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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말 한국인의 민족 독립 운동은 집권층의 청원외교, 파천운동, 의병운동, 계몽운동, 상소운동, 순국, 의열투쟁 등 다양하게 나타났다. 그 중 순국은 자기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죽여서 불의에 항거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인들은 단발령, 을사조약, 고종퇴위와 군대해산, 경술국치 등 한민족의 정체성과 국가 주권을 심각하게 훼손한 대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자신의 목숨을 바친 순국을 하였다.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는 순국은 언뜻 생각하면 가장 소극적인 형태의 항거로 보이지만, 자신의 한 몸을 초개와 같이 던져서 불의에 대항하려는 것이라는 점에서 가장 강렬한 형태의 항일운동이다. 이러한 순국은 경술국치 이후까지 한국 지식인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유교사상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유교적 전통과 밀착된 저항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일제의 침략에 맞서 순국에 가담한 인사들은 소년기부터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몇 년에서부터 20여 년에 이르기까지 유교 교육을 받았다. 그들에게 유교 경전의 내용은 모든 생각의 근원이자 행동의 기준이 되었다.
역사적 배경
| 현재 주소 |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서도리 65-1 |
|---|---|
| 현재 상태 | 원형보존, 장태수의 집은 일자형 초가로 ‘남강정사’라 하여 사적지로 지정되어 잘 관리되고 있다. 집안에는 일유재장태수선생사적비(一逌齋張泰秀先生事蹟碑)가 있다. |
장태수(張泰秀 ; 1841∼1910)는 조선말기 문신으로 일제가 무력으로 한국을 강제 병합하여 식민지로 만들자 순국으로 항거한 애국지사다.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성안(聖安), 호는 일유재이다. 전라북도 김제 출신으로 내부협판 장한두(張漢斗)의 아들이다. 1861년(철종 1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제수된 뒤 전적, 선략장군부사과(宣略將軍副司果), 예조정랑, 사헌부지평, 정언, 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1867년(고종 4) 양산군수에 임명되어 부국양병에 주력하고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조영규(趙英珪)의 제단을 고쳐 제향하였다. 그의 공이 인정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제수되고 1872년 고종을 수행하여 송도에 다녀왔다. 그 뒤 병조참의, 돈령부도정(敦寧府都政), 동부승지,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 등을 지내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 중에는 고산현감에 부임하였다. 1895년 단발령이 내리자 사직하고 스스로 남강거사(南岡居士)라 자칭하고 은거하였다. 그러나 1904년 이후 다시 관계에 진출하여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시종원부경(侍從院副卿), 칙임관 등에 임명되었다. 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고 회유하자 단식 끝에 절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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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국가의 존립의 위기를 맞아 최초로 순교한 위인은 이한응이었다. 이한응은 러일전쟁 직전부터 영국정부를 상대로 전시국외중립 외교를 부지런히 펼쳤으나 외교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러일전쟁 막바지인 1905년 5월 12일 32세의 나이에 자결 순국의 길을 택하였다.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영국, 미국, 러시아와 조선 침략을 보장받는 조약을 체결한 뒤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을 체결하였다. 을사조약의 체결로 한국이 국권을 상실당하게 되자 조약 체결 직후부터 각계각층의 반일상소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이러한 가운데 을사조약의 체결에 반대하여 순국하는 인사들이 나왔다. 이들의 순국활동은 항일의병운동을 비롯한 항일무장투쟁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을사조약 이후 최초의 순국자는 평민 중에서 나왔다. 돈의문 밖에 사는 배씨라는 성을 가진 가옥중개업을 하는 가난한 사람이었는데, 돈의문 밖에 있는 원교(圓嶠)에 올라가 며칠을 통곡하다가 그대로 자결하였다. 또한 민영환의 순국은 한국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한결같은 추앙심을 이끌어냈으며, 그에 대한 추모 열기는 곧바로 항일운동과 매국대신 처단활동으로 이어졌다.
을사조약 이후 순국자들을 관직과 신분에 따라 나누어 보면, 대신급(민영환, 조병세), 전직고관(홍만식, 송병선, 이명재, 이설), 하급관료(이상철, 이건석 등), 평민과 외국인(김봉학, 인력거꾼, 여종, 반종례, 서판풍 등)으로, 최고위 관료부터 막노동자에 이르기까지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망라되어 있다.
을사조약 체결 직후인 1905년 11월 26일 고종은 헐버트(Homer B. Hulbert)에게 조약 체결이 무효이므로 이 사실을 미국 정부에 통고하고 도움을 요청하라는 전문을 보냈다. 그러나 미국은 이미 일본과 가쓰라․태프트밀약을 체결하여 일본의 한국 지배권을 인정했기 때문에 고종의 요청을 묵살하였다. 미국의 냉담한 반응에 실망한 고종은 러시아에 손을 내밀었으나 이마저 어렵게 되자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하여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와 각국의 입장 때문에 특사는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되었고, 이준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1907년 7월 14일 분사하였다.
헤이그특사의 항일활동에 대한 정보를 접합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입궐하여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였다. 이어 일본 정부는 이토의 제안을 받아들여 고종을 퇴위시기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고종의 헤이그특사 파견 문제를 빌미로 한국 내정에 관한 전권을 완전히 장악하려 하였다. 그러자 1907년 7월 22일에는 경기도 양주에 사는 예수교 목사 홍태순(洪太順)은 고종의 퇴위에 항거하여 대한문 밖에 나가 음독 순절하였다. 7월 23일에는 전 중추원 의관 이규응(李奎應)이 아편을 먹고 순절하였다. 충청도 보은의 사성국은 의병으로 활약하다가 일본군에 잡히자 자기 손으로 고환을 뽑아 자결했는데, 그의 나이 24세였다. 그의 아내 역시 20세의 청춘으로 남편의 장례를 마치고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충청도 음성 출신의 김용묵은 경기도 안성군 삼죽면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에서 자결 순국하였다. 전북 정읍 출신의 유병우 역시 경상도 하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투쟁하다가 체포되자 단식 끝에 순절하였다. 한편 시위보병 제1연대 제2대대 대대장 박성환은 군대해산 소식을 듣자 대성통곡하고 원수를 갚지 못하는 것을 통탄하면서 자신의 배를 찔러 자결하였다.
- 질문1 을사조약 직전에 이한응이 순국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을사조약에 항거하여 순국한 사람들이 대신부터 막노동자에게 이르기까지 온갖 신분이 망라되어 있는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읽기자료 2
1910년 8월 한국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일제는 헌병과 경찰을 앞세워 무단통치를 실시하고 작위와 은사금을 주며 회유정책을 펼치는 등 강온 양면전략으로 한국민을 통치하려 하였다. 나라가 없어졌다는 현실에 맞서 한국민은 다양하게 항일운동을 벌였다. 첫째, 국내외에서 의병투쟁-독립전쟁을 통해 무력으로 일제에 대항하였다. 둘째, 독립기반 마련을 위해 국내외에서 교육활동과 식산활동에 종사하였다. 셋째, 일제의 요인과 친일거두를 척살하기 위해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벌였다. 넷째, 일제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이주하며 자기 일신이나마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려 하였다. 다섯째, 국가의 멸망이 분통한 일이며 외세의 통치를 받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며 깨끗이 자결하기도 하였다. 이중에서 자결순국은 일제에 항거하는 여러 방략 가운데 가장 강경한 것이었다.
경술국치 전후에 수십 명에 달하는 인사들이 자결 순국의 길을 택하였다. 1910년대에 순절한 사람에 대한 기록은 64명에 달하는데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이중에서 병탄이 일어난 1910년에 자결한 인물로는 황현을 비롯하여 39명이며, 1911∼1912년에 순국한 인사는 8명에 달한다. 이를 보면 1910년대 순국자는 한일병탄에 항거하여 자결한 이들이 대부분임을 알 수 있다. 이 외에 1919년 고종의 사망에 분개하여 자결한 이들도 있었고, 병탄 후 부모의 만류로 자결하지 못하고 부모의 3년상을 치른 후에 자결한 이들도 있었다. 따라서 1910년대 자결한 이들은 대부분 나라가 망하는 것을 분하게 여기고 원수 일본의 백성이 되는 수치를 참을 수 없어 자결했음을 알 수 있다.
1910년대의 자결 순국자들은 무엇보다도 국망의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자결의 길을 택하였다. 고종의 절대 충신인 이범진, 최익현의 제자이자 왕실 지친인 이재윤, 항일대신 김석진처럼 문과 출신으로 고관을 역임한 인물도 있었다. 이 가운데 이범진은 1896년 한국을 떠나 구미에 계속 머물며 고종의 국권수호외교를 충실히 보좌하다가 국망 후에 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하였다.
1910년대 자결 순국자들은 대부분 유학을 공부한 지방의 양반유림들이었으며, 김도현이나 김상태처럼 의병출신자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순국자들의 연령은 금산군수 홍범식처럼 40대도 있지만 대부분은 60대였다. 이들 중에는 송병선, 임헌회, 최익현, 전우 등 저명한 유학자들의 문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의 출신지는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등 하삼도(下三道)의 인사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지방유림 중에서 순국자가 많이 나왔기 때문으로 보인다.
- 질문1 일제에 의한 강제 병합(경술국치)에 대하여 한국인들의 저항했던 방법 다섯 가지를 말해봅시다.
- 질문2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순국이 왜 적극적 저항방법이 될까요?
읽기자료 3
한일합병조약은 8개 조항으로 되어 있는데 제5조의 내용을 보면 “일본국 황제 폐하는 훈공 있는 한국인에 대하여 특히 표창을 하기에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해서 영작(榮爵)을 주고 또 은급을 준다.”라고 하여 작위와 은사금으로 회유하였다. 은사금은 등급에 따라 후작에게는 15만원, 백작에게는 10만원, 자작에게는 5만원, 남작에게는 3만원의 은사공채를 교부하고, 일진회 등 일제의 주구활동을 한 친일단체에게는 일시금의 은전을 주었다. 또한 한일합병에 공이 있다고 인정되는 구한국 관리 3,559명과 양반·유생 9,811명에게 은사금을 주었다. 이들에게 수여된 은사공채는 원본은 은행에 예치된 채 이자만 지급되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한국 강점의 대가로서 왕족을 비롯한 이완용(李完用) 등 구관료 귀족에 대해 '조선귀족령'에 의해 작위와 은사금을 주고 한국지배에 이용하였다. 왕족에게는 조선왕·공족(公族)의 명칭을 주고 연금 150만원을 지급하는 대신 일체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기 위해 '이왕직'[장관 민병석(閔丙奭), 차관 고미야 미호마쓰[小宮三保松)]의 감시 하에 두었다. 일제는 옛 대한제국의 관리를 전부 파면시키고 극히 일부 친일 관료 287명을 채용하였으나 조선총독부 중앙행정기관이나 요직에는 전혀 배치하지 않고 중추원·경학원 직원, 지방관청 하급관리에만 배치하였다. 이완용, 송병준(宋秉峻) 등 매국노 15명은 중추원이라는 조선총독 자문기관 의관이 되었지만 일제의 한국지배에 이용만 당하였을 뿐, 아무런 권한도 갖지 못한 꼭두각시였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는 '한일병합조약'의 조문과 일왕의 조서와 조선통감의 유고 가운데에서 한국병합은 ‘동양의 평화를 영원히 확보·유지’, ‘양국인민의 행복증진’ 등의 미사여구를 나열하였지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침략행위를 은폐하기 위한 기만적인 언사일 뿐이었다.
장태수는 일제가 그를 회유하기 위하여 은사금을 전달하고자 하였으나 이를 거부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 헌병대가 세 아들을 잡아가고 그를 체포하려 하자 1910년 음력 11월 11일에 조상의 사당에 통곡으로 고별하고 단식에 들어갔다. 단식 중에 ‘고대한동포문(告大韓同胞文)’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1910년 음력 11월 27일 향년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질문1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면서 한편으로 무단통치를 단행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당시의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은사금을 지불함으로써 노린 효과는 무엇이 있을까요?
- 질문2 일제의 회유를 받아들여, 식민지 지배에 협조한 사람들을 조사해 봅시다.
시각자료
시각자료 1
다음은 장태수가 받았던 과거합격과 관리임명 증서이다.
- 질문1 장태수가 처음 꿈꾸었던 자신의 미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 질문2 을사조약과 한국강제병합의 소식을 들은 날 장태수가 느꼈을 절망감을 일기의 형태로 써봅시다.
모둠활동
①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조
② 일제에 협력하지도 독립운동에 참여하지도 않은 채 그냥 일상적인 생활
③ 독립운동에 참여하거나 협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