 사람 보기 드물어 교활한 오랑캐가 말마다 살아날 기회를 찾으라네 이 몸 위에 존왕양이의 대의를 짊어져 당당히 죽음에 나가리니 슬픔을 말하지 말라 이 시는 운강(雲岡) 이강년(李康秊, 1858~1908)이 의병활동을 하다가 1908년 일제에 잡히면서 쓴 것이다. 이강년은 화서 이항로의 학맥을 이은 유인석을 스승으로 섬긴 위정척사파 계열의 인물이다. 그는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갑신정변 때 물러나 고향에 은거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벼슬아치 출신으로는 보기 드물게 농민군을 이끌고 관군에 대항하였고,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발하여 1896년 1월 11일 출생지인 문경에서 봉기하였다. 1차 의병을 해산한 후 호남 지방의 선비들과 교유하며 자기 수양에 힘쓰다가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1907년 3월 제천에서 다시 군사를 일으켜서, 단양, 제천, 원주, 연풍, 영월, 횡성, 강릉, 청풍, 충주, 문경, 예천, 영주, 봉화, 안동 등 3도 14군을 휩쓸며 적과 대적하였다. 특히 1907년 7월 5일의 제천 전투에서 500여 명의 적을 토멸하여 사기가 충천하였고 이어서 경상, 강원, 충청 일대에서 이름을 드날렸다.
연이어 혁혁한 공을 세우던 이강년은 1908년 6월 청풍 까치성(鵲城) 전투에서 퇴로가 막혀 고전하던 끝에 적의 탄환이 복사뼈에 맞아 적에게 사로잡혔다. 서울로 압송된 후 평리원(平理院)에 이송되어 교수형을 선고받고 1908년 9월 51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역사적 배경
| 현재 주소 | 경북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 129-6 |
|---|---|
| 현재 상태 | 복원, 이강년의 집은 없어지고, 문경시에서 새로 복원하였다 |
조선에 대한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다양한 민족적 저항이 있어났다. 이 중 가장 강력한 저항은 의병투쟁이었다. 일제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은 처음으로 전국적인 의병투쟁을 불러일으켰다. 을미 의병은 위정척사사상을 가진 유생들이 주도했고 일반농민이 가담하였다. 그들은 존왕양이를 내세우고 일본 침략군과 거류민을 공격했으며, 친일 관리들을 처단하였다. 그러나 1차 의병은 아관파천으로 친일정권이 무너진 뒤, 단발령이 철회되고 국왕의 해산 권고 조칙이 내려지자 대부분 해산되었다.
열강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승인받은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국권을 강탈하자 이를 규탄하는 구국운동이 다양하게 전개되었고 의병들이 다시 봉기하였다. 을미의병이 국모시해에 대한 복수를 내세웠다면, 을사의병은 국권회복을 전면에 내세웠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지 2년 후인 1907년 일제는 열강과 더욱 긴밀한 관계 속에서 한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이러한 때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하였다. 이에 항일 의병투쟁은 더욱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읽기
읽기자료 1
이강년은 1858년(철종 9) 12월 30일(양력 1859 년 2월 18일) 경북 문경군 가북면 도태리(현재 문경시 가은읍 상괴리)에서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의 19세손으로, 이기태(李起台)와 부인 의령 남씨 남복영의 딸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운강(雲崗), 자는 낙인(樂寅)이며 태어날 때 집 뒤 둔덕산이 연일 크게 울었으며, 어머니가 태양이 입에 들어가는 꿈을 꾼 뒤 잉태하였으므로 아명을 양출(陽出)이라 하였다 한다. 당시 사람들은 둔덕산이 우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여 나라가 어지러운 때인지라 길한 징조인지 흉한 징조인지 궁금해 하였으나 이강년이 태어나자마자 이 산의 울음도 그쳤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이 같은 출생에 얽힌 사정을 가지고 장차 아기가 자라면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가문은 왕실 후손이면서도 벼슬이 종 5·6품의 당하관에 그쳤으며, 명문 사족으로서의 명성을 누리지는 못한 것 같다. 그러나 향촌에서 전통적인 학문을 닦고 도의(道義)를 숭상하는 가풍을 유지해 온 것 같다.
그의 조부인 이덕의(李悳儀)는 효행의 명성을 떨쳤으며, 아버지는 13세 때에 한시를 읊을 만큼 학문적으로 숙성하였다. 그러나 8세 때에 아버지를 여의였으므로 자연히 조부로부터 학덕을 쌓았을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아버지 상을 당하여서는 어린 나이에 여막(廬幕)에 거처하기를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아 보는 사람은 이를 신기하게 여겼다 한다. 조부를 여의고는 당시에 삭주부사(朔州府使)로 재직 중이던 백부 이기택이 맡아 양육을 하는데 선생의 천품이 영특하고 총명하며 용력과 담력이 출중할 뿐 아니라 글 읽기와 무예에도 능하여 “우리 가문을 일으킬 큰 재목이다.”라고 하면서 이름 있는 학자들을 초빙하여 교육시키고 병서를 강독케 하는 등 많은 정성을 기울였다고 한다.
이렇듯 이강년은 전통적인 선비가문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조부를 비롯한 향촌 유생으로부터 유학을 수학하였다. 선생의 묘비에 ‘고아로서 학문에 힘써 경전과 역사를 통달하고 기풍이 의롭고 도량이 크며 병법도 아울러 익혔다.’ 하였고 『기려수필(騎驪隨筆)』에는 ‘인품은 도량이 크고 의로우며 담력이 범상치 않았고 이미 어린 나이에 문장과 학문이 성취되었다.’고 하였다.
이강년은 장성하여서 8척 2촌의 장골로 풍채가 늠름하고 담이 크며 위엄이 있어 무리를 압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봉황의 눈매에 칼날 같은 눈썹과 붉은 얼굴빛을 띠었고, 수염이 휘날리며, 말소리가 우렁차서 대장부의 기상이고 평소에 학식은 물론 무예와 병서에 능하였고 그림에도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특히 그의 무인다운 기풍은 백부 이기택이 무과(武科) 출신으로 평북 삭주부사로 재직하고 있었던 데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22세 때인 1879년(고종 16년) 3월 정시 무과에 합격하여 종6품인 절충장군 행용양위부사과(折衝將軍 行龍驤衛副司果)에 올라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이강년이 벼슬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이후 옥봉서원에 칩거하면서 학문에 힘썼고, 때로는 영남과 호남 지역을 여행하면서 을미의병을 일으킬 때까지 10여 년을 보냈다.
- 질문1 이강년의 가정환경과 공부가 의병을 일으키는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해 봅시다.
- 질문2 벼슬을 하던 이강년이 낙향하게 되는 계기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2
항일 의병전쟁의 사상적 근원은 개항 전후부터 활발하였던 척사론이었다. 척사론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있었을 때 상소를 올려 ‘양이(洋夷)’의 배척을 적극 주장한 이항로의 제자 그룹인 화서학파가 주류를 이루었다.
유인석을 중심으로 한 이항로의 제자들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예로부터 없었던 근 변란으로 인식하였다. 그들은 주자학적 전통질서를 재확립하는 것만이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신념을 굳게 지켜 나갔다. 존화양이론(尊華攘夷論)은 조선 말기 이래 역사적인 상황의 변천에 따라 민족과 민족문화의 보존을 위하여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실천을 전제로 한 이데올로기이다. 항일의병전쟁이 일어나기 이전에 전개되었던 이항로의 존화양이론이 어디까지나 성리학에 입각하여 철학적·이론적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데 비하여, 유인석의 존화양이론은 소중화론(小中華論) 등과 같은 이항로의 이론을 철저하게 계승한 토대위에서 의병전쟁, 요동망명 등을 거치는 동안 그 이론이 또 다른 차원으로 발전되면서 강력한 실천논리를 표방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인석을 사사하였던 이강년은 1896년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킨 후 제천의 그를 직접 찾아가 사제의 의를 맺었다. 관군에게 패한 유인석이 요동으로 건너간 후에도 그는 직접 요동으로 건너가 유인석을 만나기도 했다. 1899년 충주 유림에서 이항로의 문집을 출간할 때 충주까지 가서 문집의 편집, 간행, 배포에 앞장섰다. 이 시기가 그의 일생을 통하여 학문과 사상적 성숙도가 가장 고조된 때이며, 동시에 화서학파의 존화양이론에 입각한 항일의 정신적 맥락이 더욱 강력해졌던 시기였던 것이다.
특히 ‘양이’의 대상이 일제 침략세력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한정되어 가면서부터는 ‘존화양이론’ 그 자체가 의병전쟁의 이론체계로 발전되고 있다.
강수명(姜秀明)이 지은 제문에는
"선생의 뜻은 이미 끊어진 중화의 맥을 붙잡아 유지하고 이미 땅에 떨어진 성인의 도를 잇게 하고 이미 망한 종사(宗社)를 지켜 보전하고 이미 짐승이 되고 또한 죽은 생령을 건지는 데 있었으니 뜻 또한 크지 않겠는가. 선생의 일은 공자, 맹자의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정도(正道)를 책임지고 춘추의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대의에 의지하여 남은 찌꺼기를 제거하고 천하를 깨끗이 하여 일의 성공을 꼭 믿으니 일 또한 크지 않는가? "
라고 하였으니 이강년은 위정척사에 입각하여 춘추의 존왕양이의 대의에 서서 의병을 일으켰던 것이다.
즉 이강년은 이항로(李恒老)→김평묵(金平黙)→유중교(柳重敎)→유인석으로 이어지는 화서학파의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특히 유인석의 문하생으로 존왕양이론에 입각하여 항일의병전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척사론의 반대편에 있는 개화운동에 대하여는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전통적인 복제를 서양식 복제로 개혁한 것은 조선의 전통과 고유 풍속까지 모두 일시에 단절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또한 을사조약과 고종의 강제퇴위는 곧 국가의 멸망이라고 인식하여 통분하였으며 대의로서 왜적을 소탕하는 것만이 왜적의 노예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 질문1 이강년이 처음 의병을 일으킨 후에 유인석을 찾아가 스승으로 삼은 까닭을 말해봅시다.
- 질문2 이항로에서 이강년까지 이어지는 화서학파의 계보를 정리해 봅시다.
읽기자료 3
1896년 1월 이강년은 만 36세의 나이로 집을 나서며 노모에게 하직인사를 하였다. “나라가 왜적으로부터 침략을 받아 그 존망의 시각을 다투는 이때에 소자 비록 용렬하오나 왜놈들을 몰아내어 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이 한 몸을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다만 어머니에게는 불효가 큼을 용서하소서.”라고 아뢴 후 아들과 두 명의 노복을 데리고 도태장터로 향하였다. 이강년은 도태장터에서 유림이 중심이었던 문중과 산포수, 그리고 농민군 등으로 처음 부대를 조직·편성하였다. 그 무렵 제천에서는 이춘영(李春永)과 안승우(安承禹)가 의병 수백 명을 일으켜 의암(懿菴) 유인석(柳麟錫)을 총대장으로 추대하여 군세가 매우 강성했고, 춘천에서는 이소응(李昭應)이, 안동에서는 권세연(權世淵)이 각각 군사를 일으켰다.
태봉 장날, 이강년은 2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장터에서 사람들을 모았다. 농암과 왕릉 장터까지 돌아다니니 호응하는 장정이 300명이 넘었다. 창의대장에 추대된 이강년은 의병의 편제를 정하고 군사훈련을 시작하였다. 2월 25일 이강년부대는 바지골-탑재를 넘어서 농암 장터에 주둔하고 창의소를 세우니 의병수는 500여 명으로 큰 부대가 되었다. 그때 일본의 주구가 되어 온갖 악행을 일삼던 안동관찰사 김석중이란 자가 도망치다가 이강년의 의병부대에 붙잡혔다. 이강년의 그 목을 장대에 꿰어 저자에서 효수하였다.
그 뒤 1월 15일 문경군 마성면 마고산성에서 첫 접전을 했고, 1월 29일에는 문경의 유인석을 찾아가 유인석 부대의 유격장으로 수안보에서 싸웠다. 2월 13일에는 문경 평천으로 가서 조령관문을 끊는 등 충북과 경북의 경계인 소백산맥을 넘나들며 일본 군경과 싸웠다. 그러나 봉건적인 유생 중심의 의병은 대중적 기반이 약했고, 전력도 상대적으로 허약했다. 이강년은 강원도 영월까지 갔으나 더 진군하지 못하고 의병을 해산하였다. 이후 1897년부터 1907년까지 10년간은 재기를 위한 잠행기였다.
광무황제의 강제퇴위 소식을 들은 이강년은 의병 재기를 결심하고 각지의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해산된 원주 진위대로부터 신식무기를 받아 마침내 재기의 깃발을 높이 올렸다. 또한 군대 해산으로 의병진에 합세한 군인들로 인해 더욱 조직화된 의병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
1907년 7월 의병전쟁을 재기한 이강년은 원주 신목정에서 군례를 받고 남진하여 제천에 입성하였다. 이때 제천으로 모여든 의진수는 40개가 넘었다. 이들은 서로 연합하여 대규모 의병부대를 형성하였으며 일제 토벌군과 제천 천남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전과를 올렸다. 이에 일제는 의병들의 근거지이고 주민들이 의병을 비호하는 경향이 있다는 이유로 제천 일대 민가를 모조리 소각하여 초토화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제천 전투 후 각 부대는 북상하여 영월, 주천으로 진을 옮겼다. 이곳에서 40 여명의 부대장들은 통일된 지휘체제를 위해 이강년을 도창의대장(都倡義大將)으로 추대하였다. 마침내 운강은 주천강가에 단을 쌓고 대장직에 올라 장병들의 군례를 받고 광무황제의 밀지를 읽어주었다. 그리고 나서 부대를 재편성하였다.
이강년은 전기 의병에서 볼 수 없었던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었다. 14명의 참모부를 두어 부대 운영과 조직상의 체계 및 향후 이동 방향 등 작전을 계획하였다. 부대를 정비한 의병부대는 서울진공작전을 위해 북상하기 전까지 약 4개월간 충청·강원·경상도 일대를 중심으로 일제의 침략군과 치열한 의병전쟁을 수행하였다. 이강년 부대는 1907년 8월 23일 민긍호의 원주부대, 조동교의 청풍부대와 연합하여 충주성을 공격하여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고, 문경지역으로 진격하여 조령 일대를 장악하고 의병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조령 일대를 장악한 의병부대는 9월 10일 갈평에서 적의 대군을 섬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또 9월 25일에는 영춘 느릅재로 넘어오는 일본군을 맞이하여 대승을 거두었으며, 10월 22일에는 원주 싸리재에서, 11월 2일에는 죽령에서 2차에 걸친 대회전을 벌여 승리하였다. 11월 10일에는 단양 고리평에서, 11월 28일에는 백자동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리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이 해 12월 13도창의군이 결성되자 이강년 의병부대는 서울 진공작전을 위해 경기도 지역으로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1907년 12월, 전국 대표 의병장들은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여 서울진공작전을 위해 13도창의군을 편성하였고 이강년은 호서창의대장에 편성되었다. 이강년의병부대는 1907년 12월 말부터 서울진공작전을 위해 강원도 지역으로 우회하여 경기 동북지방으로 진격을 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1908년 3월 19일 가평 용소동과 3월 28일 포천 청계산 갈기동에서 적과 전투를 하여 승리를 거두며 서울쪽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서울진공작전에 나섰던 13도창의군이 해체되자 이강년의병부대는 서울·양주지역의 진출을 포기하고 강원도 지역으로 부대를 옮겼으며, 4월 12일 인제 백담사와 5월 3일 양양 백사장 전투 등에서 승리하였다.
이강년은 의병전쟁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 남쪽으로 부대를 이동하기로 하고 태백산맥을 따라 경상도로 남하하였다. 그리고 5월 16일에는 봉화 서벽에서, 5월 18일에는 봉화 내성에서, 6월 4일에는 봉화 재산 등에서 적을 물리치는 등 6월말까지 이 일대를 중심으로 적과 수차례 접전을 벌여 커다란 전과를 거두었다.
1908년 6월 이후부터는 일본군의 의병토벌작전이 강화되면서 이강년의병부대의 활동도 여의치가 않았다. 마침내 7월 2일 이강년의병부대는 청풍의 금수산 작성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최후의 일전을 벌였으나 적의 탄환을 복사뼈에 맞고 움직일 수 없어 적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강년은 체포된 뒤에도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의병장으로서의 기개를 조금도 잃지 않고 의연한 자세로 일관하였다. 그는 또 충주에 일시 감금되어 있을 때 주민들에게 거사를 일으킨 당위성을 강조하고 죽어서도 항일전이 부단히 이어질 것임을 확신하였다. 1908년 10월 사형집행을 앞둔 최후의 순간에도 고결문(告訣文)을 남겨 국민들에게 국권수호에 더욱 매진할 것을 당부하였다. 마침내 1908년 10월 13일 이강년은 아들 승재와 사촌 강수에게 유서를 남기고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 질문1 이강년이 다시 의병을 일으킨 계기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이강년 부대가 활동상을 차례로 나열해봅시다.
- 질문3 이강년 부대가 경기도 지역으로 진격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4 이강년이 체포된 후 의연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시각자료
시각자료 1
사진의 책은 ‘운강선생창의일록’이다. 운강은 이강년의 호로, 책의 내용은 이강년이 의병활동을 하면서 쓴 기록과 부하들의 종군기를 함께 엮은 것이다.
- 질문1 이강년이 의병전쟁을 치르면서, 이런 기록을 남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 질문2 이강년이 오랜 전투를 치르면서 힘들고 어려운 마음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시각자료 2
다음 글은 이강년이 전국에 보낸 격문이다.
- 질문1 격문의 내용은 자료와 인터넷 등을 참고하여 확인해 봅시다.
- 질문2 이 격문을 받은 각 지역의 의병들의 반응은 어떠했을지 이야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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