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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의 섬으로 알려진 제주도에는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큼 유명한 인물들이 유배를 왔다. 1907년 민족교육의 산실로 알려진 오산학교를 세운 이승훈도 그 가운데에 포함된다. 더구나 제주도에 온 마지막 유배자로 기록되고 있다.
제주도에 유배 온 사람들을 꼽아보아도 기묘사화 때 조광조에 이에 2인자였던 김정, 효종 때 대명의리론으로 유명한 우암 송시열, 추사체로 유명한 김정희, 온건개화파로 영선사를 이끌고 청나라에 다녀왔던 김윤식, 강화도 조약을 반대하는 상소와 의병으로 유명한 최익현, 급진개화파로 철종의 부마였던 박영효 등이 꼽을 수 있다.
이승훈이 제주도에 유배를 오게 된 것은 이른바 안악사건 또는 안명근 사건에 연루되어 1911년 4월 말이나 5월 초에 제주도에 도착하였는데, 그해 10월 105인 사건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서울로 끌려가기까지 약 4개월 동안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이승훈은 제주도에서 어떻게 생활했으며, 그가 연루된 안명근 사건, 또는 안악사건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가 제주도를 떠나게 된 105인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역사적 배경
현재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9길 23(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247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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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태 | 변형됨. 이승훈의 제주 유배지는 독립유공자인 김시황의 집에 해당한다. 최근 남강재단과 제주도사연구회 공동명의로 남강 이승훈 유배지 현판을 걸어놓았다. 당시는 초가집이었으나 현대식으로 개량되었다. 『중외일보』 1930년 5월 13일자와 『남강 이승훈과 민족운동』 (1988), 『제주항일인사실기』 (2005), 『북제주군지』 하권(2006) 등에 이승훈 제주 유배 관련 내용이 나와 있다. |
이승훈이 머물렀던 집의 주인이었던 김희주(金熙胄·1854~1937)는 사헌부 감찰과 강원도 평창군수‧제주군수‧정의군수를 지내며 개화사상가들하고도 어울렸던 인연으로 제주도에 유배 온 박영효와 이승훈에게 거처를 제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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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이승훈은 1864년 평북 정주의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부모를 일찍 여의어서 16세 때에 생활이 어려워 유기 상점 점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유기 행상과 유기 공장을 경영하여 모은 재산을 청일전쟁 때 모두 잃었으나, 다시 공장을 일으키고 도매상을 시작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다. 그러나 다시 러일전쟁 때 많은 재산을 잃었다. 그 후 남은 재산으로 오산면 용동으로 이사하여 돈으로 산 참봉노릇을 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칠 목적으로 서당을 세웠다.
그러던 중 1907년에 평양 모란봉의 쾌재정에서 안창호의 교육 진흥론 강연을 듣고 감동을 받았다. 그는 자신만을 위하여 살던 삶에서 벗어나 겨레를 위한 삶을 살기로 작정하였다. 그래서 그날로 당장 세 가지를 실천하였다. 첫째, 예수 믿기로 작정하였다. 둘째,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세워 민족의 지도자들을 기르기로 하였다. 그래서 자신이 살던 용동마을에 있던 서당을 강명의숙으로 바꾸어 초등교육을 실시하다가 이것도 부족하다고 여겨 다시 중등학교인 오산학교로 고쳐 세우고 학생들에게 새로운 학문과 애국 사상을 일깨웠다. 아울러 안창호가 주동에 된 비밀조직인 신민회에도 가입하여 태극서관과 도자기회사를 운영하는 책임을 맡았다. 셋째가 상투를 자르고 술을 끊었다. 이승훈은 오산학교 개교식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였다.
“지금 나라가 기울어져 가는데 우리가 그저 앉아 있을 수는 없다. 이 아름다운 강산, 선인들이 지켜온 강토를 원수인 일본인들에게 내맡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총을 드는 사람, 칼을 드는 사람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백성들이 깨어나는 일이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를 모르고 있으니 그들을 깨우치는 것이 제일 급한 일이다. 우리는 우리를 누르는 자를 나무라기만 해서는 안 된다. 내가 못생겼으니 남의 업신여김을 받는 것이 아니냐. …… 내가 오늘 이 학교를 세우는 것도 후손을 가르쳐 만 분의 일이라도 나라에 도움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승훈은 여준, 조만식, 유현모, 함석헌 등 뛰어난 선생들을 모셔와 투철한 민족교육을 시켜 오산학교 출신에는 친일파가 없다는 말이 들릴 정도였다.
읽기자료 2
대한제국을 침략하는데 앞장 선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역에서 쏴 죽인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인 안명근(1879~1927)은 한일합병 이후 간도 지역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는 한편 이완용, 송병준 처단 등을 처단하는 의열 투쟁과 일본군에 대한 무장투쟁 등을 다양하게 구상한 다음 김구를 찾아가 함께 하기를 요청하는 등 동지를 규합하여 무장, 의열 투쟁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준비 단계로 자금 모집에 나서 안악, 신천의 부호를 찾아 1만원 가량의 자금을 수합하였다. 그런데 1910년 11월 황해도 신천의 민병찬과 민영설 등에게 군자금을 요구하다가 이들이 일제 헌병에 밀고하여 안명근은 1910년 12월 사리원에서 평양으로 가던 중 배경진·한순직·박만준 등과 함께 검거되었다.
일제는 이 사건을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 암살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한 것으로 날조하여 관련 인사 160여 명을 일제히 검거하였다. 이 가운데 몇몇 명은 안악에 있는 양산학교와 면학회에서 애국적인 문화운동에 힘썼다. 일제는 이들에게 모진 고문을 하여 사건을 확대하고 날조시켜 안명근 이하 16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1911년 7월 22일 공판에서 일제는 안명근은 종신형, 김구와 김홍량·배경진·원행섭·이승길·박만준 등은 징역 15년, 도인권은 징역 10년, 김용제·최명식 등은 징역 7년, 최익형·고봉수 등은 징역 5년을 선고하였다.(안명근은 15여 년의 옥고를 치르다가 1924년 가출옥하였으나, 옥중 여독으로 고생하다가 1927년 사망하였다.)
안악사건은 일제가 한국을 강탈하였던 당시부터 이미 민족운동의 본거지인 황해도 지역에 대한 일대 탄압이 계획되어 그 기회를 기다리던 것이 안명근을 사건에 억지로 연루시켜 애국지사들을 대거 검거한 것이었다. 결국 민족교육열과 민족의식이 높았던 황해도 지역에 대한 탄압계획은 일제의 뜻이 반영되었다
일제는 안악사건에 이어 평안남북도 지방의 민족지도자 세력도 뿌리 뽑고자 데라우치〔寺內〕 총독을 1910년 12월 27일 압록강 철교 개통식에 참석하고 관서 지역을 순시하는 기회를 잡아 ‘총독 및 요인암살 계획’을 하였다는 죄명을 씌워 이 지역의 민족지도자를 마구 잡아들였다. 이 사건을 날조한 것은 당시 경무총감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사건을 조작하였다.
“1910년, 즉 합병되던 해 12월에 압록강 철교부설공사가 낙성되어 데라우치 총독이 기념식에 참석하게 된 기회를 타서 그를 암살하고자 서울, 평양, 진남포에 있는 민족주의자들과 학생들이 연락하여 중국 안동에 사람을 보내 권총을 사다가 선천 신성학교 교실 천정에 감추어 두었다. 데라우치 총독 저격 장소로는 선천역 철교 낙성식장을 선정하는 등 용의주도한 계획을 세웠으나 일본 헌병의 경계망을 돌파할 수 없어 수포로 돌아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은 미수사건에 그쳤다.”
일제는 무고한 애국지사들을 체포 구금하기 위해 어린 소년을 시켜 지사들에게 비밀연락이라고 전갈을 보내고 그 뒤를 쫓아가 체포하는 방법 등을 썼다. 이렇게 하여 체포된 주요 인물로는 서울의 양기탁·윤치호, 평양의 안태국·김동원·길진형·윤성역, 진남포의 임치정·옥관빈, 정주의 최성주·이명용·선우혁, 선천의 장시욱·강규찬·김일준 등이었다. 이승훈은 제주도 유배 중이었는데 다시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 사건은 결국 제1회 공판에서 고문에 못이겨 허위자백을 한 123명이 죄인으로 회부되고 105인이 유죄형을 받았다. 1912년 10월 1회 공판에서 안태국은 이 사건이 허위 날조된 것임을 증명할 수 있는 분명한 증거 3건을 제시하였다. 일제는 당황하여 제2심에서는 105인 중 99명이 무죄 석방되고 윤치호·양기탁·안태국·이승훈·임치정·옥관빈 등 6인만이 징역 4년에 처해졌다.
기소된 122명의 인물을 출신지별로 살펴보면 평북이 87명(선천 23, 정주 22, 가산 14, 철산 10, 곽산 7, 의주 5, 용천 4, 설산 1, 자성 1)으로 가장 많았고 평남이 25명(평양 23, 순안 1, 중화 1)이다. 연령별로는 1912년을 기준으로 20세 이하가 12명, 20대가 57명, 30대가 6명, 40대가 14명, 50대가 3명으로 평균 연령은 30.5세이다. 일제가 독립 운동 세력으로서의 잠재력을 지닌 청년, 학생층을 탄압의 목표로 하였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종교를 파악해보면, 종교를 알 수 있는 90명 중 개신교 81명(장로교 65, 감리교 5, 조합 교회 2, 기타 9며천주교 1명, 무교 8명이었다. 일제는 식민 통치 초기에 기독교 세력을 다른 세력보다 부담스럽게 느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사건은 신민회라는 지하 조직을 뿌리 뽑고 아직도 해산 당하지 않은 채 버티고 있는 한국의 기독교 세력을 말살하자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고, 그 목적은 달성되어 국내에 남아있던 신민회의 외곽 사업도 모두 문을 닫지 않을 수 없었다.
- 질문1 일제가 105인 사건을 조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왜 데라우치 총독이 관서지역을 순시한 것을 기회로 삼았을까?
읽기자료 3
남강 이승훈이 제주도에서 어떻게 살았는 지에 대해에서 구체적으로 알려진 자료는 별로 없다. 남강이 제주도에 도착한 정확한 날짜로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대략 1911년 4월 말 또는 5월 초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가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서울로 잡혀가 제주도를 떠난 시기가 1911년 9월이었으므로, 이승훈이 실제로 제주도 유배 기간은 4개월 정도였다. 그렇지만 그가 제주도에 끼친 영향은 3개월의 짧은 유배생활을 했음에도 제주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우암 송시열 못지않다고 한다.
김기석이 지은 『남강 이승훈』에 의하면,
“유배 주변의 교회와 학교로부터 강설을 해달라고 부탁을 받을 때마다 민족사상 고취와 민족성 개조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날마다 아침에 일어나는 대로 손수 비를 들고 안뜰과 거리를 깨끗하게 쓸었고, 어린 아이들의 코를 씻어주고 옷고름을 매어 주었다. 그리고 동리 청년들을 모아 우물을 깨끗이 치웠다. 이렇게 되자 동리는 확실히 깨끗해졌고, 마을 분위기는 좋아져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이 늘었다. 이 소식은 제주 식자들 사이에 전파되면서, 그가 성공한 사업가였다가 민족의식을 기를 목적으로 오산학교를 세웠다는 사실도 함께 알려졌다. 그러자 여러 사람들이 그를 찾아오기도 했는데, 남강은 이들에게 사람들이 깨어나기 위해서는 교육과 산업으로 민족의 힘을 기르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통계에 의하면 1910년에 전국적으로 1,913개의 학교가 1914년에는 1,242개로 줄었는데, 제주도에서는 이 기간에 11개 학교에서 24개의 학교로 늘었다. 이것은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남강의 영향도 배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남강은 당시에 제주도에 머물고 있었던 박영효와도 교류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영효는 1907년에 제주도에 유배를 와서 2년 뒤에 풀려나기는 했지만 그냥 제주도에 머물고 있었다. 더욱이 그는 남강이 살고 있던 집의 주인이었던 김희주 집에서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에 종종 만났을 것으로 보인다.
이 집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이승훈은 당시 평양 출신으로 1908년에 제주읍내에 성내교회를 세우고 개신교를 전파하고 있던 이기풍 목사와 교유하면서 그의 부인 윤함애가 운영하고 있던 성내교회 부설로 설치된 영흥학교의 교육활동에도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 이승훈의 성실한 생활 태도는 1901년 이재수의 난으로 인해 제주도 사람들에게 예수는 좋지 않다는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교회(성내교회)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제주도에 와서 산수가 아름답고 기후가 따뜻한 데 놀랐다. 제주도는 옛 탐라국으로서 한반도의 본이 되게 하기 위하여 하늘이 여기에 둔 것이다. 제주도가 한반도의 본이고 한라산이 산의 본인 것 마냥 제주도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의 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제주도로 한반도의 본이 되게 하기 위하여 교회와 학교와 공장을 많이 세워야 한다. 제주도는 남해에 솟아있는 섬이 되어 육지에는 목장과 약초 지배와 특수농작이 적당하고, 해안과 바다에는 어항과 어장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
나는 얼마 전에 해안선을 돌아보고 한라산 중턱에 올라가 보았는데 제주도야말로 우리 신자성손이 영원히 번영할 수 있는 모범지역이다. 나는 우리들이 여기에 새로운 교육기관을 많이 만들어 힘써 배우고 부지런히 일하면 겨레의 영광을 회복하는 놀라운 광명이 여기로부터 본토에 비칠 것을 믿는다.”
이런 이승훈의 이야기는 당시 제주도 사람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어서 지금까지도 종교계나 교육계에 ‘제주도 개발 방략’으로 전해지고 있다.
- 질문1 이승훈의 어떤 생활태도가 제주도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을까?
읽기자료 4
이승훈은 3‧1 운동 당시 목사는 아니었지만 개신교를 대표하여 행동한 면이 많았다. 사실 남강의 실천적 성품이 없었다면 천도교 및 불교와 연합한 만세시위는 성사되기가 어려웠다. 먼저 그로 인해 관서 지역의 개신교 신자들이 결집할 수 있었다. 그는 평양신학에 수학하였고 평북노회 장로로서 활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105인사건 때 감옥에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수없이 읽어 관서 지역의 개신교 신자들의 신망만을 얻을 만큼 신앙이 깊었다. 그의 개신교 신앙은 종교적인 것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민족사상과 연계된 것으로 독립운동을 예수의 메시아, 모세의 출애굽사건으로 이해하였다.
3ㆍ1운동과 관련하여 상하이에서 연락해 온 선우혁은 105인사건의 감옥 동지였고, 만주 길림에서 무오 독립 선언을 한 여준은 오산학교 초창기 정신적 지주였으며, 오산 출신 서춘은 도쿄로부터 2ㆍ8독립선언 소식을 전했고, 도쿄의 2‧8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이광수는 오산학교의 초창기 교사였다. 그러던 차에 서울로부터 오산학교 졸업생 김도태가 천도교 측의 연합 제의안을 가지고 찾아왔을 때 곧바로 협상에 응함으로써 종교 간의 갈등을 뛰어넘는 전민족적인 만세시위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명순서를 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난관에 봉착했을 때 이승훈은 “순서는 무슨 순서야, 이건 죽는 순서인데, 누굴 먼저 쓰면 어때?” 하고 손병희를 민족대표로 첫머리에 쓰도록 하여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리고 3ㆍ1운동을 계속 추진하기 위해 평양에서는 고당을 뺐고, 서울에는 함태영을 제2진으로, 이상재를 제3진으로 민족진영의 세력을 배치하였다. 또한 오산 출신인 김지환을 만주 안동에 파견하여 상하이에 간 현순과 연락하여 상하이 임시정부 연락소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오산에서는 3월 2일 교직원, 졸업생, 교회교인, 동리 용동공동체, 자연회회원 등이 주동이 되어 1300여 명의 만세 시위가 오산학교 뒷산인 제석산에서 전개될 수 있게 하였다.
- 질문1 오산학교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을 조사하여 발표해봅시다.
- 질문2 3‧1운동 때 이승훈이 한 역할을 조사하여 각자 발표해봅시다.

시각자료
시각자료 1

상투를 틀고 전형적인 양반 생활을 추구하던 시절의 남강 이승훈
- 질문1 이 사진은 돈으로 참봉을 사서 지내던 시절의 남강 이승훈이다. 이 시절 남강이 꿈꿨던 미래는 어떤 것이었을 지를 생각해봅시다.
시각자료 2

남강 이승훈이 제주도 유배 시절에 교류했던 이기풍 목사.(사진의 오른쪽) 그는 평양 출신으로 1908년 제주도에 와서 처음으로 성내교회를 세우고 널리 개신교를 파한 사람이다.
- 질문1 이승훈이 제주도에서 기독교 전파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대해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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