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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진위대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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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원주시는 조선시대 강원도 감영이 있었던 도시였다. 그런데 1895년 5월 전국을 8도에서 23부로 개편하면서 강원감영이 없어지고 원주는 충주관찰부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강원감영은 지방군이 주둔하는 본부로 사용되었다. 1900년 7월 지방 군대의 명칭이 모두 진위대로 통합되면서 원주 진위대가 되었다. 원주 진위대는 본래 18개 대대로 편성되었으나 1905년 4월 8개 대대로 줄었다가 1907년 8월 1일 서울의 시위대가 해산되면서 8월 10일에 해산될 예정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특무정교(특무상사) 민긍호는 8월 5일 “나라에 병사가 없으면 무엇으로써 나라라고 할 수 있겠는가. 군대해산 명령에 복종할 수 없다.”고 하면서 250여 명의 진위대 병사와 함께 봉기하여 의병 대열에 참여하였다. 정미의병의 시작이었다. 민긍호의 의병부대는 해산 군인들이 중심이라서 화력과 전투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활동지역이 과거 이들의 관할 지역이었기 때문에 지형지물에 익숙하여 일본군을 상대로 뛰어난 전과를 거둔 가장 세력이 큰 의병부대였다.
그러면 원주 진위대 봉기에서 출발한 민긍호 의병부대의 활약과 그 영향을 살펴봅시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강원도 원주시 원일로 85(강원도 원주시 일산동 54-1)
현재 상태 복원. 원주 중심부인 원주시청의 별관(옛 원주군청)이 옛 강원감영 자리이다. 2005년 강원감영 복원사업에 따라 복원되었으며, 해마다 이곳에서 강원감영제가 열리고 있다.

  원주 진위대가 있었던 곳은 강원감영 자리였다. 강원감영은 조선시대 강원도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조선 태조 4년(1395)에 설치되어 고종 32년(1895) 8도제가 폐지될 때까지 강원도의 행정 업무를 수행했던 곳이었다.
  강원감영은 관찰사가 업무를 보던 선화당, 관찰사의 거처였던 재은당(내아), 감영의 정문인 포정루, 국왕을 상징하는 궐패가 모셔진 객사를 비롯하여 부속건물 등 최대 56동의 건물이 있었다. 그러나 감영이 폐지되고 진위대가 한 동안 사용하고, 그 뒤로는 여러 용도로 사용되다가 6‧25 때 대부분 사라지고 현재는 선화당, 포정루, 청운당 등의 건물만 남아 있다. 2000년 발굴 조사 결과 전체적인 건물터가 남아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강원감영 이전의 원주목 관아의 건물터 등이 그 아래층에 그대로 잘 남아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관아 건물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유적이다.
  강원감영이 폐지된 뒤 설치된 진위대는 1895년 지방의 질서 유지와 수비를 목적으로 한 최초의 근대적 지방 군대였다. 김홍집 내각은 훈련대를 해산하고, 9월에 반포한 육군편제강령에 따라 육군은 서울 수비를 위한 친위대와 지방의 진위대로 재편되었다. 처음에는 전주와 평양에 각 500명 이하 규모의 구성된 1개 대대의 진위대를 배치하였다.
  1900년 7월 원수부의 명령으로 구식군대였던 지방대를 흡수한 진위대를 전국에 6개를 배치하였다. 원주 진위대는 모두 18개 대대였으나 1895년 8월 지방군이 폐지된 후 1897년 6월 다시 지방대가 창설되었고, 1900년 7월 지방 군대의 명칭이 모두 진위대로 통합되면서 원주 진위대가 되었다. 원주 진위대는 본래 18개 대대였으나 1905년 4월 8개 대대로 감축되었다.
  원주 진위대는 1905년 원용팔 의병부대와 김하규 의병을 진압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비록 초기에는 군인이라는 신분적 한계 때문에 의병운동의 진압부대로 임무를 수행했지만, 원용팔은 원주 진위대와 협상하여 의병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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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1907년 고종의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일어난 정미의병은 실질적으로 강원도 원주의 진위대가 봉기한 것이 그 시초인 셈이다. 원주 진위대의 의병 참여는 강원도거의 모든 지역으로 확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의병이 일어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의병에 참여했을까? 앞에서 지적한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이 그 주된 원인이었지만 통감부가 세금을 가혹하게 징수한데다가 의병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무고한 주민도 무자비하게 학살하였기 때문이었다.
  1907년 이후의 의병을 정미의병 또는 후기 의병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 의병은 1908년 6월 25일∼7월 16일간 시행된 ‘북부수비구대토벌작전(北部守備區大討伐作戰)’을 중심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일제의 '북부수비구대토벌작전'에 의해 의병전선이 크게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전기에는 약 45개의 의병들이 대부대(300∼2,000여 명)를 이루면서 서로 연합하여 일본군에 대항한 것이 큰 특징이다. 대표적인 지도인물은 민긍호, 이강년, 허위, 이인영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민긍호를 제외하고는 전투 지휘관으로서는 경험이 없는 유학자 출신이었지만 그 제약을 극복하고 의병활동을 조직적으로 전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이러한 연합활동은 13도창의군이라는 연합조직을 구성되는 단계까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민긍호는 지휘에 있어서 단연 뛰어났다. 도내 소규모 의병부대를 연계하여 흡사 강원도 의병사령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양구와 춘천에서 대규모로 화약제조소가 운영된 것이다. 대규모 항쟁은 이와 같은 전문적인 화약제조소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고 하겠다.
그러나 민긍호, 허위, 이강년 등 유력한 의병 지도자들은 1908년 전반까지는 대개 잡히거나 전사하여 전체적으로 의병세력이 많이 약화되었다.
  1908년 중반 이후에는 52개 의병부대가 확인되기는 하지만, 규모로 보면 몇 십명 정도의 소규모여서 주로 유격전술을 폈고, 신분으로 보면 평민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이것은 서울 진공전(進攻戰)의 실패와 일제의 '대토벌(大討伐)'에 기민하게 대처하기 위함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10년에 이르면 의병들의 무기도 점차 정예화한다. 의병부대가 점차 독립군화되는 과도기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의병전쟁이 쇠퇴하게 되는 요인으로 (1) 유력한 의병장(예컨대 민긍호, 이강년, 허위, 이인영)이 조기 순국했던 점 (2) 1908년 7월∼8월간 의병병사들이 대거 '귀순'해 간 점 (3) 1910년에 이르러 주민들의 의병지원이 거의 차단된 점 등을 들 수 있다. (2)항과 (3)항은 일제의 간교한 술책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민이나 의병 병사들이 지속적으로 생계를 위협 받았을 때 장기간 의병으로 활약하거나 그들을 지원하는 것은 거의 힘들었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한편 강원도 의병부대는 한일합병 때까지 계속 일제에 대항하였지만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되자 점차 간도와 연해주를 중심으로 한 해외로 이주하는 경향이 늘었다.
  그리고 의병들은 일본 군경과의 싸움을 주로 했지만 그 외에도 (1) 한반도에 이주한 일본인 응징 (2) 부일한인 응징 (3) 일제 시설의 파괴 (4) 일본 군경에 '귀순'한 의병에 대한 응징 (5) 의병활동의 정당화한 선전활동 등의 활동도 하였다. 특히 부일한인 중에는 반민족적 행위를 일삼던 일진회원과 자위단원에 대해서는 색출해 가며 민족의 이름으로 응징하였다.

  • 질문1 강원지역에서 의병활동과 화서학파의 관련성을 찾아봅시다.

읽기자료 2

  원주 진위대에서 군대 해산에 반발하여 통감부는 1907년 8월 1일 서울의 시위대를 해산시킨 다음 지방의 진위대도 차례로 해산시킬 계획이었다. 원주 진위대는 8월 10일에 해산될 예정이었는데, 이 사실은 미리 안 원주 진위대의 특무정교(현 특무상사) 민긍호는 8월 5일에 먼저 봉기를 하였다.
  민긍호는 대대장 홍유형을 지휘관으로 삼으려 했으나 홍유형이 도망을 가자 스스로 지휘자가 되어 원주 장날이어서 많은 농민과 포수들을 장터로 모이기 쉬운 장날인 8월 5일을 봉기일로 잡았다.
  민긍호는 2백여 명의 병사들을 모두 집합시킨 후 봉기를 선언하고 이에 호응한 3백여 명의 읍민들에게 무기고를 열어 1천 6백여 정의 총과 약 4만발의 탄약을 분배하여 대오를 편성하였으니, 곧 민긍호 의병부대의 탄생이었다.
  원주 진위대가 봉기하여 의병부대가 된 것은 지방 진위대로서는 최초이면서 가장 규모가 컸다. 이 때문에 민긍호 의병부대는 다른 진위대 병사들의 의병부대 합류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각 지방에서 민간인들의 연이은 의병봉기에도 사기진작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의병들에게 큰 활기와 전투력을 불어넣었다.
  진위대 병사를 주축으로 한 민긍호 의병부대는 원주읍내의 우편취급소, 관청과 경찰분견소 등을 기습하여 원주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일본군 사령부는 충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로 하여금 원주의 상황을 파악하도록 지시하였다. 민긍호 부대는 이들에 대항하여 싸워 물리쳤다.
원주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게 된 일본군 사령관은 8월 6일, 서울주재 보병 제47연대 제3대대 2개 중대와 공병 1개 소대를 원주로 급히 파견하였다. 이에 민긍호는 원주 인근 지역에 격문을 뿌려 포수를 모집하여 의병 부대를 새로이 편성하여 장기항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리고는 8월 8일 일본군이 원주에 도착하기 전에 무기와 탄약들을 수습하여 원주를 떠났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을미의병 때부터 의병투쟁이 끊이지 않았던 강원도 지역과 충청도 지역에서 의병들이 두드러지게 활약하게 되었다. 당시 강원도 지역의 상황을, “그 때 강원 의병이 날로 치열하여 수령이 모두 달아나니 관청을 비운 곳이 19군이었다”는 기록도 있고, “이 해 강원도 사람들은 의병에게 식량을 대느라 씨감자가 떨어지기에 이르렀다”는 말도 있었다. 특히 “민긍호의 말에 의하면 강원도에는 의병단체가 32개나 있고, 모두 그의 지휘를 받고 있다고 한다.”고 한 말이 있을 정도로 강원도 일대에서 민긍호 의병부대의 활약은 대단한 것이었다.
  원주를 떠나 평창 지역으로 이동한 봉기군은 부대를 둘로 나누어, 1개 부대는 金덕제의 지휘를 받아 대관령을 넘어 동해안 지방인, 강릉⋅양양⋅간성⋅통천 지방으로 진출하였고, 나머지 1개 부대는 민긍호가 지휘하여 평창⋅영월의 산간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제천⋅충주⋅장호원⋅여주⋅홍천 등에서 왜군을 물리치면서 의병으로 이름을 크게 떨쳤다.
  민긍호 부대는 8월 13일 제천에서 이강년 부대와 합류하여 8월 15일 원주에서 제천으로 진입하여 야영중인 일본군 1개 소대를 협공하여 물리쳤다. 이 승리를 바탕으로 충주를 연합하여 공격하기로 하였다. 8월 21일 제천을 출발한 민긍호 의병부대는 22일 밤 박달재에서 일본군 중대와 격전을 벌이게 되어 시간이 지체되어 이강년 부대와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어 이강년 부대는 충주성 점령에 실패하고 단양을 거쳐 죽령을 넘어 경상도 풍기로 남하하였다. 박달재 싸움으로 뒤늦게 충주에 도착한 민긍호 부대는 강릉에서 온 200명과 함께 장호원 지역으로 북상하면서 각 지역에 있는 의병부대와 더불어 소규모의 유격전을 벌이면서 소규모의 일본군과 일본 경찰 초소를 기습하고, 통신망을 절단하거나 또는 일본군의 탄약과 식량을 탈취하는 등 일본군을 괴롭혔다.
그렇지만 일본군의 수색활동이 강화되면서 주민들의 피해가 늘어나자 민긍호 의병부대는 홍천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홍천을 공격하여 장악하는 한편, 낭천(화천)을 기습하여 관청의 총기를 접수하였다.
  그 후 민긍호 부대는 다시 남하하여 횡성 갑천리의 봉복사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물자를 조달하고, 군량을 비축하는 동시에 병력을 늘리고 있었다. 그러나 9월 23일 원주의 토벌대가 공격해와 치열한 격전을 벌여 피차간에 사상자가 적지 않았다. 이에 민긍호 부대는 봉복사에서 홍천으로 철수하였는데, 이 때 토벌대는 그 화풀이로 봉복사를 불태웠다.
  이렇듯 민긍호부대가 홍천지역을 근거로 하여 의병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여 영서지방을 그의 세력권내에 넣게 되자, 정부에서는 선유사(宣諭使)를 임명하고 황제의 조칙과 귀순자 처리를 위한 관계서류를 지니게 하여 각지로 파견하였다. 이때 민긍호 의병부대에 대한 선유는 강원도 선유사 홍우석이 감당하였는데, 그는 민긍호에게 몇 차례 편지를 보내 만나자고 하였는데, 그것이 일본군을 대동하여 자신을 생포하려는 계책임을 알게 된 민긍호는 사람을 보내 조칙만 받아왔다.
다시 강원도 관찰사 황철이 귀순 권고에 나서서 의병 때문에 촌락이 불타고 국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음을 들어 의병을 해산하고 귀순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민긍호는 일본에 대한 항쟁을 늦출 수 없다는 단호한 의지를 밝혔다. 다시 횡성군수 심흥택이 민긍호에게 가서 대세가 기울어졌으므로 기회를 잃지 말고 귀순할 것을 거듭 촉구하였다. 이에 대해 민긍호는 “국권을 빼앗기고 국민이 도탄에 빠져있는 때에 肯내가 투항하면 일본치하에서 지위가 높아지고 부가 8역적과 나란히 할 수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나, 나의 뜻은 나라 찾는데 있으므로 강한 도적 왜와 싸워서 설혹 이기지 못하여 흙속에 묻히지 못하고 영혼이 망망대해에 떠돌게 될지라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요지의 제2차 답서를 보내면서 친일 관료들을 통렬히 규탄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무장투쟁을 계속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민긍호 의병부대는 1907년 8월~9월까지의 일본군과 계속 싸웠고, 10월부터 12월에 걸쳐서는 여러 곳에 화약제조장을 만들어 탄환을 공급하면서 유격전으로 계속하였다. 이러한 전투과정에서 관동창의대의 이인영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인영으로부터 강원도 지역의 의병을 총지휘하여 양주로 집결하도록 요청받고 11월 초순 ‘진위대 사령부 대장 민긍호’의 이름으로 강원도 각지에 “서울의 왜적을 격멸하려 하니, 각 면⋅리의 장은 20세에서 50세에 이르는 장정을 소집하여 각자 10일분 식량을 휴대하고, 11월 25일까지 서울 동대문 밖 10리 지점에 집결시키도록 하라”는 격문을 보내어 민긍호에게 관동창의대장이라는 칭호를 주고 의병부대를 이끌고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할 것을 요구를 받았다.
  한편 민긍호 의병부대는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약 1천명의 병력으로 1907년 11월 27일 강릉을 공격하였다. 의병부대는 서⋅남⋅북에서 포위하여 공격하였으나 일본군 완강한 저항으로 강릉을 점령하지는 못하였다. 결국은 탄환이 고갈되어 강릉에서 물러나 다시 영서지방으로 이동하여 수십 차례 격전을 치렀다.
1908년 1월 민긍호는 양구⋅화천을 거쳐 서울탈환작전에 동참하기 위하여 홍천에서 양구 지역으로 북상하였다. 그러나 1908년 1월 이후 민긍호 의병부대는 탄환이 떨어진 상태가 심각하였고, 엄동설한의 추위에도 견디기 어려워 계속 유격전으로 대일항쟁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양구군 상동면 범동리와 자작현에서 일본의 양구수비대와 1월 3일에 치열하게 싸워 물리쳤으나 의병도 70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흩어져 민긍호 부대는 13도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에는 참가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처지에서도 민긍호 의병부대는 일본군과의 싸움을 늦추지 않고 하여 화천, 포천, 횡성, 홍천 등에서 계속 싸웠으나 승리보다는 패배가 많았다. 이것은 민긍호 부대도 병사 수나 화력에서도 열세였던 점도 있지만 일본군이 의병부대 가운데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강한 민긍호 의병 부대에 대해 집중적으로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위기에서 재기의 기회를 기다리던 중 2월 22일 원주에 도착한 선유사 박선빈으로부터 회견하자는 요청을 받고 가던 중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원주 강림 지역에 머물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일본군 충주수비대와 한국순사대는 민긍호 의병 부대를 포위 공격하였다. 이때 민긍호 부대는 고지와 마을로 나누어 대항하였으나 탄환이 떨어져 결국은 민긍호도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 사실을 안 한 의병부대 60여 명이 이 날(2월 29일) 밤 대장 민긍호를 구출하기 위하여 일본군을 공격하면서 “우리 대장 민씨는 어디 계신지 대답하시오”하자 일본군이 포박당한 민긍호를 사살하고 말았다.
  민긍호의 죽음으로 강원도 지역에서의 의병활동은 크게 저하되었다. 그렇지만 그의 부장들이 각각 유격대를 지휘하여 독립적인 활동을 전개하였으므로 하나의 통일된 지휘자를 가진 민긍호 의병부대는 수십 개의 유격부대로 분화되어 항일무장 투쟁을 계속 전개하였던 것이다.

  • 질문1 민긍호의 의병부대가 다른 의병부대에 비해 전투력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일찍 패배한 이유에 대해 알아봅시다.

읽기자료 3

  민긍호 의병장이 순국하자 당시 서른이었던 그의 부인은 유인석의 도움으로 받아 7살의 딸과 2살의 아들을 손을 잡고 북만주로 탈출하였다. 그들은 일본 스파이가 계속 감시하면서 죽일 기회를 노렸기 때문 계속 거처를 옮겨 다녀야 했다. 안중근 의사가 민긍호 가족을 돌봐주었으나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뒤 다시 피신을 다닐 수밖에 없어 결국은 연해주로 옮겼다. 연해주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나 싶었더니 1937년 소련 정부가 연해주 한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때 얼마나 고생했는지 손자 5명과 손녀 1명 등 모두 5명을 잃었을 정도였다.
  이런 시련 속에서도 민긍호의 아들 민영욱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의병장의 후손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버티고 살면서 네 자녀를 슬라브족과 카자크 족 사이에서도 훌륭하게 키웠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민영욱은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기뻐했으나 남북 분단으로 결국은 갈 수가 없게 되었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살았던 이 가족은 결국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알마티에 아들 민영욱, 손자 민안톤, 민로냐 등을 묻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2011년 동계 아시안 게임 피겨스케이팅 남자 싱글에서 금메달을 딴 데니스 덴이 자신이 민긍호 의병장의 외손녀의 손자라고 밝혀서 한동안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민긍호는 데니스 텐의 외고조부이다. 그는 2011년 8월에 어머니를 모시고 한국에 와서 원주에 있는 민긍호 묘소에 참배할 수 있었다.

  • 질문1 민긍호 의병장의 후손은 어떻게 한국을 떠난 지 100년 넘도록 민긍호 의병장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지에 대해 논의해보고 이들에 대해 우리가 어떤 대우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논의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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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왼쪽은 皇城新聞 1907년 6월 3일자, 오른쪽은 皇城新聞 1907년 5월 일자 기사로, 민긍호와 그의 휘하 군인들이 국채보상운동에 2번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민긍호가 의병을 일으키기 전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를 짐작케 하는 기사이다.

  • 질문1 이 기사를 보고 민긍호가 왜 의병대열에 참여하게 된 이유를 생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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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민긍호 의병장 외증손이 피겨스케이팅 대회에서 입상하여 뉴스에 보도된 적이 있다. 이처럼 독립운동을 하다가 어쩔 수 없이 해외로 망명하여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례들을 찾아보고 이들에 대한 대책에 대해 토론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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