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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을 상징하는 곳 가운데 하나가 자유공원이다. 자유공원이라 하면 1950년 6·25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맥아더 동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888년 이 공원은 인천에 와서 살던 외국인을 위한 전용공간이 되었다. 이후 1914년 조계제도가 폐지되면서 일본인이 주로 사는 곳이 되어 일본 신사가 있던 ‘동공원’의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공원’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1919년 3·1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날 때 ‘한성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13도 대표자들이 모임을 가졌던 곳이기도 하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하여 한반도에서 물러나자 만국공원이 되었고 6·25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공원에 세워지면서 명칭도 자유공원으로 바뀌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러면 만국공원은 어떤 곳이며 3‧1운동 당시 이곳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봅시다.
역사적 배경
| 현재 주소 | 인천광역시 중구 송학동1가 1 |
|---|---|
| 현재 상태 | 변형. 본래는 각국공원 또는 만국공원이라 불리다가 일본 강점기에는 서공원으로 불렸고, 광복 후 만국공원으로 다시 불리다가 1957년부터 자유공원이라 불리고 있다. |
인천은 외국인이 처음으로 살기 시작한 곳이고, 특히 조계지는 외국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는 대표적인 곳이다. 최근에는 과거 일본이 설치한 은행이나 차이나타운을 새로 단장한데 이어 인천에서는 만국공원을 복원하자는 여론이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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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만국공원이 있는 응봉산은 해발고도 69미터로 산이라기보다는 언덕에 가깝지만 바다 가까이 있어서 상대적으로 높아 보인다. 한때는 매일 정오를 알리는 대포를 이 산에서 쏘았기 때문에 오포산이라고도 불렸다.
강화도 조약(1876년)에 따라 1883년에 인천의 개항이 되었고, 1884년 10월에 체결된 “인천제물포각국조계장정”이 체결되어 일본과 중국을 비롯한 서양 각국의 조계가 바로 응봉산 자락에 약 14만평의 면적으로 설치되었다. 응봉산은 공원으로 조성되기로 예정되었는데, 1888년에 만들어진 ‘대조선인천제물포조계지도’에는 공원과 묘지 위치가 정해졌다. 각국공원이 구체적인 모습을 갖춘 것은 1888년이지만 이미 그 이전에 각국 조계를 운영했던 신동공사의 기금으로 공원에 나무를 심고, 가로등을 설치하는 등의 편의시설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공원의 구체적인 설계는 러시아 사람인 사바친이 담당하여 1888년 11월 9일에 문을 열었다.
이렇듯 만들어진 만국공원은 19세기 후반부터 한반도에서 기지개를 서서히 켜고 있던 인천이 국제적인 도시로 탈바꿈하던 인천의 상징적인 공간이 되었다. 서양인들은 각국공원은 서울 탑골공원보다 먼저 만들어진 앞선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다. 그 후 일본조계를 중심으로 동쪽 일본신사가 있던 지역을 동공원이라 불렀기 때문에 그 서쪽에 있는 만국공원을 서공원이라 불렸다. 광복 후에는 다시 만국공원이라 불리다가 1957년에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여 자유를 되찾았다는 뜻에서 만국공원을 자유공원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만국공원과 그 주변에는 과거의 조계지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먼저 만국공원의 홍예문은 인천 시내 남북간의 교통 불편을 해소한다는 명분으로 일본 공병대가 1906년 착공하고 1908년 준공하였다. 화강석과 벽돌을 혼용한 아치구조로 비교적 원형이 잘 보전되어 있다.
인천에 거주하던 영, 미, 독, 러, 일본인들의 사교장이었던 제물포구락부(1901)는 1931년 정방각(情芳閣), 해방 후 미군 장교클럽, 휴전 후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박물관으로 변신을 거듭했고, 1990년부터 2006년까지 인천문화원으로 사용되다 2007년 제물포구락부로 재탄생하였다.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은 한 세기 동안 맹방의 결속을 다진 양국간의 영원한 우애와 유대를 상징한다. 외형은 돛을 형상화시켜 인간, 자연, 평화, 자유를 상징하는 8개 탑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천기상대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관측소이다. 1904년 통감부 관측소로 기상관측업무를 시작한 이래 변화를 겪다가 6‧25전쟁 후에는 인천기상대로 재편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질문1 사바친은 한국의 근대건축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가 설계한 건축물은 어떤 것이 있고 또 어떤 특징이 있는 지 조사해봅시다.
읽기자료 2
1919년 3·1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날 때 인천에서도 3월 7일과 8일 시내 각지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되고 3월 9일에는 만국공원과 시내에 수백 명의 시위대가 독립만세를 외치다 해산되었다. 이후 상인들은 상가철시 등으로 항거하였다.
만세시위운동이 한창이던 3월 초순 일부에서는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 중심인물이 바로 홍진(면희)과 이규갑이었다. 특히 홍진은 인천에 연고가 있어서 1919년 4월 2일 만국공원에서 13도 대표들이 모이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물론 만세시위가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려는 의도에서 서울이 아닌 인천을 택한 면도 있었다.
그러면 인천 만국공원에서 있었던 13도 대표 대회는 어떻게 열리게 되었으며, 여기에서 논의된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임시정부 수립이 논의된 시기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3·1운동의 시작과 거의 같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3월 1일부터 비밀리에 간행된 조선독립신문에 3월 3일자와 5일자에 ‘가정부(假政府)’, ‘13도 대표자를 선정하여 가정부를 조직하며 가대통령을 선거하겠다.’는 등의 기사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임시정부를 조직할 생각을 한 사람은 현재까지의 자료로 본다면 홍진과 이규갑이다. 이들은 평양에서 개신교를 선교하다가 만난 사이인데, 특히 법률을 전공한 홍진은이 3·1운동을 좀 더 조직적이고 계통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주로 개신교 인사들과 접촉하면서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일에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국민의 총의를 대표할 만한 지역 대표라든지 또는 각 단체의 대표들을 모아 그 이름으로 밀고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검사 출신인 홍진은 주로 법조계 사람들을 만나 당시 현직 검사인 한성오와 변호사 권혁채 등을 끌어들였고, 자금 조달 능력이 있는 한남수, 유교의 김규 등을 끌어들였다. 이규갑은 주로 개신교 사람들을 접촉하여 장붕, 박용희, 김사국 등을 끌어 들였다.
이들은 일제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현직 검사인 한성오 집에서 비밀리에 만나 임시정부를 조직하였다. 여기에서 개신교 측과 유교 측의 의견이 약간 달라 절충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정부 이름을 ‘한성정부’라 하였고, 정부수반 명칭은 ‘집정관 총재’로, 각원은 ‘총장’으로, 민의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는 ‘평정관’,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대표, 정부의 헌법인 ‘약법’도 논의가 되었다. 이렇게 한성정부 조직안을 마련한 뒤에는 먼저 각 지역의 대표들을 소집하여 13도 대표자대회를 열어 한성정부 조직안을 통과시킨 뒤 13도 대표들이 주도하는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한성정부의 수립을 공포한다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13도 대표자 대회를 열었다. 여기에 참석한 이들은 개신교의 박용희, 장붕, 이규갑, 홍면희(홍진), 권혁채, 유교의 김규 등 수원과 강화 등에서 온 20여 명이었다. 비록 전국에서 모두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13도 대표자대회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대의제 민주주의로서 국민적 기반과 절차를 갖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는 이미 마련한 한성정부의 조직안과 헌법인 약법 등을 통과시키고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임시정부의 수립을 선포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런데 회의가 열리자 한남수가 “현재로서는 파리에서 열리고 있는 강화회의 상황과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있다고 알려진 상하이 사정을 알아본 뒤 임시정부를 추진하자.”는 신중론을 제기하였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이미 대한국민의회라는 임시정부가 선포되었고, 상하이에서도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상하이에서는 임시정부 수립에 필요한 국민과 지지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국내의 임시정부 수립과 연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통제가 심하여 비밀리에 연락해야 하는 상황에서 서로의 사정을 잘 알 리가 없었다. 결국 국민대회와 임시정부 선포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는지의 여부를 확인한 뒤 결정하기로 결론지었다.
그리하여 한남수가 상하이에 가서 사정을 알아본 뒤 연락하기로 하고 4월 8일 서울을 출발하였다. 한남수가 상하이에 도착한 것은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란 4월 11일보다 닷새 늦은 4월 16일이었다. 게다가 간첩들이 많아서 상하이 임시정부 인사를 만난 후 서울로 연락한 것이 4월 21일이었다.
국내에서는 한남수의 소식을 기다렸으나 오지 않자 홍진은 서둘러 상하이로 갈 것을 결심하였다. 한성정부가 이미 추진되기로 계획되었고, 국내에서 국민적 기반을 갖고 수립된 임시정부를 국외로 옮겨서 활동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홍진은 국민대회와 임시정부 선포를 현석칠 등에게 맡기고 한남수의 소식이 전해지기 전인 4월 15일 경에 이규갑과 함께 상하이로 출발하였다.
홍진과 이규갑은 한서정부 관련 문서를 담배갑과 성냥갑에 감추고 평양을 거쳐 압록강을 건넜다. 한성정부의 수립이 상하이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 질문1 13도 대표자대회가 인천에서 열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 질문2 인천에서 의병활동이나 만세시위가 일어나기 어려웠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읽기자료 3
① 홍진
홍진(洪震, 1877~1946)은 서울 서소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밑에서 성장하였는데 어머님으로부터 엄한 교육을 받았다.
1898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한 선생은 한성평리원(漢城平理院) 주사를 거쳐 1899년 평리원 판사가 되었다. 1905년부터 충청북도 충주재판소 검사로 전보되어 근무하던 중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검사직을 사직하였다.
이후 서울과 평양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의 변호와 변론에 노력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조직적인 활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국내에서 임시정부, 즉 한성정부의 수립을 계획하였다. 이것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가는 3․1운동을 지도하고, 또 일제 타도 이후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같은 원대한 구상에서 1919년 3월 17일 홍진은 한성정부를 조직하기 위한 준비모임을 서울의 한성오 집에서 가졌다. 이 자리에서 홍진은 한남수, 이규갑, 김사국 등과 한성정부의 수립을 논의한 뒤, 13도 대표자 대회를 열어 정부 조직과 조각을 결정하기로 하였는데, 그 소집 책임을 맡았다.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13도 대표자 대회가 개최되어 여기에서 한성정부의 조직과 조각이 정비 확정되었다. 그리고 서울에서 4월 23일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한성정부의 수립을 대내외에 선포하기로 결의하였다.
홍진은 이 같은 사실을 국외 각 지역에 알리기 위하여 4월 8일 정부 조직표와 조각 명단을 휴대하고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홍진은 상하이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의 의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5월 2일 제4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홍진은 당장 시급한 임시정부의 재정문제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독립공채의 발행, 독립의연금의 수합이나 세금의 징수 등을 제안하였다. 7월에는 임시의정원의 법제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여러 가지 법률을 제정하여 임시정부가 근대적 법치의 틀을 마련하는데 기여하였고, 블라디보스토크 대한국민의회와 상하이 임시정부 그리고 한성정부 사이의 통합할 때 13도 대표의 합의와 국민대회를 통하여 수립된 한성정부가 국민적 기반을 가지고 있어서 정통 정부로 하고 상해 임시정부와 노령 대한국민의회를 통합하는 형식으로 할 것을 주장하였다.
1921년 5월에 제3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장에 선출되어 1921년 11월 워싱턴에서 열린 태평양 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에게 독립청원서를 발송하였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운영을 둘러싸고 논란을 벌인 1923년의 국민대표회의에서도 창조파와 개조파의 갈등과 반목을 해소시키려고 노력하였다.
1925년에 헌법이 개정되어 국무령제로 되었을 때인 1926년 7월 제4대 국무령에 추대되어 “1. 비타협적(非妥協的) 자주 독립운동을 진작한다. 2. 전민족(全民族) 대당체(大黨體)를 건립한다. 3. 각 피압박 민족과 대연맹을 체결하고, 기타 우의(友誼)의 국교(國交)를 증진한다.”는 시정방침을 밝히고 일제와 타협하려는 기회주의를 배격하고 모든 민족을 하나로 하겠다는 민족유일당 운동을 촉발시켰다.
그리고 스스로 1927년에 ‘전민족적 독립당 결성의 선언문’ 발표를 주도하고 ‘한국유일독립당 관내 촉성회 연합회’를 성립시켰다. 그리고서 만주 각지의 독립운동 단체를 순방, 설득하여 각 단체의 통일을 종용하면서 유일독립당 건설에 힘썼으나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먼저 독립운동 정당을 창당한 뒤 이를 민족대당을 결성하는 방안을 모색하여 1930년 7월 길림성에서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여 만주의 독립운동 세력을 총망라한 만주 유일의 독립운동 정당으로 발전시켜 가면서 당군으로서 한국독립군을 편성하고, 총사령으로 지청천을 선임하였다. 지청천이 지휘하는 한국독립군은 중국 항일구국군과 한중 연합 작전을 전개하여 1932년 9월 쌍성보 전투, 1933년 7월 사도하자 전투, 동경성 전투, 9월 대전자령 전투 등에서 일본군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일제는 1932년 만주국을 세워 만주 지역을 사실상 식민지화하면서 이 지역의 한국독립군과 중국 항일구국군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감당할 수 없어서 결국 한국독립당은 1933년 11월 본부를 남경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1937년 7월 7일 일제는 노구교(蘆溝橋) 사건을 기화로 중일전쟁을 도발하여 남경도 위기에 직면하자 임시정부를 따라 1937년 11월 남경을 떠나 1939년 5월 사천성 기강에 도착하였다. 임시정부는 중경으로 이동한 직후인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사령부를 창설하고 광복군을 편성할 때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이후 1942년 임시의정원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어 임정의 확대 강화, 광복군의 전력 강화, 임정의 국제적 승인 획득, 재중한인의 권익 옹호 등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광복 후 1945년 12월 2일 임정 요인의 제2차 환국 때 귀국하였지만 곧바로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안에 대하여 비상국민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반탁운동과 건국 사업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다가 1946년 9월 9일에 서거하였다.
② 이규갑
홍진과 함께 한성정부 수립에 참여한 이규갑(李奎甲, 1888~1970)은 충무공 이순신의 9대 손이다. 그는 어머니의 강권으로 1908년 의병에도 참여했다. 그 뒤로 전도사로사 평양에서 활동하다가 홍진을 만나게 되어 함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고 함께 상하이로 망명하여 한성정부의 존재를 해외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알려 상하이, 대한국민의회가 통합될 때 국내에서 13도 대표들이 모여 국민의 총의에 입각하여 만든 정부로서 정통성을 인정받게 하는데 공헌하였다.
이규갑의 부인 이애라도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다가 남편을 찾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서 결국 만났으나 일본 경찰의 가혹한 고문 후유증으로 겨우 며칠을 함께 지낸 후 이역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규갑은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고 임시의정원 충청도대표의원에 선임되었다. 이어 충청도 의원으로 재선되어 국채통칙 및 공채발행조례를 통과시키는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성에 진력하였다. 1927년 국내에서 신간회 경동지회장에 선임되어 민족유일당운동을 전개하였다.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회의 재무부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50년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문교·사회분과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신동아』 1969년 4월호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첫째 나는 죄인이다. 평생을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했다고 하지만 아직도 제 영토를 영유하지도 못하고 있으며, 수많은 동지들을 내 손으로 무고하게 희생시켰으니 그런 불충이 없다. 나는 나라에 죄인이다. 둘째 나는 문중의 죄인이다. 나로 인하여 내 처가 죽고 자식이 죽고 친족 7명이 죽었다. 나 때문에 문중에서 왜적에게 죽은 사람만도 9명이나 되니 선영에 그런 작죄(作罪)가 있겠는가. 셋째 나는 내 신체에 대한 죄인 조인이다. 부에게서 받은 소중한 내 몸을 나는 무수히 학대했다. 왜적에게 잡혀 감옥행을 한 것만도 33회나 된다. 끔찍한 고문도 많이 당하고 매도 많이 맞아서 지금의 내 노구(老軀)는 성한 데라고는 없다. 이 또한 불효요, 불경이니 나는 내 몸에 죄인이다.”
- 질문1 이규갑처럼 가족이 독립운동에 헌신한 분들을 찾아봅시다.
시각자료
시각자료 1
현재 한미수교백주년기념탑 자리에 있던 존스턴 별장 사진: 6‧25 전쟁으로 사라지기 전까지는 만국공원을 상징하는 건물이었다.
- 질문1 이 사진은 인천 만국공원의 상징으로 불렸던 존스턴 별장의 사진이다. 6·25 전쟁 때 포격으로 폐허가 된 뒤 철거되고 그 자리에 한미수교백주년기념탑이 세워졌다. 최근에는 만국공원을 복원하자는 여론과 함께 이 별장의 복원도 논의되고 있다. 그런데 현재의 만국공원에는 한성정부 수립을 위한 13도대표자 대회를 기념하자는 논의는 미약하다. 이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 지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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