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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 전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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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 잔인한 어머니, 그 품속에 말없이 누워

하늘의 별을 세는 땅위의 별들을 본다

우람한 원시의 생명과 작은 들꽃의 향기와

새들의 노래 대신, 포탄의 잔해와

화약 냄새와 그 밑의 생명이

별이 되어 쉬고 있는, 그 산은 백마고지

다시는 생명을 잉태할 수 없는

다가서고 싶은 그리움도 민둥산에 묶이는 산

395고지 백마산, 이름없는 능선이

세계의 전사(戰史)에 떨친다

언제면 별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산은 산으로 돌아오려나



위 시는 백마고지 전투에 참여했던 김운기대위의 시이다. 최영미시인은 이 시에 대해 “6․25를 다룬 어떤 영화보다 전쟁의 참상을 잘 그려냈다.”고 평가하고 있다. 백마고지 전투는 6·25전쟁 기간 중 가장 치열하게 고지 쟁탈전이 벌어졌던 전투이다. 1952년 10월, 철원에 있는 불과 395m에 지나지 않는 이 고지를 놓고 국군 제9사단과 중국군 제38군 소속 3개 사단이 쟁탈전을 벌인 끝에 국군 제9사단이 승리를 거두었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10일 동안 이 고지를 빼앗기 위해 중국군 1만여 명이 전사 또는 포로가 되었으며, 국군 제9사단도 총 3,4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발사된 포탄 수는 아군 219,954발, 중국군 55,000발 등 총 274,954발이었다. 국군 제9사단의 승리는 이와 같이 세계 전투 역사에서 찾기 어려울 만큼 처절한 포격전, 수류탄전, 백병전(白兵戰; 칼이나 창, 총검 따위와 같은 무기를 가지고 적과 직접 몸으로 맞붙어서 싸우는 전투)을 10일동안 밤낮으로 반복한 끝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역사적 배경

배경
현재 주소
현재 상태

6․25전쟁이 시작된 이래 남과 북을 오르내리며 전쟁이 계속되다가 결국 38선 부근에서 서로 맞서서 버티게 되었다. 이후 1951년 4월~5월, 이른바 중국군의 춘계공세(春季攻勢; 봄에 이루어진 공격)로 중국군과 유엔군, 양측 모두 최악의 인명 손실을 입은 후에야 무력으로 승리를 얻으려는 정책을 포기하고 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정책을 택하였다. 이 무렵 미국이 주도한 미·소의 막후접촉(幕後接觸; 겉으로 드러나지 아니하게 은밀히 하는 접촉)에서 소련이 전쟁 전 원래 상태를 회복하는 선에서 휴전하여 평화를 실현한다.’는 데 호응해옴으로써 마침내 휴전협상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1년간의 전쟁을 통해 공산군 측은 무력으로 통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유엔군 측도 계속되는 전쟁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을 사실상 주도한 미국과 소련은 모두 이번 전쟁을 통해 ‘어느 쪽도 한반도에서의 전략적 이익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상대방의 의도를 잘 알게 되었다. 이로써 ‘이 지역에서 냉전 구조의 균형을 파괴할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양측은 서로 별다른 성과도 없이 계속되는 전투 대신 협상을 통해 전쟁을 해결할 방법을 찾게 되었다. 유엔군 측에서는 유엔의 역할을 대행하고 있는 미국이 전쟁 이전 상태로 휴전할 것을 결정한 데 이어, 공산군 측에서도 모스크바 조·중·소회담을 통해 “38도선의 경계선을 복구하는 조건에서 휴전이 유익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 어느 정도 잠잠하던 전선은 1951년 8월에 이르러 다시 격렬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때 양측 대표는 군사분계선의 설정에 대하여 협의하고 있었는데, 유엔군 측은 당시 전선을 기준으로 할 것을 주장하였고, 공산군 측은 38선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입장 차이는 휴전회담의 결렬을 가지고 왔다.
그러자 유엔군에서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제한된 범위에서 공격작전을 실시하였다. 고지전이 시작된 것이다. 10월 말까지 계속된 작전으로 전 전선에 평균 약 10km를 전진하였는데, 좁은 공간 안에서 밀도 높은 전투를 전개함으로써 양측은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이때부터 휴전회담이 종료될 때까지 고지를 서로 차지하려는 국지전(局地戰; 한정된 지역에서 일어나는 전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졌다. 당시 유엔군은 전선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휴전회담에서 유리한 입장에 서기 위해 전쟁을 크게 확대하지 않는 범위안에서 국지적인 고지 쟁탈전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공산군 역시 이러한 전술로 맞서면서, 치열한 고지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고지전 형태의 치열한 전투는 휴전회담이 종결될 때까지 계속 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양측은 일정한 지역을 놓고 서로 수없이 빼앗고 빼앗기는 공방전을 계속하면서 양측 모두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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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유엔군과 공산국은 1951년 4월~5월, 이른바 중국군의 춘계공세로 6․25전쟁 시작 이후 가장 큰 전투를 치렀으며, 여기에서 양측 모두 최악의 인명 손실을 입은 후에야 무력으로 승리를 얻으려는 정책을 포기하고 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정책을 택하였다.
그러나 양측의 협상 목적과 목표는 서로 달랐다. 유엔군 측은 군사협상을 통해 일단 휴전하게 한 다음 유엔 기구를 통한 정치적 방법으로 통일․민주․독립국가를 세우는 데 목표를 두었다. 반면 공산군도 전선에 별다른 변화도 없이 전투만 하던 6월부터 방어자세를 취하면서 지상군의 정비와 공군력의 전개를 통해 전력을 회복한 다음 8월 이후에 공세로 바꾸겠다는 방침이었고, 이 기간 동안에 휴전회담을 추진하는 것은 이러한 조건을 만드는 데 크게 유리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양측은 이와 같은 판단에 따라 양측은 휴전에 대비해 방어선을 강화하고 부대의 재편성․재배치를 통해 전력을 재정비하면서 휴전회담의 진전 상황을 지켜보았다. 
이때 병력면에서는 공산군이 2:1로 우세하였지만, 화력면이나 해․공군 전력면에서는 유엔군이 우세하였다. 휴전협상을 하면서도 유엔군 측은 협상이 안 될 경우나, 유엔군이 요구한 협상 조건을 공산군 측이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다시 전투를 시작하였으며, 공격을 계속하여 적에 대한 압력을 유지하면서 적의 공격도 막아냈다. 공산군은 휴전협상 과정에서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전력 증강을 꾀하였다. 또한 그들은 빼앗긴 진지를 되찾아 군사력을 과시하거나, 휴전회담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유엔군 진지 중 북쪽으로 나와 있거나 취약한 곳을 공격하였다.
그 결과 한편으로는 휴전회담 장소에서 말로 싸우는 ‘설전’을 벌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전선에서 휴전 후 방어에 유리한 고지를 먼저 확보하기 위한 고지 쟁탈전이라는 ‘혈전’이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휴전회담도 ‘중지했다가 다시 하기’를 거듭 반복하였다.
휴전회담은 회담이 시작(1951년 7월 8일)된 지 24개월 17일 만에 최종 마무리(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또는 휴전협정)되었으며, 이 기간 중에도 전쟁은 계속되었다. 다만, 이 기간 동안의 전투는 제한된 범위의 포격전, 수색․정찰전, 고지 쟁탈전 등 서로의 의지를 시험하는 국지적인 공방전을 되풀이하는데 불과하였으며, 전선의 변화는 20km정도에 불과하였다. 이 중 휴전회담 초반에 실시되었던 약 3개월간의 유엔군의 공세와 휴전 직전 약 1개월간 중국군이 실시한 공세를 제외하면, 휴전회담 기간 중의 전투는 전선의 변화가 거의 없는 전투였다.

  • 질문1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이 휴전협상을 하게 된 의도는 각각 무엇이었나요?
  • 질문2 유엔군과 공산군이 휴전협상을 하면서도 치열한 전투를 전개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 질문3 휴전회담은 언제부터 시작해서 최종적으로 언제 끝났나요? 그 기간은 어느 정도였나요?

읽기자료 2

1952년 중반에 접어들어서도 비교적 쉽게 합의될 것으로 판단했던 포로 협상이 합의점을 찾지 못하면서 다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되자 비교적 전선이 안정된 서부와 동부지역보다는 중부지역의 연천-철원 북쪽 방향의 역곡천 일대에서 보다 유리한 지형 확보를 위한 고지전이 또 다시 불을 뿜었다.
백마고지는 행정구역상 강원도 철원군에 속한 야산으로 철원읍 서북방 12㎞ 지점, 효성산(596m) 남쪽의 끝자락에 매달려 있는 해발 395m의 고지였다. 이 일대는 6·25전쟁 전까지는 별로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지역이었다. 그런데 1951년 휴전협상이 시작될 때쯤부터 이 일대에서 군사적 대결이 계속되자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평범한 야산이 갑자기 관심을 끄는 핵심 지역으로 떠올랐다. 이 지역이 철원-평강-김화로 이어지는 철의 삼각지 중 서남쪽 철원 꼭짓점을 구성하는 요충지(要衝地;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산군이 이 지역을 점령한다면 철원평야가 적의 감시 아래에 놓이게 될 뿐만 아니라 중부지역에 배치된 유엔군 측 부대의 병참선인 3번 도로를 비롯한 많은 길을 사용할 수 없었다.
395고지 일대의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국군 제9사단은 1951년 10월 17일 미 제3사단과 교대, 이 지역에 배치된 이후부터 방어자세를 재정비하고, 예상되는 적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백마고지 전투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는 1951년의 전투는, 판문점에서 임시로 군사분계선을 설정하는 회담을 하고 있는 시기인 11월 3일, 1개 대대 규모의 중국군이 방어 중인 국군 제29연대를 공격함으로써 시작됐다. 그러나 이때의 공격은 국군도 미리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방어 중인 제29연대가 비교적 쉽게 물리쳤다. 중국군은 11월 5일 오후 9시에 크게 보충한 대대 규모로 또 다시 공격을 시작하였다. 제29연대 제1대대는 끝내 395고지 일대의 진지를 지키지 못하고, 결국 백마고지를 적에게 내주고 말았다. 그러나 곧바로 쳐들어가 하루 만에 고지를 ,되찾아 전초전을 국군의 승리로 매듭지었다.
이후 이 일대의 전선은 별다른 전투 없이 잠잠한 상태가 계속되어 1952년 전반기까지는 특별한 접촉이 없었다. 그동안 국군 제9사단은 김종오 소장이 사단장으로 임명되고, 연대장들도 모두 바뀌어 이 지역의 방어를 위한 새로운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마주하고 있는 중국군도 부대가 바뀌었는데, 이번 부대는 6·25전쟁에 참전해 아주 뚜렷한 전과(戰果; 전투나 경기 따위에서 올린 성과)를 올림으로써 마오쩌둥으로부터 ‘만세군’이라는 칭호를 얻은 제38군이었다.
백마고지에 대한 중국군의 공격은 1952년 10월 6일 시작되었다. 이날 아침부터 제9사단의 전 지역에 집중적인 사격을 퍼부은 중국군은 북쪽 5㎞ 전방에 있는 봉래호의 수문을 폭파해 국군의 후방과 연결된 역곡천을 범람시켰다. 이에 따라 국군에 대한 다른 지역 부대로부터의 지원이 끊긴 것으로 판단한 중국군은 집요한 공격을 감행했다. 이때부터 국군 제9사단은 10월 15일까지 3개 연대를 교대로 투입하면서 중국군과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계속했다. 폭이 2㎞밖에 안 되고 길이가 3㎞ 남짓 되는 독립된 고지인 백마고지에 무려 9개 연대가 서로 얽히며 설키는 대접전이 벌어진 것이다. 국군과 중국군, 양측은 10일간의 전투에서 395고지를 사이에 두고 12차례나 쟁탈전을 반복하였다. 고지의 주인이 바뀐 것도 7차례나 됐지만 끝내 제9사단이 고지를 장악함으로써 이 지역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백마고지 전투에서 중국군은 8,234명이 사살되고 추정살상(殺傷) 6,098명과 포로 57명 등 14,000여 명의 피해를 입었다. 제9사단도 3,41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또한 작전 기간 중 서로간에 중국군이 55,000발, 아군이 219,954발의 포탄을 발사함으로써 총 274,954발이라는 엄청난 양의 포격이 이 작은 고지에 집중됐다. 유엔군의 항공기도 754회나 출격해 폭격을 함으로써 고지 정상에는 풀 한 포기 남아 있지 않았다. 극심한 폭격과 포격으로 고지의 나무가 모두 없어져 하얗게 된 민둥산의 모습이 마치 백마가(白馬) 누워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이후부터 395고지 일대를 백마고지라 부르고, 사단을 백마부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 질문1 중국군이 막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백마고지를 확보하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 질문2 국군과 중국군이 백마고지를 두고 벌인 대접전은 ‘몇 일간’ 이루어졌으며, 그 기간에 ‘몇 차례’나 주인이 바뀌었나요?

읽기자료 3

저격능선은 강원도 철원군 오성산 남쪽에 있는 590고지로, 오성산과 김화 사이의 험한 산비탈과 깊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적의 진지가 바로 앞에 있어서 저격당하기 쉽다’는 데에서 ‘저격’이라는 두 글자가 붙어진 작은 규모의 능선이다. 저격능선 전투는 김화지구 전투 중 가장 대표적인 전투로, 이 전투는 6·25전쟁이 진지전으로 변하여 전선에 별다른 변화 없이 전투만 하던 1952년에 중부전선의 김화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국군 제2사단이 중국군 제15군과 맞서, 전방의 전초진지를 빼앗기 위해 공방전을 벌인 전투이다. 이 전투의 작전 기간은 1952년 10월 14일부터 11월 24일까지 42일간이며, 교전지역은 김화 북방 7㎞ 지점에 위치한 저격능선이었다. 전투 후의 통계에 따르면, 이 작전 기간 중에 국군 제2사단은 실종자 89명을 포함하여 4,830명의 사상자를 낳았으며, 중국군은 포격과 공중폭격에 의한 살상자를 포함하여 14,867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제인러셀고지는 저격능선 서쪽에 있는 두 개의 봉우리가 그 당시 미국의 유명한 여배우 ‘제인 러셀’의 가슴팍을 떠오르게 한다고 해서 미 장병들이 애정을 가지고 붙인 이름이다. 제인러셀고지는 저격능선 동측에 있는 삼각고지의 동쪽 윗부분에 있는 고지로써 1952년 10월 14부터 미 제7사단이 공격하였으나, 빼앗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미군이 많은 인명 손실을 내며 계속 실패하자, 이 임무는 저격능선을 담당한 국군 제2사단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국군 제2사단도 성공하지 못함으로써 제인러셀고지는 중국군의 손안에 넘어갔다.
이렇게 저격능선 전투는 어느 편에서도 일방적으로 승리하지 못한 채, 능선 중앙을 가로질러 남북으로 나뉜 상태에서 교전을 중지하게 되었다.
피의 능선 전투는  미 제2사단과 국군 제5사단 제36연대가 강원도 양구 북쪽 방향에 있는 ‘피의 능선(983고지-940고지-773고지)’을 공격하여 북한군 제12사단과 제27사단을 몰아내고 이들 고지를 점령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국군과 미군은 전사 326명을 비롯하여 전상자가 2,032명, 실종 414명 등 1개 연대 규모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북한군은 1개 사단 규모 이상의 피해를 봄으로써 ‘피의 능선’이라는 명칭이 붙을 정도로 격렬한 전투가 이어졌다. 1951년 8월 17일부터 9월 3일까지 벌어진 이 전투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3주 동안 공격하여 마침내 이곳을 점령하였다. 이 전투로 북한군은 펀치볼(해안분지) 북쪽으로 물러나게 되었으며, 한․미 양군은 피의 능선을 장악함으로써 백석산과 대우산 사이의 도로까지 확보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안정적인 보급로를 확보하였고, 북한군의 주 보급로에 대한 감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단장의 능선은 피의 능선 북쪽 894-941-851고지로 연결된 능선이다. 미 제2사단은 1951년 9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지 1개월 동안 이 능선을 탈취하기 위해 북한군 2개 사단의 완강한 저항을 물리치고 이곳을 점령하였다. 단장의 능선은 이 전투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 비참하고 끔찍한 모습을 목격한 외국의 종군기자들이 이 처참한 상황을 보도하는 과정에서 ‘heart break(심장이 찢어질 것 같다)’라는 표현하여 ‘단장(斷臟)’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단장의 능선 전투에서는 전쟁 후반기 유엔군사령관을 지낸 클라크(M. Clark) 대장의 외아들인 클라크 대위가 미 제9연대 G중대장으로 참전하여 894고지를 탈취했고, 이 때 중상을 입고 그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펀치볼 전투는 6·25전쟁이 교착전 단계로 접어든 직후에 국군 제1해병연대와 미 제1해병사단이 강원도 양구 북쪽 방향에 있는 펀치볼(해안분지)을 확보하기 위하여 가전리 일대에 배치되어 있던 북한군 제1사단을 공격하여 몰아낸 전투이다. 펀치볼은 이곳에 있는 둘레의 삐쭉삐쭉한 산봉우리와 고개의 모습이 술잔인 ‘번치볼’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미국전쟁사에는 ‘Punch bowl’로 기록되어 있다. 이 전투에서 한·미 해병들은 지형상의 불리한 조건을 무릅쓰고 북한군의 견고한 진지를 공격하는 동안 적의 탄막사격과 완강한 저항으로 많은 희생을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한·미 해병들은 사단포병과 미 제1해병비행단의 근접항공지원 아래 3주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북한군 제1사단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고 이곳을 점령하였다. 이 전투로 북한군은 동부전선의 요지인 해안분지에서 물러나 간무봉 방면으로 후퇴하게 되었으며, 한·미 해병은 해안분지 북쪽으로 진격하여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게 되었다.

  • 질문1 전선에 별다른 변화가 없던 1951년과 1952년에 걸쳐 강원도 지역에서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벌어진 전투로, 널리 알려진 전투로는 어떤 것들이 있었나요?
  • 질문2 저격능선,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등과 같은 말들은 어떤 이유로 이런 이름이 지어졌나요?
  • 질문3 6․25전쟁 당시 유엔군사령관을 지낸 클라크 대장의 외아들은 직접 전쟁에 참여하여 중상을 입었다. 어느 전투에서 중상을 입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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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시각자료 1

사진은 강원도 철원군에 있던 395고지와 그 주변의 625전쟁 당시 모습이다.

  • 질문1 사진에서 395고지와 그 주변에 풀과 나무가 거의 없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 질문2 395고지를 흔히 백마고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떤 이유로 그렇게 부르게 되었나요?

시각자료 2

  • 질문1 피의 능선 전투는 6․25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 전선이 ‘어떤 상황’에서 벌어진 전투인가요?
  • 질문2 피의 능선 전투는 대략 ‘어떻게 시작’하여 ‘어떻게 끝난’ 전투인가요?
  • 질문3 이 전투에서 북한군은 물론 국군과 미군에게도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였다. 이 전투에서 국군이 막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피의 능선을 공격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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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활동

모둠활동 1
영화 ‘고지전’은 백마고지 전투를 모티브로 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 영화를 보면 6․25전쟁 당시 벌어졌던 고지전에 대한 묘사가 잘 되어있다. 이 영화를 보고 당시 실제 전투에 참전하였던 병사들은 고지전을 어떻게 생각하였을지에 촛점을 맞춰 감상문을 작성하여 제출해 봅시다.

모둠활동 2

유엔군과 공산군은 각자의 사정에 의하여 휴전협정에 동의를 하고, 휴전회담을 시작한다. 그러나 양측은 회담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또는 자신의 요구 조건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제한된 고지전을 통한 끊임없는 소모전을 계속해서 벌이게 된다. 당시 작은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수많은 목숨을 바쳐야 했던 전략에 대해 적절한 전략이었다라고 생각하는 측과 무리한 전략이었다라고 생각하는 측, 두 모둠으로 나누어 자신의 생각을 서로 주장해 봅시다.

모둠활동 3
유엔군과 공산군은 각자의 사정에 의하여 휴전협정에 동의를 하고, 휴전회담을 시작한다. 그러나 양측은 회담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또는 자신의 요구 조건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제한된 고지전을 통한 끊임없는 소모전을 계속해서 벌이게 된다. 당시 작은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수많은 목숨을 바쳐야 했던 전략에 대해 ‘적절한 전략이었다’라고 생각하는 측과 ‘무리한 전략이었다’라고 생각하는 측, 두 모둠으로 나누어 자신의 생각을 서로 주장해 봅시다.
모둠활동 4
6․25전쟁 당시 유엔군사령관을 지낸 클라크 대장의 외아들은 직접 전쟁에 참여하여 중상을 입고 귀국하였다. 이처럼 외국의 지도층들은 자신이 먼저 모범을 보이며 살신성인하는 삶을 실천하였다. 우리나라 지도층에도 이런 사례가 있는지 조사하여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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