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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1926년 4월 25일 창덕궁에서 승하하였다. 비록 망국의 군주였지만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던 당시 사람들에게는 나라를 잃은 슬픔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는 일이었다. 순종의 승하 소식이 알려진 4월 26일부터 사람들이 창덕궁 돈화문 앞에 몰려와 통곡을 하였다. 4월 28일 오후 1시 10분경에 순종의 문상을 다녀오는 듯 보이는 일본인 3명이 무개차를 타자, 한 사람이 이들을 뒤쫓아 차에 뛰어올랐다. 그리고 뒷자리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을 칼로 찌른 뒤 달아났다.
고종 승하 당시 3․1운동을 겪었던 일본 식민통치자들은 경성(서울), 경기도 주변의 경찰을 총동원하여 창덕궁 일대를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이런 중에 일어난 이 사건은 일본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런데 격투 끝에 잡힌 용의자는 차에 탄 사람이 당시 조선총독 사이토인 줄 알고 찔렀다고 자백하면서 죽인 사람이 사이토가 아니라는 말에 실망하였다. 이 말에 일본 경찰은 한 번 더 충격을 받았다.
사건이 발생한 뒤 일본 경찰과 언론이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알아보았더니 송학선은 평소에 조용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재판을 받는 중에도 조금도 비굴함이 없이 당당하게 행동하여 재판을 방청하러 온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러면 송학선은 어떤 이유로 총독을 죽이려는 마음을 먹게 되었으며, 어떻게 실행에 옮기게 되었을까?
역사적 배경
현재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4 창덕궁 금호문 앞 창덕궁 휴게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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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태 | 부분 변형. 현재는 창덕궁 주차장으로 휴게소와 매표소가 이 일대에 들어서 있다. |
창덕궁은 대한제국의 황실가족이 마지막으로 살았던 곳이다. 전통방식의 건축물에서 근대를 맞이하였기 때문에 현실에 맞게 개조하여 사용하였다. 특히 새롭게 등장한 자동차가 출입할 수 있도록 문턱을 없앤 문이 바로 창덕궁의 서문인 금호문이었다.

읽기
읽기자료 1
사이토 일본 총독을 죽이려다 그와 닮은 사람을 죽여 목적 달성에 실패한 송학선은 1897년(광무 1) 2월 19일 서울 천연동(天然洞)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909년 서대문공립보통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었으나 아버지의 사업이 파산하는 바람에 가정이 궁색해져 가족들이 흩어지게 되었다. 이때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갖은 고생을 하게 되었다. 그 때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기 시작하였다.
1913년에 아버지가 만리동에 있는 조선인쇄소에 취직함에 따라 가족들이 비로소 모여 살게 되었다. 그는 1916년 서울 남대문에 있는 일본인 토다〔戶田春藏方〕가 경영하는 농기구회사에 취직이 되었다. 당시 상황에서 회사에 다니는 것만도 다행이었지만 근무시간이나 봉급, 그리고 인간적인 대우에서 차별을 받으면서 안중근 의사에 대한 존경심이 더 깊어진 것으로 보인다. 1922년 2월 서울 북아현동으로 이사를 하였는데, 급성 각기병으로 전신을 못 쓰게 되어 회사에서 해고되었다.
1923년 어느 날 일본인이 많이 살고 있던 진고개를 지나다가 어느 일본인 상점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보고, 어려서부터 존경하던 안중근 의사를 본받아 당시 총독이었던 사이토를 죽이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당시 안중근 사진은 요즈음 연예인 브로마이드 정도는 아니겠지만 웬만한 사진관에서는 구하거나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925년에 급성 각기병이 완쾌되어 직장을 알아보다가 경성사진관에 취직이 되었다. 1926년 3월 경성사진관을 수리했는데, 이 때 부엌에 좋은 칼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내가 사이토를 죽이고자 한 것이 몇 년 전부터의 소망이었는데, 좋은 칼이 없는 것이 한이었는데 오늘 이 칼을 얻은 것은 하늘이 주신 것” 이라고 하며 기뻐하면서 잘 간직하였다. 그리고 거사를 실행하기 위해 신문이나 책 등에서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사진을 보고 그 용모를 머리에 새겨두었으며, 경성 사진관에서 구한 칼을 틈나는 대로 갈면서 자신의 마음을 다졌고, 시간만 있으면 집 뒤의 산에 올라가 소나무를 상대로 칼 꽂는 연습을 하였다.
1926년 4월 25일 순종 황제가 승하하자 26일부터 창덕궁 돈화문 앞은 문상객으로 넘치기 시작하였다. 송학선은 순종에 문상을 올 것인 사이토를 처단하기 위해 집에 간직하고 있는 칼을 품에 기다렸으나 27일까지도 사이토 총독은 오지 않았다.
4월 28일도 창덕궁 금호문 근처에서 사이토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사이토를 닮은 사람이 포함된 3명이 금호문으로 무개차를 타고 나오고 있었다. 바로 국수회(國粹會) 부회장 다카야마[高山孝行], 일본인민회(日本人民會) 이사사토[佐藤虎次郞], 경성부협의회 의원 이케다[池田長次郞]이었다. 송학선은 차에 뛰어올라 사이토 총독을 닮은 이사사토를 칼로 찌르고 이를 말리던 다카야마까지 칼로 찔렀다.
송학선은 사이토 총독을 처단하였다고 생각하고, 재빨리 차에서 뛰어 내려 재동 쪽으로 달아났다. 갑작스런 사건에 부근에 있던 기마순사 후지와라[藤原德一]가 경적을 불며 그 뒤를 추격하였고, 그 소리를 듣고 서대문경찰서 순사 오환필(吳煥弼)이 달려들었다. 이에 그는 오환필의 배를 찔러 넘어뜨렸다. 다시 달아나다가 뒤에 수십 명의 일경들이 추격하자 휘문고보 문앞 골목으로 들어갔으며 일경들과 격투를 벌이는 등 혈전을 하다가 머리에 상처를 입고 일본 경찰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타카야마는 이왕직 의무실에서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사망하고, 오환필 역시 중상을 입고 사망, 이사사토는 중상을 입고 총독부의원 입원, 후지와라는 머리에 칼을 맞고 총독부병원에 입원함) 이렇게 잡히면서도 휘문고보 앞에서 구경하던 학생들에게 “만세 불러라 만세 불러!”라고 소리를 쳤다.
일경에 체포될 때까지도 송학선은 자신이 처단한 사람이 사이토 조선총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종로경찰서장이 송학선에게 “다카야마와 사토를 무엇 때문에 살상하였느냐?”고 추궁하였다. 송학선은 자신이 처단한 자가 사이토 총독이 아니고 다카야마냐고 되물었다. 처단한 자가 사이토 총독이 아닌 데에 크게 실망한 것이다. 놀란 것은 일본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송학선이 죽이려고 한 자가 조선총독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순종이 승하한 이때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 조선사람들에게 미칠 영향이 크다고 판단한 조선총독부는 이 소식을 보도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창덕궁 앞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보았고, 특히 휘문고보 학생들이 현장을 적나라하게 목격하였기 때문에 이 일은 입과 입으로 퍼져 나갔다.
이에 일제 당국은 5월 2일에 사실을 발표하는 동시에 사실 심리를 빨리 진행하여 6월 5일에는 ʻ살인 및 상해죄ʼ로 기소하여 예심에 넘겼고, 7월 15일 제1회 공판을 경성지방법원 제7호 법정에서 열었다. 이때 변호사 이인과 마츠모토 그리고 한근조 등이 송학선의 변호를 맡았다. 재판장이 “칼은 무슨 목적으로 가져갔는가, 강도질할 목적은 아니었던가?”라고 질문을 하자, 송학선은 대번 “내가 언제 강도질을 하였소?”, “창덕궁 앞에서든가 어디서든지 총독을 암살할 목적으로 가지고 왔었소”라고 반박하면서 총독 처단이 목적임을 밝혔다. 그리고 “피고는 어떤 주의자인가, 사상가인가?”라고 물음에도 “나는 주의자도 사상가도 아니다. 다만, 우리나라를 강탈하고 우리민족을 압박하는 놈들은 백 번 죽어도 마땅하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총독을 못 죽인 것이 저승에 가서도 한이 되겠다.”라고 대답하였다.
송학선의 의거는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과 감동을 주었다. 재판정에는 입석까지 꽉 찰 정도였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시대일보 등은 계속해서 보도를 하였다.
1926년 7월 23일 결심 공판에서 미타무라 재판장과 에토‧와키 배석판사가 형법 제199조, 제203조, 제55조에 의하여 ʻ살인 및 살인미수죄ʼ로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대해 송학선 가족은 7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 공소하여 10월 11일에 제2심 재판이 열렸고, 11월 3일에 제2차 공판이 열렸으며, 11월 10일에 경성복심법원 제3호 법정에서 열린 제3차 공판에서 끝내 사형이 선고되었다.
가족들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고등법원에 상고하였다. 1927년 2월 3일 고등법원 대법정에서 상고심이 열렸으나 재판장인 오가와가 이유가 없다고 하면서 상고를 기각하여 사형이 확정되었다.(이 때 송학선은 재판 결과가 예상되었기 때문에 출두하지 않고, 서대문형무소 미결감 독방 안에서 쇠수갑을 차고 있었음.)
1927년 5월 19일 오후 2시 서대문형무소 형장에서 갑자기 실시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송학선은 의사는 단독으로 실행한 거사였지만 순종 승하 직후 일어났고, 그의 재판 과정이 언론에 소개되면서 당시 사람들에게 독립에 대한 의지를 자극한 점은 크게 을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 질문1 송학선 의사는 총독 살해라는 엄청난 의열 투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게 된 이유를 조사해보고, 이런 분들을 어떻게 하면 널리 알릴 수 있는지에 대한 방안을 모색해봅시다.
읽기자료 2
순종의 승하를 계기로 사회주의 세력과 학생들이 3·1운동과 비슷한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한 것이 6·10만세운동이다. 송학선의 의거는 순종의 승하를 계기로 독립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끔 만드는 계기로 작용한 것은 분명한 듯하다. 그것은 당시 신문들이 지속적으로 송학선 의사와 관련된 기사를 싣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총독을 죽이려고 시도했던 송학선을 직접 보고자 재판장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시대일보』의 「대중운동과 선구자」라는 논설은 송학선의 의거를 계기로 사람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음은 그 원문이다.(현대어 번역)
어떤 개인의 선구자뿐으로 일시적 격동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은 흔히 수명이 길지 못하고 혹은 용두사미로 마치게 된다. 어떤 자는 우리를 비웃어 말하되 조선인은 기운이 짧고 감각이 빠르기 때문에 사물에 접촉할 때마다 감동을 받기는 쉬우나 장구오래도록 지속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조선인이 선천적으로 기운이 짧고 긴가 하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니 장황히 말할 것도 없거니와 종래의 경험으로 보면 우리의 운동이 굳세게 지속되지 못한 것만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항상 대중의 깊은 각성에서 일어나지 않고 소수의 선구자로부터 일으킨 것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렇지만은 운동의 초기에 있어서는 선구자가 없어서도 되지 않는 것이다. 다만 운동의 선구자라 하면 반듯이 현시 대중의 심리에 적응한 이상을 가지고 그 진로를 인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하면 대중심리의 영역에서 대중의 목표를 목표로 하고 가장 빠른 길로 나아가게 하는 선구자라야만 그 운동의 효과를 얻는 것이다. 만일 거기에 이론이 있다면 어찌하여야 대중으로 하여금 그 목적지에 도달하여 좋고 아름다운 생활이상을 실현케 할까하는 것뿐이다. … 민중이 장차 요구할 이상을 민중에게 제공하는 동시에 그 이상이 하루바삐 민중화, 실제화하게 하는 것이 운동의 선구자로서 취할 당연한 책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모든 운동에 있어서 선구자와 대중의 사이에 너무 소원한 때가 많았다. 그로 인하여 도리어 일반 민중에게 회의와 실망을 끼쳤다. … 우리는 오직 실제의 사실을 토대로 하여 민중의 생활의식을 굳게 하며 좀 더 나아가서는 그것을 적응한 시기에 적응한 동작으로 실현케 할 것이다. 그러한 운동은 반듯이 모든 민중이 한결같이 부르짖으며 유기적 활동을 하게 될 것이니 거기에 대하여는 아무런 힘으로도 능히 제어치 못할 것이오. 억지로 제어하려는 자가 있으면 그와 반비례로 반발되는 것은 원리다. 그러하고 과거의 사실이 증명한다.
- 질문1 이 논설을 쓴 사람은 대중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떻게 행동하기길 바랐을까에 대해 생각해보고 각자의 의견을 발표해 봅시다.
읽기자료 3
나라는 이미 망했고 일제에 의해 허수아비처럼 황제자리에 있었던 순종이었더라도, 그의 승하는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생각을 갖게 하였다. ‘상록수’로 유명한 심훈도 순종의 승하에 대해 지은 시가 있다.
통곡痛哭 속에서
큰 길에 넘치는 백의의 물결 속에서 울음소리 일어난다.
총검이 번득이고 군병의 말굽소리 소란한 곳에
분철(몹시 분해 성을 냄)한 무리는 몰리며 짓밟히며
땅에 엎드려 마지막 비명을 지른다.
땅을 두드리며 또 하늘을 우러러
외치는 소리 느껴 우는 소리 구소(하늘)에 사무친다!
검은 「다기(댕기)」 드린 소녀여
눈송이같이 소복 입은 소년이여
그 무엇이 너희의 작은 가슴을
안타깝게도 설움에 떨게 하느냐
그 뉘라서 저다지도 뜨거운 눈물을
어여쁜 너희의 두 눈으로 짜내려 하더냐?
가지마다 신록의 아지랑이가 되어 오르고
종달새 시내를 따르는 즐거운 봄날에
어찌하여 너희는 벌써 기쁨의 노래를 잊어버렸는가?
천진한 너희의 행복마저 차마 어떤 사람이 빼앗아 갔든가?
할아버지여! 할머니여!
오직 무덤속의 안식 밖에 희망이 끝인 노인네여!
조팝에 주름 잡힌 얼굴은 누르렀고 세고(세상 고통)에 등은 굽었거늘
복자(배)를 쥐어짜며 애통하시는 양은 참아 뵙기 어렵소이다.
그치시지요 그만 눈물을 거두시지요
당신에의 쇠잔한 백골이나마 편안이 묻히고자하는 이 국토는
이방사람의 ‘호미’가 샅샅이 파헤친 지 이미 오래거늘
지금에 피나게 우신들 한 번 간 옛날이
다시 돌아올 줄 아십니까?
해마다 봄마다 새 주인은
인정전 ‘사꾸라’ 그늘에 잔치를 베풀고,
이화의 휘장은 낡은 수레에 붙어
티끌만 날리는 폐허를 굴러다녀도,
기억은 망각의 ○○들 찾나니
일후란 뉘 있어 길이 서러워 하랴마는 …·
오오 쫓겨가는 무리여
쓰러져 버린 한낱 우상 앞에 무릎을 꿇지 말라!
덧없는 인생, 죽고 마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어니
한 사람의 돌아오지 못함을 굳이 서러워하지 말라
그러나 오오 그러나
철천의 한을 품은 청상의 설움이로되
이웃집 제단조차 무너져 하소연할 곳 없으니
목매어 울고자하나 눈물마저 말라붙은
억새(억눌려 막힘)한 가슴을 이 한날에 뚜드리며 울자!
이마로 흙을 부미며 눈으로 피를 뿜으며
1929년 4월 29일 돈화문 앞에서
- 질문1 이 시를 읽고 당시 사람들이 순종의 승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에 대해 친일파, 유생, 평민, 독립운동가 등의 입장에서 생각해봅시다.

시각자료
시각자료 1

- 질문1 왼쪽은 송학선 의사가 일본 사진관에서 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안중근 의사 사진이고 오른쪽은 독립운동에 관련하여 제작․보급한 안중근 의사 사진이다. 같은 인물의 행위에 대해 사진이 이렇게 다르게 사용되는 이유를 사진이 갖는 대중성이라는 점에 입각하여 모둠별로 토론해 봅시다.
시각자료 2

당시 언론사들이 송학선 의사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사진들. 송학선 의사의 가족사진(위 왼쪽), 재판 받고 있는 송학선 의사(위 오른쪽)
- 질문1 송학선 의사의 의거가 있은 후 당시 언론(신문)에서는 지속적으로 이 소식을 보도하였고, 재판이 열릴 때마다 방청객은 물밀 듯이 왔다. 이 이유에 대해 6‧10 만세 운동과 관련시켜 모둠별로 자료를 찾아서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