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립초기 대한임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방략은 크게 군사활동과 외교활동으로 나누어진다.
우선 군사활동은 임시정부의 초대 내무총장이던 안창호가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천명한 것에서도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수립 직후부터 구체적 계획이 수립되었다.
임시정부는 독립전쟁을 준비하면서 크게 네 가지 방면에서 정책을 밀고 나갔다. 첫째는 제도와 법령을 마련하고, 둘째로 국내지역에 군사주비단을 조직하여 독립전쟁을 위한 군사 기초조직을 결성하며, 셋째는 육군무관학교를 세워 군사간부를 양성하고, 끝으로 직할부대를 조직하거나 기존 독립군을 산하 부대로 직할시키는 방안이었다.
임시정부는 수립초기 주로 시베리아와 만주일대의 독립군 단체에 의지하고 있었던 군사활동을 주도하기 위해 1920년 6월 남만주에서 직속기관인 대한광복군총영을 결성하고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약하던 군사조직을 임시정부 아래로 편입시켜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독립전쟁을 진행하고자 하였다.
대한광복군총영은 국내진공작전을 펴기도 하고, 일제 기관들을 파괴하거나 일본인과 친일분자를 응징하면서 독립자금의 모집과 병력 확보에 힘썼다. 또한 미국의원단이 국내를 돌아볼 때 곳곳에서 무장활동을 펼쳐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리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제의 침략상과 야만성을 국제사회에 폭로하고, 한국독립에 대한 열강의 지원과 협조, 임정의 국제적 승인 획득 등을 목표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수립 당시부터 해방 때까지, 국제정세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면서 다양한 형태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 직후 임시정부가 수립될 당시 프랑스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김규식을 외무총장으로 선임하여, 임시정부의 공식 대표로 활동하게 하였다. 김규식은 파리위원부를 설치하고 「독립공고서」를 강화회의에 제출, 각국 대표단에게 한국 문제를 상정해 달라고 주문하였다.
김규식의 노력은 열강들의 외면으로 말미암아 목적했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일본의 집요한 방해공작을 뚫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1920년 7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대회 만국사회당대회에 파리위원부 부위원장 이관용과 조소앙이 대표로 참가하여, 한국독립 승인 결의안을 통과시키는데 훌륭한 밑거름이 되었다.
수립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미국․소련․중국 등 열강들에 대한 외교 또한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미국에 대해서는 1919년 7월 서재필을 외교전권특사로 임명하였고, 이승만이 구미위원부를 설치하여 대미외교를 담당하였다. 임시정부 수립 당시 미국에 대한 외교는 워싱턴회의가 가장 대표적이다.
러시아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특사를 파견, 자금지원을 받은 일이 있었다. 임시정부는 1920년 1월 한형권․여운형․안공근 3인을 러시아 파견특사로 선정하였다. 결과적으로 국무총리 이동휘가 자신의 측근인 한형권만을 모스크바로 보내 보내는 바람에 상당한 갈등을 빚게 되었지만, 이는 임시정부가 러시아와 가진 첫 번째 공식적 외교활동이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는 레닌으로부터 2백만 루블의 지원을 약속받았고, 이 중 60만 루블을 가져왔다.
중국과의 관계는 쑨원〔孫文〕의 광동정부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이 독립운동을 펼쳐나가는 현장이라는 점에서 임시정부는 수립 직후에 중국과의 외교적 교섭이나 교류 협력을 중요한 정책의 하나로 설정했다. 1921년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 신규식이 정부특사 자격으로 광둥에서 쑨원과 회담하였다. 그 결과 임시정부는 쑨원의 광동 호법정부로부터 사실상의 상호 승인을 얻어내었으며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경제적 지원과 근거지 제공에 대한 협조 또한 약속받았다.
-
질문1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직후 독립운동 방략으로 추진하였던 두 가지 방향과 각각의 구체적인 노력을 써 봅시다.
-
질문2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를 결집시켜 독립전쟁을 진행시키고자 조직한 단체는 무엇인지 써 봅시다.
중국 상하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내의 국민들과 연계를 맺기 위해 다각적인 방안을 강구하였다. 1919년 7월 16일부터 국내로 특파원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였는데 특파원들의 임무는 ‘연통제 조직, 선전 및 시위운동, 내․외지의 종교 단체 및 유력가 연락’ 등 세 가지였다. 특파원의 파견과 활동은 극비리에 추진되었다. 국내에 파견된 특파원은 각 지역의 행정책임자를 물색하여 임시정부에 보고하고 임시정부에서는 특파원들의 추천과 보고에 의해 각 지역의 행정책임자를 임명하고, 그들에게 임명장을 전달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내와의 연계 및 실정을 파악하기 위해 1920년 3월 지방선전부를 설립하였다. 지방선전부는 일종의 정보요원인 선전대원들을 국내로 파견, 이들로 하여금 ‘국민의 동향’ ‘독립운동 상황’ ‘총독부의 정책 및 관리의 행동’ 등을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국내 유력인사를 상하이로 탈출시키는 일도 추진하였다. 대표적으로 한말 고위관직을 지낸 김가진을 탈출시켰고, 국내 대동단과 연계하여 의친왕을 상하이로 탈출시키고자 도모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 중 국내와의 연락은 연통제와 교통국이 담당하였다. 연통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민들과의 연계를 위해 국내에 설치한 지방행정제도였다. 연통부 조직은 상하이에 있는 임시정부와 국내의 도―군―면으로 이어지는 체제로 각 도(감독), 군(총감), 면(사감) 단위로 책임자를 임명하여 임시정부의 국내업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이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12월 1일 기존의 「임시연통제」를 개정하여 「임시지방연통제」를 공포하였다. 「임시지방연통제」는 전국을 13도․12부․215군으로 나누어 국내 지방단위와 행정조직을 통일적으로 체계화하고, 전국 각 도에 독판 1인을 두고, 그 아래에 참사 ․ 장서 ․ 경감 ․ 기수 ․ 통역 등의 인원을 두도록 하였다 또한 각 단위의 행정조직에 자문위원인 참의와 협의원을 두었다. 참의와 협의원은 그 지방에서 학식과 명망이 있는 인사들을 임명하는 것으로, 국내 각지의 지방 유지들을 임시정부의 조직에 참여시키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연통부의 설치는 특파원의 파견과 그들의 활동여하에 따라 크게 좌우되었으며 임시정부와의 통신 및 교통, 지리적 조건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평안도와 함경도의 경우처럼 임시정부와의 교통 및 통신이 유리한 지역에서는 연통부의 설치가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연통 각부가 수행해야 할 업무는 다방면에 걸쳐 있었다. 임시정부의 각종 법령과 공문을 국민들에게 전달하고, 3․1운동으로 폭발한 독립시위운동이 계속되도록 하며, 독립전쟁에 대비 군인과 군속의 모집을 비롯하여 군수품을 징발하고 수송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또한 구국금의 수합 및 납부, 통신 연락 등에 관한 업무도 부여되었다. 임시정부는 연통 각부가 국내의 실상을 조사하여 매 5일마다 정기적으로 보고하도록 하였다.
한편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부는 나라 안팎의 독립운동 세력과 일반 행정조직을 연결시키고자 임시지방교통사무국을 설치하였다. 이는 사람과 자금, 정보를 연결하는 비밀 연락 기구였다. 관할지역은 앞서 만들어진 연통제를 기준으로 삼았다. 특히 만주의 안둥〔安東, 현 단둥(丹東)〕에서 아일랜드계 영국인 쇼우(George. L. Show)가 경영하는 이륭양행을 국내와 연결하는 거점이자 지사로 삼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나라 안팎 주요 거점에 교통국을 설치하고, 통신원을 배치하여 임시정부에서 특파원들이 파견될 때 그들을 연결시키고,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 가운데서도 국내 동포에게 문서를 전달하고, 국내에서 모금된 자금을 상하이로 보내는 활동이 가장 중요한 역할이었다. 부산 백산상회, 대구에서 곡물 가게를 연 안상길, 만주 안동현의 김재봉, 서울의 이준태 등이 임시정부와 자금과 정보의 연결을 담당하는 주요 거점들이었다.
임시정부는 비록 먼 거리에 떨어져 있어 행정력을 장악하는 데 한계가 있었지만 연통제와 교통국을 통해 직접 행정력을 펼쳐나간다는 계획을 밀고 나갔다. 또한 이와 아울러 국민들에게 독립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뜻을 갖게 하기 위한 선전 활동도 거세게 펼쳐 나갔다. 그것이야 말로 임시정부의 위상도 굳히고, 독립운동을 이끌어나가는 지도력을 확립하는 방편이었다.
-
질문1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 중 국내와의 연결을 담당했던 부서와 그 활동에 대해 써 봅시다.
-
질문2
교통부 조직망 중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하는 거점이 되었던 영국인 쇼우(George. L. Show)가 안동에서 경영하던 상점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서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통부 설치를 주도하였다. 하려는 움직임은 1919년 10월 상순 상하이에서 파견된 이종욱이 연건동 202번지 자신의 숙소에서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의 송세호, 대동단의 나창헌, 애국단의 신현구, 연동교회 조사 전필순, 세브란스의전 학생 윤종석 등과 수차 회합을 가지면서 생겨났다. 이 자리에서 이종욱은 상하이 임시정부와 국내 비밀결사, 중앙과 지방간의 원활한 연락과 의사소통을 위해 연통제를 시행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여 참석자들의 동의를 얻었다. 그리고 우선 서울에 연통부를 설치하기로 하고, 전필순에게 회계사무를, 윤종석에게 각 지방과의 연락 임무를 맡겼다.
이종욱으로부터 상해 임시정부와 통신 및 문서 수수를 담당할 연락장소를 설치할 것을 의뢰받은 윤창석은 서대문 밖 화천정 5번지 동화약방 주인 민강에게 부탁해 그의 집을 연락거점으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민강은 3·1운동 당시 한성임시정부 수립운동에 관여하는 한편, 비밀결사 대동단에 가입해 활동하기도 하였다.
동화약방은 1897년 9월 25일 노천(老川) 민병호가 개발한 궁중비방에 양약의 장점을 취한 혼합처방을 바탕으로 장남인 민강이 설립하였다. 1908년 위생국으로부터 정식으로 허가를 받아 의약품을 생산하기 시작한 동화약방은, 일제강점기에도 활명수, 인소환, 백응고 등과 같은 주력 상품을 중심으로 90여 종의 의약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또한 동화백분, 옥용수, 위생유 등과 같은 화장품을 생산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사세가 확장되어 가면서 1910년대 동화약방의 특약점 및 출장소는 북간도를 비롯, 전국적인 규모를 갖추고 소읍이하의 지역에서까지 활발한 영업활동을 펼치게 되었다. 특히 동화약방의 특약점 및 출장소 주인들은 각 지역의 신문지국장을 겸직하는 등 지역의 유지들이었다. 이에 출장소나 지점은 단순히 약을 판매하는 곳이 아닌, 당시의 온갖 지식과 문화용품을 조달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들 판매소 중 1919년 2월 종로 2정목 5번지에 설치된 분매소의 경우 3·1운동을 위한 연락장소로 활용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설치한 곳으로 이는 동화약방이 당시 독립운동과 일정 이상 관련을 맺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다. 1919년 말 부터는 민강 사장이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피검·구금되어 1년 6개월 동안 복역한 후, 상하이임시정부로 망명하면서 사세가 한동안 위축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직접 접촉한 사례는 “1919년 10월 말 상하이 방면에서 독립운동의 사명을 띠고 온 사람과 동화약방에서 접촉한” 기록에서 확인된다.
-
질문1
동화약방 창업자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활동에 깊게 관여하고 있었던 인물과 그의 활동에 대해 써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