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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유림단 의거 관련회의지-백세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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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렸다. 나라가 회복되면 죽더라도 사는 것이오, 나라가 회복되지 못하면 살더라도 죽는 것이다. 내가 어찌 화복에 마음을 두겠는가. ……내 뜻은 이미 결정했노라. 나를 따를 자는 누구냐?”

 

  위의 발언은 1919년 공산(恭山) 송준필(宋逡弼)이 소집한 문중회의에서 한 말이다.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의 소식을 들은 송준필은 문중의 방침을 세우기 위해 비밀리에 회의를 소집하였던 것이다. 성주, 칠곡 일원의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 학맥을 대표하는 송준필은 일제의 조선 강점 이후 국외 망명을 결심하고 1912년 국경까지 다다랐으나 부친의 병세 위독했기 때문에 실패하였다. 그는 51세 되던 1919년 3․1운동 때 다시 반일 운동에 나섰으며, 파리장서 운동에 능동적으로 참가했다.
  1919년 3월 김창숙(金昌淑)을 비롯한 유림 대표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파리장서운동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창숙은 야성 송씨 문중을 이끌고 있던 송준필과 긴밀한 협의를 하였고, 송준필은 문중을 이끌고 독립청원운동에 앞장섰다. 독립청원서 서명에 앞서 백세각에서 비밀리에 가진 문중회의를 통해 의사가 결정되자 야성 송씨 문중의 인물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542
현재 상태 원형 그대로 보존․관리하고 있다.

  3·1운동의 준비단계였던 1919년 2월 상순경 최린(崔麟)은 자택에서 최남선(崔南善), 송진우(宋鎭禹), 현상윤(玄相允) 등과 수차 회합하고 독립운동을 대중화하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명망 있는 인물을 대표로 추대해야 한다는 데 합의하였다. 이들은 그러한 인물로 윤용구(尹用求), 한규설(韓圭卨), 박영효(朴泳孝), 윤치호(尹致昊) 등 네 사람을 선정하여 분담하여 접촉하였으나 한규설만 신중히 고려하여 보자고 하였을 뿐 모두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렇게 고위관료나 망명가들과의 연합에 실패한 천도교 측은 기독교 및 불교와 연합하는 한편, 유림과의 연합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최린이 김윤식, 윤용구 등과 접촉하고 한용운(韓龍雲)이 영남의 곽종석(郭鍾錫)에게 연락하였다. 하지만 윤용구는 거절하고, 김윤식은 독립청원이라면 생각해 볼 수 있으나 독립선언에는 뜻이 없다고 했으며, 곽종석은 뒤에 회답이 오기는 했으나 시일이 너무 늦어 참석하지 못하였으므로 결국 민족대표에 유림이 참여하는 것은 실패로 돌아갔다.
  한편 1919년 2월 김창숙은 아버지의 병환으로 인해 28일에야 상경하여 3월 1일의 독립만세시위와 독립선언서를 보게 되었다. 그는 선언서를 접하고 “유교의 나라에서 지금 광복운동을 선도하는 데 3교의 대표가 주동을 하고 소위 유교는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으니 이보다 더 부끄러운 일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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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파리강화회의는 1919년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들이 연합국과 동맹국 간의 평화 조약을 협의하기 위해 개최한 국제회의이다. 회의는 1919년 1월 18일 개최되어 1920년 1월 21일까지 간격을 두고 지속되었다. 이에 앞서 1918년 1월 1일 미국 대통령 윌슨은 신년연설에서 다음과 같은 14개항의 평화교섭 조건을 발표하였다.

① 비밀외교의 철폐와 공개외교의 수립 :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공개적인 평화조약. 이 이후로는 어떠한 사적인 국제 양해는 폐지하며 외교는 언제나 솔직하게 공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② 해양의 자유 : 평시, 전시를 불문하고 영해 밖의 공해 항행의 절대적인 자유. 그러나 국제행동이나 국제조약의 집행을 위하여 일부 또는 전부가 폐쇄되는 경우는 예외로 한다.
③ 경제장벽의 철폐 : 평화를 애호하고 평화유지에 참여하는 모든 국가간에 있어서 가능한 한 모든 경제장벽을 철폐하고 평등한 무역조건을 확립한다.
④ 군비축소 : 국내 치안에 필요한 최저한도까지 군비를 축소하도록 적절한 보장을 한다.
⑤ 식민지 요구의 공평한 조정 : 식민지의 주권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그 주민의 이익과 수립하게 될 정부의 공평한 주장이 동등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원칙 하에서 모든 식민지 요구를 공평하게 조정한다.
⑥ 러시아 재건에 대한 원조 : 러시아로부터 철병한다. 그리고 러시아가 자신의 정치발전과 국가정책을 자주적으로 결정할 자유로운 기회를 갖고 원하는 정치제도에서 국제사회에 들어오도록 러시아 문제를 처리한다.
⑦ 벨지움의 회복 : 벨지움으로부터 철병하고 그 주권은 완전히 회복된다. 이것만이 모든 자유국가들이 설정한 법의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며 그렇지 않다면 국제법의 모든 구조와 효력은 영원히 훼손될 것이다.
⑧ 알사스 로렌의 반환 : 모든 프랑스 영토는 해방되며 점령지역으로부터 철병한다. 알사스 로렌 문제에서 프러시아가 1871년에 저지른 비행은 근 50년간 세계평화를 불안정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평화가 만인의 이익을 위해 보장되기 위하여 교정되어야 한다.
⑨ 이탈리아 국경의 재조정 : 이탈리아의 국경은 명백히 승인될 수 있는 민족의 분계선에 따라서 재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⑩ 오스트리아·헝가리 내의 제 민족의 자결 :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국제적 지위는 유지된다. 그러나 모든 민족은 자치적인 발전을 하도록 자유스런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⑪ 발칸 제국의 부흥 : 루마니아, 세르비아, 모테네그로로부터 철병하고 점령지역은 회복된다. 세르비아는 해양을 향한 자유로운 진로가 보장된다. 발칸제국간의 관계는 충성심과 민족성의 역사적인 분계선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그들의 정치·경제 독립과 영토 보전은 국제적으로 보장된다.
⑫ 터키의 제 민족의 자치와 다다넬스 해협의 국제화 : 현재 오토만 제국의 터키인의 지역은 확실한 주권이 보장되나, 그밖의 민족들은 생명의 확실한 보장, 자치적인 발전의 절대 안정된 기회 등이 보장되어야 한다. 다다넬스 해협은 국제적인 보장 하에서 모든 국가의 상선과 무역에 자유로이 통과하도록 영구히 개방되어야 한다.
⑬ 독립 폴란드의 수립 : 폴란드 인민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독립 폴란드를 수립한다. 폴란드는 해양을 향한 자유롭고 확실한 진로가 보장되어야 하며 그 정치·경제 독립과 영토 보전은 국제조약으로 보장된다.
⑭ 국제연맹의 창설 : 대소 모든 국가의 정치 독립과 영토 보전을 상호보장하기 위하여 특별한 협약에 의하여 국가간의 일반적인 연합을 구성한다.

  이와 같은 14개 항의 주요 내용은 민족자결, 비밀외교의 타파와 공해 자유의 강조, 법에 의한 지배 등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이 가운데 약소국들에게 절실한 내용은 민족자결이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될 무렵이었다. 1918년 11월 휴전이 성립되자 미국은 특사 크레인(C. R. Crane)을 중국에 파견하여 전후 강화회의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설명하게 했다. 크레인의 임무는 중국의 대표가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는 중국을 등장시킴으로써 일본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는 윌슨이 주창한 14개조에 대해 설명하면서 “파리에서 개최될 강화회의는 각국이 다 같이 중대한 사명이 있고 그 영향이 대단히 큰 것이며, 특히 피압박 민족에 대해서는 해방을 강조한 것이므로 약소민족에게는 절호의 기회이다.”라고까지 하였다.
  이 자리에 참석해서 크레인의 연설을 들은 여운형은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민족대표도 참석하여 한국 민족의 독립의사를 전달하고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을 승전국 일본의 식민지인 한반도에도 적용할 것을 요구하는게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이를 추진하기로 하였다. 신한청년당이 그 명칭은 이미 전부터 사용되었지만 실제로 조직을 만들고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이후 민족자결주의 및 파리강화의의의 개최 사실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양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 질문1 윌슨이 제창한 14개조 가운데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방향에 큰 영향을 준 내용은 무엇인가?
  • 질문2 독립운동가들 중에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처음으로 접한 인물은 누구인가요?

읽기자료 2

  3․1운동이 일어난 다음날부터 김창숙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국제여론을 통해 독립을 인정받는 방안을 강구하였다. 김창숙은 유림의 대표가 나서야만 전국의 유림을 움직일 수 있다고 판단하고, 거창의 곽종석에게 사람을 보내 이러한 뜻을 알리고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글을 작성하도록 부탁하였다.
3월 3일 김창숙, 이중업, 김정호, 성태영 등은 성태영의 집에서 회합을 갖고 각 지방과 연락을 위해 각기 담당지역을 정하고 이튿날 모두 담당지역으로 흩어졌다. 김창숙은 경상남북도의 인사들에게 연락을 취하는 한편, 거창에 있던 곽종석을 만나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청원서를 받았다. 곽종석은 장석영에게 초고를 작성토록 하였으나 보완해야 할 부분이 있어서 이를 수정하여 김창숙에게 건네주었고, 이를 본 김창숙이 이의를 제기한 부분에 대해서 다시 수정을 거쳐 청원서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이때 곽종석은 파리에 갈 유림의 대표로 김창숙을 지목하였다.
  서울로 돌아온 김창숙은 이중업, 성태영, 유진태, 유준근 등 각지에서 돌아온 인사들과 회합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전라도에 갔던 유준근은 곽종석과 함께 유림의 대표적 인물로 거론되었던 전우(田愚)가 유림대표의 파리청원서 제출에 끝까지 반대하였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이들은 김창숙이 지방을 돌 때 이미 일본 경찰의 집요한 추적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여비와 청원서를 직접 휴대하는 것은 불안하다 하여 중국상점인 동순태(同順泰)의 서울 본점 점원에게 부탁하여 비밀리에 봉천 분점(奉天分店)으로 보냈다.
  곽종석으로 대표되는 이들 영남유림과 기호유림의 연합은 청원서를 이미 봉천으로 보낸 뒤에 이루어졌다. 유진태와 이득년이 김창숙을 찾아와 충청 사람 임석후가 기호유림의 영수인 김복한 이하 17명의 연명으로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문서를 가지고 상경하여 수일 내로 출발할 것임을 알렸다. 그날 저녁 이득년의 집에서 유진태, 성태영, 임석후, 김창숙이 회합하여 같은 일을 하면서 유림이 각각 따로 활동을 벌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에 동의하여 두 가지 청원서 중에 곽종석이 작성한 것을 보내기로 하고, 서명자 명단은 양측의 것을 합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양측의 명단은 합해서 137명에 이르게 되었으며, 임석후가 국내에 남아 국내외의 연락을 담당할 것을 자처하여 파리에 파견할 대표로는 김창숙이 단독으로 3월 23일 출발하게 되었다.
  그는 펑톈[奉天]에 들러 여비와 청원서를 찾은 후 3월 27일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상하이에서 이시영, 조성환, 신채호, 조완구, 신규식 등을 만나 김규식이 민족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이미 출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매일 이동녕 등 여러 인사를 만나 거사의 진행을 의논하였다. 그 결과 김창숙은 자신이 직접 파리까지 가기보다는 곽종석의 청원서를 영문으로 번역한 다음 인쇄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우편으로 발송하는 한편 각국 외교관 및 중국의 정계요인과 해외동포가 거주하고 있는 각지에 배포하고, 자신은 유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중국에 대한 외교를 담당하고자 중국에 남기로 하였다.
  이 청원서에 서명한 유림들 중에는 1910년 이전까지 의병으로 활동하였던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국내에서 활동하던 많은 의병들이 1910년을 전후하여 대거 해외로 근거지를 옮겼으나, 이후에도 국내에 남았다가 유림의 독립청원서에 참여한 인물로는 김복한, 안병찬, 김덕진, 유준근 등이 있으며, 이래수는 독립의군부의 총령으로 활동한 바 있다. 청원서를 작성한 곽종석은 20대 초반에 학자로서 명성을 크게 떨치며 학문에 심취하였으나 관직에는 스스로 나아가지 않았다. 1896년 거창의 다전으로 옮겨 살면서 외국 공사관에 열강의 각축과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는 글을 발송하였을 뿐 의병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며, 1908년 간도로 망명한 이승희가 망명을 제의하였을 때에도 이를 거절하였다.
  청원서에 서명한 유림들의 이전 활동으로 볼 때 137명에 달하는 유림은 척사의 기준이나, 독립운동에 대한 인식 등이 서로 일치한다고 할 수 없다. 이들은 영남유림과 기호유림의 연합체였지만 대체로 김복한을 비롯한 기호유림이 의병으로서 활동해온 인사들이었고 영남유림은 그 영수인 곽종석부터도 의병활동을 거절해 왔다는 점에서 독립운동의 방략이 달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오랫동안 학파와 당론을 달리해온 인물들이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독립운동의 방략과 참여방식에서 차이가 났던 양 계열이 이제 서로 연합하여 청원서에 같이 서명할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 질문1 파리청원서 작성을 처음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인물은 누구인가요?
  • 질문2 학맥과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방식이 달랐던 기호유림과 영남유림이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청원서에 함께 서명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요?
  • 질문3 파리청원서 작성과 서명을 계기로 알 수 있는 유학자들의 변화된 모습을 써보시오.

읽기자료 3

  곽종석 등의 파리청원서는 원본과 발송본의 두 가지가 남아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의 네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첫째, 일본의 한국 침략 사실을 폭로하고, 한국의 정당한 독립의 권리를 주장하는 부분이다. 청원서는 처음을 천지만물의 이치로 시작하여, 강국이 약소국을 강권으로 합병하고 그 위세를 함부로 떨치는 때를 만났으니 피를 뿌리며 마음을 말하고, 고개를 들어 부르짖는 것은 뼈저리게 박절하여 용납되지 않는 자기의 뜻을 밝히고자 함이라는 것이다. 이어 한국은 천하 만방의 하나로 삼천리 강토에 2천만의 인구, 4천여 년의 역사를 유지하고 보전하여 반도문명국임을 잃어본 적이 없는데, 불행히도 요즘에 와서 안으로 적신이 서로 싸우고 강한 이웃나라가 밖에서 틈을 엿보아 무력을 믿고 꾀가 간악한 자를 끼고 임금을 협박하고 백성을 쇠사슬로 옭아 강제로 조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덧붙여 일본이 1876년의 강화도조약, 1895년의 시모노세키 조약, 1904년 러일전쟁을 통하여 전세계에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 하였으나 끝내 한국을 합병함에 이르러서는 한국민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라 하여 만국의 공의를 모면하고자 하였으니 한국에 대하여는 공의를 해친 것이요, 만국에 대해서는 신의를 잃은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둘째 부분은 3·1운동에서 나타난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알리고, 당시의 국제정세와 파리강화회의에 기대를 걸고 있음을 나타내는 부분이다. 한국인들이 맨손과 맨주먹으로 분기하여도 독립이 어려운 일임은 잘 알고 있으나 지난 10년 동안 독립의 희망을 가지고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 왔는데, 드디어 파리강화회의의 개회 소식과 폴란드 등의 독립 소식을 듣고 한국에도 기회가 올 것을 기다리고 있다가 이번에 국상을 당하자 일본의 살육에도 주저하지 않고 크게 분기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처럼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 이후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부분은 다른 선언서에 비하여 소략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 이후 파리강화회의의 개최와 폴란드 등의 독립을 들어 한국도 세계만방의 하나인데 그 독립은 당연한 것이라고 기대를 하였다는 서술은 아직 유림이 파리강화회의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셋째 부분은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부분이다. 하늘 이 만물을 낼 때 반드시 각자 자유로 활동할 능력을 주었으니, 하물며 한국이 약소국이라 하더라도 3천리의 강토와 2천만의 인구가 4천여 년의 역사를 지켜온 만큼 독립을 감당할 수 없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각국의 풍속이 같지 않은데, 일본은 한국이 독립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하며 자기 방식대로 한국을 통치하려 함은 옳지 않으며, 지금 일본의 위협에 한국이 일시 압박을 당하고는 있으나 일본의 통치가 한국에 적용될 수 없는 이상 천만년을 갈 지라도 한국 민족임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앞의 내용과 중복되기는 하지만, 그것을 분명하게 정리하여 재구성한 것으로서, 내용면으로 보자면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는 청원서의 요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 부분은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 문제가 거론되기를 바란다고 하며 청원서를 마무리짓고 있다. 즉 나라 없이 사는 것보다는 나라가 있고 죽음만 못하다는 결연한 독립의지를 표명하면서 한국의 사정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지 우려하고 있다.
  이 청원서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보면 구체적인 사실보다는 공의(公義)나 신의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유림이 가지게 되는 당연한 한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유림들도 이 시기에는 종전의 입장에서 벗어나는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즉 청원서를 통해서 이들은 서양은 곧 오랑캐라고 하는 척사사상에서 탈피하여 파리강화회의를 주도하는 각국을 ‘대명대화(大明大化)’ ‘대인무(大仁武)’에 비유하여 높이 평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파리강화회의가 한국의 독립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오랑캐라 하였던 서양 각국을 정당한 교섭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각국 대표들에게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야말로 유림들에게는 일대 전환이라 할 수 있었다.

  • 질문1 유림들은 파리강화회의에 어떤 기대를 가지고 청원서를 보내려고 했을까요?
  • 질문2 파리청원서의 주요 내용을 설명해 보시오.
  • 질문3 파리청원서에 나타난 유학자들의 서양에 대한 인식이 이전과는 어떻게 달라졌는지 말해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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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다음은 서울 장충단 공원에 있는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사진이다.

  • 질문1 유림들이 일제의 식민지배에 맞서 벌였던 민족운동을 조사해 봅시다.
  • 질문2 유림들이 파리강화회의에 청원서를 보낸 사건이 독립운동사에서 가지는 의의를 이야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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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당시 세계정세로 보아 파리청원서를 국제회의에 제출하여 열강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호소하는 것이 적절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토론해봅시다.
 2)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한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호소문을 작성하여 발표해봅시다.
모둠활동 2
특정 단체에서 공익을 위하여 사람들의 서명을 받는 예를 찾아보고 자신은 서명할 것인지, 아닌지를 이유를 들어서 말해봅시다.
모둠활동 3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한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호소문을 작성하여 발표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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