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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의병, 윤희순 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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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절의 고장 강원도 춘천시에서 도로를 따라 깊숙이 들어가면 한말 유림의 대표로서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의암 유인석 선생의 유적지와 춘천의병마을이 있다. 오래 전 김구는 의암 유인석의 묘지 앞에 엎드려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달라’ 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마을에서 채 10분도 되지 않은 거리에 여성의병 윤희순의 집터가 있다. 평범한 시골 아낙의 몸으로 평생 나라를 위해 싸운 윤희순에 대해 후대의 시인은 다음과 같이 글을 남겼다.

…(전략) 우리가 뭘 알았겠습니까
일제에 짓밟혔던,
영문도 모르고 답답한 채로 흘러가기만 하던 강물은 뭘 알았겠습니까
여성의병의 크고도 넓으신
이 나라 구국의 어머니시여!
당신께서 마련해주신 군자금으로 꺼져가는 민족의 생명을 다시 찾았고
당신이 지어주신 안사람 의병가를 힘차게 부르며
쓰러져가는 민족정신은 이렇듯 의연히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선친 애국의 뜻을 받들어
아녀자들을 계몽하여 의병활동의 횃불을 밝히고
남편과 아들까지 나라 찾는데 바치신 강인한 여성이시여! …(하략)

(이 시는 김금분이라는 시인이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현재 상태

아무리 왜놈들이 포악하고 강성한들

우리도 뭉쳐지면 왜놈잡기 쉬울세라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사랑 모를소냐

남녀가 유별한들 나라없이 소용있나

의병하러 나가보세 의병대를 도와주세

금수에게 붙잡힌들 왜놈시정 받을소냐

우리의병 도와주세 우리나라 성공하면

우리나라 만세로다 안사람들 만만세라

 

<안사람 의병노래>를 지은 사람은 춘천에 거주하던 한말 여성으로 최초의 여성의병이라 평가되는 윤희순이다.

윤희순은 본래 서울 출신이지만 강원도 춘천시 남면 발산리에 거주하는 고흥 유씨에게 시집와 살면서 시아버지 유홍석을 도와 의병활동을 하였다. 윤희순이 시집온 춘천시 남면 일대는 고흥 유씨들이 모여 살면서 화서학파의 전통에 따라 위정척사를 바탕으로 한 의병활동을 활발히 전개한 지역이었다. 특히 인근의 족숙 유인석은 화서학파의 수장이며 제천의병장으로 활약한 바 있고, 윤희순의 시부인 유홍석도 을미의병과 정미의병 당시 의병을 모집하여 일제에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이들은 국망 이후에는 만주로 이주해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윤희순의 의병활동은 최초의 여성의병이라는 의의와 더불어 국가의 위기 극복을 위해 헌신했던 여성들의 독립운동 중 한 계통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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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윤희순의 집(시댁)이 자리잡은 곳은 고흥 유씨들이 모여 살던 집성촌이었다. 고흥 유씨 일족들은 춘천 남면 가정리 일대에 터전을 잡고 수 백년 동안 생활해왔다. 이들은 일찍부터 화서학파의 중심세력으로 이항로의 학문 계통을 계승해왔다.
화서 이항로(1792~1868)를 중심으로 형성된 화서학파는 한말 제국주의 세력이 밀려오는 시대 상황 속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하며 큰 영향력을 미쳤던 대표적인 학파이다. 화서학파의 학문은 실천을 전제로 한 의리와 명분을 중요시하였다. 화서학파의 일원 중 절대 다수가 제국주의 침략에 저항하는 항일운동가로 활동한 점은 이런 학문적 특성과 관계가 깊다.
유중교가 1836년부터 이항로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기 시작하여 1891년에는 화서학파의 수장격이 되었고, 유인석, 유중악, 유홍석 등 고흥 유씨 인물 다수가 화서학파에서 수학하였다. 이들은 일찍부터 위정척사운동에 합류하여 서양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경계해왔다.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하여 개항을 한 시기부터 일본의 침략야욕을 간파하여 조선의 미풍양속을 해치고 조선의 경제가 제국주의의 침략에 그대로 예속될 것이라는 점을 강하게 주장해왔다. 춘천 지역은 이항로의 학통을 이은 화서학파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어 의병봉기의 분위기가 일찍부터 성숙되어 있었다.
1895년 8월 일본인에 의해 국모가 시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어 11월에는 단발령까지 발표되자 춘천 일대의 유생과 민중들은 일제히 봉기하였다. 이들은 1896년 1월 18일 춘천관찰부를 점령하고 일대의 군사와 군수품을 모아 서울공격을 목표로 가평까지 진격하였으나 관군의 반격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유인석 역시 의병활동에 뛰어들었다. 유인석은 1896년 2월 7일 이춘영, 안승우 등과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한 때 3,000여 명에 이른 유인석의 제천의병은 제천, 충주, 단양, 원주 등지를 석권하면서 친일 관찰사와 군수 등을 처단하였다.
윤희순의 시아버지인 유홍석 역시 화서학파의 이름난 유림으로 의병봉기에 합류하여 활동을 전개하였다. 윤희순의 의병활동 역시 유홍석의 의병정신이나, 고흥 유씨 일가의 학문적 전통에서 연유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윤희순 뿐만 아니라 유인석의 부인이나 최골댁 등 고흥 유씨 가문의 안사람들이 ‘안사람 의병’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벌인 것도 같은 이유이다.

  • 질문1 윤희순의 시댁인 고흥유씨 일가 등 화서학파는 서양과 일본의 침략이 우리나라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했나요?
  • 질문2 춘천 지역 유생과 민중들이 의병을 일으키게 된 계기를 2가지 써 봅시다.
  • 질문3 윤희순을 비롯한 고흥 유씨 가문의 안사람들이 ‘안사람 의병’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벌인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읽기자료 2

윤희순(尹熙順, 1860~1935)은 본래 서울 출신으로 1860(철종 11)년에 태어나 16살 되던 해에 춘천 남면 고흥 유씨 유제원에게 시집을 왔다. 시집온 후 윤희순은 치밀하고 자상한 솜씨로 어려운 가정을 잘 이끌었고, 시부모에 대한 효성도 두터웠다. 그러던 중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어 단발령이 발표되면서 시아버지 유홍석은 춘천의병에 가담하여 싸우게 되었다. 유홍석이 춘천의병에 나서자 윤희순은 시아버지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한편 의병들의 활동을 보조하였다. 인근에서 활동하는 의병들에게 식사와 식량을 제공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의병활동을 도울 것을 끈질기게 설득하였다. 이를 위해 안사람 의병노래와 같은 한글 가사를 지어 주변 아녀자들에게 항일의식을 일깨우고, 의병활동을 보조하자고 하였다. 특히 안사람 의병노래는 지금까지 알려진 최초의 의병노래로 여성들도 의병활동에 참여하여 남성의병을 돕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강성한 왜놈들을 잡으려면 온 민족이 뭉쳐야 한다고 전제하고, 여자라고 애국심이 없으며 남녀가 유별하다고 하더라도 나라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여성들도 의병으로 나가서 의병대를 돕자는 직설적인 가사로 여성들의 항일의식을 일깨우는 한편 의병들의 사기를 북돋는 역할을 했다.
윤희순은 일생동안 총 9편의 의병가사를 남겼는데, 이 중 <안사람 의병노래>, <애달픈 노래>, <방어장>, <병정노래>가 1895~6년 사이에 씌어진 작품이다. 노래 중에는 여성 뿐 아니라 청년들의 자발적인 의병입대를 촉구한 곡도 있고(방어장), 관군들에게 왜병의 앞잡이가 되지 말고 의병을 도와주자고 권유하는 노래(애달픈 노래, 병정노래)도 있다. 윤희순은 이러한 노래가사를 지음으로써 의병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녀의 의병활동은 1907년에도 이어졌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의병봉기를 준비하고 있던 1907년 8월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전국에 의병 봉기가 잇따르자 유홍석은 족숙인 유중악 등과 함께 춘천 가정리 황골(현재의 춘천시 남면 발산리)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에 참여한 사람은 600여 명에 이르며, 이들은 춘천 진병산과 가평 주길리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때 윤희순은 주변 사람들에게 청하여 의병군자금을 모집하였고, 마을 뒤 골짜기에 무기와 화약을 제조하는 병기창을 차렸다. 아녀자 30여 명과 함께 무기와 탄약을 만들어 의병들에게 보급하였고, 의병들의 뒷바라지를 담당하면서 고된 군사훈련도 함께 받았다.

  • 질문1 윤희순이 만든 <안사람 의병노래>의 주요 내용을 정리하여 써 봅시다.
  • 질문2 1907년 윤희순의 시아버지 유홍석이 의병을 일으킨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3 1907년 시아버지 유홍석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윤희순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 세 가지 이상 써 봅시다.

읽기자료 3

1910년 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제 병합이 되자 윤희순 일가는 만주로 망명하였다. 유인석, 유홍석은 국권침탈 이후 조선에서의 독립운동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고 장기적 항일투쟁을 위해 중국 랴오닝성〔遼寧省〕일대로 건너가 정착하였다. 랴오닝성은 고구려의 첫 수도가 위치했던 곳이며, 19세기 이래 조선 농민들이 이주하여 많은 조선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윤희순은 유홍석의 지시로 노학당(老學堂)이라는 학교를 세우고 교장직을 맡았다. 환인현 일대의 조선인 청년, 학생들을 모아 국어, 수학, 역사 등 근대학문과 반일 애국정신을 가르쳤다. 노학당은 1915년 폐교되었지만, 이 학교에서 배출된 50여 명의 학생들은 이후 반일투쟁의 전선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1913년 시아버지 유홍석이 사망한 이후에는 아들 돈상과 함께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유돈상이 조선독립단을 조직하자, 조선독립단 학교를 만들고 국권회복과 반일투쟁에 대한 강의를 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또한 랴오닝 일대를 돌아다니며 조선인과 중국인들에게 함께 연대하여 반일투쟁을 전개하자는 호소활동을 하거나, 독립군을 돕는데 헌신하다가 1935년 서거하였다.

  • 질문1 1910년 국권피탈 후 윤희순 일가가 춘천을 떠나 랴오닝성 일대로 망명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윤희순이 교장직을 맡아 운영한 노학당은 무엇을 가르쳤나요?
  • 질문3 일제강점기에 노학당처럼 만주지역에서 독립운동가에 의해 설립, 운영된 학교를 찾아 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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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위의 사진은 의병들이 사용하던 무기류를 모아놓은 사진이며, 아래의 사진은 유홍석이 1907년 의병활동을 하던 당시 의병들을 모아 훈련시키는 동시에 전투에 사용할 무기를 만들던 여의내골의 현재 모습이다. 윤희순은 이곳에서 의병들에게 제공할 화약과 무기류를 제조하였고, 남자의병들과 함께 훈련을 받거나 의병들의 뒷바라지를 담당하였다.

  • 질문1 의병들이 사용하던 무기는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요?
  • 질문2 춘천의병들이 직접 무기를 만들어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 질문3 춘천의병들이 여의내골에서 훈련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각자료 2

윤희순, 유홍석 일가가 1911년 이후 활동하였던 지역을 나타낸 지도이다. 윤희순은 중국 랴오닝성으로 망명한 후 각지를 옮겨 다니며 활동하였다. 현재 랴오닝성에는 윤희순을 기념하기 위해 중국인들이 세운 기념비와 노학당 기념비가 남아있다.

   

  • 질문1 윤희순 일가가 살던 춘천과 망명지인 만주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요?
  • 질문2 윤희순 일가가 만주로 이주한 이유를 지리적 여건을 감안하여 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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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모둠별로 의병가의 가사를 만들어 보고, 좋아하는 곡에 가사를 붙여 노래를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2

모둠별로 윤희순의 독립운동을 주제로 하는 연극 대본을 만들어 발표해 봅시다.

모둠활동 3

윤희순은 우리 역사의 대표적인 여성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이다. 여성 독립운동가 남편의 입장에서 아내를 응원하는 편지를 써서 발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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