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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중앙대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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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년 2월 28일 운현궁과 종로의 YMCA 건물 사이에 붉은 벽돌로 지은 큰 건물이 들어섰다. 1918년 12월부터 짓기 시작한 이 4층 건물은 천도교에서 공을 들여 지은 천도교중앙대교당이다. 일제 강점기 동안 명동성당(1898), 조선총독부(1926)와 더불어 서울의 3대 건축물로 꼽힌 이 건물은 외국인이 지었지만 조선 사람들이 자금을 모아 지은 건물로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민족종교인 천도교는 왜 이런 웅장한 건물을 지었을까? 그리고 이 건물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일대로 457(서울 종로구 경운동 88)
현재 상태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6호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1921년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완공된 이후 천도교 중앙총부도 종로구 경운동에 세워져 천도교 중앙대교당 일대는 천도교 타운이라고 불렸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수운회관과 더불어 민족종교인 천도교의 핵심건물이다. 천도교가 3․1운동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하였지만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3․1운동 당시에는 완공되지 않아서 3․1운동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그렇지만 천도교 중앙대교당 주변에는 3․1운동과 관련된 곳이 많다. 보성사 사장이던 이종일이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터, 2월 28일 독립선언서 2만 매를 배포한 이종일의 집, 학생 대표가 처음 꾸려졌던 승동교회,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실질적으로 3․1운동이 시작된 탑골공원, 한성정부의 선포 유인물을 뿌린 보신각 등이 모두 천도교 중앙대교당 근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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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천도교는 3·1운동 때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3대 교주 의암 손병희를 비롯하여 당시 천도교의 주도층이 거의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재정적으로 어려웠던 개신교 측에게 거금인 5천원을 주어서 함께 만세시위를 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방 조직을 이용하여 3·1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1905년 12월 동학에서 천도교로 명칭을 바꾼 손병희는 지속적으로 친일행위를 하던 송병준과 이용구를 1906년 9월에 출교시켰다. 송병준과 이용구는 출교하면서 많은 재산을 빼내가 천도교는 재정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손병희는 중앙에는 총부를 두고 지방에는 교구를 설치하는 등 조직을 정비하였고 이에 필요한 재원은 교인 1인당 한 에 10전을 내는 것으로 해결하였다. 그리고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을 반포하고  1907년에는 ‘대종정의(大宗正義)’ 등 근대적인 교리서를 제작하여 보급하였다.
  1918년 4월 5일 천도교는 중앙총부와 지방의 대교구의 140여 명의 교역자가 참석한 부구총회(部區總會)를 열어 교당을 새로 짓기로 결의하고 전국의 교인들이 호당 10원 이상 내는 것으로 교당 신축 자금을 충당하기로 하였다. 이 때 모금된 자금이 약 100만원에 이르렀다. 이에 일제는 이 돈이 독립자금으로 쓰일까봐 ‘신축교당이 지나치게 크다’, ‘성금모금을 중지하고 받은 성금은 돌려줘라’, ‘중앙에 기둥이 없어 위험하다’ 등의 핑계로 건축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천도교 중앙총부는 각 교구로 4만원씩 보내고, 나머지는 천일기념일에 교인들에게 돌려주도록 하였다. 이렇게 해서 대략 30만원이 남았는데, 27만원을 공사비로 충당하고 남은 돈은 3·1운동 자금으로 사용되었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1918년 12월 1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1920년 4월에 준공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3․1운동으로 공사가 지체되다가 1920년 2월에 재개되어 1921년 2월 29일에 완공되었다.
  처음 계획에는 1,320㎡(400평) 규모로 지을 계획이었으나, 총독부는 규모가 너무 큰데다가 중앙에 기둥이 없다는 안정상의 이유로 신축허가를 내주지 않자, 지금의 700.83㎡(212평) 규모로 축소하여 지었다. 일본인 나카무라 헤이요시(中村與資平)가 설계를 했고, 중국인 장시잉(張時英)이 시공을 했으며 일본인 기사 후루타니 도라이치(古谷虎市)가 총감독을 맡았다.
  이 건물의 양식이 전통양식이 아닌 서양식이라는 점은 독특하다고 생각될 수 있다. 천도교가 서학(천주교)을 의식하여 동학으로 출발했지만 불교나 유교처럼 우리 것만을 주장하고 않았기에 당시 세계의 중심으로 여긴 서양의 건축 양식을 받아들일 여지는 충분히 있었다. 그렇지만 자생종교인 천도교는 서양에 뿌리를 둔 천주교와 입장이 달랐다. 천주교를 대표하는 명동성당은 프랑스에서 완성된 고딕양식으로 통일감 있게 지은 건물이다. 그러나 천도교는 통일된 양식으로 지을 만큼 우리의 건축 문화가 성숙하지 않았기에 19세기 유럽의 여러 건축 양식을 혼합한 절충주의로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조선총독부나 조선은행은 모두 철근 콘크리트에 외관만 석재로 마감했던 데 비해 이 건물은 구조도 벽돌을 쌓아서 짓는 방식이었고, 마감도 적벽돌과 화강암을 섞어 쓰면서도 미국에서 수입한 철근으로 보강하였다. 건축 전문가에 의하면 건물 외관은 후기 빅토리아 고딕 양식이라고 한다. 본당을 일랑식으로 하고 중앙에 탑 하나를 세우는 방식은 19세기 후반 영국 교회 건축에서 많이 보이는 유형이었다. 여기에 돌과 벽돌을 이용하여 장식을 더하는 것이 영국 건축의 특징인데, 이것은 19세기 영국이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것에 맞서 중세 교회에서 많이 사용한 벽돌을 부활시켜 인간의 정신을 지키려는 목적을 갖는다고 한다. 천도교도 서양의 발달한 문물에 맞선다는 의미를 간직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본당은 일랑식 단일공간으로 양 옆에 각각 4개의 창을 내고 안쪽 중앙 끝에는 극장 무대처럼 별도의 공간으로 꾸민 연단을 두었다. 내부 장식에서 크고 작은 원을 겹치게 한 천도교 마크를 실내장식의 모티브로 활용한 점이 눈에 띤다. 창 위쪽에는 천도교 마크를 활용함 장식문양을 새긴 스테인드글라스로 처리했다. 출입문 위에도 목재에 천도교 마크를 새겼고, 천장은 천도교 마크를 꽃으로 바꿔 꼬아 만든 것 같은 띠장식으로 구획을 하였다.
본체가 2층이고 탑 부분은 4층으로 되었는데, 주로 적벽돌로 외벽을 쌓은 뒤 일부분에 화강석을 써서 강한 인상을 주었다. 평면은 T자형으로 정면성을 강조하도록 좌우로 길게 배치하고 그 뒤에 강당을 붙인 형태이다. 건물 정면은 좌우 대칭이다. 기단부는 화강석을 사용하였다. 중앙 현관은 고딕 양식으로 반원 아치를 화강석으로 들여쌓은 출입문을 만들고, 이 현관의 양끝에 화강석으로 장식적인 보조벽을 세웠다.
  대강당의 천장구조는 기둥 없는 넓은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산 철재앵글을 사용했다. 여기에는 약 1천명을 수용할 수 있어서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걸쳐 민족운동의 집회장소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군피복 공장으로 전락하였다. 그리고 6.25전쟁 때 건물이 많이 훼손되었다.
공사기간 중 석재는 창신동 돌산 어렵지 않게 채취하였으나 붉은 벽돌은 구입하기 어려웠 천장에 쓰인 앵글철재는 미국에서 수입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시공자인 장시잉이 구속되는 일도 있어서 완공하기까지 어려움이 많았다.

  • 질문1 일제가 천도교 중앙대교당의 건축 허가를 내주지 않았던 이유를 시대 상황과 관련지어 정리해봅시다.

읽기자료 2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한 뒤 식민 지배를 실시하면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고 모든 사회단체를 해산시켰다. 그 결과 사회운동은 종교인과 학생들이 주도할 수밖에 없어서 3․1운동도 종교인과 학생들이 주축세력이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1918년 윌슨이 발표한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민족자결주의는 독립 운동가들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을 주었다. 일본 유학생들이 민족 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2월 8일에 도쿄에서 독립선언을 할 것이라는 소식을 송계백에게 전해들은 천도교의 최린은 1919년 1월 하순에 권동진, 오세창과 협의하고, 손병희와 논의하여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의 3가지 원칙을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정하였다. 외부 단체와 연락을 담당한 최린은 중앙학교 교장 송진우와 교사 현상윤, 그리고 최남선과 만나 포섭 대상을 논의하여 기독교와 합작하기로 하였다. 천도교측의 연락을 받은 이승훈은 곧바로 평양 지역의 기독교계 인사들을 만나고 17일 서울로 와서 서울의 기독교계 인사들과 상의한 뒤 21일 최남선과 함께 최린의 집에서 만났다. 이 자리에서 별도의 독립운동을 계획한 개신교측과 함께 독립운동을 추진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승훈이 개신교는 천도교처럼 일원화된 조직이 없어서 갑자기 자금을 마련하기가 어렵다고 하여 천도교측에게 당시 돈으로 5천원을 지원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최린은 그의 집에서 이승훈에게 5천원을 전달하였고, 이승훈, 함태영과 함께 독립운동 방법에 대해 논의한 결과 독립 선언으로 의견을 모았다. 23일 밤 함태영의 집에 모인 기독교측 인사들도 이에 동의하고 천도교와 연합하여 독립을 선언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런 내용을 24일 최린의 집에서 만나 합의하였고, 박희도를 통해 학생 대표에게도 알렸는데, 이들도 이 결정에 동의하여 합류하기로 하였다.
  최린은 다른 단체는 모두 해산되고 종교단체만 남은 상황에서 천도교와 개신교가 협력하는데, 불교도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24일 밤 평소에 친분이 있던 만해 한용운에게 찾아가 연락하니 한용운도 흔쾌히 동참하기로 하였다. 한용운은 함께 할 불교대표로 해인사 승려인 백용성을 참여시켰다. 최린은 유교측에도 교섭을 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수시로 만났던 이들은 민족대표 33인을 천도교 15명, 개신교 16명(감리교 9명, 장로교 7명), 불교 2명으로 결정하였다.
  일제가 1919년 1월 21일에 승하한 고종의 국장을 3월 3일로 정하자, 민족대표들은 거사일을 3월 1일로 결정하였다. 개신교가 3월 2일이 일요일이어 난색을 표했고, 3개의 종교단체가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를 부여하여 3월 1일로 결정하였다. 더구나 국장에 맞춰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올 것이므로 군중 동원이 쉬울 것이라는 판단도 작용하였다.
  구체적인 계획으로는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하고 학생들과 민중들로 하여금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하였다. 그밖에 독립선언서의 작성과 인쇄는 천도교에서, 독립선언서의 배포와 발송은 함께 하고, 일본정부와 국회에 보내는 통고문은 천도교가,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의 각국 대표에게 보내는 청원서는 기독교가 담당하기로 합의하였다.
  독립선언서는 1월 중순부터 최남선이 작성하여 권동진과 오세창이 검토한 뒤 함태영을 통해 개신교측에 보내 동의를 얻어 천도교 산하의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인쇄하였다. 이렇게 인쇄한 독립선언서는 이종일 집에서 각 단체 및 각 지역으로 배급되어 우리 동포가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에서나 만세시위가 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3·1운동 때, 천도교가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고, 여기에 개신교가 적극 협력했으며, 불교가 가세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질문1 천주교와 유교는 3․1운동 때 왜 민족대표로 참여하지 못했을까?
  • 질문2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이 함께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했을 때 생기는 어려움은 무엇일까? 그리고 이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을 지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읽기자료 3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완공된 이후 이곳에서는 천도교의 주요 종교 의식인 오관(주문, 청수, 시일, 성미, 기도) 중에서 시일식(천도교인들이 매주 일요일 11시에 교당에 모여서 행하는 종교의식)과 기념식 등이 시행되었다. 시국강연회, 음악회, 동화극, 운동경기 등도 종종 열렸으나 특히 노동자, 여성, 사회주의자 등 사회적 약자나 일제의 집중적 감시를 받던 세력이 주로 이곳을 이용하였다.
  예를 들면, 1922년 10월 22일에는 몸값 40전과 매달 30전을 경찰에 상납해야 했던 서울시내의 지게꾼들이 노동자대회를 열어 그들의 처지를 성토하였다. 이 밖에도 일본 니가타현에서 발생한 조선인 학살사건 보고 연설회(1922년 9월), 인력거꾼들이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동맹휴업을 결의한 서울시내 인력거조합대회(1922년 12월), 조선 최초로 자유연애를 주제로 한 신여성 권애라의 강연(1923년 1월), 조선물산장려회가 주최한 물산장려 대강연회(1923년 1월), 백정들의 신분차별 철폐운동인 형평사 전국대회(1924년 4월), 노동청년회 노동공제회 등 사회주의 단체들의 러시아혁명 기념 대강연(1924년 11월) 등이 잇따라 열려 이곳은 자연스럽게 약자들의 목소리를 수렴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일제 강점기의 서울에는 천도교 중앙대교당과 종로의 서울YMCA 외에도 1920년 현 소공동에 경성상업회의소 회관을 겸해 지어진 경성공회당과 1935년 태평로에 들어선 부립극장 경성부민관(현 서울시의회 본관)이 있었다. 이들 건물의 주된 수혜자는 서울에 사는 일본인들이었다. 조선인에게 허용된 것은 각종 명창대회나 몇몇 관변 집회가 고작이었다. 그래서 조선인은 규모나 시설 면에서 다소 떨어질지라도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서울YMCA와 천도교당에 애착을 보였던 듯하다.
  이와 같이 YMCA회관과 천도교당은 1980년대의 명동성당처럼 억눌리고 빼앗긴 자들의 아픔을 대변하며 비극의 역사와 숨결을 같이해 온 소중한 민의의 전당이었다. 광복 후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귀국 연설을 한 김구 선생이 “천도교가 없었다면 중앙대교당이 없었고, 중앙대교당이 없었다면 상해임시정부가 없었고, 상해임시정부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독립은 없었을 것이다.”고 말한 데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 질문1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있었던 대표적인 집회에 대해 알아봅시다. 그리고 천도교 중앙대교당과 종로 서울YMCA에서 그런 집회가 왜 열리게 되었는가에 대해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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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천도교 중앙대교당의 내부 사진. 당시로서는 내부에 기둥이 없이 천장을 구성하는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 질문1 이런 공간이 일제 강점기 때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알아봅시다.

시각자료 2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보성사 터-왼쪽, 보성사 사장이었던 이종일이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표지석-오른쪽]

  • 질문1 3·1운동 때 독립선언문 인쇄, 배포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화에 대해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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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일제 강점기에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는 다양한 집회가 열렸다. 대표적인 집회와 집회의 성격을 알아봅시다. 현재의 서울시청 앞 광장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집회를 열었다. 대표적인 집회에 대해 알아봅시다.
모둠활동 2
천도교 중앙대교당을 지을 때 ‘왜’ 일본인이 설계하고 중국인이 건축을 하였는지에 대해 찾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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