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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본이 우리나라의 토지와 농산물 등 경제수탈을 위해 세운 국책회사이자 착취기관이다. 영국의 동인도회사와 같이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단순히 영업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일반회사가 아니라 남의 나라 토지와 자본을 수탈하고 경영하고 장악하기 위해 만든 식민회사이다. 일제는 1908년 서울에 본점을 세우고, 부산, 목포, 이리, 대전, 대구, 원산, 평양, 사리원 등 전국 주요 농업지역과 교통 요충지에 지점을 설치했다.
현재 남아있는 동양척식주식회사 중 가장 크고 그 당시 일제가 중요시 했던 곳이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이다. 당시 목포는 1흑 3백으로 불리는 쌀․면화․소금의 농산물과 김과 같은 해산물이 풍부한 지역이며 물자운송이 편리한 항구 도시였기 때문이었다.
동양척식회사 목포지점은 1909년 8월 31일 영산포에 출장소로 개설되었다. 이후 목포항이 커지면서 영산포에서 1920년 6월에 목포로 이전하였고, 1921년 11월 7일 본 건물을 새롭게 만들었다. 그 후 10년 동안 각종 산업과 시가지 신축 건물에 자금을 융자해주고 이를 기반으로 사업을 확대시켜 나갔다. 목포지점에는 관리부와 금융부가 있었고, 관리 영역은 크게 확장되어 나주군 영산포, 광주군 송정리, 보성군 벌교, 강진군, 함평군 문장리 등에 6개 주재소가 있었으며 광주군 광주면, 순천군 순천읍에는 금융신청소가 있었다. 해방 이후 1989년까지 목포해역사(木浦海域司) 헌병대로 사용하였고, 그 후 비어 있다가 목포근대역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 한국에는 부산과 목포에만 동양척식회사 건물이 남아 있는데 규모면에서 부산지점보다 크다.
역사적 배경
현재 주소 | 전라남도 목포시 중앙동 2가 6 목포근대역사관 (전라남도 목포시 번화로 18 (중앙동 2가 목포근대역사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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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태 | 원형보존,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
1908년 일제는 한국경제를 독점적으로 착취하고자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특수 국책회사로 설립하였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한국민의 토지와 재산을 착취하는 식민지 경제의 첨병으로 한국민의 원성이 높았다.
일제는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한국의 산업 자본을 키우고 개발한다는 명목으로 1908년 일본 제국의회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법’을 통과시키고, 1천만원의 자본금으로 서울에 본점을 두고 1909년부터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업무를 시작하였다.
동척은 주로 토지를 사들이는데 힘을 기울여, 1913년까지 47,148정보의 토지를 사들인데 이어 1914년에는 농공은행에서 거액을 융자받아 전라도와 황해도 지역의 비옥한 논밭을 강제로 사들였다. 그 결과 1924년에는 60,591정보의 토지를 소유하였고, 회사 창립 때 현물 출자 형식으로 빼앗겼던 정부 소유지 17,714정보를 더해서 막대한 농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렇게 강점한 토지는 소작을 주어 5할이 넘는 높은 소작료를 받고 빌려준 곡물에 대해서는 2할 이상의 높은 이자로 거둬들여 일본으로 보내졌다.
사세의 확장과 더불어 1917년 회사법을 고쳐 본점을 도쿄로 옮기고, 한반도에 17개의 지점을 두는 이외에 만주, 몽골, 동부 러시아, 중국, 남양제도, 말레이시아 반도, 태국, 브라질 등 각국에 52개의 지사를 세워 경제 침략을 꾀했다.
동척은 대규모의 농업 이민 사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동척 이민 사업의 목표는 일본 농민을 자작농으로 육성하여 한국의 전 농촌지역에 분산시켜 식민 지배체제의 안정화를 도모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동척은 금융 사업과 수산업 경영에도 참여하였다.
이와 같은 동척의 식민 경제 침탈에 반대한 한국민의 저항 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읽기
읽기자료 1
“1906년 11월 및 다음해 7월에 체결된 양국의 협정에 따라 일본은 정치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면에서도 이를 지도, 인도하여 식산흥업의 방도를 열어 부원(富源)을 개척하고 인격의 함양을 도모하며 한국민이 문명의 혜택을 입게 할 중책을 짊어지게 되었다.
양국 정부는 이에 뜻하는 바가 있어 한국에서 척식사업의 영위를 목적으로 하는 회사를 설립하고, 일본정부는 이에 일정기간 상당액의 보급을 시행하고, 한국정부는 사업융자의 일부로 국유지를 출자하게 함으로써 동국이 자원개발 식산진흥을 담당케 하며, 일본으로부터 선량, 근면하고 경험이 풍부한 농민을 이식하고 진보된 농법을 시범함과 동시에 기업자에게도 저리의 자금을 공급하여 식산산업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이것이 본사 창립의 근원인 것이다.”
- 질문1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 취지를 세 가지로 정리하여 써봅시다.
- 질문2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 목적은 무엇인가요?
- 질문3 동양척주식회사 설립의 자본 형성에 한국정부는 어떤 방법으로 참여 했나요?
- 질문4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사업내용을 네 가지로 정리하여 써봅시다.
- 질문5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의 실질적 목표는 무엇이었을까요?
읽기자료 2
척식(拓殖)이란 ‘식민지 개척’을 말한다. 한국을 영업 지역으로 하고 한국 땅에 본사를 두었다면 회사 명칭도 당연히 ‘한국척식주식회사’나 ‘조선척식주식회사’로 정해야 하겠지만 ‘동양척식주식회사’로 정한 것은 일제가 정치․군사적 침략과 함께 동아시아 경제 침략의 의도와 그 전초 기지를 한국에 두겠다는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1908년 일본 의회에서 통과한 ‘동양척식주식회사법’은 한국과 일본이 공동 출자한 합작회사이며 일본만이 회사에 대한 감독권과 보호권을 갖고 한국은 이윤을 배당받을 권리만 있으며 회사를 감독할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은 동척이 한민족을 위한 식산 정책이 아니라는 것을 처음부터 계획했기 때문에 한국의 의견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법안을 만들어서 강요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동척의 설립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고서도 주주로서의 권리는 포기하고 동척에 대한 감독, 지도, 보호를 법으로 명문화한 것은 일본정부의 동척 설립은 영리 추구가 목적이 아니라 식민지 경제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본과 한국의 동척 자본 구성 비율이 70:30으로 정했는데 동척의 설립이 한국의 발전과 한국민의 생활 향상을 위한다는 명목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한국 측의 자본 비율이 높아야 하겠지만 그렇지 못하였다.
- 질문1 척식(拓殖)이란 무슨 뜻이며 일제가 굳이 회사이름에 ‘동양’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동척이 식민지 경제정책의 추진을 위해 설립됐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을 네 가지로 정리해 봅시다.
읽기자료 3
러․일전쟁을 틈타 한국의 황무지개간권을 요구하다 보안회를 비롯한 한국민의 반대에 부딪힌 바 있는 일제는 을사늑약 이후 통감부의 설치로 한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확립하자 1908년 동척을 설립하여 본격적인 토지 수탈에 나섰다.
동척은 설립과 더불어 한국정부로부터 출자분으로 인계받은 17,714정보의 토지를 보유하였고 1913년까지 47,148정보를 매입하였다. 동척의 토지 소유는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한 국유지 불하의 혜택으로 더욱 확대되어 1917년 말에는 75,178정보의 토지를 소유하였다.
1912년부터 1918년까지 진행된 토지조사사업은 명목상으로는 공평한 지세 부과, 토지 소유권의 보호, 토지의 생산력 증대가 목적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지세의 안정적 확보와 일본인에게 토지에 대한 투자가 쉽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 결과 조선총독부는 지세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게 되었고 합법적으로 약탈한 토지는 동척의 토지 소유를 증가시켰다.
1920년 말에는 90,700여 정보의 토지를 소유하여 식민지 조선에서 조선총독부 다음으로 최대 지주가 되었다. 1942년 말에는 200,722정보를 소유하였다.
이와 같은 동척의 토지 소유는 전남, 전북, 황해, 충남 등 곡창 지대에 집중되어 있었다. 일제는 일본인 지주들의 한국 이주와 동척의 설립으로 한국의 토지 침탈과 지주 경영 및 일본 농민의 이민 사업을 적극 추진하였다. 이를 통해 일본인 농민을 한국의 각 지방에 침투시켜 한국 농업을 장악할 인적 기초로 삼고 동시에 일본의 식량 문제와 인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 질문1 러·일 전쟁을 틈타 일본이 요구한 황무지 개간권에 대한 반대운동을 펼친 단체 이름을 써봅시다.
- 질문2 동척의 토지 소유가 확대될 수 있었던 계기는 무엇인가요?
- 질문3 토지조사사업은 어떤 결과를 초래했나요?
- 질문4 동척을 중심으로 한 토지 매수의 목적은 무엇이었나요?
읽기자료 4
궁삼면이란 1914년 실시된 행정 관할 구역 통폐합 이전의 전남 나주군의 지죽면, 상곡면, 욱곡면을 통틀어 일컫는 지명이다. 삼면에 ‘궁’이 붙여져 궁삼면이라 불린 이유는 삼면의 전답과 택지, 임야 등이 1909년 동척의 매수 이전에 궁장토(궁궐의 사유지)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동척은 농민과 궁장토의 주인인 경선궁(慶善宮, 고종의 후궁이며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귀비 엄씨의 거처)과의 소유권 분쟁 과정에서 이 지역의 토지를 매수하였다.
동척은 토지 매수 후 소작료를 강제 징수하려 했지만 농민은 소작료 불납 동맹을 결성하고 소유권을 인정받기 위한 지세 납부운동을 전개하고 토지 소유권 확인 소송 및 토지 소유권 청구 소송을 제기하는 등 다양한 토지 회수 운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동척이 법적으로 토지 소유권을 인정받게 되었다.
이에 “동척 사원을 죽여라. 영산포 헌병분대를 파괴해 버리자”면서 농민의 저항이 심해지자 1915년 11월 동척사원과 헌병 700명이 궁삼면으로 출동하여 모든 면을 포위하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끌어내 그 중 주요 지주 130여명을 감옥에 투옥시켰다. 나머지 2만여 명의 남녀노소를 문 밖 출입을 금하고 삼면의 토지가 동척의 소유임을 강제로 인정시켰다. 또한 동척은 과거의 소작료도 지불하겠다는 증서를 강요하고 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포박을 하거나 목검으로 구타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특히 임신한 상태에서 끌려 나가 온몸을 채여 태아를 유산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농민이 제기한 소유권 확인 및 증명 말소 소송도 1916년 2월 일제의 탄압으로 농민이 출석하지 못함으로써 농민 측에 패소 판결이 내려져 농민의 토지 회수 운동은 좌절되었다.
- 질문1 지죽면, 상곡면, 욱곡면이 궁삼면으로 불린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동척의 소작료 강제 징수에 대항하여 만든 궁삼면 농민의 조직은 무엇인가요?
- 질문3 동척에 대항하여 전개한 궁삼면 농민의 활동내용을 써봅시다.
- 질문4 동척에 대항한 궁삼면 농민에 대해 일제는 어떻게 대응했나요?
읽기자료 5
동척은 국가 자본의 도입과 프랑스 자본을 끌어들여 토지 매수와 이민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동척의 이민 사업은 일본의 소농민을 한국에 대량 이주시켜 ‘한국의 일본화’를 실현함으로써 한국의 영구 지배를 위한 인적 기반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이민 대상자는 일본과 조선에서 두루 선발했지만 일본 거주자 중심으로 선발하였다. 이들의 출신지는 일본 전역에 걸쳐 있었으나 큐슈[九州] 등 남부 지역이 중심이었다. 동척은 출신지 별로 집단화하여 분산주의 방침아래 전국 각지의 일본촌 건설에 배치하였다. 특히, 기존에 일본인 지주제가 발달한 지역에 더 많이 배치하였다.
하지만 이민 사업은 갈수록 계획이 대폭 축소되었으며 이주민의 탈락률도 증가하여 1933년에는 3,895호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동척의 토지로 유입된 이민은 1,300호에 불과했다. 이 중 절반 정도가 정체 또는 몰락을, 40% 정도가 현상 유지를, 10% 정도가 지주 경영을 위주로 하였다. 동척의 이민은 지주로 변신한 이민과 부업이나 노동력 제공을 통해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이민으로 양분되었다. 더구나 동척 이민에 대한 한국민의 반감은 타국 생활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이민은 기대와는 달리 궁핍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기존의 농촌 질서만 동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도 사실은 동척이 저리의 금융 지원은 물론 농사 개량 자금과 기술, 노동력 확보책, 사회복지시설의 지원 등의 보호 장려 조치를 취한 결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척의 이민 사업은 추진하기가 어려워져 갔다. 양질의 토지부족과 조선총독부의 토지 불하 거부, 지가 상승이 기본적인 문제였다. 동척은 소작인들에게 5할이나 되는 고액의 소작료를 요구하거나, 춘궁기에 양곡을 빌려주었다가 2할 이상의 이자를 받는 등 경제 수탈에 앞장서 농민들의 원성이 높았다.
이에 따라 이민에 의한 소작권 박탈과 높은 소작료로 농민운동이 활성화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민의 수익성과 경제 형편이 악화되고 쌀값의 하락과 토지 가격의 상승이 동척의 경영을 악화시켰다.
동척은 1910년부터 1926년까지 17회에 걸쳐 1만여 호의 일본 농민을 한국에 이민시켰다. 이 결과 한국 농민이 농지를 잃고 농촌을 떠나는 일이 날로 심해져 1926년까지 29만 9천여 명의 한국인이 만주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이 중에는 정치적 망명인도 있었으나 대부분 토지 조사 사업과 일본의 이민 사업으로 농경지를 빼앗긴 영세 농민이 대부분이었다.
- 질문1 동척의 이민 사업의 정치적인 목적은 무엇인가요?
- 질문2 동척의 이민 사업이 한국 농민에게 끼친 영향은 무엇이며 어떻게 대응했나요?
- 질문3 한국 농민이 만주 이민을 감행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6
동척의 이민 사업이 ‘한국의 일본화’에 기여했다고 평가되지만 오히려 소작권의 박탈, 국외 추방, 경영 조건의 악화로 지배의 역효과를 가져왔다. 이민 반대 운동은 이해 당사자인 농민들은 물론이고 지식인들의 여론 확산 운동을 불러 일으켜 신간회를 비롯한 각 사회단체가 참여하는 사회 운동으로까지 발전했다.
특히 신간회는 각 지회에서 동척을 비롯한 대지주의 이민 사업 반대를 논의했으며, 일본 이민 반대와 동척의 폐지는 물론 경작권의 확립, 소작료의 공정한 부과, 소작인에 대한 노예적 부역의 폐지 등을 주장하였다.
한국 농민의 이민 반대 운동은 동척의 직영농장 뿐만 아니라 일본인 지주의 농장에서도 일어났다. 이들의 궁극적 목표는 지주제 폐지에 있었지만 당면 목표는 소작료의 인하와 이민 사업의 폐지에 있었다.
이들은 이민 사업에 대해서 한국은 이민이 적합한 지역이 아니며 이민의 장려는 우리 민족을 근본적으로 몰아내는 일이니 전 민족의 사활이 걸린 문제로 폐지에 적극적인 수단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국 농민의 이민 반대 운동에도 불구하고 지주 경영이 더욱 강화되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이민 사업의 중단을 통해서 한국 농민의 소작권 안정화에 기여하였고 ‘한국의 일본화’를 실현함으로써 한국의 영구 지배를 위한 인적 기반을 확보를 좌절시켰다는데 의미가 있다.
- 질문1 이민 반대 운동을 벌인 대표적인 사회단체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신간회가 벌인 이민 반대 운동의 내용을 써봅시다.
- 질문3 한국 농민이 전개한 이민 반대 운동의 당면 목표는 무엇이었나요?
- 질문4 이민 반대 운동의 의의를 두 가지로 써봅시다.
읽기자료 7
동척은 이민 기관, 토지 경영 회사, 금융기관의 역할 뿐만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자금 대부를 통하여 토지 매수 및 토지 경영은 물론 주식 인수를 통해 사업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1917년 ‘동양척식회사법’의 개정은 1910년대 식민지 금융체계를 재편성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이때부터 동척의 사업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제 1차 세계대전으로 독점 자본이 형성되고 농․공업 간의 모순이 확대되자 일본의 저임금 체계 유지와 유휴 자본의 압박을 해소하기 위한 식민지 개발과 대륙 진출의 환경 조성을 위해 식민지 금융체제를 개편하였다. 동척은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본점을 서울에서 도쿄로 옮기고 영업 지역을 한국 외의 지역으로 넓혔으며 일본의 금융 시장으로부터 조달되는 장기자금으로 탄탄한 자금 기반을 구축해 나갔다.
1920년대 동척의 금융은 농업 개발과 관련하여 일본 대장성 예금부에서 공급되는 장기 저리 자금을 기반으로 산미 증식 계획을 지원하고 그 과정에서 소작료와 높은 이자를 거둬들임으로써 농민을 몰락을 재촉했다. 하지만 동척법 개정에서 이루어진 기업의 주식인수는 아직 본격적인 단계에 이르지 못하여 한국 농업에 대한 수탈이 영업 기반이었다.
1930년대는 기업의 주식인수를 통한 기업 지배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시기였다. 이 시기 동척은 한국의 농업 지배에 기반을 두면서도 한국 내외의 기업을 설립, 인수한 계열 기업군을 바탕으로 1930년대 본격화되는 대륙 침략을 지원하였다. 동척의 기업 인수는 전시 경제 이후 급속히 증가하였으며 태평양전쟁 시기에 다시 한 번 증가하였다. 이것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블록경제 실현을 위한 군수 조달 체제를 달성하려는 것이었다. 동척은 1945년 폐쇄 직전 85개 기업을 거느렸으며 그 중 45개사는 한국에 본사를 두고 있었다. 동척의 계열 기업은 주로 광업과 전력에 치중하고 철도, 철강, 조선, 비행기 등의 사업에도 진출하였다. 동척은 전쟁 수행을 위한 군수 조달 체계를 지향하였던 것이다.
동척은 지주회사로서 뿐만 아니라 금융기관 및 산업 지배 기관으로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첨병 역할을 하였다.
- 질문1 동척의 사업 영역을 써봅시다.
- 질문2 1917년 ‘동양척식회사법’의 개정의 목적은 무엇이었나요?
- 질문3 1917년 ‘동양척식회사법’의 개정 이후 동척사업의 변화 내용을 써봅시다.
- 질문4 1920년대 동척의 금융 사업이 한국 농업에 끼친 영향은 무엇인가요?
- 질문5 동척이 1930년대 기업 인수를 통해 계열 기업군을 형성한 이유를 써봅시다.
읽기자료 8
1924년 황해도 재령군의 동척 소유인 북률농장에서 소작인들의 생존권 투쟁이 일어났다. 북률면 나무리 들녘은 원래 궁장토로 소작료는 1/4~1/3수준이었으나 동척의 소유가 되면서 소작료가 수확의 5할로 오르고 소작 기간도 3년으로 단축되었다.
동척은 1924년 봄부터 일본인 농업 이민들을 위한 ‘이상촌’을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한국 소작 농민의 경작지를 빼앗고 1922년 이후 흉작이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24년 추수기에는 평년과 같은 고율의 소작료를 일본 농업이민을 앞세워 강제로 징수하였다.
이에 400여 명의 농민들은 1924년 11월 2일부터 4일간 동척 사리원지점에서 소작료의 감액, 소작권의 보장, 부정 사원과 조합장의 철폐, 이상촌이나 척식청년단 설치의 연기를 주장하며 농성을 벌였다.
동척은 이를 무시하고 이듬해 2월 엽총으로 무장한 일본인 이민 40여명으로 소작료 강제 징수를 위해 소작인들을 위협하였다. 상황이 악화되자 소작농민들은 소작조합을 중심으로 뭉쳐 모두 소작 계약을 거부하기로 동맹하고 서울에 대표를 파견하여 동척의 처사를 규탄하면서 소작권 보장을 요구하였다. 이로써 북률 동척 농장의 소작쟁의가 사회문제로 크게 부각되었고, 사회 각계각층으로부터 동척이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동척이 북률주재소에 300여명을 소작인을 모아놓고 재령경찰서장 입회하에 타협안을 제시함으로써 쟁의는 일단락되었다.
1890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난 나석주는 안악 양산학교를 세운 김구의 수제자였다. 1913년 북간도로 이주했다가 모친의 병세가 위독하여 귀국, 정미소를 운영하던 그는 1917년 동척으로부터 농토를 전부 몰수당하고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3․1운동 때에는 북률면 내종리 장터의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렀다. 그 후 군자금을 모금하여 상하이의 김구에게 전달한 후 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으로 근무하다가 하이난성[河南省]의 육군군관학교에 입교하여 중국군 장교로 임관, 근무하다 퇴역하였다.
그런 동안 노부모와 처자가 남아있던 재령에서는 3년째 흉년이 계속되었고 동척의 횡포에 대항하여 농민들의 소작쟁의가 벌어졌다.
비통함을 금치 못하던 나석주는 김구의 소개로 김창숙을 만나 동척을 응징하기로 결심하였다.
1926년 12월 26일 의열단원 나석주는 서울의 한복판 남대문 부근의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 지점에 돌입하여 폭탄 한발씩을 던지고 일본 경찰 등 일인 7명에게 총격 살상한 후 자결하였다. 자결 직전 그는 가두의 군중에게 “우리 2천만 민중아! 나는 2천만 민중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희생한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하여 분투하였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어라”고 절규하였다.
나석주 의거는 일본의 식민지 중심적 수탈 기관을 강타하며 민족혼을 일깨운 자랑스러운 의거였다.
- 질문1 북률 동척농장 소작인들의 투쟁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북률 동척농장 소작인들의 주장을 써 봅시다.
- 질문3 나석주 의사가 폭탄을 던진 곳은 어디인가요?
- 질문4 나석주 의사의 동척 습격 거사가 가지는 역사적 의의는 무엇인가요?

시각자료
시각자료 1

- 질문1 사진에 표시된 양각의 원형 장식은 무엇을 상징하는 문양일까요? 일본의 아마테라스 신앙과 관련이 깊다.
시각자료 2

- 질문1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은 2006년부터 목포근대역사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목포 근대 역사관에는 어떠한 전시물이 있을지 추론하여 써봅시다.
시각자료 3

사진은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과 관련된 『동아일보』기사이다.
- 질문1 무안군 농민 50여 명이 농성을 벌이는 장소는 어디인가요?
- 질문2 무안군 농민의 요구사항은 무엇인가요?
- 질문3 무안군 농민이 농성을 벌이게 된 원인을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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