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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오하요주 모씨의 통신을 거한 즉 거월에 우리 본국 전라북도 군산으로부터 미주 동방 조지아주에 도착한 백인 린촌씨의 통신에 일렀으되 대한 독립선언 이후에 군산 영명학교에서는 학생 전체와 교사 전체가 다 나가 독립시위운동을 떨치다가 왜적 병정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있더니 몇 날 후에 어린아이들과 학생 얼마는 석방되고 그 중 두령으로 교사와 학생 합 12명은 6개월 징역에 처하였는데 교사중 한 분은 박연세씨요……
위의 글은 1919년 7월 21일 미국 교포신문인『신한민보』에 실린 기사이다. “군산 영명학교 전체가 활동”이라는 제목에 “두령자 12인이 체포되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군산 지역의 만세시위는 구암교회의 출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군산 구암교회는 미국 남장로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에 의해 구암동산에 세워졌다.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구암교회와 더불어 낙후된 이 지역에 당시로는 최첨단의 서양 의료시스템을 도입한 군산야소(예수)병원도 세웠다. 이 병원에서 페터슨 선교사가 의사로서 직접 진료를 하였는데 호남 지역에서 최고의 의료기관이 되었고 일본인들도 와서 치료를 받았다.
선교사들은 당시 낙후된 군산 지역의 교육을 위하여 어린이 교육을 위한 안락소학교(현재의 구암초등학교)와 고등교육기관으로 영명학교(현재의 군산 제일중고등학교), 멜본딘 여학교(현재의 영광여자중고등학교)를 세웠다. 당시 영명학교는 현재의 중고등학교 과정뿐만 아니라 대학교육 과정을 개설하였으며 이 과정을 졸업한 학생들을 다시 교사로 세워 지역 교육의 일꾼을 배출하였다.
역사적 배경
현재 주소 | 전라북도 군산시 구암동 3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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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태 | 멸실, 본래 ‘ㄱ’자형 건물이었으나, 1959년 현재의 건물이 신축되었다. 이곳에 항일정신을 기념하고자 3․1운동 기념관을 설치하고 관련사진 및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
조선이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지 23년이 지난 1899년에 군산이 개항되었다. 개항 후 군산은 일본인이 득세하는 도시가 되었다. 1901년 군산거류민회가 창설되면서 일본인이 군산 전체 인구의 반을 차지하다가, 농사조합이 영사관내에 생겨서 토지매입이 가능하게 되자 일본 본토 토지 매입비의 1/10~1/30에 불과한 조선의 토지를 일본인들이 대거 매입하면서 일본인 인구도 대폭 늘었다. 1903년에는 미야사끼 농장, 구마모또 농장, 시마다니 농장 등 대농장이 등장한 이래로, 1907년에 이르면 군산에서 10개의 농장, 1920년에는 58개소 농장이 생기게 되었다.
전북지방이 일본인 농장의 밀집지대가 되었는데, 군산은 그 중심지가 되었다. 이런 가운데 일반 농민들은 점차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전국적으로 소작이 40%인데 전북은 68%이었고, 전국적으로 자작이 19%인데 비해 전북은 5.8%에 불과하였다. 전북에서도 군산과 옥구지방은 일본인의 농지 강점이 가장 심하였다. 따라서 영세 소작인인 농민의 생활은 점차 어려워져 갔다.
1908년 10월에 전주-군산 사이의 도로가 개통되었고, 이어 철도가 부설되면서 군산항은 전국 제1의 쌀 수출항이 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인들의 유입도 늘어 1919년의 군산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한국인보다 228명이나 더 많았다. 평지의 요지에는 대부분 일본인들이 거주하였고, 조선인은 산비탈 같은 열악한 곳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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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군산에서의 만세시위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이갑성(李甲成)으로부터 200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고, 이곳에서 활동하던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 김병수(金炳洙)가 서울의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전해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영명학교 교사인 박연세(朴淵世)는 만세 시위가 차질 없이 진행되도록 치밀하게 준비하였다. 2월 26일 자기 집에서 김병수를 비롯하여 이두열(李斗烈), 김수영(金洙榮), 고석주(高錫柱), 김인묵(金寅默), 이동욱(李東旭), 김윤실(金允實) 등과 만나 독립선언서를 받아보고,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학생인 김영후와 송기옥에게 거사에 필요한 태극기 제작을 종용하고 멜본딘 여학교 교사인 김영배를 만나 여학생들에게도 태극기를 만들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따라 멜본딘 여학교에서는 은밀히 태극기를 그렸고 영명학교 지하실에서는 독립선언문을 등사하였다. 그리고 만일에 대비하기 위해 몇몇 학생들은 4층 다락방에서 비밀리에 독립선언문을 등사했다. 멜본딘 여학교 학생들은 태극기를 만들어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가슴과 치마 속에 넣어 비밀 장소로 옮겼다.
거사 준비가 끝나갈 무렵 박연세는 서울의 독립만세 시위의 시간을 사전에 김병수로부터 전해 들었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거사를 할 것인가를 놓고 고심하였다. 거사의 시간과 장소를 놓고 교사들과 예수병원 직원들은 영명학교 지하실에 모여 앉았다. 교사들이 서울과 때를 같이 하여 3월 1일에 시위를 하자는 의견을 제시했으나, 논의 끝에 군산의 장날인 3월 6일로 결정하였다. 장날에는 많은 군중이 쉽게 모였기 때문에 만세 시위에 유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거사 전날인 3월 5일에 뜻밖의 사건이 일어났다. 거사의 낌새를 눈치 챈 일본 경찰 10여 명이 영명학교와 멜본딘 여학교를 급습하여 학교 건물 안을 샅샅이 수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때 등사기와 태극기 및 독립만세 운동과 관련된 여러 문서들이 발각되었고 주모자 격으로 교사 박연세와 이두열이 체포되었다. 나머지 교사들과 예수병원 직원들이 일본 경찰 앞에서 “우리도 함께 잡아가라”고 외쳤으나 일본 경찰은 두 교사만 끌고 갔다. 학생들이 상상 밖으로 완강하자 일본 경찰은 학생들을 향해 권총을 뽑아들고 하늘을 향해 몇 차례 공포탄을 쏘아 위협했지만 그들은 끝까지 대항하였다.
두 교사가 강제 연행되는 모습을 보고 있던 학생들과 예수병원 직원들은 그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즈음, 누군가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교사들과 학생 병원직원들은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가세하였다. 이어 김윤실 교사가 나머지 교사와 학생들을 소집하여 긴급회의를 한 결과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기 전에 하루 앞당겨 이날 5일에 만세 시위를 벌이자고 결의하였다.
이후 예수병원 직원과 영명학교 교사 20여 명, 학생 백 여 명, 멜본딘 여학생 그리고 주민들과 함께 140여 명 가량이 영명학교 운동장에 모였다. 교사들이 선창하자 나머지 사람들 모두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이 지금의 중앙로 쪽으로 진격함에 따라 사람들이 계속 모여들어 순식간에 5백여 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군산경찰서 앞에 이르러 박연세, 이두열 두 교사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군중들의 수가 증가하자 당황한 일본 경찰은 익산 헌병대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급파된 익산 헌병대와 경찰들은 군중들을 향하여 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3~4명이 총에 맞아 쓰러지자 무방비 상태인 군중들은 뒤에서부터 흐트러지기 시작하였다. 이때 현장에서 검거되거나 체포된 사람이 90여명으로 모두 군산경찰서 유치장에 투옥되었다.
헌병대와 일본 경찰은 구암동의 여명학교와 멜본딘 여학교를 수색하여 독립선언문 2천장과 여러 문서를 압수하고 학교의 기물을 부쉈다. 이 사건으로 영명학교와 멜본딘 여학교의 수업은 일시 중단되었으며, 두 학교의 교사들은 모두 연행되어 고충을 당하기도 하였다. 구암예수병원 직원들도 전원 구속되어 병원 운영이 마비되었으며 패터슨 원장은 1924년 경찰로부터 압력을 받고 구암예수병원을 떠났다.
- 질문1 만세시위 운동의 모의 과정에서 처음에 거사일을 장날로 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군산의 만세시위 운동이 예정보다 앞당겨진 까닭을 설명해 보시오.
읽기자료 2
호남 지방의 만세 시위 전파 과정은 주로 기독교와 천도교 계통으로 전송되었고, 군산은 당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인 김병수가 군산 영명학교 교사인 박연세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군산에서는 인근지역인 옥구에서 3월 4일에 일어났던 만세시위에 이어 3월 5일에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옥구에서의 만세시위는 소규모였기 때문에 본격적인 만세시위는 군산에서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특이할 만한 사실은 주로 구암교회 신자와 미션스쿨이었던 영명학교, 멜본딘 여학교, 구암 예수병원 등 학생 및 직원들을 주축으로 하여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군산경찰서는 구암 지역을 3․1운동 이전부터 주요 감시대상으로 주목하고 있었다. 학교교사들과 직원, 병원 사무원들을 연행하여 3~4일씩 사상과 신원조사를 한 후 내보내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일이 연례행사처럼 교사들을 괴롭혔다. 이러한 일제의 간섭과 탄압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어쩌면 1919년 독립만세시위는 예견된 사건이었다.
군산의 만세시위 전개 과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당시의 교사 박연세와 학생 김병수를 빼놓을 수 없다. 영명학교 보통과, 고등과, 특별과정을 마친 김병수는 영명학교 교사인 박연세의 추천을 받아 서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김병수가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된 것은 세브란스병원 제약실에 근무하는 이갑성(李甲成)을 만나면서부터인데 그는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갑성은 김병수가 다른 학생들보다 민족의식이 강하다는 것을 알고 김병수에게 군산 지방 연락책임자로 독립선언서 전달 임무를 맡기자 김병수는 이를 흔쾌히 수락하였다.
김병수는 이갑성으로부터 지시 사항을 전달받고 2월 19일 군산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군산에 도착한 김병수는 2월 20일 영명학교 은사인 박연세를 만나 군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다짐하고 자세한 거사일을 같이 계획하였다. 김병수는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이 기독교와 천도교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과 이갑성으로부터 받은 지시 사항을 영명학교 교사인 박연세, 이수열, 고석주, 김수영, 송헌옥 등에게 전달하였다. 이에 박연세는 조옥초 학생에게 군산의 독립만세운동 준비상황을 알려주고 서울에 급히 올라가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는 대표들과 접촉하고 서울의 독립운동 상황을 파악해 빠른 시일 내에 연락을 취하도록 지시하였다. 박연세의 지시를 받은 조옥초는 서울의 이갑성과 기독교계 독립운동 대표자들에게 군산의 건사준비 상황을 전해주었다.
- 질문1 군산의 만세시위 운동에서 구암교회 신자와 영명학교 및 멜본딘 여학교, 구암 예수병원 등의 학생 및 직원들이 주축을 이루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 질문2 군산의 만세시위 운동이 일어나는 데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을 선정하고, 그 두 인물이 선정된 까닭을 말해보시오.
읽기자료 3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은 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났고, 남부 지방에서는 3월 4일 군산 인근의 옥구 지역에 이어 3월 5일 군산의 영명학교를 중심으로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이는 호남 지방은 물론 한강 이남에서도 최초로 일어난 봉기였다. 광주와 전주는 이보다 늦은 각각 11일과 12일이었다. 이리하여 3월 5일 군산 시위는 만세시위가 전북 전지역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군산 시위 이후 임실(3월 12일), 전주(3월 13일), 청웅(3월 15일), 정읍(3월 16일), 김제(3월 21일), 신태인(3월 21일), 삼례(3월 23일), 오수(3월 23일), 남원(3월 23일), 산서(3월 23일), 진안(3월 25일), 장수(3월 26일), 무주(4월 1일), 옥구(4월 1일) 등지에서 지속적으로 시위가 일어났으며, 4월에 들어서면서 그 열기는 더욱 고조되어 갔다. 익산의 4월 4일 만세시위는 영명학교의 교사 문용기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것이었고, 경경의 봉기는 영명학교 학생 강금옥으로부터 권유를 받아 역시 명명학교 출신이인 엄창섭이 중심이 되어 3월 10일에 일어났다.
군산의 만세시위는 3월에서 5월까지 군산 시내에서 총 21회가 발생되었다. 여기에 25,800명이 참가하여 피살자 21명, 부상자 37명, 투옥자 145명이 나왔다. 주모자였던 이두열은 징역 3년, 김수영과 박연세는 징역 2년 6개월 고석주, 김성은, 유희성은 1년 6개월에 처해졌고 영명학교 학생 30여명이 징역 6개월씩을 선고받아 복역하였다. 인근의 옥구에서는 총 7회의 만세시위가 발생했는데, 5,700명이 참가하여 사상자 32명, 부상자 35명, 투옥자 50명이 나왔다.
만세시위의 여파는 컸다. 100여 명의 교사와 학생이 체포된 영명학교는 1919년에 학교가 문을 닫은 상황까지 이르렀다. 특히 지금의 대학과정인 특별과는 일제에 의해 폐지되었고, 지금의 고등학교 과정인 고등과는 1927년 사실상 폐지가 되었다. 그러나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교사와 학생들은 이후 다양한 형태로 항일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 질문1 호남에서 만세시위가 가장 이른 시기에 일어난 곳은 어디인가요?
- 질문2 만세시위 후 군산 사람들이 입은 피해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정리해 봅시다.

시각자료
시각자료 1

다음 사진은 군산 구암교회의 옛모습이다.
- 질문1 처음 교회가 들어섰을 때 주변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신자수가 늘었다. 구암교회의 신자수가 점점 늘어났던 이유는 무엇인지 추론해 봅시다.
시각자료 2

다음 사진은 1899년 12월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가 설립한 영명학교이다.
- 질문1 이 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만세 시위를 주도했던 배경을 이야기 해봅시다.
시각자료 3

다음은 일제하 군산 지역의 모습이다.
- 질문1 사진 속의 사람들은 무슨 목적으로 모인 것일까요?
- 질문2 경찰의 경계가 삼엄했는데도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둠활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