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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앙 형제 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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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앙(1887~1958)의 본명은 용은(鏞殷)으로 소앙(素昻)은 호이다. 1887년에 태어난 조소앙은 1904년 황실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유학 중이던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동료 유학생들과 우에노공원에서 매국노들의 행위 규탄 대회를 열었다. 1912년 귀국하여 이듬해 상하이로 망명한 조소앙은 이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안중근·이회영 등이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무력투쟁을 택했다면 조소앙은 이론과 사상으로 민족운동을 선도한 인물이었다. 그는 신규식·박은식·홍명희 등과 함께 독립운동단체를 만들고, 1917년 7월 상하이에서 임시 정부를 조직하자는 「대동단결선언」을 기초하였다.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국제사회당 대회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의제로 제출하여 국제기구에서 논의되는 성과도 거두었다. 1918년에 각 지역 독립운동가 39명의 동의와 서명을 얻어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사람도 조소앙이었는데, 이 선언서는 일본에 대한 독립군의 혈전을 선포하여 독립전쟁노선을 지향하였다. 이후 조소앙은 임시 정부의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 헌장’과 ‘임시의정원법’을 기초하며 임시 정부의 틀을 정립하고, 임시정부에서 국무원 비서장·외무부장․임시의정원 의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한국독립당의 창당위원장 및 부위원장 등 임정의 핵심 간부로서 활동하였다.
조소앙의 업적 중 널리 알려진 것이 삼균주의이다. 1920년대 이론의 기초를 정립한 삼균주의는 민족 해방 운동의 단결을 도모하고 독립국가의 비전을 제시한 이론으로서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핵심으로 삼는다. 즉 고르게 정치에 참여하고, 고르게 잘 살고, 고르게 교육을 받아 개인 뿐 아니라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에 균등한 생활을 이루자는 사상이다. 삼균주의는 1930년대 한국독립당의 이념으로 채택된 데 이어, 좌우익 독립운동 단체의 주요 이념이 되었다. 특히 1941년 임시 정부의 대한민국 건국 강령에 삼균주의가 반영됨으로써 독립 후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사상으로 주목받았다. 마침내 광복한 조국에 귀국한 조소앙은 이후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남북협상에 참가하는 등 분단을 막기 위해 힘을 쏟았다. 그러나 남북협상이 실패로 끝나자 사회당을 결성하여 삼균주의의 정책적 실현을 시도했으나 6·25 전쟁 중 납북되어 1958년 북한에서 사망하였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현재 상태

조소앙은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 지배, 광복과 분단이라는 역사의 거센 흐름을 고루 경험한 인물이다.
조소앙은 명문가에서 출생하여 6살 때부터 정삼품 통정대부였던 조부 조성룡에게 한학을 배웠고, 성균관에서 수학한 뒤 황실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유학한 수재였다. 명문가 엘리트 코스를 밟았던 조소앙은 일본에서 약소국 국민으로서 차별 대우를 경험하고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목격하게 되었다.
1904년 인천항을 출발하여 도쿄에 도착한 조소앙을 비롯한 최린, 최남선 등의 황실 유학생은 동경부립제일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일본인과 구별된 실업 위주의 차별 교육과 뒤이은 일제의 을사늑약 체결에 반발하여 조소앙을 비롯한 한국 유학생들은 동맹 휴교를 단행하고 기숙사를 퇴사하였다. 중학교의 교육 방침에 대한 유학생들의 평소 불만이 폭발한 것이었지만, 거기에는 을사늑약을 전후한 한국 유학생들의 민족적 울분이 기본적으로 깔려있었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때에도 조소앙은 '한․일병합조약'에 반대하는 '한․일합방 성토문'을 작성하고 비상 대회를 소집하려다 발각되어 심한 고초를 겪었다. 1910년에 일제에게 조국의 국권을 피탈당한 이후 조소앙은 멸망한 조국과 가난한 민족을 구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메이지 대학을 졸업한 조소앙은 1913년 베이징을 거쳐 상하이로 망명하여 신규식, 박은식 등이 만든 항일단체 동제사에 가입하고 박달학원 교사로 활동하였다. 1917년 조소앙은 스웨덴 스톡홀름의 국제사회당 대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국제 문제로 논의하였으며, 「대동단결선언」을 기초․발표하여 민주공화정이라는 독립국가의 지향점을 뚜렷이 제시하였다. 이듬인 1918년 기초한 「대한독립선언서」를 통해 민족 해방의 방법으로 무장 독립을 강조하였다. 민주공화정을 향한 이념은 민중이 주체적으로 참여한 3․1운동 이후 독립국가의 밑그림으로 굳어졌다.
조소앙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 정부 헌법, 의정원법 기초위원과 심사위원을 지내며 민주공화제 헌법의 기초를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임시 정부 초대국무원 비서장을 역임한 후 국무위원을 선임했고, 영국·프랑스·스위스·네덜란드 등 세계 각국을 돌며 만국평화회의, 만국사회당대회, 국제사회당집행위원회 등에서 활동하여 한국 자주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조소앙은 1922년 임시 정부 외무총장·의정원의장이 되어 의열단원이던 김상옥을 국내에 밀파하여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 등을 지원하기도 했다. 1929년에는 김구·안창호·이시영·이동녕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교육균등·권리균등·경제균등의 삼균주의를 주장했다. 고르게 교육받고, 고르게 정치에 참여하고, 고르게 잘 살아 개인뿐 아니라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에도 균등한 생활을 이루자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조소앙의 삼균주의는 한국독립당의 당 이념으로 채택된 데 이어 한국국민당, 민족혁명당 등 좌·우익 정당의 정강과 정책에 채택되었고, 임시 정부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건국강령」에도 반영됐다.
충칭 임시정부의 외무부장을 지낸 조소앙은 광복을 맞은 1945년 임시 정부 요인으로서 귀국하였고, 1948년 김구와 함께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남북 협상에 참가하는 등 통일을 위해 힘을 쏟았다. 같은 해 12월 사회당을 결성하여 삼균주의의 정책적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고, 1950년 2대 총선에서는 서울 성북구에 출마하여 전국 최고 득표를 기록하며 당선되었다. 하지만 6·25 전쟁 때 강제 납북되면서 조소앙과 삼균주의는 잊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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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조소앙은 16세가 되던 1902년 서울로 올라와 성균관에 입학하여 대한제국 관료의 길을 모색하였다. ‘구본신참’의 관점에서 신학문을 배울 필요성을 느낀 조소앙은 1904년 2월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하는 한편, 성균관을 퇴학하고 황실 특파 일본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조소앙은 일본 유학시절 『동유략초』라는 일기를 남겼다. 1904년 10월 황실 특파 유학생 50명의 일원으로 인천항을 출발할 때부터 1912년 5월까지 약 8년 동안 날짜별로 쓴 일기를 통해 조소앙의 일본 유학 생활을 알 수 있다. 1904년 10월 인천항을 출발해 도쿄에 도착한 조소앙은 동경부립제일중학교에 입학하였는데, 한국 유학생만으로 구성한 반에서 일본인과 별도로 실업 위주의 교육을 받았다. 그러던 차에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조소앙은 1905년 11월 24일 일기에 “오늘 같은 수치는 처음 느꼈다. 오백 년 사직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듯하다. 2,000만 국민이 일시에 노예가 되지 않았는가. 가슴이 터져나가는 것 같다”라며 망국 청년의 아픔을 털어 놓았다. 특히 한국 유학생들에게 고등교육은 무리라는 동경부립중학교 교장의 인터뷰 기사가 신문에 실리자 크게 반발한 한국 유학생들은 12월 5일 동맹휴교를 단행하였고, 조소앙을 비롯한 37명 전원이 기숙사를 퇴사했다. 조소앙은 이 문제로 퇴학당해 메이지대학 진학이 늦어져 다른 유학생들보다 귀국이 늦어지면서 1910년 ‘한․일병합조약’의 강제 체결을 일본에서 지켜봐야만 했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겪은 조소앙은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일본에 양여하는 '한․일병합조약'에 반대하는 '한․일 합방 성토문'을 작성하고 비상 대회를 소집하려다 발각되어 심한 고초를 겪었다. 우여곡절 끝에 1908년 메이지대학에 입학한 조소앙은 재학 중 한국 유학생 단체인 대한흥학회의 편찬부장, 총무 등 간부로 활동하면서 일제의 국권 피탈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감시 아래 매우 불안한 상태에서 조소앙은 병을 얻기도 했는데, 그는 ‘나라가 망하니 몸도 병든’ 상황이 되었다고 한탄하였다.

  • 질문1 조소앙을 비롯한 한국 유학생에 대하여 동경부립제일중학교는 어떠한 교육정책을 폈을까요?
  • 질문2 한국 유학생은 동경부립제일중학교의 교육정책에 어떤 방법으로 반발했나요?
  • 질문3 '한․일병합조약'에 반대했던 조소앙의 활동 내용을 써봅시다.
  • 질문4 일본 유학 생활이 조소앙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읽기자료 2

조소앙은 일본 유학 중 동서양의 다양한 지식과 사상을 학습하였다. 동시에 국권 피탈이라는 민족적 수난을 경험해야만 했다. 1912년 대학을 졸업한 조소앙은 이듬해 베이징을 거쳐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그는 상하이에서 신규식, 박은식 등이 만든 동제사에 가입하고 박달학원 교사로 활동했다.
1917년에 조소앙은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국제사회당 대회에 참가하여 주권불멸론,  민권민유론을 담은 발제로 한국의 독립 문제를 국제기구에서 논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같은 해 조소앙, 신규식, 신채호, 박은식, 박용만 등 14명과 함께 중국 상하이에서 발표한 「대동단결선언」에서 조소앙은 독립국가의 지향점을 뚜렷이 제시하였다.

 

「대동단결선언」

융희 황제가 삼보(三寶:토지․인민․정치)를 포기한 8월 29일은 바로 우리 동지가 삼보를 계승한 8월 29일이니, 그동안 한 순간도 숨을 멈춘 적 없음이라. 우리 동지는 완전한 상속자니 저 황제권 소멸의 때가 곧 민권 발생의 때요, 구한국 최후의 날은 곧 신한국 최초의 날이다. … 우리 한국은 처음부터 한국인의 한(韓)이오, 비한국인의 한(韓)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인 사이에 주권을 주고받는 것은 역사상 불문법의 국헌(國憲)이지만, 비한국인에게 주권을 양여한 것은 근본적으로 무효요 한국의 국민성이 절대 허락하지 않는 바이라. 따라서 경술년에 융희 황제가 주권을 포기한 것은 우리 국민에 대한 묵시적 선위니 우리 동지는 당연히 삼보를 계승하여 통치할 특권이 있고, 대통을 상소할 의무가 있도다. 
                                        - 국민대 한국학 연구소, 『한국학 논총』 9

  • 질문1 「대동단결선언」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써봅시다.
  • 질문2 「대동단결선언」에서 한국의 주권은 누구에게 있다고 말하고 있나요? 「대동단결선언」의 주장과 같은 뜻을 가진 말을 스톡홀름에서 발표한 국제사회당 대회 발제에서 찾아 써 보세요.
  • 질문3 「대동단결선언」이 독립운동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 추론하여 써 보세요.

읽기자료 3

조소앙이 기초한 「대한독립선언서」는 1919년 2월 1일, 중국 동북부 지린성〔吉林省〕에서 만주와 러시아 지역의 항일 독립운동지도자 39명이 제 1차 세계 대전 종전에 맞춰 조국의 독립을 요구하며 발표한 것이다. 이 선언서는 일본에 대한 독립운동의 방법을 제시하였다. 

 

「대한독립선언서」

봉기하라! 독립군아 일제히. 독립군은 천지를 힘쓸라!
한 번 죽음은 인간의 면할 수 없는 바이니 개, 돼지와 같은 일생을 누가 구차히 도모하겠는가? 살신성인하면 2천만 동포는 하나 되어 부활하니 어찌 제 몸을 아끼며, 집안 재산을 바쳐 나라를 되찾으며 3천리 옥토는 자가의 소유이니 어찌 한 집안의 희생이 아까우랴. … 국민의 본령을 깨달은 독립임을 기억하고 동양의 평화를 보장하고 인류의 평등을 실시하기 위한 자립임을 명심하여 하늘의 밝은 뜻을 받들고 일체의 모든 굴레에서 해탈하는 건국임을 확신하여 육탄 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하라.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3 -

 

음력으로 1918년 무오년에 선포되었다 하여 「무오독립선언서」라고도 불리는 「대한독립선언서」는 이후 2․8 독립 선언과 3․1 만세 선언서의 기폭제가 되었다. 국내를 뒤덮었던 3․1운동은 앞서 「대동단결선언」에서 제시한 민주공화정 이념을 확고히 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3․1운동 이전만 하더라도 독립 후 정치체제에 대한 고민이 없거나 왕국이나 제국을 되살리려는 생각을 지닌 사람도 상당수 있었다. 그러나 3․1운동에서 뿜어져 나온 민중들의 열기는 대단한 것이었고, 독립운동가들은 이만한 역량이면 충분히 민주주의 정치를 함께 할 수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그동안 지식인의 시각으로 다분히 무식한 민중들을 불쌍히 여기던 민족 운동가들은 독립 만세 운동을 오랫동안 치열하게 벌이는 민중들의 모습을 보고 많은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갈수록 커지는 학생, 노동자, 농민들의 시위 열기에 힘입어 이들이 민주공화국을 이끌기에 충분하며, 마땅히 그렇게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합의에 도달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것은 이렇듯 3․1운동의 영향 때문이다. 조소앙은 이러한 생각을 반영하여 임시 정부의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 헌장」을 기초하며 임시 정부의 틀을 정립하였다.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 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
제 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이를 통치한다.
제 3조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차별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
제 4조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은 종교․출판․결사․집회․편지왕래․주소이전․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가진다.
제 5조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선거할 권리와 선거를 통해 대표가 될 권리가 있다.
제 6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납세 및 병역의 의무가 있다.
제10조  임시정부는 국토 회복 후 만 일개 년 내에 국회를 소집한다.

  • 질문1 「대한독립선언서」에서 제시한 독립운동의 방법을 써 보세요.
  • 질문2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형태를 민주공화정으로 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 질문3 「대한민국 임시헌장」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정임을 알 수 있는 조항을 골라 써 보세요.

읽기자료 4

임시 정부의 핵심 간부로 활동하던 조소앙은 1920년대 말에 좌우 대립의 해소를 위해 독립운동의 방략과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기본 정책으로 삼균주의의 기본 구상을 마련하였다.
해방 이후 조소앙의 연설들은 삼균주의의 핵심 내용을 잘 보여준다.

 

저는 여러분께 맹세합니다. 우리 민족 독립을 성공하리다. 아기마다 대학을 졸업하게 하오리다. 어른마다 투표하야 정치적 권리를 갖게 하오리다. 사람마다 우유 한 병씩 먹고, 집 한 채씩 가지고 살게 하오리다.” 
-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조소앙의 연설(1946년 3월 1일) -


독립당이 표시하는 바의 주의는 과연 어떤 것인가. 그것은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가 균등한 생활을 하게 하는 주의이다. 개인과 개인이 균등하게 하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치의 균등화요, 경제의 균등화요, 교육의 균등화이다. 보통 선거제를 실시하여 정권에의 참여를 고르게 하고, 국유제를 실시하여 경제 조건을 고르게 하며, 국비(國費)에 의한 의무교육제를 실시하여 교육 기회를 고르게 함으로써 국내에서의 개인과 개인 사이의 균등 생활을 실현하는 것이다. 민족과 민족이 균등되게 하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민족 자결’을 자기 민족과 또 다른 민족에게도 적용시킴으로써 소수 민족과 약소 민족이 압박받고 통치받는 지위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국가와 국가가 균등되게 하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식민 정책과 자본 제국주의를 무너뜨리고 전쟁 행위를 금지시킴으로써 모든 국가가 서로 침략하지 않고 국제 생활에 있어서 전혀 평등한 지위를 가지고 나아가 세계가 한가족이 되게 하는 것이 삼균주의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 『조소앙 선생 문집』 -

 

조소앙의 삼균주의는 1931년 한국독립당의 당 이념으로 채택된데 이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이념이 되었다. 또한 한국국민당, 민족혁명당 등 좌·우익 정당에서 인정을 받아 정강과 정책으로 채택되었고, 임시정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 강령」에 반영되었다.

  • 질문1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정리해 보세요.

읽기자료 5

일제가 중․일 전쟁에서 태평양 전쟁으로 침략을 확대하자, 독립운동가들은 이를 해방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일제가 연합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는 날, 우리 민족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항일전에 적극 참여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나로 통일하여 항일투쟁의 역량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광복이 다가올 즈음에는 국외의 독립운동 세력들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일 전선을 형성해 가고 있었다. 그것은 광복 이후 건설할 새 나라에 대한 구상이 임시정부와 각 독립운동 단체 사이에 공통적인 지향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임시정부는 1941년 11월 일제의 패망을 대비하여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바탕을 둔 건국강령을 발표하였다. 건국강령은 삼균주의를 이론적 틀로 삼아 ‘새로운 민주주의의 확립과 사회 계급의 타파, 경제적 균등주의의 실현’을 주창하였다. 이는 사회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독립운동 세력들이 내세운 새로운 국가건설의 목표와도 부합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 강령」 (1941)

제1장 총강
6. 임시정부는 13년(1931) 4월에 대외 선언을 발표하고 삼균(三均) 제도의 건국 원칙을 천명하였으니, 이른바 ‘보통 선거 제도를 실시하여 정권을 균등히 하고, 국유 제도를 채용하여 이권(利權)을 균등히 하고, 공비(公費) 교육으로써 학권(學權)을 균등히 하며 국내외에 대하여 민족 자결의 권리를 보장하여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의 불평등을 과감히 제거할지니, 이로써 국내에 실현하면 특권 계급이 곧 없어지고, 소수 민족의 침몰을 면하고, 정치와 경제와 교육 권리를 고르게 하여 높낮이를 없게 하고 동족과 이족에 대하여 또한 이러하게 한다.’고 하였다.
제3장 건국
2. 삼균 제도를 골자로 한 헌법을 실시하여 정치와 경제와 교육의 민주적 시설로 실제상 균형을 도모하며, 전국의 토지와 대생산 기관의 국유화가 완성되고 전국의 학령 아동 전체가 고급 교육의 무상 교육이 완성되고 보통선거 제도가 구속 없이 완전히 실시되어 … 극빈 계급의 물질과 정신상 생활 정도와 문화 수준이 최고 보장되는 과정을 건국의 제2기라 함.


「조선독립동맹의 강령」 (1942)

본 동맹은 조선에 대한 일본제국주의의 지배를 전복하고 독립 자유의 조선민주공화국을 수립할 목적으로 다음 임무를 실현하기 위하여 싸운다.
1. 전 국민의 보통 선거에 의한 민주 정권의 수립
6. 조선에 있는 일본제국주의자의 일체 자산 및 토지를 몰수하고, 일본제국주의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대기업을 국영으로 귀속하며 토지 분배를 실행한다.
9. 국민 의무 교육 제도를 실시하고, 이에 필요한 경비는 국가가 부담한다.


「조선건국동맹의 강령」 (1944)

1. 각인 각파를 대동단결하여 거국일치로 일본제국주의 여러 세력을 구축하고 조선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할 것
2. 반추축 제국(연합국)과 협력하여 대일 연합 전선을 형성하고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저해하는 일체 반동 세력을 박멸할 것
3. 건설부면에 있어서 일체 시위를 민주주의적 원칙에 의거하고, 특히 노농 대중의 해방에 치중할 것

  • 질문1 각 건국 강령의 공통점을 써 보세요.
  • 질문2 임시정부와 다른 독립운동 단체들이 해방 이후 세우고자 했던 나라의 모습을 정치․사회적 측면과 경제적 측면으로 구분하여 써 보세요.

읽기자료 6

프랑스어로 노블리스 오블리제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이다. 당시 국권피탈이라는 어려움 속에서 국민을 통합하고 역량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회지도층의 솔선하는 자세가 필요했다. 하지만 일제가 내려준 귀족 작위나 기득권 보장을 거부한 양반들은 80명 중 6명에 불과했다. 일제강점기 누구보다 독립운동에 앞장선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회영, 안중근 그리고 조소앙 일가가 대표적이다. 조소앙은 세조 때 생육신 중 하나인 조여의 16대손으로 조부는 정삼품 통정대부였고 조소앙 자신도 15살에 성균관에 입학하고 황실 유학생으로 파견된 엘리트였다. 능력과 의지를 독립운동에 쏟은 조소앙 외에도 그의 집안에서 여섯 형제를 비롯한 11명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되었는데 이는 안중근 가문과 함께 최대 기록이다.

조소앙의 형 조용하(1862~1939)는 대한제국 시절 독일주재 참사관 죽산군수 등 관료의 길을 걷다 합병 직후 하와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하와이에서 대조선독립단 단장 등을 역임한 조용하는 한인협회 결성을 주도했으며 임시정부 재정지원 활동을 펼쳤다. 독일 주재 시절 각종 서적을 구해 조소앙에게 보내어 삼균주의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동생 조용주는 1913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조소앙과 함께 아세아민족반일대동단을 결성했다. 1915년 국내로 들어와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조직하여 조소앙의 유럽 외교 활동과 임시 정부 재정 지원 활동을 펼쳤으며 1937년 하얼빈에서 서거하였다. 조용한은 임시 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려다 일제 경찰에게 붙잡혀 옥고를 치렀으며 여동생 조경순(1898~1948도 중국으로 건너가 한국독립당 한국혁명여성동맹에서 활동했다.

조소앙의 막내 동생인 조시원(1904~82은 1920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중국한인청년동맹 화랑청년회 등에서 활동했으며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선전위원, 한국독립당 조직부장, 한국광복군 법무처장 등을 역임했다. 조시원의 아내 이순승(1902~94)도 1923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남편 조시원과 함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조소앙의 두 아들인 시제(1913~47)와 인제(1917~97도 임시 정부와 광복군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의 대를 이었다.

  • 질문1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무슨 뜻인가요?
  • 질문2 조소앙 집안의 독립 활동에 대하여 정리해 봅시다.
  • 질문3 일제시대 지식인이나 사회 지도층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에 대해 써 봅시다.
  • 질문4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다른 사례들을 조사하여 써 봅시다.

읽기자료 7

1945년 조소앙은 광복 후 귀국하여 임시 정부의 정통성 고수를 주장하며 국가 건설 운동에 전력하였다. 그토록 기다리던 광복은 되었으나 곧바로 독립국가를 건설할 수는 없었다. 냉전의 흐름 속에서 완전한 독립국가 건설이 어려워지자, 조소앙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1948년 4월 김구·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가하는 등 통일정부 수립에 힘을 쏟았다. 남북협상이 실패로 끝나자 조소앙은 그해 12월 사회당을 결성하여 삼균주의의 정책적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고, 1950년 2대 총선에서는 서울 성북구에 출마하여 전국 최고 득표를 기록하며 당선되었다.

하지만 6·25전쟁 때 강제 납북되면서 조소앙과 삼균주의는 잊혀졌다. 반공을 강조한 남한에서 균등을 내세운 삼균주의는 공산주의와 비슷한 사상으로 치부되었다. 민족독립과 통일에 헌신한 조소앙 역시 ‘북으로 갔다’는 이유만으로 잊혀졌다. 북한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납치당한 뒤 북한에서 납북 인사들과 함께 평화통일운동과 북한체제 반대 운동을 벌이던 조소앙은 1958년 사망하였다. 남한정부는 조소앙이 사망한지 30년이 지난 1989년에야 조소앙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했고, 이듬해 북한도 그에게 조국통일상을 안겼다. 사후 근 40년 지난 복권이었다.

  • 질문1 광복 이후 조소앙의 활동 내용을 써 봅시다.
  • 질문2 평생 독립운동에 몸 바쳤던 조소앙이 남과 북에서 오랫동안 잊혀졌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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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대한민국 임시 헌장 초안은 5차 개정되어 1944년 제36차 임시의정원에 상정되어 확정공포되었다.

  • 질문1 3․1운동 이후 등장한 임시정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여 헌법에 담았을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시각자료 2

사진은 1945123일 임시정부요인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면서 찍은 기념 사진이다. 사진의 맨 앞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부터 조소앙, 김규식, 김구이다.

   

  • 질문1 광복 후 임시정부 요인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시각자료 3

표는 조소앙의 집안 가계도이고 사진은 조소앙과 그의 아들들이다. 1936년 찍은 사진으로 조소앙의 두 아들은 모두 중국 광동의 중앙육군군관학교 학생이었다.(맨 앞줄 가운데 조소앙과 뒷줄 가운데 시제와 뒷줄 오른쪽의 인제)

   

  • 질문1 조소앙 집안에서 배출된 독립운동가는 모두 몇 명인가요?
  • 질문2 조소앙의 아들들이 중국의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각자료 4

사진은 경기도 양주시에 위치한 조소앙 형제의 집터와 조소앙 형제의 묘역 입구이다.

   

  • 질문1 조소앙 형제 집터와 묘지 안내판을 보면서 조소앙과 그의 형제들이 쌓은 독립운동의 업적과 비교할 때 드는 느낌을 써 봅시다.
  • 질문2 2012년까지 경기도 양주시에서 조소앙 생가를 포함한 기념 공원을 조성할 예정이라고 한다. 여러분이 기념관을 만든다면 이 기념 공원에 꼭 담겨야 할 요소가 무엇일지 써 보세요.

시각자료 5

위의 사진은 경기도 양주에 있는조용하의 묘이고 아래 왼쪽 사진은 조소앙의 가묘이다. 아래 오른쪽의 사진은 평양 애국열사릉에 있는 조소앙 묘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