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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군은 충청북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일제강점기 괴산군은 괴산․감물․장연․상모․연풍․칠성․문광․청천․청안․증평․도안․사리․소수․불정의 14개 면(面)과 153리(里)․동(洞)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괴산지역은 소백산맥을 끼고 있어 전반적으로 산지가 많고 평지가 좁고 작다. 일제강점기에 괴산지역은 충북의 10개군 가운데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인구도 1925년 통계에 의하면 106,747명으로 청주 다음으로 많았으며, 농업인구가 전체의 80%이상을 차지하는 전형적인 농촌지역이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한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괴산지역은 1919년 3월 19일 충북지역에서 가장 먼저 3․1운동이 일어났으며, 4월 10일 까지 거의 모든 지역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1919년 3월 19일 괴산 장터에서 벌어진 만세 시위는 충북지역에 본격적으로 만세 시위를 일으키는 발판이 되었다.
역사적 배경
| 현재 주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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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상태 |
일제는 조선을 강점한 후 전국을 13도(道), 12부(府), 317군(郡)으로 나누어 지방의 행정을 운영하였다. 1914년에는 지방행정제도를 정리하였으며, 1917년에는 이른바 조선면제(面制)를 시행하였다. 당시 이런 행정기구와 제도들은 우리 민족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주요한 도구였다.
‘한일합방’ 이후 일제는 조선인 가운데 세력이나 재산이 있는 사람을 끌여들여 면의 운영자로 임명하고 면 구역 개편, 면 소유의 재산 확보 등을 통해서 면의 기능을 강화하였다. 당시 면장(面長)은 헌병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법령이나 서류를 전달하고, 세금을 내도록 하며, 사람들의 이동과 움직임을 보고하는 등 식민지 정부가 요구하는 갖은 일들을 하였다.
일제강점기 농민들에게 각종 세금은 큰 부담이 되었다. 이 시기 농민들에게 매겨진 세금에는 지세(땅세), 호세(집세), 지세부가세, 시장세, 연초세(담배세), 주세(술세), 면비(면 운영비), 학교조합비를 비롯한 각종 조합비 등 갖가지 종류가 있었다. 따라서 농민들은 일제강점기에 가장 큰 피해자였다.
괴산군민 대부분이 농사를 짓고 있는 상황에서 일제의 이러한 수탈 정책은 괴산군민에게 큰 고통이었다. 이에 3월 19일 괴산 만세 시위에서 농민들은 괴산군청과 면사무소, 괴산경찰서 등 일제의 수탈기관을 파괴하고 각종 서류들을 불태 울 수밖에 없었다.
읽기
읽기자료 1
고종황제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서울에 올라온 홍명희는 손병희로부터 괴산의 만세시위를 주도할 것을 부탁받고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심하였다. 집에 돌아온 홍명희는 3월 18일 자신의 집에서 이재성·홍용식 등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이재성에게 독립선언서 300여 매를 인쇄하도록 하였다.
3월 19일 괴산장터에는 수천 명의 사람이 몰려들었고, 홍명희를 비롯한 주도자들은 장꾼들 앞에 나가 맨 먼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장터에 모인 사람들은 이에 호응하여 함께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괴산보통학교 학생들도 이날 시위에 참여하여 만세를 불렀다. 이에 당황한 경찰이 긴급 출동하여 홍명희·이재성·홍용식 등 18명을 체포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압수하였다. 그러자 시위 군중은 더욱 세차게 괴산경찰서로 몰려가 체포된 애국지사를 석방할 것을 요구하면서 돌을 던지며 싸웠다. 사태가 위급해지자 충주에서 헌병수비대 20명을 긴급히 보내 경찰과 힘을 합해 진압에 나섰다. 오후 10시경 시위대는 경찰서에서 밀려났으나, 이튿날 새벽 2시경까지 만세시위를 벌였다.
다음 장날인 3월 24일에는 홍명희의 동생인 홍성희가 주도하여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그는 괴산면 서기 구창회, 소수면 서기 김인수 등과 함께 시위를 주도하였으나, 곧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홍성희가 붙잡히자 분노한 군중들은 “대한독립 만세”를 더욱 높이 외쳤다. 3월 29일 장날에는 밤 6시경 약 1,500여 군중이 모여 독립 만세를 부르며 기세를 높였으며, 다수의 군중이 경찰과 충돌하였다. 만세시위는 이튿날인 30일에도 계속되었다. 이때에도 수많은 군중이 만세시위를 벌이며 경찰서로 몰려가 경찰과 충돌하였는데, 이때 경찰의 발포로 5명이 죽고, 2명이 부상당하였다. 4월 1일에는 다시 1,000여 명의 시위 군중들이 면사무소로 몰려가 독립 만세를 크게 외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로 인하여 홍명희는 징역 2년 6개월, 이재성은 징역 2년, 홍용식은 징역 1년 6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월 19일 괴산 장터에서 벌어진 만세시위는 충북지역에서 본격적으로 만세시위를 일으키는 발판이 되었다. 또한 괴산지역에서 일어난 3․1운동은 괴산지역 사람들를 정치적으로 깨어있게 하였다. 이를 통해 괴산지역은 농민운동․청년운동 등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 질문1 1919년 3월 19일 괴산지역에 만세시위를 처음으로 주도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 질문2 괴산지역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난 날은 1919년 3월 19일, 3월 24일, 3월 29일 등에 일어났다. 이 날들은 무슨 날이었나요?
읽기자료 2
1919년 고종황제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서울에 올라온 홍명희(洪命憙, 1888~1968)는 손병희로부터 괴산의 만세 시위를 주도할 것을 부탁받았다. 집에 돌아온 홍명희는 동지를 규합하여 3월 19일 괴산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홍명희는 이 일로 1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후, 출옥하여 괴산 동부리의 집을 팔고 제월리로 이주하여 얼마동안 거주하였다.
그의 아버지 홍범식(洪範植, 1871∼1910)은 괴산 사람으로 자는 성방(聖訪), 호는 일완(一阮)이다. 1888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1902년에 내부주사, 혜민서참서를 역임하고 1907년에 태인군수가 되었다. 1909년 금산군수가 되었으나, 이듬해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원통하고 분한 것을 이기지 못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서에는 “훗날에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는 것과 “죽을지언정 친일하지 말라.”는 당부의 글이 있었다.
홍명희는 괴산에서 출생하여 일본 다이세이[大成] 중학을 졸업하였다. 귀국하여 휘문고보 교사, 외산고보 교장, 연희전문 교수를 역임하였다.
- 질문1 홍명희의 아버지 홍범식이 나라가 망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유서로 남긴 말은 무엇이었나요?
- 질문2 홍명희가 부회장으로 참여한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단체이자 대표적인 민족협동전선은 무엇인가요?
- 질문3 작가로서 이름을 떨치기도 한 홍명희의 대표작인 장편 역사소설은 무엇인가요?
시각자료
시각자료 1
위 기사는 『매일신보』(왼쪽은 1919년 3월 24일자, 오른쪽은 3월29일자)에 보도된 괴산 장터 만세 시위 관련 내용이다.
- 질문1 위의 사진에서 당시 만세 시위를 ‘무슨 사건’으로, 3․1운동을 ‘무슨 운동’으로 보도하고 있나요?
- 질문2 괴산지역에서 만세 시위는 1919년 3월 19일, 3월 24일, 3월 29일 장날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면 오른쪽 기사에 “이십오일에도 또”라고 보도된 것으로 보아 만세 시위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요?
- 질문3 두 보도 자료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괴산 장터 만세 시위는 어느 형제에 의해 주도된 것으로 판단되나요?
시각자료 2
위의 표는 3․1운동이 전개된 시기별 시위 횟수와 시위 형태이고, 아래 도표는 3․1운동으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된 사람들의 직업별 구성 비율이다.
- 질문1 위의 표에서 만세시위가 가장 많았던 시기는 언제쯤인가요?
- 질문2 아래 도표로 보아 만세시위에 어떤 분들이 가장 많이 참여했을 것이라고 여겨지나요?
- 질문3 위 두 질문에 대한 대답을 바탕으로, 1919년 3월 말에서 4월 초에는 만세 시위가 주로 ‘어느 지역’에서, ‘어떤 형태’로 이루어졌을까요?
모둠활동
우리가 살고 있는 고장에서 일어난 3․1운동에 대해서 조사해 보고, 그곳을 답사한 후 답사보고서를 작성해 봅시다.
1919년 3월 24일, 괴산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에는 괴산면 서기 구창회와 소수면 서기 김인수가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행정을 담당했던 사람임에 불구하고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는데, 이런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이 시위에 참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찾아봅시다.
홍명희는 월북하여 남한에서는 그 이름조차 함부로 부를 수 없었다. 그러나 사회 변화와 함께 홍명희에 대한 재평가이루어지고 있다. 괴산지역에 전해지는 홍명희와 관련된 사적이나 현재 시행되고 있는 홍명희 관련 행사로는 무엇들이 있는지 조사해 봅시다.
충북 괴산에는 만세운동유적비가 많이 세워져 있으며, 서로가 거의 비슷한 것도 있다. 괴산에 세워진 만세운동유적비를 모두 비교․조사하여 ‘괴산군 만세운동유직비 안내서’ 형식으로 만들어 봅시다.
1919년 만세 시위를 하면서 당시 사람들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을지, “조선독립 만세”를 외쳤을지 책마다 다르게 나오고 있다. ‘대한독립을 지지하는 측’과 ‘조선독립을 지지하는 측’, 이렇게 두 모둠으로 나누어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주장해 봅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