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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골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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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민족은 독립을 위한 항쟁을 줄기차게 전개하였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1919년의 독립 만세 운동이었다. 조선의 청년들은 맨주먹으로 적에 항거하여 용감히 투쟁하였다.

31운동은 조선 민족이 단결하여 자유와 독립을 찾으려하다 수없이 죽어 가고, 일본 경찰에 잡혀 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았던 숭고한 독립 정신을 보여 주었다. (중략) 조선에서 학생의 신분으로 젊은 여성과 소녀가 투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안다면 너도 틀림없이 깊은 감동을 받을 것이다.

 

- ‘네루가 딸에게 보낸 편지’, 1932-

 

1919년 3월 학생․노동자․농민 등 다양한 계층의 동포들이 태극기를 손에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가 200만 명이 훌쩍 넘는 동포들이 일제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3․1운동은 19세기 말부터 1910년대까지의 모든 독립운동의 흐름을 하나로 모았으며, 독립투쟁의 큰 전환점이 되어 이후 일어난 독립운동의 기운을 크게 확장시켰다. 또한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 의지와 역량을 세계에 알리는 기회가 되었으며, 특히 그 정신은 우리 헌법 전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으로 이어져 오늘날 대한민국의 뿌리가 되었다.

역사적 배경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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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상태

3·1운동 전날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들이 사전 연락도 없이 일방적으로 독립선언식 장소를 태화관으로 변경한 사실을 확인한 학생 대표들은 태화관을 항의방문하였다. 그런 뒤 처음부터 약속했던 탑골공원에서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독자적인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학생대표가 공원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부르자, 학생들은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공원을 나서 시가행진을 하였다. 이때 종로를 거쳐 덕수궁 대한문에 이르는 길에 만난 수많은 군중들이 시위에 함께 참여함으로써 만세 시위는 대대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하였다. 3·1운동의 거족적인 독립만세 시위는 이렇게 탑골공원에서 불붙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10층 석탑이 있어 ‘탑골’이라는 이름이 붙은 탑골공원(파고다공원)은 본래 원각사라는 절이 있던 곳으로, 대한제국 시기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원으로 조성되었으며, 3·1운동이 처음 시작된 곳으로 역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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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0년대는 폭압적인 무단통치가 기승을 부린 시기였다. 한국을 강제로 점령한 일제는 군대와 경찰 인원을 늘려가며 무력을 앞세워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을 탄압하였고, 각종 식민지 악법을 만들어 식민지 지배체제를 강화해 나갔다.
또 일제는 우리나라 경제를 수탈하는 데에도 힘을 쏟아 민족 산업의 육성을 차단하고 식민지 수탈을 합법화하였으며, 나아가 민족문화와 교육을 억압하는 등 한민족말살을 시행하였다. 또한 조선민사령과 조선형사령(1912)을 공포하여 한민족의 기본적 인권을 탄압하였으며, 조선인에게만 적용한 봉건적이고 야만적인 조선태형령(1912~1920년 4월)으로 우리 민족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특히 조선태형령은 3․1운동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일제는 강점 이후 본격적인 경제 수탈에 나섰다. 특히 1912년부터 1918년까지 진행된 토지조사사업은 일제가 한민족으로부터 막대한 세금을 거둬들이고 이런저런 핑계로 토지를 빼앗거나 차지하는 등 식민지 토지제도를 마련하기 위한 속셈으로 실시한 대규모 약탈 사업이었다. 이 사업의 결과 조선총독부는 전 국토의 50.4%를 약탈함으로써 최대의 땅주인이 되었다. 반면 농민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농사지을 권리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권한 등을 잃어버려 경제적 지위가 매우 불안정하게 되었다.
이런 일제의 경제 침탈은 토지 이외에도 모든 분야에서 시행되었다. 일제는 삼림령과 임야조사사업을 통해 조선의 전체 삼림 중 60% 이상을 국유림이라는 핑계로 빼앗았다. 또한 어업령을 공포하여 한국인의 어업권을 부정하고, 마을 이장을 일본인 중심으로 바꿔버렸다.
그러나 폭압적 침묵이 강요되던 1910년대에도 이에 맞서 항일 투쟁은 계속되었다. 농민들은 토지를 빼앗으려는 일제에 맞섰다. 농민과 소상인들은 시장세와 연초세(담배세) 등 늘어나는 세금에 저항하였으며, 청년이나 지식인들은 사립학교와 서당, 야학에서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교육활동을 벌였다. 교사와 학생이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의병운동이나 계몽운동에 참가하였던 사람들 가운데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투쟁을 이어 간 이도 많았다. 임병찬 등은 비밀리에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의병을 재조직하려 애썼고, 대한광복회는 군자금(돈)을 모아 해외에 무관학교 설립을 추진하는 한편, 친일파 처단 활동을 전개하였다. 나라 밖에서 민족운동을 벌인 이들도 많았다. 조선인이 많이 살던 간도와 연해주는 해외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간도의 용정촌과 명동촌, 연해주의 신한촌, 상하이의 외국인 거주지역 등이 대표적인 곳이었다.
1917년 러시아혁명에 성공한 소비에트공화국의 레닌은 세계의 식민지, 반식민지의 민족 해방을 지원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어 1918년에는 미국의 대통령 윌슨도 ‘세계 평화와 민주주의’를 선언하고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해서 열린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의 원칙을 제시하였다. 윌슨이 말한 ‘민족자결’은 독일과 같은 패전국이 지배하던 식민지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전승국의 식민지는 그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민족자결주의에 관한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파리강화회의에 민족대표를 파견하여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자는 여론이 거세게 일어났다.

  • 질문1 일제가 한민족의 토지와 삼림을 빼앗기 위해 마련한 사업은 각각 무슨 사업이라고 하나요?
  • 질문2 일제의 식민지 지배체제 강화와 경제 수탈에 맞서, 1910년대에는 어떤 식으로 저항하거나 투쟁했나요?
  • 질문3 1918년에는 미국의 대통령 윌슨이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해서 열린 파리강화회의에서 제시한 것은 무엇인가요?
  • 질문4 민족자결주의는 모든 식민지에 적용된 것이 아니었다. 어떤 나라의 식민지는 적용되고, 어떤 나라의 식민지는 제외되었나요?

읽기자료 2

국내에서 민족운동을 추진하던 세력들은 해외의 독립운동 세력과 연합하여 큰일을 준비해 나갔다. 상하이[上海] 신한청년당은 국내로 대표를 보내 독립운동을 재촉하였다. 독립선언은 해외에서 먼저 이루어졌다. 1919년 2월, 만주와 러시아령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여준 등 39명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또한 동경 유학생들도 2월 8일, 동경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해외에서 전개된 독립선언을 이어받아 국내에서 3․1운동을 추진한 것은 종교계와 학생들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운동을 선구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던 세력은 전국적 조직망을 지녔던 종교단체뿐이었다. 천도교 측 인사들은 1910년 8월 29일 나라를 완전히 빼앗기기 이전부터 민족운동을 추진하거나 대규모 민중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1919년 1월 20일경 3․1운동의 기본 강령이 된 3대 원칙을 세우고 다른 종교와의 접촉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3대 원칙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독립운동을 대중화할 것
둘째, 독립운동을 일원화할 것
셋째, 독립운동을 비폭력으로 할 것

천도교 측은 최남선을 내세워 오산학교(1907년 이승훈이 평안북도 정주에 세운 학교) 교장으로 있던 기독교 측의 이승훈과 접촉하게 하였다. 기독교계에서는 관서지방(평안도와 황해도 북부 지역)의 장로교 계통과 서울의 감리교 계통이 별도로 독립운동을 조직하였는데 천도교 측의 요구로 연합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한편 불교계를 대표하는 한용운 스님이 함께 할 뜻을 밝히고 백용성 스님과도 함께 함으로써 불교계와의 연합도 이루어졌다. 이로써 종교계의 연합이 완성되어 민족대표를 선정하게 되었다. 한편 독자적으로 만세 시위를 추진하던 학생들도 함께 하기로 하였으며, 3월 1일 탑골공원에 모이기로 하였다.
독립선언식 행사와 만세 시위를 하기로 한 날은 3월 1일로 결정되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민족대표들은 2월 28일 밤, 손병희 집에서 최종 모임을 가지며 굳게 뜻을 다졌다. 이 자리에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이 폭력 시위로 번질 것을 걱정하여 장소를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하였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미리 한 약속에 따라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 집합하였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읽고 한용운의 간단한 연설에 이어 만세를 세 번 외치고는 독립선언식을 마쳤다. 이들은 미리 연락받고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한편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서는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모였다. 이들은 민족대표들이 따로 독립선언식 행사를 치렀다는 소식을 듣자, 군중 가운데 한 학생이 앞으로 뛰어나와 이미 나누어준 독립선언서를 읽어나갔다. 선언서 낭독이 끝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탑골공원에 모인 사람들은 가슴에 고이 간직해 온 태극기를 힘차게 흔들며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서울 거리를 누볐다. 때마침 고종 황제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사람들도 시위 대열에 함께 하였다. 시위 군중은 여러 대열로 나뉘어 여러 방향으로 행진하였다. 해질 무렵부터는 서울 주변 지역으로 번졌고, 연희전문학교 부근에서는 오후 11시경까지 시위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독립선언서 ‘공약 삼장’에 밝힌 대로 질서정연하게 비폭력으로 평화 시위를 전개하여 단 한건의 폭행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공약 3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나. 오늘 우리들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번영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하나. 마지막 한 사람까지, 마지막 한 순간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흔쾌히 발표하라.
하나. 모든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들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나 떳떳하고 당당하게 하라.

  • 질문1 3․1운동의 기본 강령이 된 3대 원칙의 내용은 무엇인가요?
  • 질문2 3․1운동은 어째서 종교단체와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준비되었을까요?
  • 질문3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식 장소를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읽기자료 3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만세 함성은 3월 1일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 주요 도시에서도 거의 동시에 독립선언과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3월 1일 시작된 독립선언과 만세 시위는 불붙은 벌판의 불길처럼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 3월 19일 충북 괴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비롯해 전국에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만세 시위는 교통이 편리한 철도와 연결된 대도시에서 중소 도시로, 다시 읍․면지역으로 확대되어 갔다. 시위 날짜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데 유리한 장날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시위가 진행될수록 점차 조직적으로 벌어졌고, 시위 형태도 비폭력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폭력적인 방법도 사용되었다. 시위 참가자의 중심 세력도 농민과 노동자로 바뀌어 갔다.
만세 시위가 전국으로 크게 번지자 당황한 일제는 즉각 병력을 늘려 배치하고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시위가 격렬해지자 일제는 이들을 총동원하여 탄압하고, 3월에는 헌병과 보병부대를 크게 늘려 무력 탄압에 나섰다.
3․1운동은 국내뿐 아니라 나라 밖으로도 번져 나갔다. 서북간도, 중국의 상하이, 소련의 시베리아와 연해주, 미국 지역에서도 만세 시위가 잇달았다. 일본에서도 도쿄 유학생들이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곧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으며, 오사카의 동포들도 뒤이어 시위를 벌였다.
3․1운동은 일제의 야만적인 탄압으로 비록 민족의 독립이라는 목표를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우리 민족에게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으며, 독립운동 방향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전까지 많지 않는 지도자 중심으로 전개되던 민족운동이 많은 이들이 중심이 된 대중운동으로 바뀌었으며,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많은 청년들이 무장 독립운동 단체에 참여하여 무장 독립투쟁이 활발해졌다. 또한 외교 독립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나아가 3․1운동은 민족지도자들로 하여금 여러 갈래로 진행되던 민족운동을 하나로 모아 좀 더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하였다. 이에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3․1운동은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결의와 자주정신을 전 세계에 보여 주었으며, 세계 여러 나라에 우리 민족의 독립 문제를 올바르게 인식시키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또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간섭을 받거나 지배를 받고 있던 많은 국가들에게 자극을 주어 반제국주의 민족운동을 일으키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다.

  • 질문1 3․1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가면서 지방에서는 만세시위 날을 대개 어느 날로 선택하였으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 질문2 3․ 1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가면서 시위 형태가 어떻게 변했으며, 시위에 참가하는 이들은 주로 어떤 직업을 가진 이들이었나요?
  • 질문3 3․1운동이 국내외에 끼친 영향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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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왼쪽 표는 31운동이 전개된 시기별 시위 횟수와 시위 형태이고, 오른쪽 도표는 31운동으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된 사람들의 직업별 구성 비율이다.

  • 질문1 왼쪽 표에서 만세 시위가 가장 많았던 시기는 언제쯤인가요?
  • 질문2 오른쪽 도표를 보아 만세 시위에 어떤 분들이 가장 많이 참석했을 것이라고 여겨지나요?
  • 질문3 위 두 질문에 대한 대답을 바탕으로, 1919년 3월 말에서 4월 초에는 만세 시위가 주로 ‘어떤 지역’에서, ‘어떤 형태’로 이루어졌을까요?

시각자료 2

왼쪽 사진은 일본군에 의해 폐허가 된 경기도 화성의 제암리교회 모습이고, 오른쪽은 파괴된 제암리 마을의 일부 모습이다.

  • 질문1 두 사진에서 보이듯이 제암리 마을과 교회는 완전한 폐허가 되었다. 어떤 식으로 파괴하였기에 이처럼 완전한 폐허가 되었을까요?
  • 질문2 제암리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였기에 이토록 잔인하게 마을을 폐허로 만들고, 사람들을 학살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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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31운동의 기본 강령이 된 3대 원칙에는 비폭력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만세 시위는 평화적 시위에서 폭력적인 시위로 변해갔다. 이에 대해 폭력 시위는 안 된다는 측폭력 시위는 정당하다는 측’, 두 모둠으로 나누어 자신의 주장을 펼쳐봅시다.

모둠활동 2

다른 독립선언서들도 조사하여 비교한 후, 그 내용들을 보고서로 제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1919년 만세 시위를 하면서 당시 사람들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조선 독립 만세라고 서술된 책도 적잖게 있다. 당시 우리나라는 대한제국이외에 조선이라는 말을 사용했으며, 기미독립선언서에도 조선의 독립국임을 선언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심지어 당시 고려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렇다면 대한 독립 만세라고 외쳤을지, “조선 독립 만세라고 외쳤을지? 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주장해 봅시다.

   

모둠활동 4

31운동의 중심 세력은 학생들이기도 하였다. 이후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역사적 사건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조사하면서 자신 같으면 그 당시 어떤 역할을 했을지 되새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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