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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의 3·1운동은 천도교 및 개신교, 그리고 귀향하는 학생과 승하한 고종을 조문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로 인해 빠르게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일제가 독립만세시위를 막고자 3월 말이나 4월 초경부터 강경 진압하면서 죽거나 다치는 사상자가 속출했다. 강원도에서는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가 대표적인 만세시위운동지이다.
물걸리에서 장두(지휘자)김덕원과 부장두 전성열이 지휘로 거사 일정과 장소를 미리 정하고 주변의 5개 면(내촌면, 화촌면, 서석면, 내면, 인제군 기린면)에 비밀리 연락하였다. 1919년 4월 3일 동창장터에서 1천여 명이 모여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내촌면을 향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던 중 미리 잠복해 있던 일본헌병과 보조원의 실탄 사격으로 8명이 현장에서 목숨을 잃고 2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그러면 물걸리에서 만세시위가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시위 후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알아봅시다.
역사적 배경
현재 주소 |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595 일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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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태 | 변형. 현재 물걸리 동창마을에는 기미만세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팔열각 주변은 3·1만세시위가 전개되었던 곳이다. 그 옆에는 김덕원이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추진했던 마방터가 있다. |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는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에 3·1운동 때 주변의 여러 마을 사람들이 모여 만세시위운동을 했다
교통이 편리한데다가 농사 짓기도 좋은 여건을 갖춘 물걸리 주변은 수탈의 대상이었다. 수탈에 견디지 못한 이곳 사람들이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 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양반들에 대항하였다. 이런 동학농민군의 자취가 바로 물걸리에서 멀지 않은 서석면 풍암리에는 동학혁명위령탑이다. 이러한 동학농민전쟁은 3·1운동으로 이어져 1919년 4월 3일에 물걸리에서 만세운동이 대대적으로 행해질 수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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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1919년 3월 말부터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의 김덕원과 전성열은 만세시위를 준비했다. 마침 1919년 3월 30일 서울에서 홍천감리교회 원익상 목사를 거쳐 동창감리교회 미국인 선교사에게 비밀리에 전달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1매는 기독청년인 전우균에게 전해졌다. 전우균은 이미 만세시위를 준비하고 있던 장두(총지휘자) 김덕원, 부장두(부지휘자) 전성열과 함께 김덕원과 전영균의 집을 오가며 모여 계획을 짜고 있었다. 여기에 서석면 수하리의 이문순도 참여하였다.
이들은 모두 천도교인이었으며, 물걸리도 동학란 때 동학군이 진을 치고 싸우던 곳으로 전통적으로 천도교와 관계 깊은 마을이었다. 전우균은 3·1운동 직후에 기독교 신자가 되었지만 만세 시위 준비에는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김덕원은 대형 태극기 3매를 그렸고 전성열과 전우균은 작은 태극기 300여 매를 그렸다. 그리고 4월 1일 홍천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이들은 4월 3일에 만세시위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시위에 참여할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부장두 전성열은 인근 5개면(기린, 화촌, 서석, 두촌, 내촌)을 다니면서 연락하였고, 이장의 하인이었던 이오실이 물걸리 집집마다 방문하여 소식을 알렸다.
그런데 4월 2일 도관리 헌병주재소에서 보조원 홍재호가 물걸리에 와서 만세시위를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는 소식을 들은 김덕원과 전성열은 있는 김도명의 주막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홍재호에게 ‘같은 민족’이라는 점을 들어 일본군에게 보고하지 말라고 설득하였다. 홍재호는 오히려 이들에게 호통을 치니 분개한 김덕원과 전성열은 술상을 엎어 버리고 보조원을 때리고 밟아 폭력으로 그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이윽고 4월 3일의 동창마을의 비석거리(현 팔열각 일대)에는 5개 면에서 모여든 1천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장두 김덕원이 “우리는 자유와 독립을 찾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한 사람도 이탈하는 사람이 없이 최후의 일각까지 싸웁시다.”라고 말하자 사람들이 저고리에 숨겨두었던 태극기를 꺼내어 들었고, 김자선, 전영균, 이기선 등이 대형 태극기 3매를 들었다. 이어서 전우균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사람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양도준이 치는 징소리에 맞춰 시위대열이 내촌방향으로 행진을 시작하였다.
전날 김덕원, 전성열에게 쫓겨난 홍재호가 일본 헌병과 보조원 4명과 함께 나타나 시위하는 군중을 해산시키려고 공포를 쏘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동요하지 않고 계속 만세를 외치며 내촌 방면으로 행진하였다. 그러자 공포로는 군중들을 해산시키기가 어렵다는 것을 느낀 일본 헌병과 보조원들은 군중을 향하여 실탄을 쏘았다. 이들의 총에 맞은 여덟 사람(이순극, 전영균, 이기선, 이자선, 연의진, 김자희, 전기홍, 양도준)은 현장에서 숨을 거두었고 함춘광, 승만수 등 20여 명은 중경상을 입었다.
이에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김덕원 장두는 해산하라고 외쳐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다. 만세 시위가 진압된 것으로 여긴 일본 헌병 일행은 내촌 헌병분견대로 돌아갔고 시위군중은 복골 방향의 산속에 숨어 있었다. 이 날 현장에서 숨을 거둔 사람들을 거두지 못하고 흩어지자 시위 현장 주변에서 주막을 경영하던 정익화 할머니와 남씨 부인이 시신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 관헌은 계속하여 만세 군중을 수색 체포하였으니, 최공직의 가게에 피신해 있던 10여 명을 비롯한 많은 인원이 검거되었다.
4월 4일 내촌 분견대의 헌병들이 다시 물걸리에 나타나 장두 김덕원의 집에 불을 지르고 마을을 순찰하며 다시 만세시위를 하면 마을 전체를 불살라 버리겠다는 협박하고 돌아갔다.
김덕원 장두는 체포를 피해 가족과 함께 서석면 수하리 깊숙한 산속에 숨어 3년간 피신생활을 하다가 결국은 잡혀 옥살이를 하고 풀려나 척약산에서 살다가 숨을 거두었다. 전성열 부장두는 서울에서 수년간 피신하다가 인제군 남면 갑둔리(서낭거리)에서 화전을 하면서 살다가 조용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 질문1 물걸리 기미만세시위운동처럼 종교적 갈등 없이 독립운동이 일어난 사례를 찾아봅시다.
읽기자료 2
기미만세공원과 그 주변에는 3·1운동과 관련된 유적들이 많다. 먼저 마방터가 있다. 마방은 상인들의 쉼터로서 장거리 여행에서 지친 말들과 상인들이 쉬어가던 장소였다. 옛날에는 말이 주요 교통수단이었기 때문에, 상인들이 자주 왕래하는 곳에 마방이 있었다. 동창마을의 마방은 동창만세운동의 장두이었던 김덕원이 운영하였다. 그는 이곳을 중심으로 동지들을 규합하고 동학운동과 항일운동에 대한 정보를 얻었으며,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광복 후 마을 주민들은 열사의 뜻을 이어받아 일을 시작했다. 동창초등학교에서 8열사에 대한 제례를 시작으로 이듬해인 1946년 8열추존보국회가 결성됐다. 이 모임에서는 홍천군과 함께 1963년 1919년 4월 3일 8열사를 추모하기 위하여 관천과 합동으로 팔열각을 건립하였다. 현재 팔열각 주변에는 이들의 행적과 뜻을 기린 비석들이 있다. 아울러 이 해에 이들의 뜻을 후대까지 잇기 위해 팔열사의 이름을 따 중학교를 설립하였고, 2006년 고등학교까지 문을 열었다. 1990년 2월 18일에는 기미만세공원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현재의 공원을 조성하였다. 마침 이 해는 팔열사에게 애국훈장이 추서되었고, 이어 1992년에는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김덕원에게 건국애장이 추서되었다.
- 질문1 물걸리 기미만세공원에는 3·1운동을 기리는 글과 시를 새긴 돌들이 많다. 그 내용을 조사해 봅시다.
읽기자료 3
‘장두 김덕원 의사’는 1919년 4월 3일 동창에서 기미만세운동을 주도한 항일투사다. 1876년 11월 26일 물걸리에서 태어나 생계수단으로 마방을 차리고 ‘말강구’(곡물 중개인)를 한다.
45세가 되던 1919년 4월 3일 물걸리, 와야리, 문현리, 장평리, 수하리, 인제 상남, 내면 방내에서 모인 1천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동창 만세운동을 주도한다. 독립선언서 낭독과 대한독립 만세 삼창에 이어 내촌면 주재소로 행진하던 중 일본헌병의 총격으로 8열사가 목숨을 잃고, 김덕원은 복골 은장봉으로 피신한다. 1923년 일제의 관헌에 체포되어 춘천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27년에 석방되었다. 그 후 마방을 정리하고 항골 응달말로 이사하여 옥고의 여독으로 고생하다가 1942년경에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는 만세시위 후 척야산에 숨어 살면서 “이 나라 주상이 건재 하온데 침략자 왜인이 통치함은 하늘의 법칙을 위반하는 것이오니 즉시 추방하여 주시옵소서. 이 나라에 힘을 주시옵소서. 이 민족에게 용기를 주시옵소서.”라고 읊었던 시가 있었다. 후에 이것을 기념하여 척야산의 한 봉우리를 청로봉이라 하고 그 봉우리 위에 정자를 짓고 청로각이라 했으며, 그 아래에 그를 모신 창의사라는 사당을 지었다.
다음은 척야산 철쭉과 김덕원 의사를 연상시키는 시조이다.
척야산 철쭉
파르나스 이순옥
박잡한 세상살이 그늘진 언덕에서
신산에 젖은 마음 척야산 물들이며
두견이 지새우는 밤 꽃잎하나 피운다.
뜨거운 피와 살이 밤하늘 열어젖혀
용호강 우짖던 새 애절함을 달래는 듯
봄이면 열사의 선혈 꽃물결로 흐른다.
- 질문1 김덕원 의사의 행동을 일제의 식민통치 정책과 관련하여 그 의의를 생각해봅시다.

시각자료
시각자료 1

물걸리 절터의 3층 석탑과 보호각: 강원도 영서지역에 남아있는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절터이다.
기미만세시위 기념탑이 있는 뒤편에 있는 물걸리 절터가 있다. 강원도 기념물 제47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절터는 기록은 남아있지는 않으나 통일신라시대 말기 혹은 고려 초에 세워진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만 추정된다.
먼저 이 절터에 잘 남아 있는 삼층석탑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인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갖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기단 각 면의 가운데 기둥[탱주]이 줄어든 점과 3층의 지붕돌받침이 5단이 아니라 4단인 점으로 보아 9세기 후반 양식으로 추정된다.
석탑 옆에는 보호각이 있는데, 이곳에는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41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542호), 대좌(보물 제543호), 대좌 및 광배(보물 제544호) 등이 보존되고 있다. 모두 뛰어난 작품이고 절의 규모도 커서 강원도 영서 지역을 대표하는 통일신라의 절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 질문1 기미만세공원 뒤에 있는 통일신라 말기로 추정되는 절터이다. 이곳에 남아있는 유물, 유적을 조사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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