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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만세고개 3·1운동 만세 시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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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세 소리
         박종화


이곳 만세고개는
그 옛날 일본 식민지 통치에 항거
이 곳 애국 선열들이 불꽃 같이 일어나
뜨거운 피로 조국 자주 독립을 외치던
3·1만세운동, 그 만세소리 언덕



지금도 생생히
그 피끊는 만세소리 들려오나니
오, 이 만세소리
이 겨레, 이 조국에 영원하리라

조국은 겨레의 터전, 겨레의 생존
그 우리의 생존의 보금자리
그 명예, 그 긍지, 그 자존, 그 사랑
우리의 그 몸과 얼이려니
어찌 이 만세소리 잊으리

오, 이 곳을 지나가는 겨레여
잠시 길을 멈추고
이 만세소리 들으소서

사람은 죽어서 사라지지만
이 만세소리 이곳에 영원하리니

대한 독립 만세 만세
만만세.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과 양성면 사이에 ‘만세고개’로라고 불리는 고개가 있다. 이 고개는 원래 양성면 동항리에서 고개 북쪽에 있는 성은리로 넘어가는 길이라 ‘성은리 고개’라고 불렸다. 그런데 이곳에서 1919년 양성면 동항리와 원곡면 칠곡리 주민 20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벌였다. 그래서 1991년 ‘만세고개’로라고 이름을 붙였으며, 2001년에 3·1운동 기념관을 세웠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경기 안성시 원곡면 칠곡리 2-19
현재 상태 1991년 이후 만세고개로 불리우며, 길 남쪽에는 휴게소, 북쪽에는 3․1운동 기념관리 조성되어 있다.

  한국을 강제로 병합하여 식민지로 만든 후 일제는 조선인 가운데 세력이 크거나 재산이 많은 사람을 끌어들여 면의 운영자로 임명하여 말단 행정 구역인 면의 지배력을 강화하였다. 당시 면장은 헌병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법령이나 서류를 전달하고, 세금을 내도록 독려하며, 사람들의 이동과 움직임을 보고하는 등 식민지 정부 유지의 기초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일제 강점기 농민들에게 각종 세금은 큰 부담이 되었다. 이 시기 농민들은 토지세, 호세(戶稅), 토지에 대한 부가세, 시장세, 연초세(담배세), 주세, 각종 조합비 등 여러 종류의 세금을 내야 했다. 따라서 농민들이야말로 식민 지배의 가장 큰 피해자였다.
  1919년 서울에서 시작된 3․1 만세 운동은 처음에는 비폭력적인 모습으로 출발되었다. 그러나 지방 대도시와 중소 도시를 거쳐 농촌으로 확산되면서 폭력적인 양상이 나타났다. 하층 농민에게 식민지 상황은 매우 암담하였고 절대 독립이 농민들에게 절실하였기 때문이었다. 안성군은 읍내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4월 1일 원곡, 양성의 만세 시위에서 농민들이 서로 힘을 합하여 면사무소, 우편소, 주재소 등을 파괴하고 서류를 불태웠던 것은 당시 식민 지배로 말미암아 이 지역의 농민들이 생존권을 위협받았던 결과로 나타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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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3․1운동의 제 1 단계는 민족대표 33인이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대도시에서 만세 시위가 전개된 단계이다. 민족대표 33인은 대체로 종교지도자, 민족자본가 및 신지식층으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상하이의 신한청년당과 동경유학생들의 독립운동 움직임에 자극되어 운동을 각기 준비하였다. 독자적인 운동을 준비하던 학생층과도 막바지에 연결이 되었다. 운동을 주도적으로 준비한 이들은 파리강화희의에 대한 독립청원, 미국에 독립지원요청, 일본에 독립승인 요구, 국내에서의 독립선언을 통하여 독립을 획득한다는 방침을 채택하였다. 이 가운데 그들이 가장 중점을 둔 것은 강화회의에 대한 독립청원과 미국에 대한 독립지원요청이었으며, 국내에서의 독립선언은 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국내에서의 시위는 어디까지나 비폭력주의에 입각해서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민중들에게 제시하였다.
  3․1운동의 2단계는 3월 초순 학생과 상인 및 노동자층이 주체적으로 참여하여 만세시위운동이 서울, 평양 등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전개된 운동의 초기 단계이다. 이 시기에 전국 주요 도시에서 운동을 이끈 사람들은 주로 학생과 젊은 지식층이었다. 노동자 상인층은 그들에 호응하여 만세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상인과 노동자들은 만세 시위와 동맹파업, 철시, 전차파괴 등의 방법으로 항쟁하였다. 3․1운동은 이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3․1운동의 제 3 단계는 3월 중순 ~ 4월 상순 사이 운동이 전국의 각 농촌으로 확산되고, 주요 도시에서도 운동이 계속되는 단계이다. 이 시기 농촌의 운동을 기획하고 조직하는 과정에서 서당선생, 학교 졸업생 등 지식층이나 일부 중소지주 등 유력자층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운동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농민층 내부에서도 운동을 주도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운동의 모습도 결렬해져서 곳곳에서 유혈 충돌이 일어났다.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일제는 야만적인 수단으로 이를 탄압하려 하였다. 이에 맞서 시위 농민들은 농기구나 간단한 무기로 무장하고 면사무소, 헌병분견소, 경찰서, 친일지주 등을 습격하여 호적대장, 과세대장 등을 소각하는 등, 일제의 식민 통치 질서의 근본을 붕괴시켜 나갔다.
  3 단계에 접어든 이후 비폭력주의의 표방은 무너지고, 3․1운동은 민중들에 의해 폭력적인 저항으로 발전한 제 4 단계로 들어섰다. 이 시기의 격렬한 저항을 보인 것은 농민들이었다. 1910년대 일제의 식민지배에 의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층이 농민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조선의 절대독립만이 자신들의 살 길이라는 생각을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 중 일부는 만세시위에 그치지 않고, 헌병분견소,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여 이를 접수하고 인본인들의 철퇴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 질문1 3․1운동이 초기에 비폭력으로 출발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3․1운동이 지방 도시, 다시 농촌으로 확산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 질문3 3․1운동이 농촌으로 확산되면서 폭력적 양상을 띠는데, 당시 농민의 입장에서 일기 형식으로 그 이유를 써봅시다.

읽기자료 2

  원곡면과 양성면의 시위운동은 양성면 쪽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양성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3월 11일 오전 11시에 돌연 교정에서 일제히 독립만세를 불렀던 것이다. 그 이후 양성에서는 4월 1일이 되기까지 만세시위에 관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 보통학교 학생이었던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4월 1일 시위 며칠 전부터 양성군 덕봉리 출신으로 보성전문학교를 다녔던 남진원이라는 사람이 학교 조회 시간에 와서 일본인 교장이 있는데도 한국인 선생들을 끌어내어 만세를 부르게 했고, 이렇게 며칠을 만세 부르고 난 뒤에 전 면(面)이 통일적으로 만세를 불렀다 한다.
  4월 1일 밤의 양성면 연합 만세 시위 상황을 재판 기록을 중심으로 각 동리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양성면 덕봉리는 면사무소가 있는 동항리로부터 약 2km 남쪽에 있는 마을인데, 이미 약 200명이 4월 1일 밤(이날 누가 어떻게 연락을 했는지는 모른다) 자기 동리 산위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부르고, 여기서 같은 면의 오세경, 오관영 두 사람의 주도로 양성으로 가서, 2~3백 명이 단체로 만세를 부르면서 주재소로 몰려가 만세를 불렸고, 그 후 보통학교로 가서 만세를 부르고서 돌아오려 할 때 갑자기 원곡 방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각기 횃불을 들고 양성으로 쳐들어와 여기에 합류했다.
  양성면 산정리는 동항리에서 북쪽으로 약 2.5km 떨어진 마을인데, 4월 1일 저녁 이희봉이 와서 "조선독립으로 각지에서 만세를 부르니, 자기들 마을에서 오늘 저녁 모여 일제히 만세를 부르자"고 하여 마을 사람들이 모여 마을 한길에서 만세를 불렀다. 이희봉은 "이것으로 읍내만은 되었으나, 불충분하니 다시 양성 읍내로 가서 다른 마을 사람과 합동하여 치열하게 부르자"고 하여 모인 사람들이 양성으로 갔다. 산정리 마을 사람들이 동항리에 도착한 것이 오후 9시, 그 곳에 와 있던 양성면 사람들과 함께 주재소로 몰려가 일제히 만세를 부르고 돌아오려 할 때 원곡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와서 일동에게 "지금 같이 주재소로 가자"고 하여 다시 주재소로 가는 대열에 합류했다.
  양성면 도곡리(도골)는 동항리에서 약 2.5km 북동쪽에 위치하고, 산정리로부터는 0.8km 동쪽의 맞은편 마을인데, 이날 밤 이웃 마을에서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자 이 마을의 김영대(金永大)가 "우리 동리에서도 만세를 부르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10명 가량 되는 사람이 자기 마을 뒷산에서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이웃 마을 사람들이 양성으로 가는 것을 보고 이에 따라 만세를 부르려고 양성 구읍내인 동항리 주재소로 갔다.
  양성면 추곡리는 동항리 동쪽으로 1.8km 거리에 있는데, 4월 1일 밤 각 마을 사람들이 양성 읍내에서 만세 운동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른 동리 사람들이 하니 자기 마을에서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사람들이 상의하여, 저녁 식사 후 10 명이 나가서 마을에서 만세를 불렀다. 그 후 사방의 봉화가 양성 읍내로 향하고 있는 것을 보고 모두들 읍내로 가기로 동의하여 저녁 9시경 양성에 도착했다. 그때 이미 여러 마을 사람들이 모여 주재소로 가서 만세를 부르고 보통학교 부근에 왔을 때 원곡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밀어 닥쳤다.
  이 밖에도 동항리(東恒里)와 동항리 근처의 다른 마을에서도 많은 사람이 참여했다고 하나 구속 송치 과정에서 다 빠졌기 때문에 이날 밤의 동리 주민들의 참여 상황이 나타나지 않는다.

  • 질문1 양성면 시위운동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은 어디인가요?
  • 질문2 양성면 시위 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들의 출신 마을과 이름을 정리해봅시다.

읽기자료 3

  원곡면의 만세시위운동은 당시 원곡면 면서기였던 정종두의 진술에서 보면 3월 25~26일부터 원곡면 독립시위운동이 시작되었다. 3월 28일에 내가천리의 이시련의 집에 모여 의논하고 가까운 마을과 칠곡리 등에 연락을 해서 면사무소에 모여 만세를 불렀다. 이후 3월 29일부터 31일까지 계속 면사무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벌였고, 31일의 시위 후 해산할 때에 칠곡리 이유석, 홍창섭이 “내일도 모이라”고 명하였다.
  1919년 4월 1일 칠곡리에서는 아침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외가천리에서는 정오쯤 이덕순이 와서 “오늘 면사무소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니 저녁식사 후 모이라”고 전달했다. 내가천리에서는 이덕순, 최은식, 이근수 등이, 월곡리에서는 이근수의 권유로, 칠곡리에서는 홍창섭·이유석의 권유로 면사무소에 모였다. 이때 면사무소에 나오지 않았던 사람들은 시위 대열이 양성으로 가기 위해 칠곡리를 통과할 때 합류했다.
  이날 저녁 8시경 등불 또는 횃불을 밝혀 들고 원곡면 사무소 앞에 모인 원곡면 각 마을 주민 1,000여 명은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고, 면장 남길우와, 그와 함께 있던 면서기 정종두를 끌어내어 태극기를 쥐어 주며 만세를 부르게 했다.
  시위 군중은 면장과 면서기에게 태극기를 들게 하고 군중에 앞장세워 연달아 만세를 부르며 양성으로 향했다. 이들이 원곡면과 양성면의 경계를 이루는 성은고개에 이르자 이유석이 군중 앞에 나서서 “오늘밤 기약함이 없이 이렇게 많은 군중이 집합하였음은 천운이다. 제군은 양성 경찰관 주재소로 가서 내지일본인 순사와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안 된다. 순사가 이를 응하면 좋으나 만약 응하지 않을 때에는 자기로서도 할 바가 있다.”는 뜻의 연설을 하고, 이어서 홍창섭, 이덕순, 이근수, 최은식 이희룡 등이 교대로 일어나서 군중에게 “조선은 독립국이 될 것이므로 일본의 정책을 시행하는 관청은 불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모두 같이 원곡면·양성면 내의 순사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소 등을 파괴하자. 또한 일본인을 양성면내에 거주케 할 필요가 없으므로 일본인을 양성으로부터 몰아내자. 여러분은 돌 또는 몽둥이를 지참하여 활동하라.”는 연설을 했다. 이에 시위 군중은 근처의 나뭇가지를 꺾어 몽둥이를 준비하였고, 바지에 작은 돌을 싸가지고 양성주재소와 면사무소·우편소 등이 있는 양성면 동항리로 나아갔다.
  그런데 이날 밤 오후 9시 반경부터 양성면민 수백 명이 조선독립운동을 위하여 주재소에 몰려가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9시 50분경 해산하여 돌아가려는 길에 원곡 방면에서 온 시위 군중과 만나 합류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2,0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 군중은 마을로부터 동쪽 끝 약 300m 거리에 있는 순사주재소로 나아가 그 앞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른 뒤 돌을 던지기 시작하였다.
  양성주재소에는 순사 1명과 순사보 2명이 있었는데, 시위대는 순사보들이 도망쳐 나가자 주재소에 불을 놓았다. 일제의 기록에는 이때 “경관이 극력 방어하였으나 탄환이 소진되어 일시 퇴각하다”로 되어 있으나 당시 일본 경찰은 대항을 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발포도 하지 않았다. 만약 발포로 인해 사상자가 났다면 그들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 목격자들의 일치된 견해였다.
  주재소에 불을 놓은 군중의 일부는 “전선을 끊으러 간다”고 하며 달려가고 나머지는 양성우편소로 몰려갔다. 우편소는 동항리의 밀집된 인가 속에 있는 초가집이었는데, 시위 군중은 사무실에 들어가 쳐부순 책상과 의자들을 가지고 나와 약 l00m 남쪽의 밭 가운데 쌓고서 짚횃불로 불을 붙여 태웠다. 또한 우편소 사무실에 걸린 일장기를 떼어 내 집밖에서 불태웠다. 이때 시위 군중이 우편소를 태우지 않은 것은 이 건물이 동항리의 인가가 밀집되어 있는 지역 안에 있어 이웃 민가에 피해가 있을 것이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어 시위 군중은 잡화상하는 일본인 및 대금업자 집을 습격하여 가옥을 파괴하고, 가구류 기물들을 집 바깥 뜰에 들어내어 불태워 버렸다. 그 다음으로 양성면사무소로 가서 물품을 부수고 서류를 꺼내어 집 바깥에서 불태웠다. 양성면 사무소도 동리 가운데 있었다.
  양성면에서의 일제 관공서와 일인 상점을 파괴·방화를 끝낸 시위 군중은 그 이튿날인 4월 2일 새벽 다시 성은고개를 넘어와 원곡면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 사무실과 서류·물품 전부를 불태우고 오전 4시 아침 식사 후 7km 서남방에 있는 평택의 경부선 철도를 침목 핀을 뽑아 파괴 차단하고자 하였으며, 원곡리 남산에 일본수비대가 들어올 경우 싸우기 위해 돌망태를 준비해 놓고 날마다 돌을 주워 산위로 오르는 것이 일이었다 한다. 그러다 일본수비대가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피신하였다.

  • 질문1 원곡면의 만세시위 과정을 일어난 순서대로 정리해봅시다.
  • 질문2 원곡면 만세시위를 주도한 인물들은 누구인가요?
  • 질문3 시위 군중들이 경부선 철도를 파괴하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읽기자료 4

  조선주차군헌병사령부는 수원과 안성지방에 대해 헌병장교와 경부 등을 지휘관으로 하는 검거반을 4파로 나누어 파견했다. 일본 경찰과 헌병 검거반은 시위주동자를 확실히 체포하기 위해 4월 2일부터 14일 사이에 64개 마을에 걸쳐 주로 야간에 조사와 수색을 하였다. 이들은 주민 약 800명을 검거하고, 19명의 주민을 죽이거나 부상 입혔으며, 17개소에서 총 276호의 가옥에 불을 질렀다.
  원곡·양성지역에는 4월 3일 조선주차군 제20사단 보병 제40여단 제79연대 소속 장교 이하 25명이 경찰을 지원하기 위해 투입되었다. 만세 시위 주동자를 검거하는 과정에서 피살 1명, 부상 20여 명, 가옥 9채가 소실되었다.
  시위 참여자의 대부분이 피신 상태여서 야간 수색과 갖은 방법에도 검거가 부진하였다. 이에 일제는 원곡면장을 시켜서 그때가 농사철임을 구실로 하여 경찰서장의 연설을 듣고 나면 사면해서 농사짓도록 해 주겠다고 하며 16세 이상 60세까지의 남자 주민은 모두 4월 19일, 현재의 원곡국민학교 뒷산에 모이도록 가족·친지들로 하여금 피신자들을 설득하여 데려 오게 했다. 사방 각지의 친척집이나 처가집 등에 피신하고 있었던 시위 참가 주민들이 가족들을 통해 이 말을 믿고 당일 지정된 장소에 모이자, 헌병대가 서쪽과 동북쪽으로부터 갑자기 주민을 포위했다. 그들은 총칼로 위협하는 한편, 몽둥이를 닥치는 대로 휘두르면서 거사 참여자는 일어서라고 명령했다. 이들은 무조건 폭행을 가하면서 저항 또는 도주하는 자를 참살하였는데, 현장에서 숨진 사람이 3명이었다. 또 양민들의 상투를 줄줄이 묶어서 안성경찰서까지 30여 리 길을 걸려서 연행했다. 이때 투입된 일본군은 30명이었다.
  일제는 그해 6월 1일 세 번째로, 36명의 군 병력을 투입하여 경무관헌과 합동 검색을 폈으며 수백 명을 구속하여 고문을 가하고 127명을 기소하였다. 이러한 3차례에 걸친 갖가지 방법을 통한 일제의 탄압으로 이곳 주민들이 치룬 희생은 다음과 같다.
현장 순국 : 3명
안성경찰서 순국 : 5명
서대문형무소 순국 : 9명
부상 후 순국 : 7명
피검자 수 : 361명 이상(훈계 방면자 제외)
옥고 : 127명(선고 전 2, 복역 중 순국 7명 포함)
가옥 방화 소실 : 9동

  • 질문1 원곡면과 양성면 사람들의 만세 시위에 대하여 일제는 어떻게 보복하였는가요?
  • 질문2 일본 헌병들이 피신한 시위 참가자들을 검거하기 위하여 어떤 방법을 썼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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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다음 사진은 원곡면과 양성면 사람들이 만세 시위를 벌였던 만세고개에 조성된 기념탑이다.

  • 질문1 이곳에 2,000여 명이 한데 모여 만세를 불렀을 때의 느낌이 어떠했을지 표현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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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모둠을 나누어서, 당시 원곡, 양성면 시위에서 폭력적인 방법과 비폭력적인 방법 중 어느 편이 적절할 지 자신의 견해를 지지하는 토론을 해 봅시다. 
모둠활동 2
본인이 원곡면과 양성면 시위에 참여하였다고 가정하고 후손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정리하여 발표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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