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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의 흰 호랑이 백야 김좌진, 우리의 독립운동에서 김좌진은 대표적 독립운동가라고 할 수 있다. 흔히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에 초점을 맞춰, 김좌진을 이해하고 있는데,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이전, 국내에서도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김좌진 생가는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에 있는데, 원래는 현 갈산고등학교가 생가 터라고 하나, 호명학교 건립 후 안동김씨 종택을 개조해 학교로 만들고 지금의 생가 터에 옮겨와 살았다고 한다.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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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이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내고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시기는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고, 결국은 식민 지배하던 시기이다.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시켜 나갔다. 동학농민운동으로 조선이 청에 병력을 요청하자 톈진조약을 구실로 일본군을 파병하고, 이후 청과 전쟁을 하고 경복궁을 점령하여 개혁을 강요하는 등 조선에서 힘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기점으로 조선에 대한 배타적 지배권을 강화하면서 마침내 1910년 한ㆍ일병합조약으로 조선의 국권을 강제로 빼앗았다. 1910년대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헌병경찰을 앞세워 무력으로 통치하는 무단통치를 실시하고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기한 내 신고하지 않은 토지는 몰수하였다.
이 시기 독립운동은 국내에서는 대한광복회 등의 비밀결사를 중심으로, 만주․연해주 등지의 국외에서는 독립운동기지 건설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919년 일제의 무단통치에 저항하는 3․1 운동과 국제여론의 악화 등의 영향으로 일제는 문화통치를 실시하였다. 이때 상하이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졌고, 만주에서는 활발한 무장독립운동이 전개되었으며, 국내에서도 실력양성운동 등 꾸준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시기 독립운동의 어려움에도 중국에서는 임시정부 세력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고, 국내에서도 농민운동이나 노동운동, 문자보급운동 등 독립운동의 불길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국내와 만주에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한 김좌진은 1889년 음력 11월 24일 충청남도 홍성군 고도면(현 갈산면) 행산리에서 태어났다. 홍성은 고려시대부터 서해안권의 행정과 교통의 중심지로서 번성했으며, 고려 말 충신 최영 장군과 사육신 중 한 명인 성삼문, 위정척사운동의 사상적 배경을 제공한 남당 한원진, 홍주의병을 이끈 지산 김복한, 민족대표 33인의 한명인 만해 한용운 등이 태어난 곳이다. 홍성의 원래 지명은 홍주였는데, 1914년 일제 강점기 행정구역 개편으로 홍성으로 바뀌었다. 홍주와 공주의 일본식 발음 비슷해서 ‘홍성’으로 바꾸었다고 하나, 홍주의병이 일어나는 등 홍주의 항일의식이 높아 그 지역의 성격을 없애려고 지명을 바꾸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홍주의병은 1895년에 처음 일어나 항일분위기를 고조시켜 을미의병이 전국적으로 확산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그가 태어난 1890년대는 청, 러시아, 일본 등 강대국 간의 대립 속에 국내․외 정세가 급변하던 시기였다. 그런 과정 속에 일본의 한국에 대한 영향력이 점점 강화되어 국권이 피탈 되었고, 이것을 직접 경험한 김좌진은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게 되었다. 특히 홍주는 일제시대 의병항쟁의 중심지였는데 이런 지역적인 특성도 김좌진의 독립 의지와 방법 등에 영향을 주었다.
읽기
읽기자료 1
김좌진은 유년시절에 글공부보다는 활쏘기·말타기·병정놀이를 즐겨하였으며 『삼국지』, 『수호지』와 군사학에 관련된 책을 즐겨 읽고 무술연마에 힘썼다. 병정놀이를 할 때는 주로 대장을 했는데, 대장기에 강한 것은 누르고 약한 것은 돕는다는 뜻의 ‘억강부약(抑强扶弱)’을 썼다. 그는 강인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지만, 약한 자들을 돕는다는 이타정신으로 주변에 걸인을 보면 밥을 먹이고 옷을 입혀 보냈다고 한다.
김좌진은 김광호·김동익·김복한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김광호를 통해 알게 된 김석범의 영향으로 계몽의식을 갖게 되었으며 이후 독립운동을 함께 하는 동지가 되었다. 김동익은 기호흥학회 홍주지회에서 활동한 인물로 김좌진의 기호흥학회 활동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1895~1896년 전개된 홍주의병을 이끄는 등 전 생애를 항일운동에 노력한 김복한으로부터 민족의식을 배웠을 것이다.
고향집에서 김좌진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제일 먼저 실천한 일은 집안의 노비를 해방시킨 일이었다. 그리고 교육활동을 위해 호명학교(湖明學校) 설립에 참여했다. ‘호명’이란 뜻은 호서지역을 개명한다는 뜻으로 개화와 신학문을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었다. 호명학교 건립은 김좌진뿐만 아니라 당시 홍성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안동김씨 문중이 주도하였다. 호명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위국가’를 불렀는데, 위국가의 내용은 학문에 힘써 세계맹주가 되자는 애국정신을 고취하는 내용이었다.
김좌진은 호명학교 설립에 참여한 후, 부인 오씨와 함께 서울로 올라가 형 김경진의 집에 머물며 육군무관학교에 재학했다고 하나 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서울에서 그는 구한국군 출신이었던 윤치성, 노백린, 이갑 등과 만나 새로운 군사학을 배웠다. 당시 서울에서 전개된 계몽운동의 영향을 받아 자진하여 상투를 자르기도 하였다. 이후 김좌진과 그의 문중인물들이 호명학교의 설립과 기호흥학회의 홍주지회 활동에 참여하여 홍성지역의 계몽운동을 주도하였다.
주권을 빼앗긴 후 김좌진은 서울 관수동에 이창양행을 세우고 신의주에 염직회사를 세워 독립 운동의 연락 거점으로 삼고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노력했다. 만주에서의 독립 운동자금을 위해 서울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모금하려고 했으나 발각되어 1911년 6월에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김좌진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옥한 뒤 대한광복회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대한광복회는 1910년대 친일 부호 처단, 군자금 모금, 독립군 양성 등을 목표로 한 비밀결사조직이었다. 1915년 12월에는 길림광복회 조직에 참여하였고, 평안도․황해도 지부원이었던 이근영, 이근석과도 함께 활동한 사실로 보아, 1915년 대한광복회가 조직된 때부터 국내외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중국 안둥〔安東〕에서 유통 중인 중국지폐 위조 계획을 세웠었는데, 1918년 1월 관련 인물들이 체포되면서 실패로 끝났다. 1918년에 국내의 대한광복회 조직이 대부분 체포되면서 국내 조직이 크게 파괴되었지만, 김좌진은 대한광복회 만주부사령으로 파견되어 만주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김좌진은 독립군을 양성하고 국내로 진공해 독립을 이룬다는 목적 하에 만주 망명 이후에도 국내와의 관계를 유지하였고, 이를 위해 국내에 특파원을 파견하거나 비밀결사를 조직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김좌진은 대한광복회에서 활동했던 한훈이 임시정부의 지원 하에 조직한 비밀결사인 광복단결사대와 김동순․김상옥 등이 조선인 순사 및 친일조선인 처단 등을 목적으로 조직한 암살단을 지원하였다. 이 단체들의 활동에서 중요한 것은 무기와 탄약의 구입이었는데 이를 해결해준 것이 김좌진이었다. 국내진공을 위한 활동도 지속적으로 추진해 독립운동 단체들과 국내진격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국내에서의 무장투쟁과 정보수집을 위해 공작원을 국내에 파견하기도 했다..
- 질문1 김좌진이 자신의 노비를 풀어준 이유를 써봅시다.
- 질문2 김좌진이 국내에서 전개한 독립운동을 찾아 두 가지 이상 써 봅시다.
- 질문3 김좌진이 가입해서 활동한 대한광복회의 목표가 무엇인지 써봅시다. 그리고 대한광복회의 활동 목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써봅시다.
읽기자료 2
- 질문1 시는 김좌진이 만주로 망명하면서 지은 시이다. 자신이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가는 중이라면 어떤 시를 남길 것인지 3줄 이상 시로 표현해 봅시다.
읽기자료 3
- 질문1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써 봅시다.
- 질문2 김좌진이 전개한 독립운동의 방법은 무엇인지 써 봅시다.
- 질문3 김좌진이 관여하였던 독립운동 단체를 모두 써 봅시다.
읽기자료 4
- 질문1 윗글은 당시 잡지에 실렸던 김좌진의 부인에 대한 기사이다. 윗글을 요약해봅시다.
- 질문2 나혜국 여사가 만주로 되돌아간 이유를 써봅시다.
- 질문3 김좌진의 사망 당시 모습을 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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