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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망명시절 단재가 한 친구와 함께 푸짐한 중국음식을 함께 하고 있을 때였다. 신채호는 음식을 배달하는 소년에게 음식 맛이 아주 좋다고 칭찬하고 나서 물었다. "그런데 이 고기는 무슨 고기이기에 이처럼 맛이 유별나지? 어디서 온 거니?" "그 고기는 동양어라는 것으로, 일본에서 직접 가져온 희귀한 고기죠." "뭐라고? 왜놈 음식이라고?" 그는 노발대발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길로 화장실로 달려가 먹은 음식을 모두 토해 버렸다. 대접한 친구가 도리어 미안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할 정도였다. 토하고 나서야 신채호도 친구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미안하네. 하지만 왜놈 고기는 내 위장이 좀처럼 받지 않으니 별 수 없지 않은가."
신채호(申采浩)(1880∼1936)는 한말에서부터 일제강점기에 걸쳐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언론인, 계몽사상가, 역사연구가로서 활동한 개화기의 지식인이었다. 또한 민족해방을 위한 염원으로 유자명과 함께 1923년 의열단의 독립운동노선과 투쟁방법을 천명한「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그는 투철한 역사의식을 가진 독립운동가로서 우리 현대사에 독특한 삶의 자취를 남긴 민족의 선각자이다.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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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는 본관이 고령이고, 호는 단재이다. 1898년 성균관에 입교하였다가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구한말에는『황성신문』과『대한매일신보』의 논설기자로 민족의식 고취에 진력하였으며, 신민회·기호흥학회 등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한편『독사신론』,『을지문덕』,『수군 제일위인 이순신전』,『동국거걸 최도통전』,『대동사천년사』등을 저술하여 근대민족사학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1910년 국외로 망명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간행된 민족지『권업신문』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1914년에는 윤세복이 경영하는 동창학교에서 청소년들의 국사교육을 담당하는 한편,『조선사』를 저술하였다. 1919년 4월 10일 상하이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한 최초의 29인 모임에 참가하였으나, 그해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에 이승만이 선출되자 분개하여 임시정부와 결별을 선언하고 반임시정부 노선을 취하였다. 10월에는 상하이에서『신대한』을 간행하여 무장투쟁노선을 지지하는 언론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20년에는 베이징으로 이동하여 제2회 보합단을 조직하였으며, 1923년에는「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였다.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창조파에 가담하였으며, 국민대표회의가 실패로 끝나자 실망하여 칩거하면서 국사연구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에『조선상고문화사』,『조선상고사』,『조선사연구초』등을 집필하였다.
이후 점차 무정부주의운동에 관심을 갖고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8년 4월에는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북경회의를 개최하고 그 회의의 결의에 따라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타이완의 가오슝[高雄]에서 활동하다 일제 관헌에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6년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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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신채호가 신문 언론계에 처음 투신한 것은 1905년 그의 나이 26세부터이다. 『황성신문』의 사장 장지연의 초빙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그 신문의 논설기자가 되어 언론활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그 후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참여하였고, 부녀자들의 계몽잡지인 『가뎡잡지』의 편집인으로도 활동하였다.
신채호는 1910년까지 국내에서는 전국민에게 가장 영향력이 큰 애국계몽 사상가이며 운동가였으며,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할 만큼 민족주의 사관을 정립시키는데 공헌하였다.
그는 언론을 통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반외세 민족운동노선을 펼쳤다.
그러나 국권피탈 후 국내의 활동에 한계를 느끼고 동지들과 망명을 떠나게 되었다.
신채호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대양보』와 『권업신문』의 주필로 활동하면서 일본의 한국 통치를 맹렬하게 공격하고 민족혼을 불러일으키는 논설을 게재하여 독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국내에서 3·1운동이 거족적으로 일어나자 신채호는 국외 독립운동의 중심적 거점이었던 상하이로 와서 임시정부조직에 참여하였다. 1919년 10월 28일에 『신대한』을 발행하고 그 주필로 활약하였다. 이 신문은 신규식의 후원아래 발행된 것으로 임시정부의 노선과 행동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기사와 함께 『독립신문』의 문약한 논조를 낱낱이 지적하고 공격하였다. 그가 집필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창간사에는 신문 발행의 목적을 '독립을 부르짖어 원수 적을 꾸짖으며 내외사정을 보도하여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자 하며, 우리도 미래의 이상세계는 빈부평균을 주장하나 2천년의 원수가 우리의 수족을 묶고 도살을 실시하고 있으니 우리가 바라는 바는 원수를 물리치고 민족을 보전할 문제'라고 주장하였다.
신채호는 중국에서 『천고』라는 순한문 잡지를 발행하기도 하고 『중화보』와 같은 중국어신문에 논설을 기고하기도 하는 등 언론활동을 계속하였다. 특히 국내의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시대일보』 등에도 논설이나 사론을 게재하였다. 1928년 무정부주의 활동에 연루되어 뤼순감옥에서 수형 생활을 하면서도 역사연구와 집필을 계속하였다.
- 질문1 신채호가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언론활동에 매진한 목적은 무엇인가요?
- 질문2 신채호가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3 신채호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주필로 활동했던 신문은 무엇인가요?
- 질문4 신채호가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신대한』창간사에서 주장한 내용을 정리하여 써 봅시다.
읽기자료 2
신채호는 언론인으로 또 독립운동가로 활동했지만 역사학자이기도 하였다. 그가 국내에서 활동하였던 초창기 사관은 소수의 영웅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영웅주의사관'을 가지고 있었으나,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고대사에 대한 관심과 연구로 고대문화를 폭 넓게 이해하게 되면서 영웅주의 사관을 극복하고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에는 역사의 주체인 민중이 혁명을 주도하여 항일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에 폭력적 항일운동과 무정부주의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채호의 사관은 시기에 따라 변화를 가져왔지만, 독립운동가로서 국권을 회복하고자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구한 민족주의자였던 것이다. 그가 국사의 연구와 교육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생각한 것은 그것이 단순한 '국사의 연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통해 민족의 자강과 나라의 완전한 독립을 추구하고자 한 것이다.
그의 사학은 민족의 자강과 독립이라는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지만, 민중을 주체로 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유교적인 전근대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근대사학으로 발돋움하였다.
- 질문1 신채호의 초창기 사관은 무엇인가요?
- 질문2 신채호가 국사의 연구와 교육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3 신채호가 역사 연구에 매진한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3
신채호는『신대한』사건을 계기로 상하이임시정부와 결별하고 베이징으로 돌아와 항일운동에 매진하였다. 보합단 조직에 참여하여 내임장으로 추대되어 활동하는가 하면 독립운동의 행동대였던 '다물단'의 고문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다물단은 이회영의 조카인 이규준이 중심이 되어 만든 무장독립운동단체로 다물은 ‘조국의 광복’이라는 의미를 가진 말이었다.
신채호는 1922년에 김원봉이 이끌던 의열단에 고문으로 가입하여 의열단 선언인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였다. 일제에 대한 비타협적인 폭력투쟁으로 일관하는 의열단은 그의 운동정신에도 부합하는 단체였다.
그는 조국 독립운동의 결실을 민중혁명으로써 이룰 수 있다고 판단하고, 1924년 베이징에서 처음 결성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기관지인『정의공보』에 논설을 실으면서 무정부주의운동에 관심을 나타냈다.
이후 신채호는 자신이 관여하였던 통일전선체인 신간회운동이 무산되자 무정부주의 운동에 더욱 매진하였다. 1927년 난징에서 수립된 무정부주의동방연맹에 가입하였으며, 무정부주의 기관지인 『탈환』, 『동방』 등의 잡지에도 많은 글을 기고하였다.
신채호는 1928년 4월 조선인 무정부주의자들의 베이징동방연맹대회부터 무정부주의 혁명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였다.
1928년에 그는 1920년 재혼한 부인 박자혜와 아들 수범을 불러 얼굴을 본 후 무정부주의운동의 본격적인 활동을 위하여 공작금 마련을 위한 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방법은 외국위조지폐를 만들어 이를 폭탄제조소 설치에 사용하는 것이었다. 신채호는 중국인 유병택이라는 가명으로 일본에서 이 위폐를 교환하려 하였으나 발각되어 타이완 기륭항에서 체포되었다.
- 질문1 신채호가 무정부주의운동을 펼친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요?
- 질문2 신채호가 위조지폐를 만든 이유를 써봅시다.
읽기자료 4
「조선혁명선언」은 1923년 1월 중국 상하이에서 신채호가 집필하고 의열단 이름으로 발표된 민족혁명 선언문이다.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을 재정립하고 혁명적 민족주의의 폭력투쟁 노선을 옹호한다는 취지가 잘 나타나 있다.
의열단 활동의 성과는 밀양폭탄사건, 부산경찰서 투탄의거, 밀양경찰서 투탄의거,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등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으로 의열단은 ‘의열투쟁’의 상징이요 대명사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의 독립운동계 일각에서는 의열단의 운동방법을 과격모험주의로 비난하거나, 맹목적인 자기만족적 테러리즘에 의존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하였다. 의열단은 그러한 비판에 적극 대응함과 아울러, 운동노선 및 투쟁방법의 정당성을 논리적으로 밝히고 이념적 지표를 분명히 정립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에 의열단장 김원봉은 1922년 12월 베이징에서 신채호에게 의열단의 독립운동 이념과 방법을 천명하는 선언문을 작성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신채호는 김원봉의 요청을 쾌히 승낙하고 「조선혁명선언」을 완성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 생존의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 (중략) 강도 일본이 헌병정치·경찰정치를 힘써 행하여 우리 민족이 한발자국의 행동도 임의로 못하고,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일체의 자유가 없어 고통의 울분과 원한이 있어도 벙어리의 가슴이나 만질 뿐이오, (중략) 이상의 사실에 의거하여 우리는 일본 강도정치 곧 이족통치가 우리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우리는 혁명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함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내정독립이나 참정권이나 자치를 운동하는 자가 누구이냐. (중략) 3.1운동 이후에 강도 일본이 또 우리의 독립운동을 완화시키려고 (중략) 이따위 광론을 외침이니, (중략) 일본 강도 정치하에서 문화운동을 부르는 자가 누구이냐? 문화는 산업과 문물의 발달한 총적을 가리키는 명사니, 경제약탈의 제도 하에서 생존권이 박탈된 민족은 그 종족의 보존도 의문이거든, 하물며 문화발전의 가능이 있으랴? (중략)
강도 일본의 구축을 주장하는 가운데 또 다음과 같은 논자들이 있으니, 제1은 외교론이니, (중략) 국망 이후 해외로 나가는 모모 지사들의 사상이, 무엇보다도 먼저 외교가 그 제1장 제1조가 되며, (중략) 최근 3·1운동의 일반 인사의 <평화회의> <국제연맹>에 대한 과신의 선전이 도리어 2천만 민중의 용기 있게 힘써 앞으로 나아가는 의기를 없애는 매개가 될 뿐이었도다.
제2는 준비론이니, (중략) 강도 일본이 정치·경제 양 방면으로 구박을 주어 경제가 날로 곤란하고 생산기관이 전부 박탈되어 입고 먹을 방책도 단절되는 때에, 무엇으로 어떻게 실업을 발전하며, 교육을 확장하며, 더구나 어디서 얼마나 군인을 양성하며, 양성한들 일본전투력의 백분의 일의 비교라도 되게 할 수 있느냐?
이상의 이유에 의하여 (중략) 조선민족의 생존을 유지하자면, 강도 일본을 쫓아내어야 할 것이며, 강도 일본을 쫓아내려면 오직 혁명으로써 할 뿐이니, 혁명이 아니고는 강도 일본을 쫓아낼 방법이 없는 바이다.
(중략)
이제 폭력 - 암살· 파괴 ·폭동 - 의 목적물을 열거하건대,
㉠ 조선총독 및 각 관공리
㉡ 일본천황 및 각 관공리
㉢ 정탐꾼·매국적
㉣ 적의 일체 시설물
(중략)
혁명의 길은 파괴부터 개척할지니라. (중략)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 암살· 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조선혁명선언」이 발표됨으로써 의열단원들의 사기와 자부심은 매우 높아졌다. 의열단에 대한 주변의 이해와 지지도 점점 높아졌다. 그 결과, 의열단의 조직세가 급속도로 신장되고 독립운동계 내에서의 영향력도 커졌다. 또 이를 바탕으로 더욱 강도 높고 큰 규모의 의열투쟁 거사와 폭동계획을 추진해 갈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조선혁명선언」의 발표는 의열단운동이 크게 도약하는 획기적 계기가 되었다.
- 질문1 의열단이「조선혁명선언」을 발표한 목적을 써 봅시다.
- 질문2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에서 기존의 독립운동의 방법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어떠한 독립운동의 방법에 대해 비판하고 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지 써 봅시다.
- 질문3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에서 독립운동의 진정한 방략이 무엇이라고 보고 있으며 열거한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지 써봅시다.
시각자료
시각자료 1
- 질문1 신채호가 지은『을지문덕』이다. 신채호는 초창기에 이외에도 『이태리건국 삼걸전』,『수군 제일위인 이순신전』,『동국거걸 최도통전』과 같은 위인전을 많이 썼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시각자료 2
- 질문1 독립기념관에 있는 신채호 어록비 중 일부이다. 신채호가 일본을 물리치기 위해서 제시한 방법은 무엇인가요?
시각자료 3
- 질문1 독립기념관에 있는 신채호 어록비 중 일부이다. 신채호의 역사에 대한 정의를 정리하여 써 봅시다.
모둠활동
왼쪽 사진은 신채호와 박자혜의 결혼식 사진이고, 오른쪽은 뤼순감옥 시절 신채호의 모습이다. 모둠별로 박자혜의 입장에서 신채호에 대한 탄원서를 작성하여 발표해 봅시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열기가 확산되면서 1920년대 한국 독립운동의 방략은 무장독립전쟁론을 제외하고도 외교론, 준비론, 문화운동론 등으로 다양화 되었다. 네 모둠으로 나누어 각각의 방략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어떠한 전략을 취할지 토론해 봅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