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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혁 의거지(옛 부산경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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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부산 용두산 자락, 일본영사관으로 올라가는 계단 바로 오른편에는 1924년 9월 14일 의열단원이었던 박재혁이 폭탄을 던졌던 부산경찰서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당시 부산 시가지 전체를 관할하기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부산항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요지였다. 1874년 일본 거류민에 대한 경찰업무를 관장하면서 시작된 부산경찰서는 1897년 이곳으로 이전했고 1905년 청사를 신축했다. 부산경찰서는 박재혁 의사의 투탄의거가 있었던 직후인 1924년 6월 영정(榮町) 1정목 3번지로 이전하기까지 부산지역에서 1910년대 무단통치를 대표하는 헌병경찰제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였다. 
박재혁은 부산경찰서를 폭파하기 위해 1920년 9월 13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부산에서 동지인 최천택을 만나고 다음날 14일 오후 2시 부산경찰서로 가서 하시모토[橋本秀平] 서장에게 면회를 청하였다. 2층 서장실에서 서장과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고서를 구경시켜주는 척하며 폭탄을 던져, 서장은 오른쪽 다리에 중상을 입고 혼절했으며 박재혁도 다리에 중상을 당하여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현재 상태

일제는 강점 직후 1910년 9월 10일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하였다. 조선에 주둔하는 일본군 헌병사령관이 모든 경찰을 장악하는 경무총감이 되고, 각 도에 배치된 일본군 헌병대장이 도의 경찰부장을 겸임하였다. 강점 이전에 주로 도시에 배치되었던 일본군 헌병은 강점 이후 전국 방방곡곡에 분산 배치되었다. 이런 까닭으로 전국에 걸쳐 헌병이 단기간에 급증하였다. 곧 1910년에 전국의 헌병기관은 653개소, 헌병은 2,019명이었는데, 1911년에는 각기 935개소, 7,749명으로 1년 사이에 3배 이상 크게 늘었다.
이처럼 군인인 헌병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경찰 행정을 담당하는 헌병 경찰제도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헌병경찰이 아닌 일반 경찰의 수도 크게 늘었고, 그 기능도 헌병과 더불어 군대식으로 한국인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것이었다.
경찰의 조직을 보면 헌병사령관이 중앙의 경무총감이 되고, 도의 헌병대장이 도 경무부장, 위관이 경시, 하사관이 경부, 사병이 순사의 지위와 역할을 수행하였다. 헌병경찰은 정해진 법적 수속이나 정식 재판 절차를 거치지 않고 멋대로 한국인을 체포하여 벌금·태형·구류 등의 처벌을 가하였다.
일제는 헌병경찰에게 일정한 사법관의 특권을 부여하고, 헌병경찰제도를 뒷받침하는 각종 장치를 마련하였다. 1912년에는 1908년 통감부령 제44호로 발포했던 「경찰범처벌령」을 강화하여 부령 제40호로 「경찰범처벌규칙」을 반포하였다. 모두 87조로 구성된 이 법은 한국인의 항일 투쟁뿐 아니라 일상생활도 노예 상태로 묶어 두려는 목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또 제령 제10호로 「범죄즉결례」, 제령 제13호로 「조선태형령」을 제정, 공포하였다. 특히 태형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완전 폐지된 전근대적인 형별인데, 일제가 그들에게 공손하지 않거나 기분에 거슬리는, 또는 독립 사상을 가진 한국인을 탄압하기 위해 되살린 것이다. 일제의 잔혹한 태형 시행으로 아무 죄도 없는 한국인이 사망하거나 불구가 되는 일도 많이 일어났다. 이처럼 헌병경찰을 범죄 즉결 처분권, 민사 쟁의 조정권 등의 권한을 가지고 의병 토벌, 첩보 수집을 비롯하여, 일본어 보급, 농사 개량, 세금 징수, 산림·위생 감독 등 각종 행정업무까지 수행하였다.
한국인은 언제 어떤 트집으로 헌병경찰에 끌려가 태형을 당하고 처벌을 당할지 모르는 불안 속에 항상 떨어야 했다. 이 때문에 ‘순사 온다’라는 말이 가장 무섭게 여겨질 정도였다. 
일제는 조선총독부의 행정조직과 더불어 경찰관서와 헌병경찰을 거미줄처럼 엮어 놓고 한국인을 착취하고 탄압하였다. 그 결과 헌병경찰이 체포되어 즉결 처분된 건수를 보면 1918년 1년만 해도 94,640건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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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1910년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제국주의는 한국인의 저항을 무조건적 폭력수단으로 제압하기 위하여 헌병경찰제를 실시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1919년, 민족독립의 열망이 분출하며 거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났다.
3·1운동은 그 열기가 고조되면서 일부 지역에서 대중적 폭력항쟁의 면모도 내보였지만, 기본적으로는 비폭력 원칙 하의 평화적 만세시위운동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성격이 한계가 되어 3·1운동은 일제의 잔혹한 탄압을 뚫고나가지 못하였고, 결국 많은 희생을 낸 채 끝나고 말았다. 이에 망명 독립지사들은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조직적인 무장투쟁과 폭력적 수단의 동원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1919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노선은 외교론 일변도에서 민족독립 성취가 결국은 전쟁을 통해서만 가능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장기 전략을 수립하였다. 
무력투쟁은 비교적 큰 규모의 병력과 장비, 일정한 숙영지 겸 근거지, 조직편제와 지휘체계 등 이 세 가지가 필수요건이었다. 이에 비해 의열투쟁은 순전히 개인적인 결의와 준비로만 이루어지거나, 아니면 소집단 규모의 비밀결사나 큰 조직체에 속한 하위 별동조직의 독자적 판단과 선택에 의해 목표물과 행동방식이 결정되었다. 노출 가능성이 큰 근거지의 상비나 조직체계의 완비도 필요하지 않았다. 바로 이런 측면들 때문에 의열투쟁은 독립군의 편성과 군사작전의 전개가 매우 어렵거나 아예 불가능한 시·공간에서 우선적으로 채택되는 대체투쟁 방책이 되었다. 소수 인원과 적은 비용으로 기동성과 집중성을 최대한 발휘하여 수행되는 암살파괴활동은 군사행동 못지않게 위력적인 성과를 낳는 경제적인 투쟁방법이었다. 독립운동 방법으로서 의열투쟁이 1920년대 들어 채택되면서 이를 목적으로 한 독립운동 단채들이 설립되었다.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의 수립과 때를 같이하여 대한독립의군부는 조선독립군정사(朝鮮獨立軍政司)로 명칭을 바꾸고, 만주지역 독립운동계의 중견 지도자와 군사전략가들을 영입하여 조직을 확대 개편하였다. 그러나 군정사는 항일무장투쟁을 당장 개시할 만한 역량을 갖추고 있지 못하였다. 인적 자원은 상당 정도 확보되었으나, 그들을 무장시킬 무기, 장비, 자금 등이 열악한 수준이었다. 
조직적 무력항쟁을 당장에 실행하기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3·1운동으로 점화된 국내 민중의 독립 열망과 항일투쟁 의지를 고양시키기 위해 군정사 간부진은 일종의 ‘결사대’ 조직을 편성하여 국내의 적 기관과 그 요인들을 직접 타격·제거하는 방안으로 전환하였다. 이 방법은 적은 인원·적은 비용·적은 희생으로도 빠르고 큰 효과를 낼 수 있었다.
1919년 7월 김원봉과 이종암은 상하이로 가서 약 3개월에 걸쳐 폭탄 제조법 및 조작법을 배우고, 10월에 길림으로 귀환하였다. 이에 앞서 뜻을 모았던 동지들과 이후 길림으로 망명해 온 곽재기·윤세주·윤치형 등이 모여 합동으로 폭탄제조법을 배운 후, 1919년 11월 10일 의열단을 창립하였다.

  • 질문1 1920년대 의열투쟁이 독립운동의 중요한 전략으로 선택된 이유를 써봅시다.
  • 질문2 1919년 11월 10일 의열단 창립에서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던 사람은 누구인가요?

읽기자료 2

1895년 부산 범일동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난 박재혁은 15세 때 부친이 별세하여 어려운 생활환경에서도 학업을 계속하여 공립부산상업학교에 입학하였다. 재학 시절 그는 동지 최천택·오택 등 학우 겸 동지 16명과 함께 비밀결사 구세단을 조직하고, 매월 등사판 잡지를 발간하여 경남 일대의 청년들에게 보내어 동지 규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 활동이 일제 경찰에 포착되어 주도자들이 체포되었고, 일주일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고 훈방되었다. 
공립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한 박재혁과 그의 동지들은 계속해서 울산·경주·김해·밀양 등 부산·경남지역의 뜻있는 청년들과 접촉하고 규합하면서 독립운동을 모색하였다. 박재혁은 친척이 경영하는 경북 왜관의 곡물무역상에 취직하여 일하던 중 1917년 6월 상하이로 건너갔고, 이듬해 6월 귀국했다가 다시 상하이를 거쳐 싱가포르로 가서 남양무역회사에 취직하여 무역업에 종사하였다. 1920년 4월경 박재혁은 상하이에서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1920년 7월 의열단의 첫 국내거사 계획이 추진과정 막바지에 실패로 끝난 후, 김원봉은 지체 없이 대체거사를 추진키로 결심하고, 가사정리를 위해 귀국해 있던 박재혁을 불렀다. 1920년 8월초 상해로 가서 김원봉을 만난 박재혁은 거사 지시와 함께 폭탄 1개, 군자금 300원, 여비 50원을 수령한 후, 상하이를 출발하여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경유하여 9월 7일경 부산으로 들어왔다. 
부산경찰서를 폭파 응징 대상으로 잡은 박재혁은 서장이 중국 고서에 관심이 많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고서상으로 위장하여 부산경찰서를 찾아가 서장 면회를 청하였다. 서장실로 안내되어 하시모토〔橋本秀平〕와 마주앉은 박재혁은 보자기를 끌러 펴는 척하다 폭탄을 꺼내어 안전장치를 풀고 폭탄을 마루에 내려쳤다. 요란한 폭음과 함께 폭탄이 터지면서 방안은 흰 연기로 가득 찼다. 하시모토는 폭탄 파편에 맞아 피투성이로 쓰러져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절명하였다. 
우측 무릎 뼈에 중상을 입고서 현장에서 체포된 박재혁은 부산부립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치료 후 경찰서로 끌려가 취조를 받았다. 박재혁은 1920년 11월 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사형이 선고되고, 1921년 2월 1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무기징역이, 3월 31일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5월 11일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 질문1 박재혁의사는 부산경찰서를 폭파하기 위해 하시모토 서장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접근하였는지 써봅시다.

읽기자료 3

「조선혁명선언」은 1923년 1월 중국 상하이에서 신채호가 집필하고 의열단의 이름으로 발표된 민족혁명 선언문이다.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을 재정립하고 혁명적 민족주의의 폭력투쟁 노선을 옹호한다는 취지가 잘 나타나 있다.  
의열단 활동의 성과는 밀양폭탄사건, 부산경찰서 투탄의거, 밀양경찰서 투탄의거,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등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으로 의열단은 ‘의열투쟁’의 상징이요 대명사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의 독립운동계 일각에서는 의열단의 운동방법을 과격모험주의로 비난하거나, 맹목적인 자기만족적 테러리즘에 의존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하였다. 의열단은 그러한 비판에 적극 대응함과 아울러, 운동노선 및 투쟁방법의 정당성을 논리적으로 밝히고 이념적 지표를 분명히 정립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에 의열단장 김원봉은 1922년 12월 베이징에서 신채호에게 의열단의 독립운동 이념과 방법을 천명하는 선언문을 작성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신채호는 김원봉의 요청을 쾌히 승낙하고 「조선혁명선언」을 완성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 생존의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 (중략) 강도 일본이 헌병정치·경찰정치를 힘써 행하여 우리 민족이 한발자국의 행동도 임의로 못하고,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일체의 자유가 없어 고통의 울분과 원한이 있어도 벙어리의 가슴이나 만질 뿐이오, (중략) 이상의 사실에 의거하여 우리는 일본 강도정치 곧 이족통치가 우리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우리는 혁명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함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내정독립이나 참정권이나 자치를 운동하는 자가 누구이냐. (중략) 3.1운동 이후에 강도 일본이 또 우리의 독립운동을 을 완화시키려고 (중략) 이따위 광론을 외침이니, (중략) 일본 강도 정치하에서 문화운동을 부르는 자가 누구이냐? 문화는 산업과 문물의 발달한 총적(總積)을 가리키는 명사니, 경제약탈의 제도 하에서 생존권이 박탈된 민족은 그 종종의 보존도 의문이거든, 하물며 문화발전의 가능이 있으랴? (중략) 
강도 일본의 구축(驅逐)을 주장하는 가운데 또 다음과 같은 논자들이 있으니, 제1은 외교론 이니, (중략) 국망 이후 해외로 나가는 모모 지사들의 사상이, 무엇보다도 먼저 외교가 그 제1장 제1조가 되며, (중략) 최근 3·1운동의 일반 인사의 평화회의, 국제연맹에 대한 과신의 선전이 도리어 2천만 민중의 용기 있게 힘써 앞으로 나아가는 의기를 없애는 매개가 될 뿐이었도다.
제2는 준비론이니, (중략) 강도 일본이 정치·경제 양 방면으로 구박을 주어 경제가 날로 곤란하고 생산기관이 전부 박탈되어 입고 먹을 방책도 단절되는 때에, 무엇으로 어떻게 실업을 발전하며, 교육을 확장하며, 더구나 어디서 얼마나 군인을 양성하며, 양성한들 일본전투력의 백분의 일의 비교라도 되게 할 수 있느냐?
이상의 이유에 의하여 (중략) 조선민족의 생존을 유지하자면, 강도 일본을 쫓아내어야 할 것이며, 강도 일본을 쫓아내려면 오직 혁명으로써 할 뿐이니, 혁명이 아니고는 강도 일본을 쫓아낼 방법이 없는 바이다. 
(중략) 
이제 폭력 - 암살· 파괴 ·폭동 - 의 목적물을 열거하건대,
㉠ 조선총독 및 각 관공리
㉡ 일본천황 및 각 관공리
㉢ 정탐꾼·매국적
㉣ 적의 일체 시설물
(중략)
혁명의 길은 파괴부터 개척할지니라. (중략)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 암살· 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조선혁명선언」이 발표됨으로써 의열단원들의 사기와 자부심은 매우 높아졌다. 의열단에 대한 주변의 이해와 지지도 점점 높아졌다. 그 결과, 의열단의 조직세가 급속도로 신장되고 독립운동계 내에서의 영향력도 커졌다. 또 이를 바탕으로 더욱 강도 높고 큰 규모의 의열투쟁 거사와 폭동계획을 추진해 갈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조선혁명선언」의 발표는 의열단운동이 크게 도약하는 획기적 계기가 되었다.

  • 질문1 의열단이「조선혁명선언」을 발표한 목적을 써 봅시다.
  • 질문2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에서 기존의 독립운동의 방법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어떠한 독립운동의 방법에 대해 비판하고 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지 써 봅시다.
  • 질문3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에서 독립운동의 진정한 방략이 무엇이라고 보고 있으며 열거한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지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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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 질문1 사진은 과거 부산 이사청이 있던 자리이다.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 대한제국의 식민지화 작업에 본격 착수한다. 이사청은 통감부의 지방통치기관이었다. 일제는 1905년 이사청 언덕 바로 아래에 경찰청사를 신축하여 사용하였다. 이곳에 경찰서를 세운 일제의 통치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써 봅시다.

시각자료 2

그들의 생활은 밝음과 어두움이 기묘하게 혼합된 것이다. 언제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므로 살아 있는 동안이라도 마음껏 즐기려했던 것이다.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멋진 친구들이었다. ..... 사진찍기를 아주 좋아했으며, 언제나 이번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찍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 아리랑, 님 웨일즈 -


  • 질문1 사진은 부산경찰서 투탄의거의 주인공 박재혁 의사가 거사 전날 찍은 사진이다. 이처럼 당시 의열투쟁가들은 많은 사진을 남겼다. 위의 참조하여 의열투쟁가들이 남긴 사진이 가진 의미가 무엇인지 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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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의열단이 의혈단(義血團)’으로 잘못 기록되거나 발음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암살파괴운동이 격렬한 피의 항쟁과 죽음을 불사하는 영웅적 투쟁의 이미지로 오랫동안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1920년대의 의열단 활동을, 나아가 그 시기의 의열투쟁 전체를, ‘테러리즘의 범주로 파악하게 한다. 두 모둠으로 나누어 당시 의열투쟁을 테러리즘의 범주로 볼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토론해 봅시다.

 

* 테러리즘 : 어떤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직접적인 공포 수단을 이용하는 주의나 정책


모둠활동 2

김상옥, 나석주, 최수봉 등 1920년대 초반 의열단의 국내진입작전은 활기를 띄었다. 이들 의거는 주로 일제의 주요 식민 통치기관에 집중되었다. 다른 의열투쟁가들의 의거에 대해 더 찾아보고 의열투쟁에 참여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가족이나 동지, 민족에게 남기는 마지막 편지나 성명서를 써봅시다.


모둠활동 3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열기가 확산되면서 1920년대 한국 독립운동의 방략은 무장독립전쟁론을 제외하고도 외교론·준비론·문화운동론 등으로 다양화 되었다. 네 모둠으로 나누어 각각의 방략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어떠한 전략을 취할지 토론해 봅시다.

 


모둠활동 4

최근 각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지역 출신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기념사업 및 기념물 설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박재혁 의사의 동상의 경우 지금 현재 부산시 부산진구 초읍동 어린이공원 내 위치하고 있다. 몇 개 모둠으로 나누어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기념할 만한 의열투쟁가들을 조사해보고 이들의 업적을 선양하기에 알맞은 기념행사나 기념물 설치가 필요한지, 필요하다면 어떤 것이 있을지 토론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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