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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의병 주둔지 - 대공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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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릉의 대공산성은 1895년 민용호가 의병을 일으켰을 때 한 동안 주둔했던 곳으로 알려진 산성이다. 발해의 대조영이 쌓았다 하여 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쌓았다는 의미에서 대공산성이라고 불리고 있다. 한편에서는 가까운 곳에 보현사가 있어 보현산성이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을미의병 때 민용호는 1896년 1월 13일 원주에서 봉기한 이후 약 10개월간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다. 민용호 부대는 원주에서 강릉으로 동진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보현산성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민용호는 정부군이나 일본군과 평지에서 맞서기보다는 산악 지대인 관동지방의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였던 것이다.
  민용호 부대는 1896년 1월 17일 원주를 떠나 1월 29일 대관령을 넘어 강릉성 밖의 구산까지 행군하였으며, 2월 1일 강릉에 입성하였다. 그 후 원산으로 진출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4월 초순에 강릉으로 귀환하였다. 관군의 공격으로 5월 24일 강릉에서 물러나 동해안을 따라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현산성이 을미의병 때 사용되기는 하였으나 격전을 치러낼 정도로 의병의 근거가 되는 성으로 활용되지 못하였던 것 같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 산44 일대
현재 상태 복원. 대공산성 석축과 성안의 우물 등이 일부 복원되어 있다.

  민용호 의병부대가 강릉지역에 주둔했을 때 근거지로 삼았다고 알려진 대공산성은 강릉시에서 서쪽으로 약 20㎞ 지점에 위치한 994미터의 보현산에 타원형으로 축조된 석성이다. 이 성은 남쪽의 제왕산성, 동남 방향의 칠봉산성, 명주성 등에 둘러싸인 고대산성의 거점 성으로 판단된다.
산성은 남서쪽 끝 남문지가 있는 정상 부근과 북쪽 끝이 돌출되어 치성처럼 되어 있다. 남문지 근처에 망루대지가 있으며 남동쪽으로 폭 약 5m, 길이 79~97m의 치성 끝에도 망루대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산성의 방어 정면이 남쪽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대공산성은 남고북저형의 지형에 축조되었으며, 현재 성벽도 동남 방향으로 잘 남아 있으며 북벽은 붕괴되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이 산성은 신라와 고구려와의 무력 충돌이 빈번했던 5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성 안에는 건물지로 보이는 평탄지가 곳곳에 있으며, 평탄지에서는 고려~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많은 양의 토기편과 와편, 백자편, 그리고 청자편도 흩어진 채 발견되고 있어서 조선시대까지도 성곽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공산성 주변에는 보현사와 통일신라시대에 김경신과 왕위 쟁탈전에서 밀려난 강릉으로 물러나 살았다는 김주원의 무덤으로 알려진 명주군왕릉이 있다. 보현사에는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에 활약했던 낭원대사의 승탑과 탑비가 있다. 특히 탑비는 당시 최고의 문장가였던 최언위가 글을 짓고 최고의 서예가인 구족달이 쓴 글씨로 유명하다.
  명주군왕릉은 김주원의 묘으로 알려져 있는데, 김주원은 강릉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김주원의 묘는 중간에 잃어버렸는데, 조선 명종 때 강릉 부사와 강원도 관찰사 등을 지낸 후손 김첨경에 의해 다시 복원된 것이다. 명주군왕릉 입구에는 강릉 김씨로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키려고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며, 한문소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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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민용호(閔龍鎬, 1869~1922)의 본관은 여주이고, 경상남도 산청군 오부면 오곡리에서 민치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7세에 부친이 급사하자 가세가 기울어 산청군 금서면 오봉산으로 이거하여 화전민 생활을 한 적도 있다. 20세 무렵까지 기정진의 문인 민치량에게 수학하면서 위정척사 사상을 물려받았으며, 25세 경 한성으로 옮겨 민치우의 양자가 되었다.(이설이 있음)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그는 원주·평창·진부를 거쳐 1896년 1월 17일 원주의 남쪽 30여리 떨어진 신림에서 이병채·송형순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대장에 추대되었다. 민용호 부대는 평창을 점령한 다음 1월 29일 강릉에 진입하여 강릉의 토착세력을 포섭하고 경무관보 고준식을 처단하였으며, 강릉 선비 권인규를 초빙하여 각종 포고문을 작성하여 의병의 뜻을 널리 전파하였다. 육지와 해안에 봉수장과 망해장을 두었으며, 무사청과 예빈소도 설치하였다. 또한 권익현·권명수·이경한·김윤희 등을 강원도와 함경도 각지에 소모사로 파견하여 의병 모집과 일본군 방어의 임무를 맡겼다.
민용호가 이끄는 2천여 명의 강릉 의병은 당시 일본인 1천 4백여 명이 거주하고 있던 원산을 공격하기로 계획하였다. 민용호 부대는 3월 4일 강릉을 출발하여 3월 9일에는 고성, 11일에 통천, 그리고 3월 17일에는 원산의 길목인 선평에 진을 쳤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일본군 원산수비대는 정찰병과 한인 정보원을 파견하여 의병의 동태를 살폈다. 이어서 수비대 병력을 선평으로 출동시켜 3월 19일에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은 선제공격을 한데다가 진눈깨비로 의병들이 화승총을 쏠 수 없는 상황을 이용하여 불과 2시간 만에 의병부대는 패주하고 말았다. 더욱이 이 전투에서 지장으로 이름 높던 군사 박동의까지 잃어서 그 타격은 더욱 컸다. 하지만 곧 재기의 결의를 다지고 회양, 양구, 설악산 오색령, 양양을 거쳐 민용호 의병의 본거지인 강릉으로 돌아왔다.
  그 후 춘천의병에서 활약했던 사람들과 경상도 영양의 김도현 의병이 합류하여 전력을 다소 보강할 수가 있었다. 이즈음 민용호 의병의 지역부대에서 친일파 관리를 처단하고 항구에 정박해 있던 일본 선박 3척을 격침시키는 등의 활약이 있었다.
2월 들어 춘천의병이 무너지자 강원도 관병들이 강릉의 민용호 의병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고, 대구진위대에서 쳐들어와서 이를 물리쳤다. 그 뒤로도 강릉을 근거지로 삼아 강원도 동해안 일대를 전전하면서 관군과 수많은 격전을 치르면서 많은 전력을 소비하게 되었다. 이즈음 제천의 유인석 의병부대가 관군에게 패배하여 서북지역으로 북상하면서 중부지방의 의병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민용호도 더 이상 동해안에 머무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최후까지 따르는 5백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북상하였다. 그러나 계속 추격하는 관군의 공격을 받아 큰 타격을 입으면서도 계속 북행하여 1896년 8월 초순에는 함경도의 함흥을 거쳐 삼수에 당도하였다. 그때까지 남아 있던 의병은 겨우 140여 명에 불과하여 어쩔 수 없이 의병들을 해산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도 민용호는 북상을 계속하여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통화현 칠도구에 당도하였다. 그곳에서 몇 달 동안 머문 뒤 1896년 11월 20일 평소에 스승으로 받들던 성암 박문오가 강학을 하던 태천으로 가기 위해 귀국하였다. 민용호는 성암 박문오를 배알하고 여러 사우들과 함께 학문을 토론하였다. 이즈음에 그 동안 의병항전을 벌이면서 기록한 일기인

  • 질문1 민용호가 자신이 자랐던 경상도나 젊어서 살았던 경기도 여주에서 의병을 일으키지 않고 전혀 관련이 없는 강원도에서 일으킨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읽기자료 2

  민용호의 의병활동과 관련된 대표적인 인물이 제천의병을 이끌었던 화서학파의 거목 유인석과 강릉에서 민용호를 도왔던 권인규이다. 두 사람 모두 위정척사 사상에 따라 의병을 일으켰다.
  먼저 권인규(權仁圭, 1843~1899)는 민용호가 강릉에 들어온 직후에로 만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민용호에게 큰 기대를 걸고 민용호 의병부대의 격문과 포고문 등의 문서를 작성하여 의병의 당위성을 피력하였다.
그가 작성한 문서들이 『소은창의록』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를 통하여 활동내용과 창의 이념을 알 수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의병과 관련 있는 문서로는 ‘예안창의소에 답한 통문’·‘창의 포고문’·‘창의 통문’·‘관동 창의소 포유문’·‘관동 창의사 효유문’·‘서고문’ 등과 서간문인 ‘의병장 민용호에게 보낸 편지’와 ‘유진장 이병채에게 보낸 편지’ 등이 있다.
  그 작성한 ‘창의포고문’에는 민용호가 ‘관동 9군 도창의소’를 설치했으니 의병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임진왜란이 원수이며, 명성황후를 시해한 ‘섬 오랑캐(일본)’를 철저하게 공격해야 하며, 원수를 갚지도 못했는데, 또 단발을 할 수는 없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권인규의 의병활동은 자손들에게 이어졌다. 그의 아들인 권종해는 1907년 이강년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또한 손자인 권기수는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옥중에서 숨을 거뒀다.
  유인석의 의병부대는 민용호 의병부대와 협력도 하고 갈등도 일으켰지만 행적이 거의 비슷했다. 의암 유인석(柳麟錫, 1842~1915)은 위정척사를 대표하던 화서 이항로의 문하에서 김평묵, 유중교 등의 인물들과 교류하면서 성장하여 일찍부터 화서학파의 위정척사, 존화양이 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특히 1866년 병인양요 때 서울에서 혼란한 시국상과 어지러운 민심을 보고 위정척사 사상이 더욱 견고해졌다.
그 뒤 개항이 되고 개화파에 의해 개화정책이 추진되던 중 일본군이 단발령과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이에 데 대응하고자 유명한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이라는 격문을 발표하고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유인석 의병부대는 지평(경기도 양평)에서 일으킨 안승우, 이필희, 이춘영 등이 의병 400여 명을 주축으로 하고 각지의 화서학파 사람들이 참여한 연합부대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의병대장에 취임한 유인석은 당시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충주성을 공격하여 장악하고 주변의 친일 관리들을 처단하였다.
그러나 반격에 나선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충주성에서 철수하고 제천으로 돌아왔다. 이즈음 문경의 이강년, 영춘의 권호선, 원주의 한동직, 횡성의 이명로 등의 의병장들이 합류하여 1896년 5월 제천성이 함락될 때까지 약 3개월 동안 제천 지역에서 일본군 및 관군과 활발한 전투를 벌여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한편 서울에서는 친러 내각이 조직되어 단발령을 철회하고 의병들을 회유하여 해산시켰다. 여기에 대해 유인석은 개화정책을 중단하고 일본 세력이 완전히 물러나지 않는 한 의병항전을 계속할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에 관군은 유인석 의병에 대규모로 공격하여 결국 제천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 계속 패배하여 지속적인 항쟁을 위해 함경도 지역으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이후 충청도와 강원도를 거쳐 함경도에 들어섰으나 가는 곳마다 관찰사나 군수들이 압력을 가해 끝내는 청나라의 구원을 요청하고, 이것이 안되면 일제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항쟁을 준비할 생각으로 서간도로 갔다. 그리하여 압록강을 건넜더니 그곳의 청나라 관리가 무기 휴대를 금지하여 할 수 없이 의병을 해산하고 말았다.
  의병이 해산되자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던 통화현 오도구로 가 정착하였다. 그런데 이듬해(1897) 3월에는 고종이 민용호와 함께 귀국을 명하여 귀국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되돌아 왔다. 이 무렵 유인석의 제자들도 대거 서간도로 망명하여, 이들과 함께 항일투쟁의 의지를 다지면서 살았다.
1900년 7월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자 중국에 머물기가 어렵게 되자 귀국하여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항일의식을 불어넣었다. 그런데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와 그를 이은 ‘정미7조약’을 강제로 맺게 되자 1908년 7월 67세의 늙은 몸을 이끌고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다.
  연해주에서 이상설, 이범윤 등과 함께 ‘십삼도의군’이 편성하였는데, ‘십삼도의군도총재’에 추대되었다. 나라가 빼앗겼다는 소식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전해지자 연해주 지역의 한인들은 ‘적의 죄를 성토하고 우리의 억울함을 밝힌다(聲彼之罪 明我之寃)’는  성명회를 조직하였는데, 유인석이 그 총대로 추대되었다. 그리하여 성명회 취지문을 발표하여 조국 광복의 그날까지 일제와 투쟁할 것을 결의하고서 합병반대 성명서에 8,624명의 서명을 받아 각국 정부와 신문사에 발송하였다.
이런 독립운동에 대해 일제가 러시아에 강력하게 항의하자, 러시아는 할 수 없이 이상설, 이범윤, 김좌두, 이규풍 등의 독립 운동가들을 체포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유인석은 서간도로 이주하여, 1914년 3월에 중국 봉천성의 서풍현으로 망명생활을 하다가 1915년 관전현의 방취구(芳翠溝)에서 독립운동의 막을 내리고 말았다.

  • 질문1 을미의병을 일으킨 민용호, 권인규, 유인석 등은 유학자들이라서 의병을 일으킨 이유를 밝힌 창의문이나 의병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는 격문을 직접 지었다. 이들이 지은 격문이나 창의문을 찾아서 읽고 서로 비교한 후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표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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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이 사진은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의 안현동에 있는 항일기념공원의 강릉의병항쟁기념탑이다. 여기에는 권기수(1894~1922), 권종해(1870~1953), 권인규(1843~1899), 민용호(1869~1928), 민긍호( ? ~1908) 등의 흉상이 있다.

  • 질문1 강릉의병기념탑에 흉상이 있는 권기수, 권종해, 권인규는 일가족이다. 이렇듯 일가족이 독립운동을 하게 된 사람들을 조사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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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민용호를 비롯한 을미의병에 참여한 사람들은 일제의 침략에 맞섰다는 의미에서는 훌륭한 민족적 행위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저변에 있는 사상은 신분제를 근간으로 하는 성리학적 사고방식이 굳건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반외세와 봉건성의 공존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찬성과 반대의 모둠으로 나누어 그것이 갖는 역사적 의의에 놓고 토론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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